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10월25일(월)맑음
오전에 부산 반송 작은 절에서 일진선사와 홍보살, 민재거사가 방문하다. 점심 공양하고 차담하면서 법담을 나누다. 선학산 전망대에서 남강이 굽이쳐 흐르는 진주시를 관망하다. 오후 3:30에 일행은 갈 길을 가다.
<일진선사와의 법담>
①일진선사: 한 손가락을 척! 들면서 지금 이 자리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요? 이미 벌써 여러분 각자가 알고 느끼며 날마다 쓰고 있는 이 경지는 본래 완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렇게 자명하고 생생한데 꼭 말을 해서 설명해야 알아듣겠어요? 이미 이렇게 ‘지금’이 떡하니 앞에 벌어져 있는데 ‘지금’을 알기 위해 학습이 필요합니까? ‘지금’을 알기 위해 무슨 수행이 필요합니까? ‘지금’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습니다. 당장 이 자리일 뿐입니다. 언어문자와 말이 끊어져 묘사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분명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一念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때가 묻질 않습니다. ‘지금’은 말이 끊어졌으나 ‘지금’에 대해서 온갖 말을 갖다 붙인다 해도 허물이 전혀 붙질 않습니다. 왜 그래요? 이 자리는 때가 묻질 않기 때문이지요. 흐르는 물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 흔적이 이내 사라져 버리듯, 이 자리에는 어떤 허물이나 때가 묻지를 않아요. 그래서 본래청정, 항상청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處染常淨)’의 소식이지요. 이것과 관련된 선법문이 바로 空過句공과구입니다.
②연경보살: ‘지금’ 이 자리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서 마음에 딱 맞아 수긍되기는 하는데, 일상생활로 돌아갔을 때는 번뇌망상이나 세상사에 끌려 들어가서는 ‘지금 이 자리’를 놓쳤다는 뒤늦은 후회가 되어 힘이 빠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진선사: 그건 초심자가 흔히 하는 질문입니다. 처음 ‘지금 무심 자리’를 듣고 알기는 알았는데 일상사에서 마음만큼 자유롭지 못해 이 자리를 놓치고 헤맨다는 불안함, 불만족이 있다는 겁니다. 좋아요. 모든 수행자는 이 단계를 지나갑니다. 초심자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아 힘이 길러질 시간이 필요해요. 걱정이나 조바심을 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선지식을 자주 찾아 법문을 듣고 지도를 받으며 좋은 도반들과 탁마를 해가면 알아차리는 힘이 길러집니다.
홍보살: 이 자리를 알아차리는 힘이 70%, 흐리멍덩한 상태가 30%면 자신이 생기고, 힘을 얻은 겁니다. 이렇게 되기는 대략 2~3년 걸립니다. 저는 계합하기는 했는데 말주변이 없어서 표현을 잘하지 못해요.
③일진선사: 자! 여기서 오뚜기 법문이 필요합니다. 오뚜기를 옆으로나 앞으로 밀어도 흔들흔들하다가 본래 자리에 오뚝! 돌아옵니다.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생각에 휘둘려 이리저리 헤매다가도 문득 ‘아, 지금 이 자리!’하고 깨달으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생각으로는 아무리 멀리 돌아다니고, 어지럽고 혼란스럽더라도 사실은 본래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니 떠날 수도 없어요. ‘지금’이 어디로 도망가나요? 당신이 있는 그 자리는 항상 ‘지금’이 아닙니까? 당신의 현존 자체가 바로 ‘지금’인데 어디를 헤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이렇게 한번 척! 알아버리면 안심, 대 안심, 항상 안심입니다.
④원담스님: 홍보살과 민재거사는 일진스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민재거사: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에 밀양에서 어느 불교 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이웃에 사는 지암거사의 인도로 참석하게 된 거죠. 그 자리에서 일진스님이 선법문을 하셨어요. 저는 전혀 경험이 없어 처음 듣는 법문이었지만 뭔가 가슴을 울리며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자꾸 나와서 난처했어요. 그리고는 속으로 ‘와! 이거 뭔가 있다. 불교에 뭔가 있다.’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어머니 홍보살님도 함께 계셨어요. 어머님도 뭔가 가슴을 울리는 것을 느꼈나 봐요. 그래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저와 어머니는 부산 반송 작은 절로 일진선사를 찾아뵈어 오늘이 있게 되었습니다.
일진선사: 밀양 그 동네에 깨달은 분이 다섯이나 있어요. 지암志嵓거사, 우보牛步 거사, 보현행보살, 증곡거사 등등. 曾谷거사라는 법명을 제가 주었는데요. 밀양역에서 저를 배웅하면서 ‘스님, 관세음보살님이 눈이 천 개요. 손이 천 개인데, 어떤 것이 참 관음입니까?’ 이에 내가 ‘관음 아닌 게 있습니까?’ 이 말 한마디에 깨달았어요. 言下開悟언하개오이지요. 속인으로 깨달았으니까 중 僧에서 사람 人을 떼면 曾, 속인 俗에서 사람 人을 떼니 谷, 이렇게 해서 曾谷증곡거사라 했습니다.
