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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속을 가는 박교수
이 근 영
1
×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박교수(영호)는, 한 대학의 경제학 교수 김성후와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 가면서 토론하다가, 김교수가 박의 작품이 정치성 없는 무가치의 것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불쾌하여 먼저 나와 버렸다.
박은 윤의 집을 찾을 때마다 성큼 들어서는 일이 없다. 그는 돌층대를 오를 때부터 청태(靑苔)빛을 엷게 입은 석조 이층 양옥이 항상 바늘같이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윤은 자기 소유의 조선집을 팔고도 오십여 평의 살찐 정원을 갖고 아담하게 꾸며진 적산 가옥을 차지하였건만, 나이 사십을 코앞에 바라보도록 자기 방 한 간 없이 현재 학교 사택의 한쪽을 들어 있는 것이 연상되는 것이다.
윤의 반가운 맞음을 받으며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낯모르는 미국인과 조선인을 보고는 꽁무니라도 뺄까 하고 무춤하였다. 이런 기색을 눈치챈 윤은 박을 의자에 쓰러뜨리듯 앉히었다.
언뜻 보아 브라운 소장같이 보이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날씬한데다가 해사한 얼굴에 신사복을 입은 미국인과, 이와는 반대로 영양분이 넘쳐 비대한 몸집에 윤택이 붉게 돋고 남색 양복에 흑자지 넥타이를 맨 사람이 양과자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 윤교수가 미국 유학의 안목으로 꾸몄다고 자랑하는 응접실과 짜장 어울렸다.
“조선에서 일류 영문학자고 소설과 시를 쓰는 미스터 박입니다.”
윤의 소개말에 두 사람은 박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미국인은 상무부에서 일을 보고, 조선 사람은 해방 전 상해에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무역상을 하여 성공하였다는 소개말을 듣고 박은 도박장에나 뛰어든 것같이 께름칙하였다. 두 사람은 박에게 번갈아 말을 걸었으나, 박은 말할 바를 몰라 커피잔에 입을 자주 대었다.
“오늘은 조선에서도 드물게 더운 날씨외다.”
박이 모처럼 입을 열자,
“이 장연만 씨와 내 춘부장과 큰 무역회사를 만들게 됐소.”
하는 말에, 박은 계속하려던 말을 이내 거두고 말았다.
응접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양장을 금방 차린 것 같은 윤의 부인이 넓은 양은쟁반에 요리를 가지고 왔다. 윤교수 부인이 몇 번 드나드는 동안, 식탁에는 양요리가 격에 맞추어 올랐고, 생선전야와 식혜 약식 등의 조선 요리도 올라 식탁은 제법 어울렸다.
박교수는 유쾌하지도 않은 황홀경에 빠질 것 같은 기분에 싸였는데, 윤교수 부인이 나간 뒤, 이윽고 기생 하나가 들어오자 갑자기 몸이 움츠러졌다. 미국 사람과 그 여자가 서로 반기며 악수하는 것이 초면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아래위 새하얀 모시옷에, 퍼머넌트한 머리를 옥시풀로 약간 노랗게 하고, 균형된 몬탁한 연분홍 분을 살짝 바르고 연하게 보이는 콧날이 높직하면서도 알맞게 선 것이, 미국인과 나란히 앉고 보매, 대조(對照)에서 오는 조화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아름답게 보이는 두 인물의 조화가, 박교수는 서글프게도 느껴졌다.
술이라면 비상같이 싫어하던 윤교수가 미국 술에 맛을 붙였는지 맥주의 컵을 유쾌한 얼굴로 수나롭게 비워 놓는다.
“박교수의 주량은 한이 없습니다.”
하는 윤교수의 말에 미국인과 장이라는 사람은 박교수에게 총공격을 한다.
“선생님은 문사 같어요.”
하는 기생의 말에 모두 박수하며 웃었다.
“그란허도 소설가구 시 인이구 독신이니까 대스려무나.”
하는 윤교수의 말에,
“그럼 더 좋지.”
하고 기생은 박에게 웃음을 치며 컵을 자꾸 권한다.
“무역으로 돈을 벌어서 미스터 박과 출판사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맨 먼저 미국에 소개하여 미국의 이해와 원조를 얻으렵니다.”
윤교수는 맥주 깡통을 두 손으로 따르며 말하고는 말을 다시 이었다.
“미스터 박은 돈 쓰는 속으론 천재지만, 돈 버는 속으로는 낙제생이죠.”
윤교수가 박을 이렇게 규정하는 데에 모두가 동감이란 것같이 함께 웃어 댔다. 박은 한편 불쾌하기도 하였으나, 민족이든 학문이든 돈을 위해서는 헌신짝같이 버리는 그들과 구별되는 것이 한껏 유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무역회사 창립의 첫 기념으로 무슨 상품을 우리나라에 선물하겠습니까?”
