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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우리는 얼룩☆]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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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룩]
장요원 시집 / 시작시인선 193 / 주) 천년의시작(2015.11.03)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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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룩
장요원
창으로 들어온 순한 햇빛이 꽃무늬 벽을 타고
나비의 자세로
어룽거린다
유리는 투명하고 객관적이지
투명한 바탕 위에 날개의 감정이 헛딛는 것처럼
약속이 비켜나간 손가락들 틈에서
얼룩이 자란다
온통 얼룩을 기워 입고 사는 말을 본 적이 있니?
얼룩말의 눈빛을 기억하니?
얼룩과 얼룩 사이에는
경계가 살지
두려움은 얼룩 속에 숨어서 자라나고 두려움을 먹고 얼룩은 화려해져서 얼룩을 입은 사람들로 세계는 번져가네
TV 화면에는
모자를 쓴 여인이 모자이크를 들쎡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울먹인다
축축한 물질들은 쉽게 어두워져
안으로 스미는 습성이 있지
울음의 속을 뒤집어 보면
끝물 같은 흐느낌이 묻어나올 것 같아
오늘의 날씨는 구김이 많고 신축적인 페이즐리 패턴이라고 했니?
날씨에 상관없이 우리는
약간의 울음과 무늬가 필요해
사람들의 손에는 매일 매일 클렌징크림이 들려 있지
브로콜리 주관적인 브로콜리
장요원
감각이 뭉툭해
혓바늘이 돋았어요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던 치통이 마취주사 한 방에
무능해졌어요
가끔 혓바늘이 푸르게 부풀죠
그린이에요
그린에는 홉컵이 없고
감은 눈을 빠져나온 눈알이 공처럼 굴러 다녀요
어둠은 울창하고
오돌오돌
소름이 돋아요
주먹을 꽉 쥐고 잠이 든 날에는 자꾸만
벙커에 빠져요
모래알 같은 생각들이
흘러내려요
울음이 닳아버린 암고양이의
발은 어디로 갔나
마이크처럼 나무를 움켜쥐던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갔나
꾸욱,
다문 입이 다발로 수북해요
무반주첼로 소나타
장요원
현들이 공중에 매여 있다
빼곡이,
수직의 자세로 허공의 천장과 바닥을 잇고 있다
그 탄력을 터뜨리는 지상의 수많은 손가락들
빗방울의 형식으로 음표들이 터진다
비의 음계는 동물성일까요
우우 우짖는 소리
맹렬하게 열어젖히는 성대들
단풍나무의 무수한 손끝에서 울음이 흘러나오고 담장 밑에서 고양이의 신음이 끊어졌다가 이어진다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담쟁이넝쿨의 왼손과 오른손들,
지붕들은 범람하기 위해 솟고 있는 걸까요
팽팽하던 공중이 느슨해지자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폐활량을 늘리기 시작한다
소리의 계단 뒤에는 내밀한 골목 하나 들어 있지
지루한 골목은
낡은 연인들이 헤어지기 쉬운 배경
길게 내린 그녀의 속눈썹도 슬픔에 매여 있었지
저녁이 낮은음자리로 몸을 낮추는 시간,
호흡이 느려진 후렴이
긴 목울대를 향해 강 쪽으로 흘러간다
드라이플라워
장요원
해를 보면 자꾸만 어지러워
거꾸로 매달렸다
꽃대가 밀어올린 향이 오르던 그 보폭으로 흘러내렸다
향기의 내용이 다 비워지기까지
붉어진 시간만큼 외로웠다
문득,
유리병 속을 뛰어내리는 코르크마개의 자세가 궁금했다
핑킹가위 같은 비문들이 잘려 나갔다
창백해졌다
소소한 바람에도 현기증이 난다
무릎이 잘린 낯선 걸음들이 유리문을 지나갔다
유리에 서성이던 웃음들이 싹둑 잘렸다
통점은 훼손된 부위가 아니라 향기의 왼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붕대처럼, 향기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나팔꽃을 본 적이 있지 그들의 심장이 왼쪽에 있을 거라는 편견도
흘러 내렸다
내력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도 쉬이 얼룩이 번진다
허공이 우산처럼 접히고 있다
홀쭉해졌다
장미의 유전자를 가진 나는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고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할퀴었다
가시와 향기는 다른 구조를 가진 같은 슬픔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몸속에서 너라는 물질이 다 휘발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로 설 수 있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벽에 걸린 캔들 홀더 속
검은 심지가
잊어버린 어제를 켜고 있다
물집들
장요원
바람이 수평선을 물고 해안선으로 왔다가
포말들을 몰아서 되돌아가요
바다가 기르는 건 바람인 줄 알았는데 물거품일까요
