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90)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69) – 고린도전서 강론(13)
고린도전서 강론(13) – 9장 1~18절
오늘 강론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변론과, 돈 문제(고후12:16-19)에 대한 사도 바울의 변론이다.
변론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연약한 신념을 가진 자들의 자리에 까지 내려가서 자기가 가진 자유까지 포기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라 섬겨야 하는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변
론
사도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기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자유하게 된 사람이며, 우리 주 예수를 뵈었으며, 그대들이 바로 주님 안에서 내가 일이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주 안에서 나의 사도됨을 보증하는 표라는 것이다.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클레로노모스로 성장한 것이며, 자기가 한 역할의 결과물이 그대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의심하며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복음을 전해준 대상인 고린도 형제들이 우리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에 속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 자매 된 아내와 함께 다닐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또 자신과 바나바도 생활비를 버는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나바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린도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 여행 때 함께 들어간 것으로 봐야한다.
사도행전에서는 바나바를 포함해서 두 사도라고 표현되어 있고(행13:43), 여러 곳에서 바나바를 사도로 인정하고 있다.(행14:1,3,4,5,14)
그렇다면 사도란 무엇인가?
12명의 사도는 초기에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형제들이 교회의 사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8:23) 즉 고정된 멤버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나바도 사도이고, 형제들도 사도이고, 모든 클레로노모스들은 사도로 성장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사도와 관련된 논지는 사도 바울 일행에 대한 이야기와 그대들도 사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 논지로 보아야 한다. 사도라는 특정 신분을 가진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하나 됨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서는 연보를 내는 것도 옳고, 안 내는 것도 옳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해서 군복무를 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양떼를 치고 그 젖을 먹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율법도 이런 것들을 말씀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말씀이니, 밭을 가는 사람은 소망을 품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사람은 자기 몫에 대한 소망을 품고 타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대들에게 영에 속한 것을 뿌렸다면 그대들에게서 육에 속한 것을 거두려는 것이 심한 일이 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만약 다른 이들이 그대들의 것을 나누어 가지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모든 일에 조용히 넘어갔다고 변론하고 있다.
즉 복음 전파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생활비를 받는 성서에서 보장된 권리까지 포기한 이유는 복음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주인공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형제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돈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형제들에게서는 돈을 빼앗아서 고린도 형제들을 위해 썼다는 것이다.(고후11:8-9) 마케도니아 형제들은 자신들도 복음 전파의 섬기는 일에 동참하는 의미로 연보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비를 받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에서는 돈을 받은 것이고, 고린도 형제들에게는 그 돈을 쓰는 것이다.
연보의 용도는 에클레시아 안에서 삶을 평균케 하기 위해 쓰는 연보와, 사도 바울 일행의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의미의 연보와, 예루살렘에 보낸 연보의 세 가지 용도가 있다.(고후8:1-15, 고전16:1-4) 그런데 고린도 형제들은 너무 어린 형제들이라 다른 데서 받은 연보를 고린도 형제들을 위해 썼다는 것이다.
결론은 연보는 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가 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돈을 썼고, 마케도니아에서는 연보를 받은 것이다.
하나 됨을 위해서 연보를 쓰는 것이다. 섬김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주인공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사도 바울의 형제들도 사도들인 것이다. 이것이 모든 클레로노모스들이 가지게 되는 시각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집권자들이 주인공인 것이다.(마20:25-27) 세상에서의 섬김의 리더십은 자기가 리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큰 자는 앞에 있는 어린 형제들이 주인공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이 사도 바울 일행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성한 일을 하는 자들은 성서에서 비롯된 것을 먹고, 제단에서 시중드는 자들은 제단에서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반포하는 이들이 복음으로부터 비롯되어 살아갈 것을 지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 됨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와 같이 해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 됨만이 옳다는 것이다. 복음을 사명으로 받아 하나 됨을 위해 일하는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 문제로 오해를 일으키는 결과가 나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앞에 놓여진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며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큰 슬픔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며, 사명을 받아 몸이 달아서 하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삯을 받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비용을 받지 않고 복음을 가져가고 복음 안에 있는 나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나에게 무슨 삯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재물은 빛을 비추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돈궤를 가지고 다니셨고 회계 책임자도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대를 차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연보를 받은 마케도니아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성서에서 보장되어 있다고 하는 권리까지 포기하며 그 연보를 고린도에 쓴 것이다. 즉 하나 됨 만이 옳은 것이다. 연보를 내는 것도 옳고 안 내는 것도 옳다는 것이다. 하나 됨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옳은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허남회 전도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