박은 그들의 뱃속을 들여다볼 작정으로 세 사람을 둘러보며 물었다.
“미국서 양복기지와 생고무와 설탕을 가져올 계획 입니다.”
윤교수가 선뜻 대답하였다.
“대상 물자로는 무엇이 나가는가요?”
“미국서 요구허는 건 광석 입니다. 그 중에도 중석을 제일 좋아하지요.”
“중석은 수출 금지품이라고 하던데요.”
“그것이 해제, 특히 우리 회사만 수출 권리를 얻으려고 교섭중인데 곧 실현될 것 같습니다.”
윤은 박교수와 같은 문외한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스러웠다.
“그보담도 조선에 없는 기계를 사들여 오면 일석 이조가 아닐까요?”
“물론 그렇죠. 그러나 기계를 요구허는 사람도 없구 기계를 사왔자 그걸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죠. 그런 건 정부가 선 뒤에야 실현될 일입니다.”
윤의 말에 얼굴에 취기를 올린 장이라는 사람이 입을 열고 나선다.
“상업이란 건 이윤을 짧은 기간에 많이 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번 걸로 보아 양복감이나 설탕이나 생고무는 제일급에 속하거든요. 양복감이나 설탕은 불필요한 것 아니냐 허시겠지만 그렇잖습니다. 조선도 해방 덕으로 국제무대에 오르게 된만큼 생활문화를 향상시켜야 합니다. 첫째 의복도 양복으로 모두 개량해야 하고 음식도 맵고 짠 것을 단 것으로 개량해야 합니다.”
“정말 문화인의 경제 관념입니다. 조선 사람들의 흰옷 입고 몰려다니는 걸 아름답게 보자면 양떼 같다 하겠지만 흡사히 폐물 된 병객들이 방황하는 것같이 뵙니다.”
미국인이 교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윤과 장은 그 말에 혹하는 시늉을 하고, 윤은,
“참 적절한 비유올시다.”
하고 웃었다.
“정치? 경제? 문화?’
윤의 말을 들은 끝에 박은 문득 이런 의문을 일으켰다. 문학에서 정치성을 버려야 한다는 유교수가 경제와는 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경제와 정치는 구루마의 양쪽 발통과 같지 않을까. 무역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먹기 위한 행동일까. 조선 상품으로 달러를 획득하려 하지 않고 어찌 미국 물자만을 가져오겠다는 것을 의논하는가. 이왕 미국 물자를 가져올 바에는 조선 경제 재건에 필요한 것보다 폭리만을 위한 상품을 요구하는가. 박은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을 궁굴리다가, 미국에서 이미 진 채무가 백억 원이 훨씬 넘는다고 일부 정객들이 불평과 반대를 말하는 것이 머리를 무겁게 누른다.
박교수는 술맛도 돌지 않고 몸에 이가 군실거리는 것같이 자리가 불안하여 몇 번이나 일어나려다가 붙들리고 하였고, 결국은 요릿집까지 끌려오고 말았다. 미국인이나 윤이나 장보다도 더 다구지게 붙드는 것이 기생인 데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난처하였다.
요리상이 들어오고 새로 온 기생들이 옥란이와 함께 손님 사이로 섞여 앉자, 장은 수표(手票)책을 꺼내더니 삼천 원이라는 액수를 쓰고 상아도장을 찍은 다음 기생에게 나누어 준다. 박은 물론이거니와 윤도 놀란 표정을 하며,
“자네, 돈은 정말 멋있게 쓰네그려.”
하고 웃었다.
“장사라는 건 첫째 선전이네. 기생 아가씨들부터 선전원으로 매수해야 사방으로 다니며 나를 선전하거든. 그게 바로 회사의 이익으로 된단 말이네.”
하고 허거롭게 웃는 장의 말에,
“딴은 그래.”
하고 윤은 감탄하였다.
술자리는 제법 구성지게 어울렸다. 박은 다시 빠져나갈까 틈만 노리고 있는데, 옥란이가 문학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므로, 자연 호기심에 붙들리게 되었다. 옥란이가 문학에 관한 말을 하면, 윤이 영어로 통역하매 미국인까지도 흥미를 가져, 좌석은 옥란을 중심으로 흐믓해지는 것이다.
옥란이가 즐겨 읽는다는 소설의 작가를 들추는데, 모두 문학가동맹원인 것이 박으로서는 더욱 흥미를 느꼈다. 그래,
“그럼 정치성 있는 문학 정치하는 작품을 좋아하는군?”
박은 다소 긴장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러구말구요, 요샌 더구나 그러죠. 입원한 환자에게 해수욕을 가느니, 온천엘 가느니 따위의 이야기가 소용 있겠어요? 무슨 약을 먹구, 어떻게 조섭한다는 이야길 해줘야죠.”