송글송글 맺혀 있는 아침 토마토는
지난 밤 몇 시의 달과 격정적인 인사를 나누었을까요
천 개의 눈을 매달고
등나무가 허공을 비틀며 오릅니다
이제 곧 가을이야,
속으로 말했을 뿐인데
서쪽 하늘은 왜 빨갛게 부어오를까요
물집들이 생겨날까요
근육질의 바람이 몰고 다니는 구름을
핀셋으로 당기면
자꾸만 내 입술이 짓물러요
바람의 내용을 다 비워내도
증발하지 못한 감정들이 욱신거려요
공중은 사무적으로 어두워지고
먼 바다에 맺혀 있는 작은 섬들이
거즈처럼 안개를 떼었다가 붙이는 저녁
결
장요원
사과는 조각을 내어 깎는 게
예의라지만
나는 사과를 둘둘 풀어내는 걸 좋아해
짓무른 부위를 풀어낼 때면
상처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고 있는 것 같아
진물에 찌든 붕대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머그잔 속의 커피를 돌려보렴 물레성형처럼 커피를 돌려보렴
나도 모르게 커피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는 건
어젯밤 우리가
공원 호수를 왼쪽으로 돌았기 때문이야
호수에
내리꽂히는 빗방울들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몸을 점점 커다랗게 풀어가는, 풀다가 사라지는 빗방울들
비 오는 날
호수에는
빗방울의 나이가 겹겹이 자라고 있지
오늘 아침 창밖은
잘 구워진 노을빛
부풀어 오른 구름이 페이스트리처럼 접혀 있네
접혀진 주름과
주름 사이의 바람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한 겹 한 겹 풀어내야지
세상의 무늬들은
주름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자라나지
양배추로 만든 기분
장요원
감기몸살이야
으스스 오한이 들었어
자꾸만 옷을 꺼내
껴입었어
얼굴이 점점 부어올랐거든
가득 차고
텅 빈 얼굴
짧은 손목에서 뽑혀 나온 빠른 손뼉들이
지루한 얼굴을 감춰버렸어
의지와는 무관하게 광대뼈가 쑥쑥 자라나고 있어
압박붕대가 필요해
필사적으로 싸맸어
구불구불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겹겹이 속지에는
발열된 기억들이 소용돌이쳤어
키스처럼 전율처럼
어제 같은 아침은 따분해
신선한 기분을 배달해줄래?
감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몸속의 압력이 결구結球를 압박해
팝콘처럼 튀어오르려고 해
동그란 압력을 공중으로 날려줘
바닥에 떨어뜨리는 건 파울이야
점프 점프
오른손으로 힘껏 패스해줘
운동장
장요원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돌고 있다
걸음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나도록 돌고 있다
남자가 큰 보폭으로 뛰면서 여자를 반복적으로 앞지르고 있다
플라타너스들이 시계의 숫자판처럼
꾹꾹 박혀 있다
추 모양으로 주먹을 꾹 쥔 사람이 지나간다
척추를 바짝 세우고 양팔을 앞뒤로 저으며 지나간다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인 양
다정하게 뒤를 따르고
같은 방향으로
운동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그네를 탄 아이가
운동장을 힘껏 밀었다 당겼다 한다
모래시계 같은 자세로 철봉에 매달린 남자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운동장을 뒤집는다
플라타너스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가
밤을 잘게 썰고 있다
데칼코마니
장요원
모르는 여자와 경비실에서 한바탕했다
멱살이 머리채를 잡고 빨강이 노랑을 잡아채고 손가락과 모가지와 팔다리가 뒤섞여 늘어지고
머리카락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입안에서 소용돌이 쳤지만
소리 밖으로 빠르게 번져나가지 못했다
모르는 여자 얼굴이 아는 얼굴과
자꾸만 겹쳐졌다
서로 당기고 미는 틈으로
자꾸만 아는 얼굴이
그러나 더욱 알 수 없는 얼굴이 나왔다
2인용 레일바이크 타기
장요원
페달을 밟자 선로가 감깁니다
길게 풀어진 강줄기가 팽팽하게 감깁니다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함께 펌프질을 합니다
정오를 지나가는 태양이 쏟아내는
홀씨와 정자들이 무수한 꽃들을 번식시킵니다
멈추면 안 돼
멈추면 안 돼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발음은 왜 동그랗게 말리는 걸까요
한쪽 심장이 덜컹거리자
베낭 속의 김밥이 풀립니다
페달을 더 세게 밟아
꾹꾹 말아야지
등 뒤에서 자꾸만 풀어지는 너를
꾹꾹 말아야지
내리막은 발목을 들어 올려도 발목이 조여 옵니다
나는
제자리를 구르는데
풍경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감깁니다
빠른 풍경들이
롤 블라인드처럼 촘촘하게 풀어집니다
람부탄
장요원
붉은 빛깔은
흰 접시 위에서 약간 젖은 채 발랄하다
처녀에서 나오지 않는 둥근 몸을
부드러운 털이 감싸며
아무렇게나 터져버리지 않으려고 단단하다
쉽게 벗기지 못하여
나이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나는