원담스님: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 깨달음의 시대가 이미 열려서 정신문화의 흐름을 형성했어요. 지금은 서양과 동양이 함께 어울려 깨달음의 지평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 남미에서는 깨달은 거사와 보살님들이 여럿이 나와 대중을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깨달은 거사, 보살님들이 설법하면서 저변을 확대하고 있어요. 참 고마운 분들이죠.
⑤황룡회기 선사와 여동빈, 일생일대의 만남
신선의 경지에 오른 여동빈(呂洞賓, 당, 796~?)이 하루는 구름 따라 무창 황룡산(黃龍山)에 오른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중 절 위에 자주색 구름이 덮여 있어 이인(異人)이 있음을 알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고명한 황룡회기(黃龍誨機,?~887?)선사가 법당에서 설법하려는 참이었다. 여동빈도 설법을 듣기 위해 사람들 속에 묻혀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황룡선사가 “오늘 여기에 법을 훔치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 늙은 중은 설법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에 여동빈은 곧 자기를 가리키는 것을 알고 무리 속에서 나와 예를 올리면서 말하였다.
“화상에게 묻겠습니다.
一粒粟中藏世界, 일립속중장세계 한 알의 조 알갱이 속에 세계가 감춰져 있고
半升當裏煮山川. 반승당리자산천 반 되들이 솥으로 산천을 삶는다는 이 한 마디는 무슨 뜻입니까?”
황룡선사가 껄껄 웃으며 “원래 당신은 시체를 끌고 다니는 죽지 않은 귀신이구려!” 여동빈은 노여움을 띠지 않았으나 눈썹에 힘이 들어가면서 말하였다.
“화상은 내가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을 조롱하지 마시오. 내 호주머니 안에는 장생불사의 약이 있는데 어찌할 테요?” 황룡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饒你經得八萬劫, 요니경득팔만겁 당신이 설사 팔만 겁을 지내왔더라도
難免一朝落空亡. 난면일조락공망 하루아침에 공망에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없으리라.”
여동빈은 황룡선사의 기지와 총명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서, 선사의 법력이 얼마나 높은지 시험하고자 등에 차고 있던 보검을 꺼내면서 말하였다.
“이 검은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신령한 보검입니다. 내가 검을 칼집에서 나오라고 하면 곧 빠져나오고, 칼집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곧 들어가지요. 선사께서는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황룡선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비록 영물이지만 그것이 도력 있는 사람의 명령을 들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 당신이 먼저 한번 시험해 보시오.”
여동빈은 “보검이여, 칼집에서 나오라”고 외치자 검은 칼집에서 스스로 나와 은빛을 뿌리며 대웅전 기둥으로 날아가 칼끝이 나무로 깎은 용의 눈에 박혔다. 황룡선사가 웃으면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서 기둥에 박힌 보검을 가리키며 말한다.
“내가 보건대 네가 이 검을 능히 칼집에서 끄집어낼 수는 있으나 다시 꼽을 수는 없으리라.”
여동빈이 잠시 놀라다가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검을 보면서 “칼집으로 들어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보검은 기둥에 박힌 채 꼼짝하지 않는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다. 여동빈은 선사의 도력이 높음에 감복하고 그 자리에서 절하여 불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였다.
황룡선사는 여동빈의 마음이 진심과 성의가 있음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이미 반 되들이 솥으로 산천을 삶고, 한 알의 조 알맹이 속에 세계를 감출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던가?” 내가 답하노니
“先要心中無物, 선요심중무물 먼저 마음속에 아무런 물건(욕심)이 없어야만
方能包羅萬象. 방능포라만상 능히 삼라만상을 둘러싸 안을 수 있다.”고 하리라.
<원담 주석>여동빈이 대단한 신통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에고(자아중심성)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황룡선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것이다. 아직 有心有我의 경지에 머문 채 아무리 신통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유위법이기에 하루 아침에 空亡공망에 떨어질 것이라는 경책을 받았다. 그러나 여동빈은 선근이 있었던지 그 말씀에 화를 내지 않고 회심하여 심중에 깃든 我見我相을 털어버리니 금방 일체를 품어 안는 현전의 자리를 깨달았다. 無我 現前을 깨달은 분이 신통을 쓰게 되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에 大機大用이라 한다. 큰 기틀大機로 큰 쓰임새大用을 쓴다는 말이다. 그런 분이 바로 보디사트바, 보살, 깨달은 영웅이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칼집에서 나온 칼을 거둬들일 수 없었지만 깨닫고 나서는 칼집에서 칼을 꺼내고 거둬들임에 자유자재하게 된다. 칼집은 大機, 큰 기틀이고 칼은 큰 쓰임새大用을 비유한 것이다. 무심의 자리에서 유심을 나투어 자유롭게 쓰다가 다시 거둬들여 무심의 자리로 돌아옴이 자유자재하다. 무심에 안주하지도 않고 유심에 걸리지도 않으며 무심, 유심을 자유롭게 쓰는 경지는 깨달은 사람의 살림살이다.