“조선도 병자고 조선 사람도 병자일까.”
“그러먼요. 옳게 정부도 못 섰으니까 병자 아녀요?”
박교수는 병자가 아니라고 대답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러나 병자는 의사인 정치가에게 맡길 일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지려 하였으나, 다지는 힘이 약한 것을 느꼈다.
“참 말 잘 했다. 내가 박선생 대신 상을 주마.”
하더니 최는 이천 원짜리 수표를 옥란에게 주고,
“돈 버는 사람에겐 돈 생기는 이야기가 필요허구.”
하고는 유쾌한 듯이 껄껄 웃는다.
2
여름비가 아침부터 주룩주룩 내리었다. 박교수가 연구실에서 다음 시간의 강의를 준비하느라고 책을 뒤적거리고 있으려니,
“나는 비 오는 날이 기분 좋아. 밤에 혼자 있는 것같이 맘이 안심된단 말야.”
혼자말같이 하며 윤교수가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자마자 정중하게 말올 꺼낸다.
“그런데 콘 문제가 생겼어. 교장이 말하는데 김성후 교수가 좌익성 당에 관계헌다구 경찰 방면에서 파면시키라고 권고를 해왔대. 실력으론 아깝지만 학교 처지로 보아 헐 수 없다구 교장이 말하니 일은 결정적이란 말야.”
박은 너무도 의외의 말에 ‘앗’ 소리를 낼 뻔하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벽만 보며 연구실 안을 서성거리었다. 정치관계에 있어서 경제와 문학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학문연구에 있어서 정치적 경향이 진퇴 문제에까지 관계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기가 너무 단순한 탓으로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윤이 나간 뒤에도 박은 연구실 안을 거닐다가 벽 앞에 다다르면, 벽을 대한 채 한동안 그대로 있는 것이다.
“박군 뭘 그렇게 노심초사허는가?”
김교수가 문을 열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박은 김과 마주 앉아 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목에 가시처럼 걸리어 망설이고 있노라니,
“보게 오늘 유쾌한 장면이 있었네.”
하고 커다란 소리로 말을 꺼낸다.
김이 ‘노동가치설’을 강의하고 니·니, 학교 쌈패에 끼여 다니는 학생 하나가 ‘계급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계급의 타협은 불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하기에 김교수도 흥미를 느끼어 노트를 덮어 놓고 설명을 자상히 해주었다. 학생은 김교수의 연구실 앞까지 따라오며 우연한 의문이 생각되었다가 진리를 깨달았다 하며, 앞으로는 행동을 고치겠노라고 거듭 맹서하였다.
“아 그놈이 내 강의를 듣더니 제 딴에는 몹시 반가웠든지 두 번이나 괜히 벌떡 일어났다가는 다시 앉는단 말이네.”
하고 김교수는 만족하게 웃었다.
며칠 뒤, 김교수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는 권고사직을 받고 교장을 만나서 사직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대라고 대들자, 교장이,
“당신이 경찰서에 가서 소상하게 알 때가 오구야 말 것이오.
하는 말에, 매양 같은 결과를 까다롭게 가져올 필요가 없다 하는 생각으로 깨끗이 단념한 것이다.
김의 후임으로, 윤의 집에서 만났던 장연만이가 취임하는 것을 보고야 박은 비로소 김이 사직하게 된 동기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얼마 전에 교수회 규칙이 변경되어 부장의 임명은 교수와 전임강사의 무기명투표로 하게 되었다. 문학부장의 자리가 비게 된 후 후임을 선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윤을 비롯한 몇몇 교수의 반대로 미루어 왔다. 후임으로 물망에 오른 사람으로는 윤교수와 조교수다. 조교수는 나이도 많고 윤을 중학교 때 가르친 일까지 있었으나 최근에 취임한 관계로 보통 교수로 되었다. 윤은 미국 유학을 했다는 것을 미끼로 부장자리를 노리는데 투표결과를 예상하면 윤과 조가 막상막하의 관계다. 조교수에 투표할 사람을 내보내고 윤교수에게 투표할 사람을 들인다면, 윤 편으로는 두 표를 얻는 셈이 된다. 여기에 평소부터 윤을 위선자고 파시스트라고 미워하는 김교수가 걸려든 것이다.’
장연만이는 시원하게 보이는 하늘빛 양복을 입고 기름 바른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가지고, 취임인사를 하려고 전교 학생 앞에 나타났다. 이날은 여느 때의 집회보다도 많은 학생이 모였다. 부과장의 소개말이 끝나고 장연만이가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려 할 때, 경제학부 학생들은 아무런 신호도 없이 흩어져 나가매 운동장은 장바닥같이 시끄러워졌다. 경제학부 학생들은 제각기 교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예정한 계획대로, 김교수의 무조건 복직과 학원의 자유 보장 등 여섯 가지 요구조건을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선언하였다. 이날 다른 학부에까지 파급되어 전교가 맹휴로 들어갔다. 우익 학생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아 오던 김교수인만큼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맹휴는 단행되었다.
