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의정서와 이지용 > ㅡ 1904년 2월 23일 1910년의 일제 강점에 이르기까지는 숱한 징검다리들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1905)이 특히 유명하지만 그 조약은 ‘제 2차 한일협약’일 뿐이었다 그 뒤에 정미7조약이라 일컬어지는 3차한일협약(1907)이 있고 그 앞에는 우리에게 유명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등을 고문으로 등용하는 ‘고문정치’를 실시한다는 제1차 한일협약 (1904.8)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6개월 전, 매우 불평등한 조약 하나가 체결됐다. ‘한일의정서’라고 불리는 조약이다. 2월 초 일본은 러시아의 뤼순 요새를 공격하고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바략과 카레스키 등 러시아 군함을 강습하면서 선전포고 없는 러일 전쟁의 막을 올렸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원래 힘 없는 중립이란 밥상에 올라온 반찬일 뿐이다. 즉 거들떠보지 않거나 먹어 치우거나. 대한제국은 “우리는 중립임”을 유럽 각국에 호소하고 선언도 몇 차에 걸쳐 했지만 그 누구도 그걸 진지하게 듣는 나라는 없었다. 전쟁이 나자마자 일본은 ‘중립국’ 대한제국에 상륙했고 서울을 점령한 뒤 ‘한일의정서’를 들이민다. 이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의 ‘중립’의 지읒자부터 무시하고 있었다. 조항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나올 지경.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을 확신하고 시정의 개선에 대한 충고를 들을 것”(1조)를 보면 “오빠 믿지?”가 떠오르고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3조) 하는 조항을 보면 “ 누군가의 ‘정의사회’나 ‘준법사회’ 약속과 비슷하게 들린다. 핵심은 4조였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은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 즉 네 땅과 네 자원과 네 백성을 다음대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配備)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한다”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이 조약 하나로 대한제국의 중립은 흘러간 뱃노래가 돼 버렸다. 서울 일원에 5만 명의 일본군 부대가 늘어지게 진을 쳤고 이들이 점거한 용산 일대는 그 이후 100여년간 외국 군대의 터전이 된다. 이 치욕스런 조약의 당사자는 외부 대신 이지용이었다. 그의 인생을 잠깐 들여다보자. 그 할아버지는 이최응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으로서 권세를 누렸지만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졌던 이로서 동생과는 비교가 안되게 무능하면서 욕심은 그 이상인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도무지 생각이 없어 ‘유유정승’, 알기 쉽게 요즘 말로 푼다면 ‘예스정승’이라 불리우지만 벼슬 팔아먹는 능력은 당할 사람이 없었다. 임오군란 때 봉기한 구식 군대가 궁궐에 뛰어들기 전에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참혹하게 때려 죽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지용은 그 손자였다. 조부를 닮았는지 그 역시 벼슬을 파는 재주가 비상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할아버지에 한술 더 떠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가담하고 말았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려는 일본군에게 걸림돌이었던 사람이 있었다. 군부대신 이용익. 서울 충주를 마라톤 세계 기록의 속도로 오가며 민비의 소식을 서울에 전했던 주력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보부상 출신의 함경도 사나이. 점증하는 일본에 대항하려 했음인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차리기 위해서인지 모르나 그는 강경 친러파였고 일본은 그를 납치하는 초강수를 둔다. 그리고 외부대신 이지용에게는 1만엔의 돈을 건넨다. 당근과 채찍의 알맞은 활용. 이지용은 한일의정서 뿐 아니라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에서도 그 이름을 올린다. 을사오적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인간 엉뚱하게도 자신을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에 비했다고 한다. “ "나는 오늘 병자호란시의 지천(遲川) 최명길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기염을 토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최명길이 발휘했던 용기와 현실 판단이 전혀 부재했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생에게 “내가 기생이지만 엄연히 사람인데 어떻게 역적의 첩이 되란 말인가” 하는 딱지를 맞았을까. 아들은 유학생 사이에서 왕따가 됐고 그 부인은 일본 남자들에게 꼬리를 치고 다녔으니 가정적으로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최후의 양심 한 조각은 있었던 것 같다.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고 일본이 그 금지를 압박하자 “내가 오적 욕을 들어먹고 있는데 차마 이것까지 어떻게 막느냐.”고 거절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정미칠조약, 즉 제2차한일협약에서도 자청해서 빠진다. 물론 그게 양심이었는지 집에 폭탄을 던지는 민중들의 표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였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겠지만. 나라가 망한 뒤 그는 조선 귀족 가운데 1급의 부호였다. 그는 그 막대한 재산을 도박판에 쓸어넣었다. 이완용도 화투를 치다가 어깨 통증에 시달려다지만 이지용은 그에 비할 바 없는 도박판의 큰손이었다. 일본군 헌병조차 그의 도박판에 경계의 눈길을 던졌고 이지용은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가 얼굴이 찢기기도 했다고 한다. 경술국치가 있던 해에 그는 이미 대단한 도박중독자였다. 심지어 짓고땡을 치다가 (지여땅이라는 화투라는데 짓고땡 아닐까) 귀족 대우가 중단되는 망신까지 당했지만 도박을 끊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주일공사를 지낸 일본통으로서 아내도 영어와 일본어를 할 만큼의 ‘스펙’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 할아버지 이최응처럼 무능하면서 욕심 많은 것도 죄지만 유능하면서 유약하기만 한 것도 만만치 않은 죄다. 외부대신으로서 또 그 이후 관료로서 그는 단 한 번도 그의 지식과 경험을 최명길처럼 활용하지도 못했고 그럴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생기긴 참으로 멀쩡하게 생겼다. 자고로 우리나라 외교부에는 이런 사람들이 참 많다. 최명길을 닮고 싶어하지만 저승에 가면 최명길에게 늘어지게 맞아야 할 사람들. 그런 자 중의 하나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그 이름 석 자를 디민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