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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서
기자명 김보선 기자
'노인과 바다'의 배경인 코히마르의 레스트랑 ‘라 테라사’
여행지 쿠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이 많겠지만 우선 20세기 대문호 헤밍웨이를 빼놓을 수 없다.
쿠바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일종의 문학과 풍류의 순례 코스이다.
알고 보면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빼면 별다른 유적이 없다. 그러나 쿠바의 매력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이 차고 넘친다. 그중 빠질 수 없는 테마가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와 20세기 대문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쿠바는 이 두 명이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흔적을 찾아 전 세계에서 여행객들이 몰려든다. 재미있는 건 두 사람 모두 쿠바 태생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쿠바를 사랑한 이들이기는 하다. 체 게바라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하고 우선 헤밍웨이의 흔적들부터 따라가 본다.
낚시광인 헤밍웨이는 1928년 낚시 여행으로 처음 쿠바 땅을 밟았다. 이후 1960년 미국과 쿠바의 관계 악화로 추방될 때까지 약 28년 동안 쿠바에서 지냈다. 소설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고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쿠바에서 보낸 셈이다. ‘헤밍웨이 루트’는 그가 살았던 집이지만 이제는 헤밍웨이를 그리는 박물관이 된 핀카 비히아 저택,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썼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인 코히마르, 그리고 그가 즐겼던 아바나 시내의 술집 등을 찾는 코스이다. 쿠바 아바나 여행의 필수 코스이자 인기 코스다.
아바나 동쪽 어촌 코히마르에 있는 헤밍웨이의 흉상과 ‘라 테레사’의 모히토.
<노인과 바다>를 마주하다, 코히마르
헤밍웨이는 소설 <노인과 바다>로 1953년 퓰리처상을, 이듬해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코히마르(Cojimar)는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이곳은 아바나에서 동쪽 방향, 차로 20분이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고요하고 소박한 이곳은 소설 <노인과 바다>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코히마르에서 낚시를 즐겼고, 어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나눴다. 실제로 <노인과 바다>는 그가 코히마르 어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코히마르는 여전히 조용하고 지루할 정도로 한가로운 풍경이다. 가끔씩 단체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고 한 무리의 관광객이 버스에서 내려 잠시 소란스러울 뿐이다. 헤밍웨이는 떠났지만 어부들은 여전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어부들은 노인 산티아고처럼 바다로 길게 난 낡은 다리 위에서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면 마을 모퉁이에 덩그러니 세워진, 먼 바다를 바라보는 헤밍웨이의 흉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으로, 마을 어부들이 헤밍웨이를 기리기 위해 못 쓰는 배들의 프로펠러를 녹여 1962년에 세웠다.
코히마르에서 유일하게 그럴듯한 레스트랑은 ‘라 테라사(La Terraza)’이다. 청새치 물고기의 파란 입간판이 온통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이곳은 <노인과 바다>에도 실제로 등장한다. 노인의 유일한 친구인 소년 마놀린이 산티아고를 위해 커피를 받아 왔던 곳이다. 내부 곳곳에는 헤밍웨이와 관련된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낚시대회에서 우승한 피델 카스트로와 헤밍웨이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입구 쪽은 바이고 안쪽으로 들어서면 레스토랑인데, 레스토랑 내부 중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자리는 ‘헤밍웨이 지정석’이다. 창 너머로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낚시 광인 헤밍웨이는 평생 청새치 800마리, 참치 200마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과 바다’는 이런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그가 어부들과 술잔을 나눴던 코히마르의 레스트랑 ‘라 테레사’는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진짜’ 모히토,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쿠바 사람들에게는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걸작보다 “내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 내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라는 낙서가 더 소중할 것 같다. 모히토와 다이키리를 마시기 위해 긴 줄을 서는 여행객들을 보면 말이다. 실제로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 바 정면에는 헤밍웨이가 친필로 쓴 글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헤밍웨이가 남긴 이 낙서 하나로 라 보데기타와 엘 플로리디타는 아바나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명소가 됐다.
‘라 보데기타’는 메인 거리가 아닌 아바나 대성당 인근의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좁은 골목길 중간이지만 찾기는 어렵지 않다. 워낙 유명세를 타는지라 골목 가득 사람들이 몰려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곳은 술집이 아니라 잡화점이었다고 한다. 헤밍웨이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다 1942년에 아예 바로 문을 열었다. 작은 바 내부는 물론이고 입구에서라도 어떻게든 모히토를 맛보려는 여행객들이 줄을 선다. 바 안쪽은 레스토랑이지만 이 역시 손님들로 만원이다. 내외부의 벽에는 이곳을 방문한 세계 각국의 명사들의 사진과 여행객들의 기념 낙서가 빼곡하다. 한국어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입구의 좁은 바에서 라이브 밴드가 공연을 펼치기라도 하면 바 내부는 물론 외부의 골목길에서도 밴드의 리듬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여행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헤밍웨이가 그랬듯, 모두 헤밍웨이가 된 듯 모히토에 취해 쿠바의 흥을 즐긴다. 유명 관광명소 어디든 그렇듯 이곳 바 골목길에는 몸매 풍만한 쿠바 할머니가 커다란 시가를 입에 물고 있다. 멀리서라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온갖 포즈를 취해준다. 물론 모델료 1달러는 억척같이 받아낸다.
