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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헌 전순(全順)公 묘갈명 (星山伯 睡軒 全公 墓碣銘)
고령읍(高靈邑) 북쪽 오리(五里)쯤의 관동(館洞) 강곡(講谷) 산소(山所)는 우리 성산 전씨(星山 全氏)의 수관조(首貫祖)인 수헌공(睡軒)의 묘소(墓所)이다. 지난해 신유(辛酉) 10월 묘사(墓祀) 때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수백 족인(族人)이 모여 석물 건립(石物 建立)과 역내 정화사업(域內 淨化事業)을 논의(論議)하였습니다.
중윤(仲潤) 현족(賢族)의 지극한 숭조정신(崇祖精神)과 거액성금(巨額誠金)에 수만 자손(數萬 子孫)들이 감복(感服)되어 기꺼이 힘을 모으기로 결의(決議)하여 과거 600년 동안 못했던 사업(事業)을 이루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격(感激)스러운 일입니다.
유사(有司) 용한(鏞漢) 병국(炳國) 병우(炳祐) 용채(龍采) 등이 공역(工役)을 담당하고 비문(碑文)을 불초(不肖) 나에게 지으라고 청함에 따라 천학비재(淺學菲才)한 내가 감(敢)히 이 선조(先祖)의 성덕(聖德)을 만(萬)의 일인들 천양(闡揚)하겠는가마는 끝내 사양(辭讓)만 할 수 없어 이에 옛 문헌(文獻)을 상고(詳考)하였습니다.
공(公)의 휘(諱)는 순(順)이요 자는 사공(士恭)이며 호는 수헌(睡軒)이다.
우리 전씨(全氏) 시조의 휘(諱)는 섭(聶)이니 백제 온조왕의 십제공신(十濟功臣)중 한 분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封)해졌으며 8세의 휘(諱)는 선(愃)이요 신라 때 정선군(旌善君)에 봉(封)해졌으며 16세의 휘(諱) 이갑(以甲)은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사(太師)이고 시호(諡號)가 충렬(忠烈)이며 또 정선군(旌善君)에 봉(封)해졌다.
그 이후 대대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나와 봉군(封君) 분관(分貫)한 분이 많았는데 우리 성산(星山) 분관(分貫)은 공(公)이 이곳에 봉(封)해졌기 때문이다.
공(公)의 고(考) 휘(諱) 우화(遇和)는 공민왕조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이고 비(妣) 정부인은 옥천황씨(沃川黃氏) 덕보(德甫)의 여(女)로 휘(諱) 분(賁) 휘(諱) 순(順) 휘(諱) 승(雨+承) 3남을 두셨다.
첫째 분(賁)의 자(子) 오륜(五倫)의 호(號)는 채미헌(採薇軒)이며 셋째 승(雨+承)의 자(子) 빈(賓)은 평강백(平康伯)이고
공(公)은 둘째로 생(生)하시니 자품(資品)이 뛰어나고 도량(度量)이 굉심(宏深)하여 군국(君國)을 광구(匡救)할 경륜(經綸)을 품고 천인성명(天人性命)의 학문(學問)을 연구하여 목은(牧隱) 포은(圃隱) 야은(冶隱) 유항(柳巷) 등 제현(諸賢)과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우왕 2년에 등제(登第)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고 성산백(星山伯)에 봉(封)해졌다.
려조(麗朝)가 망(亡)하자 공(公)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절(臣節)을 지켜 성산 교후동(校後洞)으로 은퇴(隱退)하여 동명(洞名)을 사와동(謝臥洞)이라 하였는데 “사세은와(辭世隱臥)”의 뜻에서 연유됐다.
아! 공(公)의 충의(忠義)는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지만 년대(年代)가 오래 되어 문헌(文獻)이 없기 때문에 생졸년월(生卒年月)과 쌍봉(雙封)인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마저 알 수 없으니 통탄스럽다.
공(公)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長男) 천노(天老)는 무후(無後)이고 차남 현노(玄老)는 태종조에 감찰(監察)로 소배(召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감찰(監察)이 1남 전중(殿中)을 두었는데 형조참의(刑曹參議)이다.
