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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각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善正花
부산 여여선원 정 여 스님 |
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명인 부루나 존자는 설법제일(說法第一)로 불린다. 그는 뛰어난 설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불사하고 포교를 했다. 부루나는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수로나 지방으로 가서 인내하며 포교했다. 경전에서는 그가 수로나에서 500 우바새를 위하여 설법하고, 500 승가람을 세우고 열반에 들었다고 했다. 부처님은 부루나 존자를 보내며 인내를 잘 배웠기 때문에 험한 사람들 속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열반을 얻을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다. 오랜 선원 생활을 접고 포교 일선에 뛰어든 부산 여여선원장 정여스님 역시 현대판 부루나 존자에 비견할 만하다. 포교에 뛰어든 지 10여년이 지났는데 스님은 부산 불교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훌륭한 가르침은 저절로 알려지지 않는다”
“수행과 포교는 하나…불교세 약화는 전법활동 소홀 탓 죽음불사하고 설법 나선 부루나 존자같은 자세 아쉬워”
스님은 목숨을 걸고 사지(死地) 조차 마다않는 기독교의 선교의지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한국불교 현실을 대비하며 안타까워했다. 좋은 가르침은 저절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의지를 갖고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사진설명 : 부산 여여선원장 정여스님은 “여여(如如)한 그 자리를 깨우쳐 주는 것이 포교”라고 강조했다. 이제 유적만 남은 아프가니스탄 등 서부 이슬람권이나 날로 교세가 뒤처지는 한국불교 현실은 모두 부처님 제자들의 탓이라며 스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칠고 모진’ 수로나 사람들이 죽일지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겠다는 ‘부루나’가 우리 불교사에도 존재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로 시작된 불교가 오늘날 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도선언’이다. 그 때 부처님은 왜 포교를 해야하며 그 방식까지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사람과 하늘의 이익과 안락,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 법을 전하러 떠나거라. 다른 마을로 갈 때 같은 길을 두 사람이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아야 하느니라. 이치에 따라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전하라. 원만 무결하게 청정한 실천을 설하라….” 그렇게 해서 불교는 전 세계로 뻗어갔다. 하지만 현재 불교의 위치는 튼튼하지 못하다. 정여스님은 “현재 회교권 국가는 원래 불교 국가였지만 이제 유적만 남았다. 이는 부처님 제자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불교국가였는데 그 전하는 부분이 소홀하다 보니 가령 서울은 불교가 2등도 아닌 3등으로 떨어졌다고 한다”며 그 원인을 포교 소홀에 두었다. 정여스님은 “어떤 스님들은 교세보다 가르침이 소중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를 어떻게 전하느냐가 소중하다. 기독교나 가톨릭은 전하는 부분에 생명을 걸어놓고 열심히 한다. 제3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고 자원봉사하는 수가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과연 전법 활동에 생명을 걸어놓고 하고 있느냐”며 포교의 중요성을 거듭 설파했다. 포교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거꾸로 포교를 왜 하는가. 부처님께서 ‘전도선언’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사람과 하늘의 이익과 안락,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라고. 안락이란 무엇인가. 밝고 깨끗한 본래 마음을 깨칠 때 찾아온다. 전법은 바로 그 길을 가르쳐주는 가장 복되고 가치 있는 ‘보시’(布施)다. 그 마음을 찾기 위해 수행을 하고 전도를 한다. 그래서 정여스님은 “수행이 필요한 만큼 전도와 베푸는 삶도 돼야 한다”며 “불자라고 하면 부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어리석음을 깨쳐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한다”고 말했다. 전법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정여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 스스로 불교사상에 대한 확신 없이는 전교할 수가 없다. 불교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마음 중심 사상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모든 사람 마음이 맑고 파란 하늘처럼 깨끗하다. 