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회] 여순사건, 4ㆍ3항쟁 빌미 보안법제정
독재자 이승만 평전/[9장] 폭압체제 이끌면서 민족세력 제거 2012/04/05 10:05 김삼웅이승만은 집권에 성공했으나 앞길은 험난했다.
조각에서 한민당을 배제하면서 양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원내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한민당의 존재는 손을 잡을 수도 배척하기도 어려운 계륵이었다. 조각에서 배제된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일제에 협력해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악질 친일파를 처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해방 뒤 재빨리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리고 이승만 권력 주변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승만이 정통독립운동가인 김구ㆍ김규식 등을 따돌리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도움이 컸지만, 친일세력의 자금지원과 정보제공이 큰 힘이 되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과 집권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은 이들의 금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한에서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전범ㆍ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9월 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이승만은 처음에 반민법 공포를 기피했지만, 이 법을 거부할 경우 다른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9월 22일 법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가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월 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주석 1)
이승만은 처음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해방 뒤 한 때 납작 엎드렸던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품안으로 몰려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친일파들은 이승만을 업었고 이승만은 이들에 업혀 정권을 잡았다.
반민특위가 악질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을 체포하면서 이승만의 노기가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장 신익회와 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반민특위의 권위와 신성한 법률을 무시하는 안하무인격의 처사였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로부터 자기 수족이 된 친일파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석방종용’이 거부당하자 이승만은 이른바 ‘의명친전(依命親傳)’을 통해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 조사하여 선처하라”는 통첩을 정부기관에 내렸다.
이승만은 민족정기나 사회정의보다 자신의 권력유지를 우선시하였다. 긴 세월 미국에 거주하여 친일파들의 반민족 활동에 별다른 적대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48년 8월과 9월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이질적인 두 개의 정권이 거의 동시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체제 정권이 대치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미 군정은 끝났으나 9월 20일 미군은 당분간 남한에서 철수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대소련 봉쇄가 최대의 외교정책인 미국의 최전선인 한국에서 철군할 리 없었다. 더구나 남한의 집권자는 상대하기 버거운 김구나 김규식이 아닌 친미주의자 이승만이었다. 10월 20일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남한 각지에서 유격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면서 무장봉기가 유격전화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주둔 제14연대를 제주도로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지창수ㆍ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 등을 내걸고 출항 직전인 20일 새벽에 봉기했다. 이들은 곧바로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순천까지 진출했으며, 여기에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여수ㆍ순천 일대는 반란군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정부는 10월 22일 여수ㆍ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국군이 진압작전에 나서, 22일에는 순천, 27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탈환했다. 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반란군 일부는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유격대가 되었다.
이승만은 7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 선포로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이 제주도민들을 강폭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그러나 계엄을 선포할 당시에는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 공포되었다. (주석 2)이승만은 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대통령은 국가보위의 의무와 함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승만은 ‘국가보위’의 명분 아래 국민의 생명ㆍ재산의 보호에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경진압’ 등 폭압적인 방법을 명령했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은 이승만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여순사건 - 필자)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 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주석 3)
이승만은 분단정권 수립 등에 반대하며 봉기한 일부 국민을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으로 치부하면서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같은 ‘가혹한 방법’은 12년 집권기간 내내 변하지 않았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지침’은 4ㆍ3사건으로 산중에 피신 중인 제주도민들에 대한 폭압적인 살상의 지침이 되고, 이미 체포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형과 고문의 준거가 되었다. 또 대통령의 지시는 즉각 군부대와 검찰, 경찰 계통을 통해 시달되고 시행되었다.
국회의 반민특위 활동과 여수ㆍ순천사건 그리고 제주 4ㆍ3항쟁 등은 이승만 정권의 폭압통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부는 1948년 11월 20일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국가보안법을 서둘러 제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악명 높았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국가보안법은 정부전복을 목적으로 결사, 단체를 조직한 자는 3년 이상 무기징역 또는 금고형, 이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가진 사항을 선전하는 경우에도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제정과정에 국회에서 노일환 의원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애국지사가 이 법망에 걸리니 불순도배의 손에 쓰러지는 앞날을 역력히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 우려하고, 찬성하는 의원들도 “농사를 지을 때 피를 뽑다 보면 나락까지 다칠 수 있다”며 운영 과정에서 애국지사들까지 다칠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국가보안법은 비판세력과 언론탄압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다고 반대 의견이 개진되었으나 제주 4ㆍ3항쟁과 여순사건 등 시국상황에서 졸속으로 제정되었다. 이렇게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승만은 물론 역대 독재자들에 의해 반대ㆍ비판세력을 때려잡는 일에 더 많이 악용되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 제정을 극력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이 법안을 반대했던 소장파의원 13명이 6개월 뒤 이 법에 의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 법을 만들어 놓고 1949년 한 해 동안 이 법으로 잡아가둔 사람이 무려 11만 8,621명이었다.
그리하여 일제가 전국에 지어놓은 수많은 감옥이 해방 이후 다시 차고 넘쳤다. 국가보안법 하나만으로 1년에 1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잡아들이니, 전국의 주요 형무소는 죄다 차고 넘칠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지만, 웬만한 감옥에는 모두 정원의 2배 이상이 수용돼 있었고 수감자의 80% 이상이 좌익사범이었다. 절도ㆍ강도ㆍ사기ㆍ폭력ㆍ상해ㆍ강간ㆍ살인ㆍ방화 등 인간 세상 온갖 범죄행위의 4배가 넘는 인원을 국가보안법 관련으로 잡아들였다는 이야기다. (주석 4)
주석
1> <현대일보>, 1948년 9월 4일.