참의參議)가 3남을 두었는데 장남(長男) 환(煥)은 호(號)가 근제(謹齋)로 세조조에 동래부사(東萊府使)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고 증직(贈職)으로 참찬(參贊)이었다.
차남(次男) 형(炯)은 강진현감(康津縣監)이고 3남 찬(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였다.
환(煥)이 2남을 두었는데 장남(長男) 억령(億齡)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이며 차남(次男) 만령(萬齡)은 호(號)가 나옹(懶翁)으로 성종조 지평(持平)에 소배(召拜)되었다.
형(炯)이 1남 효령(孝齡)을 두었으며 찬(燦)이 1남 보령(寶齡)을 두었는데 경주부윤(慶州府尹)이었다.
억령(億齡)이 4남을 두었는데 장남(長男) 영기(永期)의 호(號)는 죽헌(竹軒)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다.
차남(次男) 영세(永世)의 호(號)는 성재(惺齋)로 첨지중추(僉知中樞)이고 임란 때 백형(伯兄)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며 정란(靖亂) 후에 고령 향교(高靈鄕校)를 중건(重建)하여 윤강(倫綱)을 바로 잡았다.
3남 영성(永成)은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했으며 4남은 영창(永昌)이다.
영기(永期)가 1남 종립(宗立)을 두었는데 호(號)가 추모(追慕)이다.
영세(永世)가 5남을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사립(士立)이며 차남(次男) 문립(文立)은 봉정판사(奉政判事)이고 3남 무립(武立)은 무후(無後)이며 4남 홍립(弘立)은 호(號)가 용암(龍巖)이고 5남은 흥립(興立)이다.
영성(永成)이 1남 응환(應環)을 두었으며 영창(永昌)이 1남 예립(禮立)을 두었다.
만령(萬齡)이 1남 영빙(永聘)을 두었는데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이며 별제가 1남 세업(世業)을 두었다.
효령(孝齡)이 1남 봉석(鳳碩)을 두었으며 봉석(鳳碩)이 1남 숙강(淑康)을 두었다.
보령(寶齡)이 1남 탁(倬)을 두었는데 진사(進士)이며 진사(進士)가 3남을 두셨는데 장남 사홍(士弘)은 호군(護軍)이며 차남 사헌(士憲)은 부호군(副護軍)이며 3남 사업(士業)의 호는 낙와(樂窩)이다. 이 밖의 내외손(內外孫)은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와재(謝臥齋) 높은 곳에 공(公)의 충의(忠義)가 서려있고
강곡사(講谷祠) 옛 터에는 후손(後孫) 전적(傳跡) 희미하다.
금산야월(錦山夜月)은 고절(高節)을 못 잊어서 천고(千古)에 비춰주고
가천유수(伽川流水)는 충혼(忠魂)을 위로(慰勞)하고 지금도 오열하네!
원컨대 우리 후손(後孫)들은 이 영역(靈域)을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보존(保存)하면서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고 후손들의 화목(和睦)은 더욱 더 돈독(敦篤)케 하리라.
임술(壬戌) 3월 (서기 1982년)
16세손 해기(海畿) 근식(謹識)
◎ 전순[全順]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사공(士恭), 호는 수헌(睡軒). 아들로 세종 대 등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낸 전천노(全天老)가 있다.
활동사항
전순(全順)은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에서 태어났다. 1376년(우왕 2) 생원에 등제하였으며, 1392년(공양왕 4) 우헌납(右獻納)을 제수 받았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전순에게 바친 시에 의하면 고려 왕조가 망한 후 절의를 지켜 고향인 고령군 성산면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1400년(정종 2) 사헌중승(司憲中丞), 1401년(태종 1)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를 역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순 [全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려사 기록[전순(全順)]
공양왕 4년(1392) 임신년
• 여름 4월
○ 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래(李來)·이감(李敢)·권홍(權弘)·정희(鄭熙)·김무(金畝)·서견(徐甄)·이작(李作)·이신(李申) 및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 등을 유배 보냈다.
병진일. 조준(趙浚) 등을 소환했다.