모히토는 럼주에 민트를 넣어 만든 칵테일로 쿠바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핵심은 예르바 부에나라고 하는 민트(mint) 허브이다. 럼에 민트를 넣고 봉으로 으깨면 상쾌한 청량감과 박하 향이 난다. 주당들도 알 일이 별로 없었을 이 칵테일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아마 배우 이병헌 때문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남긴 “모히토에서 몰디브나 한잔하자”라는 대사는 한동안 온 매체에서 패러디되어 유행했다. 몰디브에도 당연히 모히토가 있다. 그렇지만 모히토의 원조는 쿠바다. 만약 모히토를 만든 회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병헌에게 공로상을 줘야겠지만, 적어도 쿠바에선 헤밍웨이가 가장 큰 공로자다. 쿠바를 여행하는 여행자치고 헤밍웨이가 즐겼던 ‘모히토’와 ‘다이키리’를 마시지 않은 이는 없다. ‘쿠바를 다녀갔다’는 일종의 의식이다.

‘엘 플로리디타’ 정문 옆 작은 무대에서는 쿠바 전통 밴드가 다양한 쿠바 음악을 들려준다. 정식 앨범까지 낸 밴드의 공연으로 항상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는 쿠바 민요 ‘관타라메나’. ‘관타나모의 시골 여인’이라는 뜻으로 쿠바의 명소 어디든 들리는 국민가요이다.
모히토보다 다이키리, 엘 플로리디타
헤밍웨이의 또 다른 단골 술집은 ‘엘 플로리디타(El Floridita)’다. 올드 아바나 중앙공원에서 오비스포 거리를 가다 보면 초입에 있다. 이곳은 외벽이 핑크색 원색인 데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오래된 간판 때문에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간판에 커다랗게 쓰인 ‘다이키리의 요람(La Cuna del Daiquiri)’이라는 문구에서 이곳이 다이키리의 원조라는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이곳 역시 입구 쪽은 바, 안쪽은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입구 왼편의 모퉁이 자리에는 실물 크기의 헤밍웨이 동상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헤밍웨이가 바를 찾는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듯하다. 여행객들은 헤밍웨이 동상 옆자리에 앉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환한 웃음에 턱수염 가득한 헤밍웨이와 함께 다이키리를 마시는 포즈를 찍기 위해서라면 기다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문 옆 작은 무대에서는 쿠바 전통 밴드가 다양한 쿠바 음악을 들려주는 공연을 펼친다. 단순히 관광객에게 팁을 바라는 수준이 아니라 정식 앨범까지 낸 밴드의 공연이다. 항상 빠지지 않는 밴드의 레퍼토리는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Guantanamera)’.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 노래는 ‘관타나모의 시골 여인’이라는 뜻으로 쿠바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가 전래 민요에 시를 붙인 것이다. 쿠바의 명소 어디에서든 들리는 국민가요다. 다이키리는 모히토와 쌍벽을 이루는 쿠바의 대표 칵테일이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시원한 얼음과 어우러져 목까지 얼얼하다. 우리에겐 모히토가 더 유명하지만 다이키리의 매력에 빠지면 우리 입맛엔 오히려 모히토보다 다이키리가 맞을 듯하다.
