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그날도 올해와 같은 일요일이었다.
아무 대비도 없었던 아군은 한달반이 채 안된 7월 29일, 밀리고 밀리어 국토의 10%만 남겨진
낙동강 왜관철교에서 칠곡 다부동,팔공산을 경계로하여 대구와 부산만 남게되었다.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7월 21일 괴산 수안보 전선사령부까지 내려와
8.15 광복절기념행사를 대구에서 거행하겠다며 북괴군 5개사단을
성주,고령,상주,선산,효령으로 투입하여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이에 아군은 Y자형 방어선을 구축하고,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 삼아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다부동을 중심으로
시산혈하(屍山血河), 즉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가 강물같이 흐르는
뺏고뺏기는 치열한 혈투끝에 방어작전에 성공하고 드디어 반격의 기회를 잡는다.
구국경찰충혼비
다부동 전투에서만
아군은 군인,경찰,학도병 등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적군도 17,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살아 남았고
오늘날 세계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며 잘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삼가 숭고한 희생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구국용사충혼비
여기 자유의 제단에 조국위해 목숨바친 영령을 모시노라.
가신님의 짧은 인생은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리.
2023.7.5 제막 예정인 다부동전적기념관앞의 백선엽장군 동상(현재 마무리 공사중)
백선엽(白善燁)장군은 1920.11.23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현 남포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수원, 호는 우촌(愚村)· 운산(雲山)· 산남(山南)이다.
제7대(1952.7.23~1954.2.13), 제10대(1957.5.18~1959.2.2) 육군 침모총장,
제4대 연합참모본부총장(1959.2.26~1960.5.31),
제19대 교통부장관(1969.10.21~1971.1.28) 등을 역임하였으며,
2020년 7월 10일 향년 100세로 사망하였다.
장군은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잠들어있다.
전적기념관 내의 기록들
당시 낙동강 남부 동쪽 부분만 남은 위기의 전황도
구국의 영웅 백선엽장군 동상(공사중)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찾은 차세대 꿈동이들
16개 참전국 깃발 아래의 꿈나무들
무궁화꽃이 곱게핀 이곳은 왜관 낙동강변에 있는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이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전경
기념관 현관
"낙동강방어선"이라 새겨진 철모
기념관이 있는 이곳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한 전투가 수없이 펼쳐졌던 곳이다.
기념관안의 백선엽장군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장면
낙동강 방어선 현황도
6.25전쟁 칠곡의 55일 전쟁사
백선엽(白善燁)장군 저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와
국가안보의 요람 호국평화기념관 2015.7.16 백선엽 친필
지게부대원 탄약운반
백선엽(1920~2020년) 장군의 장녀 백남희(75) 여사는 사비 1,200만 원을 들여
높이 160㎝의 ‘다부동전투 지게 부대원 추모비’를 제작 설치하고
오는 2023년 7월 5일 백선엽 장군 동상과 함께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제막식을 한다.
“지게 부대원은 국군의 수호천사를 자처했던 이름 없는 영웅들입니다.”
이들 지게 부대원은 탄약, 연료, 식량 등의 보급품 40㎏을 짊어지고
가파른 산악지대 고지를 오르며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과 미군에게 전달했다.
백남희여사는 지게 부대원의 헌신을 높이 평가했던 아버지 백선엽장군의 유지를 받들고,
지게 부대원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73년 만에 추모동상을 건립하게 되었다.
1,129일간의 6.25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
전사.사망 : 국군 137,899명, 유엔군 37,902명,
부상 : 국군 450,742명, 유엔군 103,460명
실종,행방불명,포로 : 국군 32,838명, 유엔군 9,767명
유해발굴시 나온 철모
호국기념관 추모공간내의 촛불
참전 16개국의 깃발과 뒤로 보이는 칠곡보
찰곡 호국평화기념관의 태극기
왜관 매원마을의 능소화
능소화는 타태화(墮胎花), 금등화(金藤花),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대추나무처럼 다른 목본류보다 좀 늦게 싹이 나오는데,
이것이 양반들의 느긋한 모습에 착안해 양반나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래서 이 이름 때문에 평민들은 능소화를 함부로 기르지 못했다고 하며
만약 기르다가 적발되면 즉시 관아로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칠곡 매원마을은 17세기 광주이씨(廣州李氏)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가
아들 이도장(李道長, 1603-1644)을 데리고 함께 이거(移居)한 후,
이도장의 차남 이원록(李元祿, 1629-1688)이 뿌리를 내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동족(同族)마을 중 한 곳이다.
1905여년까지 최대 번성기로 400여채의 가옥이 있었으나,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마을 "박곡종택"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지경당"을 북한군의 야전병원으로 운영한 까닭에 적군의 주둔지였던
매원마을에 폭격을 가하여 대다수가 소실되었고, 현재는 고택 60여채만 남아있다.
6.25 전쟁의 많은 상흔을 입었던 매원마을
그럼에도 최근에 많은 복원사업을 통하여 옛모습을 찾아가고 있는데다
근·현대기를 지나오면서 이뤄진 마을 영역의 확장 및 생활방식 등의 변화 속에서도
다른 영남지방의 동족마을과 구별되는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옥 및 재실, 서당(書堂) 등을 비롯해 마을옛길, 문중(門中) 소유의 문전옥답(門前沃畓),
옛터 등 역사성과 시대성을 갖춘 다양한 민속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2023년 6월 15일 전국최초로 마을단위 국가등록문화재로 최종 등록(문화재청)하었다.
6.25의 노래 / 작사 박두진. 작곡 김동진
아 ~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짖밟아 오든 날을
맨 주목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