맹휴가 계속되는 동안 문학부장의 선거가 있었다. 개표한 결과 윤교수가 두 표 부족하여 조교수가 피선되었다. 박교수는 김의 사건에 충동을 받아 조교수에게 투표하였으나, 다른 교수 하나도 정녕 이런 핑계로 윤에게 한 표를 주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날 윤은 휴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김에게 이런 결과를 속히 알려 주는 것이 우정일 것 같아 강의를 끝내기가 바쁘게 김의 집을 찾아갔다.
김은 조용한 서재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논문의 제목이 「현하 조선 경제의 식민지적 성격」이란 것을 보고,
“김군, 인제 노골적으로 정치운동을 할 작정인가.”
하고 원고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내가 학교서 강의하는 것은 정치운동이 아닌 줄 아나? 정치운동이란 정당 사람이 하는 것만 아니네. 인제 좀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을 해야겠네. 까딱하면 조선이 반쪽으로 잘리고 반동분자의 독무대가 될 위험성이 있으니 그리 되면 조선은 참담한 운명에 빠지고 마네. 박군도 상아탑 문을 박차고 나오란 말일세.”
박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추잡한 모략을 알고, 그 속에 얽힌 정치성을 안 것 같기도 하나, 안다는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더러운 물을 찍어 바르는 것같이 불쾌하였다.
“김군, 깨끗한 내 투표 한 장 값을 술로 갚게.”
박은 기분이 안정되지 않아 술 생각이 났다. 김은 이내 승낙하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박은 이날 밤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도 없는 독방에서 자리에 눕긴 했으나, 김과 실컷 토론한 것이 다시 생각되어 정신은 도리어 새맑아지는 것 같다. 김에게 항변하는 자기의 용기가 차차 약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한편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이 경찰서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던 날, 교수회의에서 경제학부 학생 중에서 열한 명은 퇴학 처분하기로 결정되었다. 조교수와 김교수를 비롯하여 반대하였으나 다수가결로 패하고 말았다.
“선생을 선택하는 권리는 학생에게 줘야 할 것 아닙니까.”
결정된 뒤에도 박은 흥분하여 교장에게 영어로 대들었다.
“열한 명 학생은 성적도 우수한 사람이오. 무슨 죄로 퇴학을 시킨단 말이오?”
“박교수는 모든 걸 문학적으로 보니까 그럽니다.”
윤교수는 박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 버리고 마는 것이, 박은 모욕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럼 윤교수는 정치적으로 처리한 게 그렇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정치적으로?”
박은 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문학에서 정치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항상 자기와 담론한 것이, 자기를 불구자로 만들어 이용하자는 수작이었던가. 생각하면 자기들의 위선과 행동에 맹종할 것 같지 않으매, 차라리 상아탑 속에 감금시켜 놓자는 음모였던가.
“난 이런 불순한 교수회의에는 앞으로 참석을 않겠소.”
박은 문을 탁 닫고 나와 버렸다. 과연 자기가 어리석은가. 박은 이런 생각을 되풀이하느라고 운동장을 건너가는 데에 한참 걸렸다.
3
하기 휴학을 앞당겨서 선언하던 날 김은 이십구 설 구류와 만 원 벌금을 물고 석방되었다.
며칠 뒤, 김이 몸을 정양하려고 고향에 가기로 되었는데, 한적한 시골에서 원고도 쓰고 담수어도 잡아먹자고 꼬이는 바람에 박도 동행하였다. 고향을 이북에 가지고 퇴학을 당한, 한때 쌈패 학생이었던 민우식을 위로도 해주기 겸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김의 고향은 높은 산이 하늘 울타리처럼 둘러 있고, 그 안에 제법 넓은 들이 분지(盆地)로 되어 있는데, 마을 앞에는 닭알 같은 돌이 깔린 채 맑게 보이는 시내가 흐르고 있다. 가을에는 은어가 많이 잡히는 관계로 먼 곳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김의 집은 넓고 아담한 초가였다. 개와집보다 산천에 오히려 어울리고, 이 집의 누마루에서, 검은 바위와 키 큰 소나무로 덮인 산과 언제나 허벅다리 위까지 빠지는 물이 흐르는 시내를 보고 있노라면, 땀이 나는 줄 모르게 흘렀다가 더운 줄도 모르게 걷히는 것이다. 김은 식전과 아침으로는 책을 읽기도 하고 원고를 쓰기도 하다가, 햇빛이 한창 내리쪼일 적에는 물 속에 들어가 목욕도 하고 고기도 잡았다. 때로는 낚싯대를 메고 오 리 가차이 나가면 못에서 손바닥만한 붕어라든지 메기 같은 것이 일쑤 잡혔다. 김의 집에서 애용하는 과하주를 이렇게 잡은 물고기로 안주하여 마시고 있노라면, 박은 소란한 조선 땅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박군, 이런 선경에 이런 흥겨운 자리에도 정치가 있단 말인가.”