정사일. 배극렴(裴克廉)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조준(趙浚)과 유만수(柳曼殊)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설장수(偰長壽)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이원굉(李元紘)과 김사형(金士衡)을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로, 이두란(李豆蘭)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우리 공정왕(恭靖王 : 이방과)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윤사덕(尹師德)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임명하고, 민개(閔開)를 대사헌(大司憲)에 겸직시켰으며, 이정견(李廷堅)과 김자수(金子粹)를 좌·우상시(左右常侍)로, 최운사(崔云嗣)와 이문화(李文和)를 좌·우사의(左右司議)로, 권총(權總)을 사헌집의(司憲執義)로, 박관(朴貫)과 유향(柳珦)을 장령(掌令)으로, 송인(宋因)과 전순(全順)을 좌·우헌납(左右獻納)으로, 정탁(鄭擢)과 김승(金陞)을 지평(持平)으로, 최굉(崔宏)을 우정언(右正言)으로 각각 임명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양왕 4년(1392) 임신년 (국역 고려사, 2008.8.30., 경인문화사)
◎ 전오륜 [全五倫]
요약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공양왕 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이색·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정선의 서운산으로 옮겼으며, 훗날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全五倫] (두산백과)
◎ 전형(全炯)
[무과]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16/28)
[인물요약]
자 요경(耀卿)
본관 성주(星州)
거주지 고령(高靈)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28명
전력 전하동현감(前河東縣監)
부모구존 구경하(俱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전중(全殿中)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관직 : 행충무위사직(行忠武衛司直)
[안항:형제]
성명 : 전환(全煥)
[출전]
『정덕8년계유9월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 전만령[全萬齡]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인이자 학자이며, 많은 시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세상만사는 삼척 가얏고에 부치고/
생애는 한 잔 술에 맡겼네/
서쪽 정자는 강상의 달 아래요/
동쪽 누각은 눈 속에 매화 핀 곳일세
世事琴三尺
生涯酒一杯
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
라는 시는 인구에 회자되어 중종이 이 시를 전해 듣고 ‘문장’이라 찬탄하였다.
◎ 전영기[全永期]
전영기(全永期)[1536~1618]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환으로 위중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먹여 반나절을 더 살게 하였다.
시묘가 끝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庵) 김면(金沔), 모계(茅溪) 문위(文緯),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경학을 강구하고 후학을 지도하여 향리의 사우(士友)들이 추중하여 읍지의 인물 편에 기재되었다.
◎ 전영세[全永世]
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의병.
◎ 全仲潤(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
‘근면절약’ 라면으로 食足平天 헌신일생'정직과 신용' 일편단심
국민영양식으로 사랑받는 라면의 원조(元祖)라 불린 삼양(三養)식품 창업주 전중윤(全仲潤) 명예회장이 아흔다섯 천수를 다하고 지난 10일 별세했다. 고 이건(以建) 전중윤 명예회장은 ‘정직과 신용’의 일편단심으로 “온 국민이 배불리 먹으면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식족평천’(食足平天)의 대의를 실천한 후 대관령의 삼양목장 내에 준비된 영원한 유택으로 돌아갔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경제풍월 기자 teuss@economytalk.kr
◎ 이색[李穡]
정의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몽주[鄭夢周]
정의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길재[吉再]
정의
1353년(공민왕 2)∼1419년(세종 1).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학자.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길원진(吉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재 [吉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수[韓脩]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중찬(中贊) 한악(韓渥)의 손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1347년(충목왕 3)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政房)의 필도치(必闍赤: 서기 일을 맡은 관원)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해 따라갔다. 1353년(공민왕 2) 전의주부(典儀注簿)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치가 되었고 이어 전리좌랑·성균사예·비서소감·병부시랑·국자감좨주 등을 역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를 거쳐 좌대언(左代言)으로 승진하였다. 1365년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왕에게 신돈이 바른 사람이 아니라며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밀려난 다음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신돈이 주살되자 왕이 다시 불러 이부상서·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발탁했으며, 곧 승선(承宣)에 임명됨으로써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우왕대에 밀직제학·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고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한수의 필적이다.
이색(李穡)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고, 또한 『유항집(柳巷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동문선』에「영모정행(永慕亭行)」등 시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책에서도 한수의 시문이 산견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수 [韓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문과급제자
01 | 철종12년 식년시 | 丙科 24위 | 전재봉(全在鳳) | 1861 신유 | 사헌부 지평 (司憲府 持平) 정5품 | 성주(星州)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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