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풍미/청석 전성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대구 하면 번뜩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막막하고 막연할 따름이다. 대구는 경상도에 여행 갈 때 스쳐 지나가는 길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으로 우리나라 보수의 본향이라는 명예인지, 불명예인지 모르는 별칭이 붙은 대구의 색은 무슨 빛깔일까? 붉은색인지 흰색이진 검정인지 어떤 색인지 궁금하다. 하여 사람 사는 애환이 듬뿍 쌓인 왁자지껄한 저잣거리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사람들 표정을 살펴보고 싶다.
‘민족 독립의 뜨거운 열망, 대구’라는 표어를 가지고 떠나는 도봉문화원 인문학 기행, 오전 6시 30분에 출발한 관광버스가 수락산 터널을 지나더니 잠시 주춤거린다. 아침 출근길과 겹쳐서 도로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모습이다. 구리 토평 방향으로 향하는데 차창 밖에 이팝나무가 보인다. 마치 한 겨울 함박눈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다. 아니 함박눈보다는 커다란 함지박에 백설기를 찌는 것 같이 풍성하고 포근한 모습이다. 문득 외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먹었던 보송보송하고 따듯한 백설기 생각이 난다. 톨게이트를 지나니 언제 길이 막혔냐는 듯이, 자동차들이 신나게 달리기 시작한다. 5월 중순의 여행은 봄이 무르익은 계절 속으로 풍덩 잠긴다. 잠시나마 쓸데없는 세상살이 근심과 걱정거리를 잊어버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바지에서 묵주를 꺼내어 기도를 드린다. 두 시간 정도 숨 가쁘게 달리던 버스가 괴산휴게소에서 한숨을 돌린다. 버스에서 내려 주차장 한구석에서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한다. 밝은 아침 햇살이 선잠이 깨어 부은 듯한 얼굴을 살살 보드랍게 어루만진다.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 대구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금호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드디어 대구 시내로 들어선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대구이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게 없는 듯하다. 첫 방문지는 국립대구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는 국립박물관이 14곳이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지방마다 있다. 공주, 부여, 청주, 전주, 익산, 나주, 광주, 춘천, 김해, 대구, 경주, 진주, 그리고 국립제주박물관이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 넝쿨 터널에 5월의 꽃, 장미가 요염한 웃음으로 맞이한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석인상(石人像)이 보인다. <木, 人, 石, 心>이라는 표지가 있고, “돌사람, 나무 마음 ..... 꽃과 나무에 둘러싸인 채, 그 자태를 뽐내던 돌사람, 그 얼굴에서 옛 선조의 마음을 그려봅니다”라는 멋진 글귀가 눈에 띈다.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가장 기대하고 궁금해한 게,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가족이 기증한 선물이다. 국보인 <대구 비산동 원삼국시대 청동기>와 보물인 <경상북도 고령 지산동 삼국시대 장신구.무기.마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고 이건희 회장 말씀을 떠올려본다.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큰 부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알아보는 커다란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물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복식문화실에서 한참 머무른다. 모자, 신발, 예복, 자수 등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복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인상적이다.
두 번째 방문한 곳은 효목동 조양회관이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교육회관으로 대구시 동구 망우당공원에 있다. 서상일(徐相日) 선생과 대구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조양(朝陽)은 “아침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후에는 자유 관람이다. 점심을 먹으려고 서문시장을 찾는다. 조선시대 ‘대구장’은 강경, 평양과 함께 3대 시장의 하나로, 서문시장은 ‘대구장’의 전통을 이으며 정기시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방송에 몇 번 나왔던 ‘합천할머니칼국수’ 집을 찾아간다. 대구에서는 대구국수를 ‘누른국수’로 부른다고 한다. 소위 경상도식 칼국수를 뜻하는 것으로, 멸치, 다시마, 양파, 무, 대파 등을 넣고 우려낸 육수에 면을 넣고, 애호박과 배추를 넣고 끓인 다음에 김가루, 지단 등의 고명을 올린 것이다. 멸칫국물로 끓인 정갈한 수제비, 정을 듬뿍 얹어서 커다란 대접에 한가득 담아준 수제비,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으며 수제비 한 숟가락에 봄날의 추억을 만든다. 서문시장 골목 구석구석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배가 조금 꺼진듯하여 노점상에 둘러앉아 일행과 함께 모듬순대에 막걸리 한 잔 나눈다.
대구가 경북지역에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싹을 피운 곳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 지역 분들의 애국심과 보수적인 분위기가 조금 이해된다. 조양회관에서 본,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찬양하며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시절 중국의 통치자였던 위안스카이의 만시(輓詩)가 잊히지 않는다. 서로 다른 모습의 태극기 모형을 보면서 촛불과 태극기가 대비되는 오늘의 세태가 어른거린다. 그저 나오는 것은 허허로운 쓴웃음뿐이다.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은 마음을 얼마나 열고, 낯선 고장의 모습과 사람의 체취를 느끼는가에 달린 것 같다. 모처럼 뜻있는 대구 여행이, 곧 다가올 우리 삶의 커다란 변혁에 당황하거나, 역겹거나, 혹은 기쁨이 넘치는 도약의 세상을 그려보는 한 줄기 빛의 원천이 되기를 기원한다. (202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