김은 이글거리는 홍에 몸이 뛸 것같이 되면, 큰 소리로 이렇게 묻고는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혼자 껄껄 웃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어느 날 김은 먹은 것이 걸리어 곽란을 일으켰다. 토사를 여러 차례 하고 겨우 돌리기는 했으나 잔뜩 파리해 가지고 누워 있고 박과 민우식은 그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고요하던 이 동네는 갑자기 전쟁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군청소재지에 있는 몇몇 청년이 화물자동차 두 대에 타고 불의에 이 동네를 습격하였다. 울며 아우성치는 소리와 살림 부서지는 소리에, 도야지 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더욱 요란하였다. 김의 집이 높은데 있는만큼, 이 광경을 얼마는 멀리 볼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불의의 습격인데다가 깔꾸리를 들고 덤비는 데는 대항할 수 없음인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는 사람도 많았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더니, 화물자동차가 소리내며 사라지자 사방에서 다시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박은 파리한 몸에 흥분하여 벌떡 일어났다가는 쓰러져 눕는 김을 겨우 안정시켜 놓고, 민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습격을 당한 집을 들어가 보매 접시 한 개 남기지 않고 부시고, 간장독을 깨어 간장이 마당에 쏟아져 흐른 집도 있고, 도야지를 죽여 논 집도 있고, 도야지나 닭을 죽여 가지고 실어 간 집도 있다. 문짝은 부서져 쓰러지고 어떤 집은 불을 놓았으나 타다가 제대로 꺼진 일까지 있다. 박은 너무도 참혹하고 울고 싶어 발길을 돌리려 할 때인데 오십 가차이 되어 보이는 여자가,
“당신은 구경 댕기는 사람이오? 모두 한통이지 이놈들.”
하고 악을 쓰더니 박의 와이샤쓰에 잡아 매달리고 얼굴을 손으로 쥐어 갈겼다. 박은 피할 겨를도 없이 와이샤쓰를 찢기고 한편 볼의 살점이 떨어졌다. 이렇게 당하고도 박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못 내고 있으려니,
“선생님을 왜들 이러십니까?”
민우식이가 평안도 어조로 말을 하며 박의 앞에 나서서 막았다.
“이놈의 자식이 아까 바로 그놈이다.”
박에게 대든 여자가 이렇게 소리 지르자 청년 세 사람과 여자 다섯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민우식이는 손으로 맞고 발길로 채이다가 사발만한 돌로 가슴을 맞고는 그만 쓰러졌다.
“이 학생은 내가 서울서 데리고 저 높은 집에 놀러 온 사람입니다.”
박은 이 말을 여러 번 했으나, 사람들은 민이 쓰러진 뒤에야 알아듣고 잠잠하였다. 청년 하나가 민을 업고 다른 청년이 뒤에서 부축하여 김의 집으로 데려왔다. 청년들은,
“너무 분해서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그놈들은 자동차로 갔을 텐데 그만 생각을 못 했습니다. 용서허십시오.”
하고 민의 전신을 주무리 주기도 하고 박과 김에게 허리를 몇 번이나 구부리며 사과하였다. 민은 괴로운 듯이 입을 다문 채 숨을 자주 쉴 뿐이고, 아무런 표정과 말이 없는 것이, 박은 보기에 안타깝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민을 껴안고 울고도 싶고 입을 맞추어 주고도 싶었다. 김은 창백한 얼굴에 핏기를 올려 청년들을 보기 싫다고 쫓아 보내었다. 의사가 진단한 결과 늑골은 상하지 않았다 하고 가슴과 다른 상처에 약을 붙이고 돌아갔다.
이 사건의 동기는 하찮은 것이었다. 얼마 전 동네 앞 들의 삼분의 이 가량 소유하고 있는 읍의 지주가 기생을 데리고 여러 사람과 함께 천렵을 왔다가 물고기가 잡히지 않으매 소작인을 동원시켜 잡으라 하였으나 두 벌 기침에 한창 바쁠 때라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더니 소작인 몇 사람을 때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주었다. 참다가 분통을 터뜨렸던 젊은 청년 몇 사람이 지주와 함께 온 사람 중의 둘을 조금 때려 주었는데 이것의 복수로 일을 일으킨 것이다.
“박군, 그 지주가 단순한 복수로 한 것은 아닐 거네. 이 동네가 군내서는 농민조함이 제일 강력하게 된 것을 파괴하랴는 것이 더 큰 목적일 것이네.”