비윤리적이고
완고한 솔기가 툭, 벌어질 때
동그란 방 하나
당돌하게 빠져 나올 때
싱싱한 어둠은 은밀하게 녹아들지
접시는
침들이 고이는 세계
혓바닥들의 세계
테이블 위의 감정들이
시럽으로 흐르고
나는 생크림으로 만든 케이크가 될래
벗기지 않은 너를
토핑처럼 푹푹 박을래
*말레이지아가 원산지인 열대과일
허공의 사생활
장요원
나무들이 손가락 모양으로 길어지고 간략해졌다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그늘이 벌겋다
공중이 핼쑥해졌다
단단해진 공중을 뜯고 나온 꽃망울을
따라 나온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은
장미의 기분이 아니야
구름을 탕진하는 일은 바람이 관여한다 해도
그것은 허공의 권리,
구름의 성분이란 죽은 새의 울음과 기억이 빠져나간 그을음 그리고 물컹거리는 무릎들
빗방울에서 저녁 냄새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지
어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눈송이들은 하얗게 태어나네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얘지다가
눈과 입술을 두고 사라졌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눈사람 속으로 들어가 부풀었다
장미의 몽우리가 점점 진해지자
어둠이 허공을 닫는다
담장이 그리운 장미가 공중의 허벅지를 끌어당긴다
풀리고 있는 오전
장요원
검은 뭉치가 마당 한쪽에서 풀리고 있다
조용히 접혀 있는 작은 새의 비행 궤적을
개미떼가 풀어내고 있다
오전을 다 왕복해도 사라지지 않는 어둠
새의 몸에서 날갯짓이 길게 풀어진다
오그라든 발에서 실밥이 풀어진다
움켜쥐었던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
몸을 부풀린 바람이 다녀간다
바람의 혀에
팽팽해지는 검은 실뭉치
허공엔 하현달이 날아간다
여전히 파닥거리는 깃털이나 마지막 비틀거림은 지상에서 배운 것
몇 개의 깃털은 아직 바람에 매여 있고
몸은 공기의 관棺에 들어있다
먼저 떨어진 나무 그늘 위로 붉은 이파리 하나가 떨어진다
잎들이 다 날아간 빈 가지 아래
개미 떼가 다 풀어간 실패 같은
뼈들만 얽혀 있다
새의 몸에서 검은 실이 길게 풀려나오고 있다
아니, 오전의 햇볕 한 줄기가
처마 밑 어둠 속으로 오래 감겨 들어간다
풍선들
장요원
빵빵하던 이팝나무들이
끈만 남겨진 채
푹,
꺼져 있다
쭈글쭈글한 바람이 펴지려고 나무의 그늘이 가렵다
온통 코를 땅에 박고 숨을 불어대던 여름
바람이 쑥 쑥 자라나고
부풀던 폐는
여름의 기억으로 꿈틀거린다
가끔, 커다란 허파를 가진 바람이 공중으로 날려 보내려고 안달이 나지만
끝내
주둥이를 놓지 않는다
마주 보고 스틱을 휘휘 저을 때면
카푸치노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지
푹 푹 꺼지지
가을은 어지러움증을 앓고
허공의 손톱은
자꾸만 까칠해지지
어둠이 불어놓은 태양이
빈 끈에 매달려 있는 아침,
주저앉은 둥그런 그늘이 일어서고 있다
말뚝
장요원
초록이 접힌 들판에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느낌표 하나 서 있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제 그림자를 묶어 두고 있다
몸집 큰 바람이 그림자를 넘어뜨릴 때도 있지만
그림자는 한번도 줄을 놓지 않았다
어린 그늘에
스스로 묶였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수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
말뚝은 처음 묶였던 목덜미를 기억한다
가끔 바람을 타고 온 굽소리를 되뇌이며
느릿한 되새김질을 한다
그때마다 머리에선
구부러진 각질 덩어리가 자라곤 한다
아기 덩굴 한 줄기가
더딘 걸음으로 뒤늦게 노을을 감는다
허리 굽은 저녁을 끌고
누군가 말뚝을 쑥 뽑아 풀숲으로 던진다
흩어졌던 풀벌레들이 누운 말뚝 근처로 모여든다
풀숲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
속이 다 타버린 것을 어둠이 뒤꿈치로 비벼 끈다
한 개비의 저녁이 꺼져가는 풀숲,
말뚝이 사라진 들판엔
캄캄한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가지마다 서랍처럼 은밀한 파동이 들어 있다
장요원
가지마다 붙어 있던 소리들을
나선의 밑동으로 밀어 넣고
새들이 푸른 귀를 찾아 날아갔다
펄럭거리던 그늘이 떨어진 소리를 다 싸서 가고
가끔 햇볕의 뼈대만 흔들리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이 머플러처럼 가지를 감고
남아 있는 몇 장의 귀가 따뜻한 소란을 듣고 있다
나무의 소임은 햇볕의 등에
그늘을 붙였다 떼는 일
엽록의 달팽이관에 새들의 졸음을 재워주는 일
가지마다 서랍처럼 은밀한 파동이 들어 있다
햇빛 두어 채 개켜두거나 혹은
새들의 사서함이거나 노숙하는 구름이 묵어 갈 서랍들
따뜻하라고
은색의 머플러가 감겨져 있다
늙은 오동나무는 늙은 바람의 목덜미이다
무거운 귀를 툭툭 흘리고
맨몸으로 서 있는 은밀한 서랍이지만
봄이 오면
푸른 귀들이 빼곡, 차오르겠다
외출을 벗다