2> <관보(官報)>호외, 1949년 11월 24일.
3> <국무회의록>, 1949년 1월 21일.
4> 한홍구, <대한민국사(史) 4>, 67쪽, 한겨레출판, 2006.
조각에서 한민당을 배제하면서 양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원내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한민당의 존재는 손을 잡을 수도 배척하기도 어려운 계륵이었다. 조각에서 배제된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일제에 협력해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악질 친일파를 처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해방 뒤 재빨리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리고 이승만 권력 주변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승만이 정통독립운동가인 김구ㆍ김규식 등을 따돌리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도움이 컸지만, 친일세력의 자금지원과 정보제공이 큰 힘이 되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과 집권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은 이들의 금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한에서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전범ㆍ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9월 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가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월 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주석 1)
이승만은 처음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해방 뒤 한 때 납작 엎드렸던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품안으로 몰려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친일파들은 이승만을 업었고 이승만은 이들에 업혀 정권을 잡았다.
반민특위가 악질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을 체포하면서 이승만의 노기가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장 신익회와 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반민특위의 권위와 신성한 법률을 무시하는 안하무인격의 처사였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로부터 자기 수족이 된 친일파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석방종용’이 거부당하자 이승만은 이른바 ‘의명친전(依命親傳)’을 통해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 조사하여 선처하라”는 통첩을 정부기관에 내렸다.
이승만은 민족정기나 사회정의보다 자신의 권력유지를 우선시하였다. 긴 세월 미국에 거주하여 친일파들의 반민족 활동에 별다른 적대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48년 8월과 9월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이질적인 두 개의 정권이 거의 동시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체제 정권이 대치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미 군정은 끝났으나 9월 20일 미군은 당분간 남한에서 철수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대소련 봉쇄가 최대의 외교정책인 미국의 최전선인 한국에서 철군할 리 없었다. 더구나 남한의 집권자는 상대하기 버거운 김구나 김규식이 아닌 친미주의자 이승만이었다. 10월 20일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남한 각지에서 유격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면서 무장봉기가 유격전화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주둔 제14연대를 제주도로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지창수ㆍ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 등을 내걸고 출항 직전인 20일 새벽에 봉기했다. 이들은 곧바로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순천까지 진출했으며, 여기에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여수ㆍ순천 일대는 반란군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정부는 10월 22일 여수ㆍ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국군이 진압작전에 나서, 22일에는 순천, 27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탈환했다. 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반란군 일부는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유격대가 되었다.
이승만은 7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 선포로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이 제주도민들을 강폭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그러나 계엄을 선포할 당시에는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 공포되었다. (주석 2)이승만은 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대통령은 국가보위의 의무와 함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승만은 ‘국가보위’의 명분 아래 국민의 생명ㆍ재산의 보호에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경진압’ 등 폭압적인 방법을 명령했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은 이승만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여순사건 - 필자)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 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주석 3)
이승만은 분단정권 수립 등에 반대하며 봉기한 일부 국민을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으로 치부하면서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같은 ‘가혹한 방법’은 12년 집권기간 내내 변하지 않았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지침’은 4ㆍ3사건으로 산중에 피신 중인 제주도민들에 대한 폭압적인 살상의 지침이 되고, 이미 체포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형과 고문의 준거가 되었다. 또 대통령의 지시는 즉각 군부대와 검찰, 경찰 계통을 통해 시달되고 시행되었다.
국회의 반민특위 활동과 여수ㆍ순천사건 그리고 제주 4ㆍ3항쟁 등은 이승만 정권의 폭압통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부는 1948년 11월 20일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국가보안법을 서둘러 제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악명 높았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국가보안법은 정부전복을 목적으로 결사, 단체를 조직한 자는 3년 이상 무기징역 또는 금고형, 이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가진 사항을 선전하는 경우에도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제정과정에 국회에서 노일환 의원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애국지사가 이 법망에 걸리니 불순도배의 손에 쓰러지는 앞날을 역력히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 우려하고, 찬성하는 의원들도 “농사를 지을 때 피를 뽑다 보면 나락까지 다칠 수 있다”며 운영 과정에서 애국지사들까지 다칠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국가보안법은 비판세력과 언론탄압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다고 반대 의견이 개진되었으나 제주 4ㆍ3항쟁과 여순사건 등 시국상황에서 졸속으로 제정되었다. 이렇게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승만은 물론 역대 독재자들에 의해 반대ㆍ비판세력을 때려잡는 일에 더 많이 악용되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 제정을 극력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이 법안을 반대했던 소장파의원 13명이 6개월 뒤 이 법에 의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 법을 만들어 놓고 1949년 한 해 동안 이 법으로 잡아가둔 사람이 무려 11만 8,621명이었다.
그리하여 일제가 전국에 지어놓은 수많은 감옥이 해방 이후 다시 차고 넘쳤다. 국가보안법 하나만으로 1년에 1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잡아들이니, 전국의 주요 형무소는 죄다 차고 넘칠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지만, 웬만한 감옥에는 모두 정원의 2배 이상이 수용돼 있었고 수감자의 80% 이상이 좌익사범이었다. 절도ㆍ강도ㆍ사기ㆍ폭력ㆍ상해ㆍ강간ㆍ살인ㆍ방화 등 인간 세상 온갖 범죄행위의 4배가 넘는 인원을 국가보안법 관련으로 잡아들였다는 이야기다. (주석 4)
주석
1> <현대일보>, 1948년 9월 4일.
2> <관보(官報)>호외, 1949년 11월 24일.
3> <국무회의록>, 1949년 1월 21일.
4> 한홍구, <대한민국사(史) 4>, 67쪽, 한겨레출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