김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앉은 채 말하였다.
“그렇다고 청년들을 그렇게 이용해?”
“청년들은 정열적이니까 이용하기가 쉽지. 그러니 지도자의 죄악이 크지.”
“선생님, 과연 그렇습니다. 악질 청년도 있지만 대체로 지도자의 죄가 많습니다. 저는 오늘 전날의 죄악에 대한 벌을 당했습니다.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었던 민이 숨을 자주 쉬면서 떠듬떠듬 말하고는 두 눈에서 눈물을 주루루 흘린다.
박은 미친 사람처럼 민에게 달려들어 입을 쭉 맞추고는 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참 고맙다. 모두가 너 같은 청년이라면.”
하고 얼굴을 들지 않고 있으려니 눈물 한 방울이 민의 볼에 떨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먼산을 넋없이 바라보다가는 누마루를 어실렁어실렁 걸었다. 그는 이날의 사건에서 받은 충동을 어떻게 받아들여 삭일 것인가 혼자서 당황하였다.
‘이것 이 지금의 조선의 현실인가.’
박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 김에게서 대답을 찾아낼 듯이 그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4
동맹휴학은 새학년 개학이 된 지 며칠 만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윤교수의 의견대로 좌우익 학생간의 분열정책을 이용한 것이 들어맞았다. 학생간의 충돌은 가끔 벌어져 일부 부상자를 내다가 한사람 두 사람씩 등교하는 수효가 늘어 가기 시작하여 결국 맹휴측에서도 등교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두 파로 갈리어 서로 노리고 있는 상태라 한편에서 손가락질만 하여도 육박전이 벌어질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생 문학 간담회를 교내에서 열게 되었는데, 그 전날 문학부 학생 유하근이가 코피를 홀리면서 쌈패 학생들에게 쫓기어 박의 연구실로 뛰어들었다. 끝까지 쫓아온 이민철이라는 학생은 연구실 문을 재껴 열고 들어오려다가 박을 보고는 우뚝 섰다.
“무슨 야만 행동이냐. 이론으론 싸우지 못허니? 보기도 싫다. 어이 가버려라.”
박은 소리를 높여 무섭게 나무랐다. 그는 자기로도 이상할 만큼 흥분되어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것 같았다. 이 학생이 사라진 후 손수건을 꺼내어 닦다 만 얼굴의 코피를 없애 주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며 허리를 구부리는 유하근을 정면으로 보자, 박은 염○한 맘이 들었다. 유하근은 문학부 학생 중에서도 박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기대를 붙이고 있는 학생이다. 재주가 놀랍고 시를 잘 짓고도 감각이 섬세하고 예민한 데에 박은 더욱 좋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정치적인 이념을 살리려고 고심하는 것이, 박으로서는 한갓 불만이었으나 유하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 학생회의 문화부를 맡고, 좌익적인 학생운동에도 가담하여 있는 것을 박은 진작부터 눈치를 채고, 학생시대는 잡념을 버리고 공부에 열중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타일러왔다. 유하근의 체격은 어깨뼈가 날카롭게 보이도록 야위고 허약하나 눈은 이글이글 타는 것 같고, 얼굴은 항상 긴장되어 있는 것이, 박은 이날에 있어서는 정 이 흐뭇하게 느껴졌다.
마침 학교 자동차가 나가는 기회가 있어 박은 유하근과 함께 타고 나왔다.
“선생님 이 저를 보호해 주신다구 놈들이 욕허겠습니다.”
유하근은 박이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며 말하였다.
“그놈들은 야만인이다. 이론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인테리의 특권이 아닌가.”
유하근은 흥분이 걷힌 지가 이미 오래지만 박은 홍분이 도리어 전신에 퍼졌다.
박은 유하근과 갈리어 대학 동기동챵인 강익주를 찾기로 하였다. 박은 강과는 재학중에도 친했거니와, 졸업한 후 해방 전까지는 일주일 이상을 거르지 않고 서로 찾았다. 강은 영문학의 실력도 있어 학교 방면에서 와달라고도 했지만, 가진 재산이 있는지라 모두 거절하고 집에서 독서하는 것이 일이었다. 일본의 교육정신에 한몫 끼기가 싫어서였다. 강은 해방 후부터 정치운동에 다소 가담하게 되매, 박은 우정은 가시지 않았으나 정치운동이 맘에 께름칙하여 찾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강이 경찰서에 들어가서 월여를 고생하다가 석방되었다는 것을 알고 찾아본다는 생각만 하고 미루어 오기만 하였다. 이날 갑자기 강을 찾고 싶은 것은, 박으로도 그 동기를 끄집어내기가 어려웠다.