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벗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각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정유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저수지
장요원
커다란 눈을 멀리서 들여다본다
고요가 출렁임을 꾹 누르고 있다 가라앉히지도 엎지르지도 못한 마음들이 수피水皮처럼 일어, 고여 있는 듯 같은 자리를 부유한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것은 품는 습성이 있다지
이미 떠나버린 철새들의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지난밤 달이 부려놓은 시름을 토닥거린다
저 온몸은 태胎인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발끝을 세우고 빙글빙글 돌자 어지러운 듯 울컥거린다
꼬리 긴 바람이 마법을 걸어 파동을 일으킨다
수만 번 제 숨을 조였다가 푸는
물의 태동
오랜 시간 자신의 씨앗을 품지 못한 태동은
이 계절을 분만하고 나서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서쪽 하늘에 걸린 생리혈이 눈망울로 번지고 있다
춤
장요원
바람의 손끝에 춤이 묶여 있다
몸을 벗어버리자
바람들이 옷으로 들어온다
옷이 한번도 해보지 못한 동작을 한다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춤을 춘다
바람이 손끝으로 줄을 밀고 당기는 동안
빨래집게가 햇볕을 꽉 물고 있다
날아가지도 못하는 공중에 관절들이 가득 들어 있다
셔츠를 입은 바람이 줄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안간힘을 쓰며 놓지 않는 햇볕의 어금니
미니스커트 속으로 바람이 든다
수백 마장 바람의 층에 동작들이 접혀 있고
한 호흡 한 호흡,
넘어갈 때마다
눅눅한 관절이 경쾌해진다
바닥에 매달린 춤이 다 마를 때까지
오후는 햇볕을 끄지 않았고
공중은 매여 있어
몸을 비워낸 춤들이
반듯하게 개켜지는 저녁
고여 있는 잠
장요원
꽃잎이 딛는 자리마다 꽃의 족적이다
울음에 갇힌 족적들이
가라앉지 못하고 고요 속에 떠 있다
목백일홍의 기침 소리가 고였다 가고
밤새 흔들린 나무들이
뜬 눈으로 졸고
뒤늦게 당도한 밀봉된 울음들이 툭툭 뜯겨진다
검은 리본을 두른 영정에
환한 웃음이 울고 있다
썩지 않으려고 아무리 환하게 웃어도
울음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녀가 고였다 간다
다시 몸속에 통증이 고이지 않도록
꽁꽁
묶여간다
울음은 어둠을 구부리고
상복 입은 열두 살 아이의 울음이
고인 자리를 흔든다
숲
장요원
헐거워진 벽에 매달린 뻐꾸기 둥지에는 알이 없다
울음이 열릴 때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시간들만 튀어나온다
고개를 내밀고 우는 저 환지통
목청이 터질 때마다
늙은 시간들이 사라진다
부화되지 않은 시간을 떠서 세안을 하고 뻐꾸기가 내어놓은 숲길을 걷는다
발자국 뗀 자리마다 소리가 고여 맑아지는 수위水位가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도 꾹, 백화점 바코드에도 꾹,
소리를 다 소비하고 돌아와 다시
충전하는 몸들
울음이 부리를 침대에 묻는 시간,
현관 신발엔 하루치의 울음이 단단히 묶일 것이고
어둠은 캄캄한 잠을 품고 있다
이미 떠나간 시간들, 낯설지 않은 울음의 횟수가 집안을 울린다
시간이 날아다니고
부화되고 있는 숲이 뒤척이고 있다
노병의
장요원
수련의 수많은 잎은 늘 오므리고 있는
단단한 입술,
단추처럼 단정하다
오후 5시에는 꽃뱀이 개구리의 울음을 물고 사라지고
오후 5시의 그림자들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긴 혀를 늘어뜨리고 생각이 골똘하다
누군가 벗어놓은 사라진 신발을 끌고
절벽은 바쁜 걸음으로 오기도 하지
공항으로 가는 구름이 불시착하는 건
개떼들의 공증을 끌어내렸기 때문
햇빛과 빗방울이 동시에 투신한 까닭은
그들 사이에
분홍의 감정이 관여했기 때문
정오의 체위를 모방하는 수초들
그것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
속눈썹처럼 나무들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어지고
눈을 감은 늪
세계의 모든 비밀들이
완강하게 입술을 채우고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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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꽃들이 리본처럼 하공을 묶고 있다.
나는 희거나 검거나 빨갛거나 노랗거나
색색으로 흔들리며
마침내 허공을 묶었다.
빈 주머니가 되어 홀가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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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원 詩集 [※우리는 얼룩※]
[ 해설 ] -
풍경의 현상학
홍용희(문학평론가, 교수)
