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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에스겔강해 3회}(11.11.09)]
/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장우 목사)
에스겔 2:1-8 듣든지 아니 듣든지 2011. 11. 09
“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이 여호와 영광의 형상을 보고서 엎드립니다. 1:28절을 봅니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 앞에 엎드리지 아니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조상들은 임금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임금이 행차를 하면 백성들은 길에서도 엎드려야 했습니다. 임금에게 청원을 하여도 엎드려서 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아도 인간의 죄란 신이 되려고 하는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 왕 앞에서도 엎드리는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는 스스로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어느 장로님이 자기에게 찾아와서는 성경을 번역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불만이 많다고 하였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존칭어를 사용하지 않고 번역하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많다고 하였답니다. 어떻게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함부로 이름을 부르느냐는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누가 엎드려 떠는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하지 아니하리라고 십계명에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 어처구니없는 일이나 욕설에 사용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라고 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일어서서 듣든지 엎드려서 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9:2-3절입니다.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세 시간은 서서 말씀을 듣고 세 시간을 죄를 자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듣지만 마음의 자세만은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을 때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 이사야, 에스겔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계시록 1:4절에서 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생전에 주님 품에 기대어 앉았던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엎드려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져 있으니 그가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을 부르시는 주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에스겔 2:1-2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에게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힘으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힘이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제가 2주전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힘이 다 빠진 것이 아니라 감기기운으로 힘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설교를 위하여 서점에 갔다가 힘이 다 빠졌는데 이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엎드려졌기에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이 임하여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일어서서 그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우지는 것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수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으로 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벤 아담입니다. 아담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을 사람이라고 하니 인자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인자라는 말이 93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인자는 연약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다니엘서에서 묵시적인 존재인 인자와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연약한 인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패역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에스겔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3절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부름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어느 정도로 언약을 어겼는지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라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패역이나 배반이라는 말은 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대항하였다는 표현입니다. 한문으로 패역(悖逆)이란 어그러지고 거역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로 패역하고 배반하는가 하면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사야 30:8-11절입니다. “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전하여 영영한 증거를 삼으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고 하신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22:21절입니다.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어려서부터 습관이라서 구스인이 피부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고 표범이 그 반점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가야 하는 것입니까? 2:5절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깔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는데 눈을 떠 보니 부자는 지옥이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입니다. 문자대로는 음부이고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이때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에 좀 대어달라고 합니다. 불꽃 속에서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곳과 그곳은 건너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나사로를 살려서 지상으로 보내어 자기 형제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전하여 달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면 믿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서 가더라도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 어떤 표적과 기적을 보고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지도 아니할 그들에게 왜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도 선지자의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게 됩니다.
에스겔 2:6-7절을 봅니다. 에스겔이 당할 고난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전할 때에 반응이 가시와 찔레와 전갈입니다. 에스겔이 엘리야나 세례요한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에스겔을 미워하고 싫어할 환경이 이런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하였기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으로부터 지금까지 패역하고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잠시 잠간 언약의 갱신이 일어나지만 곧 다시 패역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그들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거짓 평안을 남발하며 거짓 축복을 남발합니다.
8-9절입니다. “봉독” 주시는 말씀을 받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니 한 손이 에스겔을 향하여 펴지고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펼치니 그 안팎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5:1-4절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는데 그 두루마리에 온 땅에 내리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을 사르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과연 어느 인간이 좋아하면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패역하고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찌르는 형국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예언하였고 그 예언하였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역시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가시와 찔레와 전갈정도가 아닙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합동으로 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자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서 가시와 찔레와 전갈의 대접으로 올지라도 전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현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번영의 신학이 가득한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곳에 애가와 애곡과 저주의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그들로부터 가시와 찔레와 전갈과 같은 공격들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여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1-11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도 두루마리 책이 있고 받아먹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에스겔 3장에서도 이 말씀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 세상이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말씀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여야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에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여진 복음과 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복음대로 된다는 것은 온 세상과 우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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