누구나 그 마음은 밝고 행복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 스스로 만든 욕심과 욕망의 그물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그린 그림에 갇혀 불행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본래 행복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설법을 시작하셨다. 부처님은 네 진짜 마음은 파란 하늘 같은 거야. 진여는 파란 하늘과 같은데 금생 내생을 이끌려 가며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어. 부처님 가르침 대로 ‘참된 바탕은 맑고 여여해서 때묻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면 포교할 만 하잖아” 포교를 소홀히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10여년째 신도교육 중점…사회복지 종교화합에도 앞장 12년 째 포교 하나만을 화두로 씨름하는 스님은 신도교육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자비와 종교화합에 앞장서고 있다. 맡고 있는 일만 해도 몸이 열이라도 모자란다. 참여불교연대를 통한 북한 어린이돕기와 부산불교어린이회 회장을 맡아 어린이 불교도 책임지고 있다. 부산시 사회복지 부회장과 진구 지역 회장을 맡아 사회복지에도 큰 관심을 기울인다. 범어사 복지법인 상임이사이며 금정복지관장이다. 스님은 포교원칙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신도들이 절에 오면 <금강경>까지 강의한다. 스님은 실제로 ‘금강경 강의’ 책을 펴내 이를 신도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둘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자비 복지를 실천한다. 셋째 정법을 준수한다. 사주 관상이나 비법 사법은 일체 배격한다는 것이 스님의 강력한 의지이다. 스님은 포교사 대학에서 이를 적극 실현해 기초 10개월을 배우고 나면 금강경을 1년 배우고 다시 포교사 과정 1년 등 3년 과정을 정법을 배우는데 할애한다. 그만큼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익히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2년 교육과정을 그간 7000여명이 수료했다. 그 가운데는 타 사찰 신도도 많다. 다른 사찰 주지스님이 일부러 위탁교육하기도 한다. 그만큼 교육을 중시하는 것이다. 스님은 “교육을 통해 밝아지고 교육을 얼마나 했느냐가 성공의 열쇠”라고 말했다. ‘여여한 그 자리’를 깨우쳐주는 것이 포교라고 한다. 수행과 포교가 둘이 아닌 셈이다. 하나를 소홀히 함은 다른 하나도 부실하다는 증거다. 아프가니스탄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다. 부산=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1974년 출가…목숨 건 정진 ‘일화’ 95년부터 포교에 전념 ‘부산 대표’ 정여스님은 1974년 범어사에서 벽파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중학교 때 이미 미래 희망이 출가였다. 스님을 보면 좋아서 쫓아다니기도 했다. 출가 전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이미 무심의 경지를 체험했다. 관세음보살을 8시간동안 염하는데 모든 상념이 끊어졌다. 출가 후 오직 본래자리를 찾기 위해 피나는 정진을 했다. 김천 수도암에서 종정 스님을 모시고 3년간 결사했다. 수도암에서 3년 결사자를 모집할 때 전국선원에서 공부 잘한다는 수좌들 18명을 선발할 때 포함됐었다. 곡기를 끊고 잠을 자지 않은 상태로 한달여를 토굴에서 정진하기도 했다. 도반들이 큰일난다며 막무가내로 끌고 내려가 중단했었다. 7년간 은사스님의 뜻을 따라 범어사 금강암 중창불사를 하고 다음날 걸망을 지고 바로 쌍계사 금당선원으로 들어갔다. 보리암 신선토굴, 용문사 백련암 등 토굴에서 다시 생사를 놓고 정진했다. 그렇게 해서 화두일념이 돼 시공이 끊어지고 여여한 본래자리를 경험했다. 스님은 “여여란 부처님 마음처럼 때묻거나 물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은 마음”이라며 “여여하게 보고 듣고 머물고 행하라”는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시비분별을 벗은, 사물을 가식 없이 듣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그 자리가 바로 여여”라고 했다. 그렇게 참선 수행만 하다가 극적으로 포교 일선에 뛰어들었다.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남해 보리암 의상대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도반 스님 몇 분이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스님들이 너무 적다’며 포교를 직접 해 보지 않겠냐고 권유”받고 스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라는 대승적 가르침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하여 3년 결사를 마치고 세상 속으로 나왔다. 재래시장 한 복판에 ‘여여선원’이라는 현판을 걸고 생활 속에서 참선, 기도정진, 부처님의 가르침 두루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교육체계를 마련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그 때가 1995년이다. 12년만에 정여스님은 부산을 대표하는 위치에 올랐다.
[불교신문 2352호/ 8월18일자] 2007-08-16 오전 9:22:31 / 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