1.
장요원의 가장 특징적인 창작 방법론은 묘사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을 읽는 것은 정밀한 풍경화를 감상하는 과정이다. 풍경은 시적 대상과 시각 주체와의 미적 거리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이때 미적 거리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가리킨다. 장요원의 시적 묘사에서 심리적 거리는 매우 일관되게 엄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시적 풍경에는 주관적 정감이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시 세계에는 시적 자아의 미적 주관성이나 의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이점은 그의 시세계를 비교적 정서적 울림보다는 가치중립적인 사물성에 가깝게 한다. 또한 이 점은 그의 시 세계에서 시적 대상의 “본색”(「본색」)을 직시하는 풍경의 현상학에 충실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시 세계에서 시적 거리는 어떤 선입관이나 타성화된 사고의 개입을 통어하고 순수의식을 견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순수의식이란 주관과 객관이 최대한 연속성을 이룬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의 시적 묘사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자에 대한 의존이나 ‘무엇인가를 위한 의식’에 편향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시적 묘사는 물자체의 본질과 존재성을 지향한다. 한편, 시인의 풍경의 현상학은 구상화와 추상화를 모두 포괄한다. 그에게 구상과 추상은 서로 다른 둘이 아니다. 구상은 추상의 표정이고 추상은 구상의 또 다른 본색이다. 다만, 시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음 시편은 “운동장”의 밤 풍경에 관한 면밀한 구상화이다.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돌고 있다
걸음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나도록 돌고 있다
남자가 큰 보폭으로 뛰면서 여자를 반복적으로 앞지르고 있다
플라타너스들이 시계의 숫자판처럼
꾹꾹 박혀 있다
추 모양으로 주먹을 꾹 쥔 사람이 지나간다
척추를 바짝 세우고 양팔을 앞뒤로 저으며 지나간다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인 양
다정하게 뒤를 따르고
같은 방향으로
운동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그네를 탄 아이가
운동장을 힘껏 밀었다 당겼다 한다
모래시계 같은 자세로 철봉에 매달린 남자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운동장을 뒤집는다
플라타너스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가
밤을 잘게 썰고 있다
- 「운동장」 전문
운동장의 밤 풍경이 천진스러운 시선으로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여자가” “째깍째깍 소리가 나도록 돌고” 있고 “남자가” “반복적으로 앞지”른다. 운동장이 마치 둥근 시계같다. 여자가 분침이라면 남자는 초침이다. “플라타너스들”은 “시계의 숫자판”이다.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이 모두 “다정하게 뒤를 따”른다. 이러한 분주한 움직임은 “운동장”이 항상 “팽팽하게” “구겨지지 않도록” 끌어당기는 동력이다. “그네를 탄 아이”도 “운동장을 힘껏 밀었다 당겼다”하는 작용을 하고 “철봉에 매달린 남자”도 “흘러내리는 운동장을 뒤집”는 일에 분주하다. 그래서 운동장은 원형 시계의 본모습을 변함없이 지탱할수 있게 된다. 시점의 변화를 통한 묘사와 인식의 재발견이며 전환이다. 운동장은 운동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운동장과의 상호 역학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플라타너스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는 “빛줄기가” “밤을 썰고 있다”. 밤 운동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운동장뿐만이 아니라 “플라타너스와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어둠과 싸우는 “빛줄기”의 고투도 작용해야 한다. 운동장의 밤 풍경이 크레용화처럼 재미있고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한편, 장요원의 이러한 시적 묘사의 섬세함은 다음과 같은 활유적 표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연인”의 등장없이도 “연인”의 상황이 강렬하게 전개된다.