만난 적도 오래지만, 강은 박을 몹시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해방 후 강이 중심되어 만든 상사 회사의 사원 네 명이 와서, 장부를 내놓고 강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강은 장부를 치우게 하고 박과 마주 앉아 언제 보아도 너글너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같이 박은 보았다. 그러나 강은,
“문학자를 대하니까 좀 어색해지네.”
하고 웃는다.
“왜 그럴까.”
박은 강의 말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궁금하였다.
“문학을 떠나서 장사꾼이 돼서 그런 것 아니겠나?”
“내 문학이 현실적이 아니라는 선입관념이 있어 그러네.”
박은 강이 생각하지도 않은 말을 꺼내었다. 강이 전공한 문학을 당분간 쉬고, 한편 장사도 하고 한편 정치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 자기와는 거리가 먼 세계에 서로 떨어져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박과 강의 대학동창이면서 조선 의학계의 권위자로 지목받는 의사 둘이 들어왔다. 해가 질 무렵이라 박은 작별하려 했으나, 강과 의사 친구들이 굳이 붙드는 통에 다시 주저앉았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줄도 모르게 조선 독립 문제가 화제로 되어 시끄러워졌다. 마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상태에 빠져 있는 때였던만큼, 만일 결렬되면 남조선 단독 정부가 서고, 이렇게 되면 삼팔선은 아주 굳어질 위혐성이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토론이 시끄러워졌다.
두 의사는 단독 정부라도 세워야 한다고 박과 강에게 다시 반격하려고 열을 올릴 때, 밤과 아울러 술상이 들어와서 중단되었다. 모두 술에 정신이 팔린 듯이 토론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취기가 전신에 배면서부터 모두 흥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의사 하나가 전기축음기에 ‘강강수월래’라는 민요를 걸어 놓고 앉은 채 어깨춤으로 우쭐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색안경을 쓴 청년, 마스크를 건 청년이 성큼 들어오며,
“꿈쩍만 허면 모두 죽인다.”
하더니 강의 멱살을 붙들고 끌어내었다. 뒤이어 오륙 명이 강도같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들어왔다.
“이놈아 보따리 싸가지고 이북으로 가. 안 가면 죽일 테니깐.”
이 말과 함께 청년들은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수었다.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고 곤봉으로 때리고, 하늘에서 벼락불이 폭주하는 것 같았다.
“여보들, 말로 합시다.”
박은 정신이 아득해진 중에도, 이런 말로 앉은 채 청년들을 노려보았다. 박은 자기에게까지 무지한 손이 닿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눈 깜박할 동안 엎으러진 채 소리 한마디 지를 수 없었다. 전구가 탕탕 깨지고 상과 아울러 기명도 깨졌다. 전축과 사방탁자도 산산이 부서졌다.
“히키 아게(철수)!”
하는 일본말 호령으로, 청년들은 귀신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 뒤에야 전구를 새로 끼어서 불을 다시 켰다. 한 사람씩 여기저기 기어오다시피 하며 모여들었다.
중상을 입은 사람은 박과 의사 둘이었다. 박은 두개골이 터져 피가 온몸에 흐르고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쉬기가 곤란하고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의사 하나는 입술이 터져서 부어오르고 자기 가늠으로 늑골이 한 개는 부러진 것 같다는 것이고, 다른 의사는 ○○○이 됐는지 한편 다리가 부어올랐다. 강은 얼굴에 상처가 조금 나고, 발꿈치가 붓고 시어서 발을 디디지 못할 정도뿐이었다.
“정작 쥔놈은 덜 맞고 손님만 죽게 됐구나. 무지헌 놈들 같으니.”
한 의사가 아픔을 참으려 농담조로 말하자 강은,
“미안하네만 내가 시킨 것 아니고 별수 있나? 세상이 이러니 쓰겠나? 자네들도 나와 함께 내일부터라도 남정당에나 들세. 어째피 당헐 바엔 빨갱이나 돼가지구 당허지.”
하며 역시 농담으로 받았다.
“어서 혁명이 돼야지.”
박은 무의식중에 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 말을 하고 신음하는 소리를 연해 내었다. 인력거를 오라 하여 의사들은 자기 병원으로 돌아가고 박과 강은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강은 입원할 정도는 아니지만 테러가 재습할 위험성과 박에게 미안하여 함께 입원한 것이다. 숙직의사가 응급치료만 하고 이튿날 과장의 진찰을 받은 결과, 강은 퇴원해도 좋다 하고 박은 늑골 한 개가 부러졌으나 염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였다.
박은 가슴을 봉대로 칭칭 동여맨 채 병상에 바로 누우니, 모든 일이 연극과 같이 생각되었다. 해방 후 무관심하게 체험한 것을 차례로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한 실에 꿴 바늘처럼 똑똑하게 눈앞에 재현되면서 맘속을 아프게 찌르는 것이다. 김이 항상 입버릇같이 말하는 조선의 현실을 애써 가며 피하려 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낯모르는 두 환자도 자기와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자기와 같은 원인으로 입원한 것인가 궁금하였다. 자기와 같이 테러를 당한 것은 아니라도 악착하고 악질적인 조선의 이런 현실에서 빚어내어진 결과임에는 틀림없으리라고 혼자 단정하였다.