이 말끝에 크게 깨달은 여동빈은 스님께 오도송을 지어 바쳤다.
棄却瓢囊擊碎琴, 기각표낭격쇄금 하나 있는 표주박 주머니도 버리고, 거문고도 깨버렸다,
從今不戀汞中金; 종금불연홍중금 이제부터 불사약(金丹)에 더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니,
自從一見黃龍後, 자종일견황룡후 황룡선사를 한번 만난 뒤로는
始覺當年錯用心. 시각당년착용심 비로소 이제까지 마음 잘못 쓴 걸 깨달았도다.
여동빈은 낭랑히 오도송을 읊으면서 선사께 인사를 고하고 표연히 떠나갔다. 그는 세상에서 백 살까지 살다가 황학루 3층 누각 위에서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한다. 신선이 된 후에도 인간 세상에 와서 놀러 와 사람을 제도한 전설이 많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2021년10월28일(목)맑음
<박문호 선생의 뇌과학 강의>
뇌는 관계(선형적 인과율이 한 예가 된다)를 다룬다. 뇌가 외계를 지각하는 방식은 지구환경에서 생존하는데 유용한 것을 중시하지 정확성이나 절대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전제하고 있는 것, 관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것을 가정 assumption이라 한다)을 의심하는 데서 창의성이 생긴다. 가정이 질문을 제한한다. 가정을 바꾸면 지각이 바뀐다.
모든 게 착각이니 착각 아닌 게 없다. 착각이 실재이고 실재가 착각이다. 망막에 빛이 맺힌 것이 실재(예를 들어 점 세 개)인데, 뇌가 인지하는 것은 자연에 없는 것(점과 점을 이어서 만들어진 삼각형)을 본다. 뇌는 실재-아닌 것을 본다. 관계, 형태, 거리는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닌 두뇌가 지어낸(configuration, 구성한, 날조한) 것이다. 뇌는 실재를 보도록 진화하지 않았기에 행위의 주체성이라는 환각(즉, 자아selfhood)이 출현했다. 뇌는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얻어진 정보를 가공하여 의미(관계) 있는 가상현실을 창조해낸다. 그래서 동물은 감각에 구속되지만, 인간은 의미에 구속된다.
예를 들어 시각피질에 감지된 점 세 개는 감각자료sense-data이다. 뇌는 그것을 원료로 하여 삼각형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지각이라 한다. 뇌는 항상 ‘그게 뭐지?’에 대한 답을 찾는다.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을 ‘지각’이라 한다. 감각에서 지각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연속적이 아니다. 대상에서 얻어진 감각정보를 인간의 생존에 유용하도록 맥락화하여 다음 순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예측한다. 즉 생략과 보충, 단순화와 맥락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통계적 구성이다(statistical configuration)이다. 몇억 개의 신경세포 뉴런이 감지한 감각자료(전기적 신호 pulse)가 시상하부의 시냅스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고유한 통계적 구성(뇌가 예측하는 전체상을 구성하는 데 유용한 정보만 선택하고 전달하여 종합한다. 어떤 정보가 선택될 것인지는 통계적 확률을 가진다)이 일어난다.
이렇게 자연에서 얻은 감각정보가 뇌에 지각된 가상현실로 바뀐다. 감각된 대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실재를 알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도록 인간 수준에 맞게 알 뿐이다. 지각은 두뇌의 날조이다. 생생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란 뇌가 창조해낸 가상세계이다. 두뇌에 의해 지각된 세계는 제2의 자연(the second nature)이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는 인간의 생존에 유용한 방식이었으나, 심리적인 고통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문제를 일으켰다. 이것이 苦dukkha이다.
칭찬과 보상은 행위가 완료된 즉시에 해주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다. 칭찬과 보상이 따른 행동은 반복될 소지가 충분하다. 그러면 이윽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보상이 필요 없는 행위도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저절로 우러나서 하는 것, 하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놀이나 예술적 행위이다. 이런 종류의 행위는 ‘저절로 돌아가는 바람개비’과 같아, 칭찬이니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놀이에 몰입한 아이들이 얼마나 재미있어하는가? 동무들과 놀이에 빠져 날이 어두워져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릴 정도이니.
2021년10월29일(금)맑음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동영상을 듣다. 법륜스님의 법을 보는 지견이 확실하고 수승하심을 다시 한번 찬탄하게 되었다. 오후에 독감 주사 맞다.
2021년11월1일(월)맑음
입보리행론 반야바라밀 장과 회향 장을 강의하다. 이로써 5개월에 걸친 입보리행론 강의를 완성하다. 책거리 행사를 하다. 도반들이 둘러앉아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하다. 송계거사 선창으로 ‘시월에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고, 다시 ‘사랑으로’을 부르며 손을 잡고 둥글게 돌다. 모두 우주적인 꿈을 실현하는 보리행자가 되시길!
첫댓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