해안선에
튤립
두 송이가
삼각 플라스크에 어슷하게 꽂혀 있다
꽃받침에서 나온 두 손이
목을 휘감고
잎에서 나온 두 팔이
허리를 끌어안고
한 변이 늘어났다가
두 변이 서로 팽팽해졌다가
플라스크 속에
쉴 새 없이
물방울이 돋아난다
- 「연인」 전문
시적 대상이 “연인”이다. “연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람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삼각 플라스크”안에 “튤립/ 두 송이”가 있을 뿐이다. “튤립/ 두 송이”가 어찌해서 “연인”인가? “튤립 두 송이”가 “삼각 플라스크” 안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목을 휘감고”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 이들의 격렬함에 “삼각 플라스크”는 “한 변이 늘어났다가/ 두 변이 서로 팽팽해졌다가”한다. “튤립/ 두 송이”를 둘러싼 세계의 지축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플라스크” 안에 “쉴 새 없이/ 물방울이 돋아”난다. 두 송이 “튤립”의 숨 가쁜 사랑의 열정이 “물방울”을 낳고 있는 것이다. “삼각 플라스크” 안에 피어 있는 “튤립/ 두송이”에서 역동적인 사랑의 절정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다. 장요원의 시선이 닿으면, 이와 같이 친숙하고 평이한 대상까지도 새로운 표정으로 재탄생된다. 그의 이러한 재발견의 시적 묘사는 소리 풍경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다음 시편은 그윽한 “무반주 첼로 소나타”의 소리 풍경이다. 소리도 그의 시선에 이르면 풍경으로 펼쳐진다.
현들이 공중에 매여 있다
빼곡히,
수직의 자세로 허공의 천장과 바닥을 잇고 있다
그 탄력을 터뜨리는 지상의 수많은 손가락들
빗방울의 형식으로 음표들이 터진다
비의 음계는 동물성일까요
우우 우짖는 소리
맹렬하게 열어젖히는 성대들
단풍나무의 무수한 손끝에서 울음이 흘러나오고 담장
밑에서 고양이의 신음이 끊어졌다가 이어진다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담쟁이넝쿨의 왼손과 오른손들,
지붕들은 범람하기 위해 솟고 있는 걸까요
팽팽하던 공중이 느슨해지자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폐활량을 늘리기 시작한다
소리의 계단 뒤에는 내밀한 골목 하나 들어 있지
지루한 골목은
낡은 연인들이 헤어지기 쉬운 배경
길게 내린 그녀의 속눈썹도 슬픔에 매여 있었지
저녁이 낮은음자리로 몸을 낮추는 시간,
호흡이 느려진 후렴이
긴 목울대를 향해 강 쪽으로 흘러간다
- 「무반주 첼로 소나타」 전문
“무반주 첼로 소나타”의 소리 풍경은 어떤 것일까? “허공의 천장과 바닥”으로 이어지는 “탄력”이 터뜨려지면서 “무반주 첼로 소나타”의 운율이 전개된다. 마치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형식”을 닮았다. “비의 음계는 동물성일까”. 그렇다.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우우 우짖는 소리”와 “맹렬하게 열어젖히는 성대들”의 조합으로 개진된다. 동물성의 음계가 “단풍나무의 무수한 손끝”, “담장 밑”의 “고양이”, “담쟁이넝쿨의 왼손과 오른손들”의 음역을 타고 흐르면서 때로는 울음으로 때로는 신음으로 범람하듯 울려 퍼진다. “팽팽하던 공중이” 하염없이 “느슨해지”면 “가로등 불빛이” 다시 현들을 팽팽하게 조인다. “무반주 첼로 소나타”의 소리 풍경, 즉 청각의 시각화가 개진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리의 계단 뒤”의 “내밀한 골목” 풍경까지 드러난다. 그곳은 “낡은 연인들이 헤어지기 쉬운 배경”이다. “무반주 첼로 소나타”의 쓸쓸한 하강의 음색의 시각화이다. 