“박군 뭘 생각허나. 왜 아무 말도 없어?”
옆 병상에 앉어서 이야기 하던 강은 박이 말없이 듣고만 있으니까
이렇게 물었다.
“머릿속이 너무 벅차서 견디질 못허겠네. 전혀 딴세상에 여행이나 온 것 같네.”
“그 동안 자네 여행은 맹목적였으니까 인제부터는 정신을 똑똑히 차려서 구경을 허란 말이네. 홍미도 나고 철학도 발견될 것이네.”
“철학?”
박은 새로 하얗게 바른 천장을 보면서 혼자말같이 거듭 외었다. 확실히 위대한 철학의 어느 테제에 부닥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병실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박은 고개를 조금 들고 보자마자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하였다. 예상하였던 간호부가 아니고 김옥란이었다. 옥란이는 새빨간 튤립꽃을 한 묶음 들고 들어오더니 창백한 얼굴에 곱슬머리를 한 환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환자에게 인사한다음, 꽃을 갈아 꽂고는 다시 도신도신 이야기를 하다가 박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옥란이는 누가 보기에 호들갑스럽게 급히 박에게로 걸어오는 것이다.
“선생님 이게 웬일이세요?”
옥란이는 박을 들여다보듯 하며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 박은 대답하기가 거북하여,
“병원엘 웬일이십니까.”
하고 딴 말을 물었다.
“이종오빠를 만나러 자주 옵니다.”
“박선생도 테러 세계를 여행 했답니다.”
웃음말을 잘 하는 강이 능청스런 어조로 말하자, 옥란이는 잠깐 웃더니 이내 놀라는 표정을 한다.
강이 퇴원한 뒤에도 옥란이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박은 고적하지 않았다. 옥란이는 꽃도 갖다 꽂아 주고 과일과 과자도 자주 사왔다. 어느 때는 잣죽을 두 사람분을 쑤어 가지고 와서는 박이 먹은 것을 보고야 돌아가기도 하였다. 옥란의 이종오빠 되는 환자가 퇴원한 뒤로도 꼭 찾아와서는 전보다도 맘을 풀어 놓고 놀다 갔다. 박은 처음 동안은 의사와 간호부에게 겸연쩍게도 생각되었으나, 얼마 아니 가서 친밀한 정을 느꼈다.
하루는 무뚝뚝한 간호부를 부르기가 싫어, 풀어진 붕대를 옥란에게 부탁하여 다시 동여매고 있을 때다. 학교에서 유하근이를 때린 쌈패 학생이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왔다. 쌈패 중에는 가장 박에게 따르는 학생이건만 독사처럼 보기에 무섭고 징그러웠다. 유하근의 파리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학생이 더욱 미워졌다. 학생은 얼마 동안 있다가 나가고 말았다.
“이제 나간 학생이 학교 테러단의 두목격입니다.”
“그래요?”
옥란은 눈을 크게 뜨고는 학생이 나간 문을 돌아보다가, 그 문이 다시 열리며 김이 들어왔다. 옥란이는 병실에서 몇 차례 만난지라 다정히 인사하였다.
“사과 바구닐 침대 아래로 치워 버리시오.”
박은 사과를 머리맡에 올려놓는 것이라도 유하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바빠서 찾아오지 못하겠다고 나흘 전에 말하고 간 유하근이가 신변에 변화는 없는가 걱정되면서 공부에만 열중하라고 일러 오던 자기 자신이, 유하근에게서 맘속으로 얼마나 멸시되었을 것인가가 이상히도 맘에 걸리었다.
“김군, ‘탁류’라는 제목으로 단편 하나 구상했어.”
박은 한동안 말없이 생각하다가 담배를 피우는 김에게 말하였다.
“탁류만을 그리지 말구 탁류 속에 흐르는 청류를 봐야 헌단 말이네. 그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야.”
“글쎄 내가 그걸 캐치하랴는 것일세.”
박은 자기도 모르는 기운을 느꼈다. 병실에 있는 것 같지 않은 상쾌한 맛을 느꼈다.
“자네 유군 소식을 들었나?”
“요즘 내게 오지도 않어. 왜 무슨 일이 생겼나?”
“그렇진 않건만 유군 신변이 자꾸 걱정되어 그러네.”
“자네 신경이 쇠약해서 그래. 유군 같은 학생은 위험이란 걸 한 번두 생각한 일조차 없을 것이네.”
김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데서 박은 무엇을 발견할까 하고 눈을 감았다.
(《신천지》, 194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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