엘 플로리디타 옆 건물 2층에는 쿠바산 시가를 파는 상점이 있다. 쿠바 여행의 기념품은 역시 시가이다. 쿠바 곳곳에서 시가를 살 수 있지만 아바나 시내에서는 이곳이 가장 믿을 만하다. 시가는 여러 종류의 브랜드와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이 있다. 호텔이나 정식 상점의 제품들은 믿을 만하지만 길거리에서 ‘코히바(Cohiba, 쿠바의 프리미엄 시가 브랜드)’를 외치며 유혹하는 호객꾼을 따라갔다간 가짜에 속기 십상이다. 가짜는 담뱃잎의 건조 상태나 겹겹이 쌓는 정도가 달라 시가 특유의 향이나 연기가 퍼지는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헤밍웨이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 있다. 여행객들은 헤밍웨이 동상 옆자리에 앉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암보스 문도스 호텔 511호
헤밍웨이의 대표작 중 하나인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한 ‘암보스 문도스 호텔(Ambos Mundos Hotel)’은 아바나 여행자들에겐 시내 관광의 메인 도로인 구시가지 오비스포(Obispo) 거리에 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집을 구입하기 전인 1932년에서 1939년까지 이 호텔 511호실에 묵으면서 <에스콰이어> 잡지에 연재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511호실은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객실이다. 가장 위층 객실인 데다 사각 코너에 있어 양쪽으로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을 수 있으며, 커튼을 열면 멀리 바다와 구시가지의 광장을 한눈에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곳은 이제 작은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침대와 그의 손때가 묻은 타자기, 관련 작품의 책, 아프리카 사냥 여행 전리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를 내고 룸에 들어서면 안내인이 헤밍웨이와 이 호텔의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의 진가는 511호보다 바로 위층의 루프톱 바에서 알 수 있다. 허름한 구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오르면 사방이 트인 루프톱 바를 마주한다. 이곳에선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비롯하여 아바나 대성당, 멀리 거대한 예수상이 보이는 카사블랑카 지역까지 아바나의 구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루프톱 바는 저녁 노을 때도 좋지만, 찬란한 햇살이 길게 뻗는 아침이라면 더욱 좋다. 여기에 진한 쿠바산 커피가 더해지면 여행으로 지친 고단함과 아바나의 혼잡함을 한순간에 잊게 하는 묘한 마력이 생긴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쿠바 아바나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내려다본 풍경.
헤밍웨이 삶 간직한 박물관, 핑카 비히아
헤밍웨이 루트의 또 하나는 ‘핑카 비히아(Finca Vigia)’이다. 이곳은 쿠바 아바나 남동쪽 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San Francisco de Paula)에 위치한 헤밍웨이의 저택이다. 그는 초기에 주로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머무르다 쿠바의 매력에 빠져 그의 세 번째 부인 마사와 함께 아예 집을 구해 정착했다.
‘핑카 비히아’라는 이름은 ‘망루 농장’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 저택에 딸린 4층 높이의 망루에 오르면 아바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헤밍웨이가 날마다 낚시를 떠났던 바다도 보인다. 원래 본채의 실내를 개방했었는데 도난사고가 많아 요즘에는 아예 내부에 입장할 수 없게 되었다. 넓은 창을 통해서만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침실과 책상, 오래된 서적들이 빼곡한 책장, 다양한 술병, 옷가지 등 헤밍웨이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보전해 놓았다.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사냥을 좋아했던 그는 집 안 곳곳에 직접 사냥한 물소, 표범, 사슴 등을 박제하여 장식했다. 본채에서 정원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실외 수영장이 있다. 깊이도 상당하다. 수영장 바로 옆에는 그가 바다로 나가 낚시를 즐길 때 이용했던 낚싯배 ‘필라르(Pilar)호’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져 있다. 야외 정원에는 헤밍웨이와 함께했던 4마리의 반려견 무덤이 간이 비석과 함께 보전되어 있다.

(좌) 헤밍웨이가 낚시를 할 때 탔던 배 ‘필라르호’. 그의 저택 ‘핑카 비히아’에 전시돼 있다. (우) 헤밍웨이가 거주했던 쿠바의 저택 ‘핑카 비히아’.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쿠바 입양인’
헤밍웨이는 미국 태생이지만 미국보다 오히려 쿠바와 인연이 깊다. 그는 문학보다 모히토와 다이키리, 낚시를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창작보다는 술과 낚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그의 일상을 따져보면 더욱 그렇다. 풍류를 즐겼다고 말해야 하나. 그에겐 모히토와 다이키리, 새치 낚시가 있던 쿠바가 고향인 미국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을 ‘쿠바 입양인’이라고 소개했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1954년)을 받으며 “나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쿠바 입양인이다. 그래서 행복하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의 인생은 극단적이었다. 이혼과 술로 인생을 소비했고 쿠바에서 추방된 후에는 과대망상증과 우울증으로 말년을 보냈다. 결국 두 번의 자살기도 끝에 61세의 나이로 장총을 입에 물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에는 ‘모든 것을 가졌던’ 쿠바로부터의 추방도 상당히 작용했으리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쿠바 곳곳에는 아직도 헤밍웨이의 숨결이 깊이 남아 있다. ‘헤밍웨이 루트’는 그의 문학을 깊이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노인과 바다>를 다시 한 번 꺼내 읽고 쿠바를 여행한다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웃집 아저씨’ 헤밍웨이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쿠바의 시간은 헤밍웨이가 추방됐던 시기에 거의 그대로 멈춰 있어 더욱 생생하다.
김보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