이제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점차 막바지를 향한다. “낮은 음자리로 몸을 낮추는” 풍경이 저녁 시간의 정조를 닮았다. “호흡이 느려진 후렴”이 흐른다. 마치, “긴 목울대를 향해 강 쪽으로 흘러”가는 형상이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변주되는 “무반주 첼로 소나타”의 소리 풍경이다. 이와 같이 소리도 풍경으로 그려지는 장요원의 시 세계에서 묘사의 대상은 드러난 구체적인 실체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그는 새의 “몸”을 묘사하는 자리에서 그 “몸”의 탄생과 비상의 근원을 이루는 “허공”에 주목하기도 한다.
새의 몸에서 날갯짓이 길게 풀어진다
오그라든 발에서 실밥이 풀어진다
움켜쥐었던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
(중략)
여전히 파닥거리는 깃털이나 마지막 비틀거림은 지상에
서 배운 것
몇 개의 깃털은 아직 바람에 매여 있고
몸은 공기의 관棺에 들어 있다
- 「풀리고 있는 오전」 일부
시적 묘사의 대상이 “새의” “날갯짓”만이 아니라 그 “날갯짓” 으로 인한 허공의 떨림까지 포괄하고 있다. 1연 1행의 “새의 몸에서 날갯짓이 길게 풀어진다”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새의 “날갯짓”은 허공에 의지하여 허공의 힘들을 헤치고 나갈 때 가능하다. 허공이 없다면 새의 “날갯짓”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새의 날갯짓”은 새의 날개와 허공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이점은 또한 “허공”에 시점의 중심을 두고 “새의 날갯짓”을 묘사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오그라든 발에서 실밥이 풀어”지면서 “움켜쥐었던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 새의 비상은 “오그라든 발”에 “허공”을 움켜쥐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는 것이 새의 낙하에 대한 묘사이다. “여전히 파닥거리는 깃털”이란 낮고 미약한 날갯짓을 가리킨다. 이것을 허공의 시점에서 묘사하면 “몇 개의 깃털은 아직 바람에 매여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공기의 관棺”에 몸이 들어 있다는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다. 허공은 “공기의 관”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시 새의 비상이 시작되는 것은 “잃어버린 날갯짓을 되찾으려는 듯/ 바람이 부력을 모”(「깃털」)으는 행위로 묘사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장요원의 시적 묘사는 구체와 추상이 서로 다르지 않다. 다만 시점의 차이와 변주가 있을 따름이다.
속도가 빠져버린 바퀴가 허공을 굴리고
- 「금요일」
걸음 안에는 허공이 들어 있다
- 「허공 한 켤레」
소리가 난다는 것은 허공이 깨진다는 것이지
- 「허공에는 각이 있다」
우리는 모두 “허공 안에 들어 있”(「프러포즈」)다. 모든 있음은 없음의 허공 안에 존재하는 허공의 식구들이다. 그래서 “바퀴”는 “허공을 굴리”는 것이고 “걸음 안에”도 “허공”이 내재하며 “소리가 난다는 것은 허공이 깨진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허공과 연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옥상 위 환풍기 축이 겨울의 근육을 풀어가”는 것을 “허공의 감정을 순환시”(「금요일」)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장요원의 풍경의 현상학이 모든 사물의 존재론적 근원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제 “허공의 사생활”을 노래하기에 이른다.
단단해진 공중을 뜯고 나온 꽃망울을
따라 나온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은
장미의 기분이 아니야
구름을 탕진하는 일은 바람이 관여한다 해도
그것은 허공의 권리,
구름의 성분이란 죽은 새의 울음과 기억이 빠져나간 그
을음 그리고 물컹거리는 무릎들
빗방울에서 저녁 냄새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지
어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눈송이들은 하얗게 태어나네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얘지다가
눈과 입술을 두고 사라졌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눈사람 속으로 들어가 부풀었다
장미의 몽우리가 점점 진해지자
어둠이 허공을 닫는다
담장이 그리운 장미가 공중의 허벅지를 끌어당긴다
- 「허공의 사생활」 부분
“구름”은 “허공”이 관장한다. “구름”의 형성과 운행의 여로는 “허공의 권리”이다. “허공”이 만든 “구름의” 구성 “성분”은 “죽은 새의 울음과 기억이 빠져나간 그을음 그리고 물컹거리는 무릎들” 등이다. “허공”이 일상 속의 여러 가지 재료들을 모아 부지런히 “구름”을 만들어 하늘 위에 띄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구름에서 내리는 백지처럼 하얀 “눈송이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눈사람” 역시 “허공”의 생성물이다. “눈사람”은 허공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온 사람들이 두고 간 “눈과 입술”,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을 버무려 만든 것이다. “눈사람” 역시 지상의 삶과 추억을 질료로 한 결정체이다. 날은 어두워져 “장미의 몽우리가” 진해지면서 “허공”은 “어둠”으로 덮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허공”은 분주하다. “장미가 공중의 허벅지를 끌어 당”기고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허공이 장미 가지를 담장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잠시도 하지 않음이 없는 내밀한 “허공의 사생활”이다. 세상의 모든 물상이 “허공”속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장요원의 시적 묘사가 어느새 대상은 물론 그 우주적 존재 원리를 조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거리를 통해 주관적 감정을 통어하고 그 대가로 순수의식을 확보해내면서 마침내 물자체를 직관하는 풍경의 현상학을 면밀하게 펼쳐내고 있다. 장요원의 다음 시집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현상학에 집중할 차례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직시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재인식과 발견으로 환원되는 성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장요원만의 내밀하고도 독창적인 내성의 풍경을 기대해본다. 그의 내성의 현상학은 외적 풍경의 현상학을 또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펼쳐내는 동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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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장요원 시의 저류에는 사물과 현상을 강렬하게 잡아채는 첨예한 감각의 흐름이 있다. 그녀는 사물과 현상의 고유하고도 역동적인 이미지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선명한 물질성의 언어로 명명하는 역량을 지속적인 미더움으로 선보인다. 그 안에는 아득한 저 심연에서 전해져오는 “은밀한 파동”([가지마다 서랍처럼 은밀한 파동이 들어 있다])이 담겨 있는데, 말하자면 “일렁이며 구겨지는 어린 바람의 수면”([공일])을 미세하게 그려내면서 “몸 모서리에서도 물소리”([허공에는 각이 있다])가 나는 것을 듣다가 그 “소리가 고여 맑아지는 수위水位”([숲])까지 채록하는 시인의 섬세한 감각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장요원 시편에는 ‘바람’이나 ‘물’ 같은 원형 상징들이 선연한 “선염법渲染法”([장마記])으로 번져가며 만들어내는 “설레는 경계들”([레이스])이 깊이 농울치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경계의 표지標識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지상의 감각적 실재들이 사라져가는 소실점까지 천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어둑한 심층에서 글썽이는 환한 심미적 서정에까지 근접하려는 성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 확연한 진경進境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시선도 한없는 미적 감염으로 한동안 물들어가게 될 것이다.
- 유성호(문학평론가·교수)
장요원의 시를 읽는 즐거움은 평범한 사물, 눈에 익은 현상을 변형하거나 해체하여 우리의 관습적인 감각과 사고를 깨움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하는 데 있다. 빗방울을 공중에 걸린 첼로 현으로 만들어 세상에 감춰진 음악 소리를 듣게 하는가 하면, 빠르게 도는 줄넘기의 줄을 혀로 변형시켜 매일 반복되는 수다 안에 갇힌 여자의 욕망을 엿보게 한다. 몸살감기에 걸려 옷을 껴입으며 덜덜 떠는 느낌을 식물적인 본성과 양배추의 형태로 형상화시키는 상상력이나, 반으로 자르자마자 돌기 시작하는 양파의 운동을 통해 전속력으로 정신없이 쳇바퀴 돌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선은 읽는 이를 유쾌하게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며, 우리의 다양한 경험이 사물이나 일상과 엉뚱하게 결합될 때 우발적으로 솟는 풍요로운 세상을 여행해보자.
-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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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요원 시인∥
∙ 본명 장혜원.
∙ 전남 순천에서 태어남.
∙ 201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을 수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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