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경제 발전의 주역 - 국민의 힘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헌신이었습니다. 석유와 같은 지하자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땅이 좁은 데다 그나마 있는 땅도 70%가 산지여서 농사를 지어도 인구 전체를 먹여 살릴 만큼 농산물이 풍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장을 지으려고 해도 자본이 부족해 외국에서 돈을 빌려 와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풍부하고 우수한 인력이 전부였습니다. 내일은 지금보다 더 잘 살 것이라는 희망,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의지가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1)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6월에 모내기를 해서 벼를 심으면 9~10월경에 수확을 합니다. 벼를 수확한 가을에 보리를 심는데, 보리는 이듬해 6월이 돼야 여물어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쌀은 3~4월이면 똑 떨어졌고, 보리를 수확하는 6월까지 쌀독이 비어 굶어야 하는 기간을 ‘보릿고개’라고 합니다.
‘초근목피’라는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을 캐거나 나무의 껍질을 벗겨 삶아 죽을 끓여 먹는 일도 흔했습니다. 보릿고개인 5월만 되면 산에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래서 5월에 피는 찔레꽃을 두고 ‘슬픈 꽃’이라고도 했습니다. 배가 고파 산에서 나는 독버섯을 먹고 배탈이 나거나 심한 경우 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지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가난에 힘겨워할 때 독일에 가서 일할 광부나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습니다. 1960년대 독일은 빠르게 경제성장을 하면서 일손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독일 사람들은 광부나 간호사 같은 힘든 일을 꺼렸습니다. 그때 독일은 한국 정부와 인력 파견 협정을 맺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6,0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 광부로 가면 월급으로 6만 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 탄광 일은 너무나 힘들었고 자칫 갱도가 매몰되어 광부들이 사망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지만 공무원 월급의 열 배를 준다고 하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19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명이 지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여 아무나 독일 파견 광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체중이 60킬로그램을 넘어야 했는데,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라 못 먹어서 60킬로그램을 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신체검사 직전 수돗가에서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또 선발되기 위해서는 ‘광부 경력 2년’이 필요했습니다.
광부 경력이 없는 사람들은 손에 연탄가루를 잔뜩 묻히고 와서 “광부였다.”고 우기기도 하고 허위 광부경력 증명서를 몰래 사서 제출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당시 허위 경력 증명서 가격은 4만 원, 소 한 마리 값이었습니다. 아무리 독일에서 월급으로 6만 원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지원서를 내는 데만 소 한 마리 값을 투자해야 하는 큰 모험이었습니다.
그만큼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독일로 가서 탄광에 투입된 광부들의 고생은 극심했습니다. 지하 1,000미터 갱도에 들어가 탄가루 속에서 일을 해야 했고, 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고국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1966년부터는 독일에 간호사 파견도 정식으로 시작됐다.
그 전에도 일부 간호사들이 선교 단체 등을 통해 독일에서 일을 했었는데, 한국 출신 간호사들이 성실하고 일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역시 월급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에 전국의 수많은 간호사들이 독일 파견을 지원했습니다. 고국에 있을 때 보다 월급은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온갖 마음고생, 몸고생을 했습니다. 독일어를 잘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작고 연약한 체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독일의 체격 큰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일 같은 어려운 일을 주로 했기에 고생은 곱절로 해야 했습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선진국의 경제 발전 모습을 직접 보려고 독일(당시 서독)을 방문했습니다. 독일의 공장들과 고속도로(아우토반) 등을 둘러보고 독일에 파견 나간 우리 광부들을 만나기 위해 함보른 광산을 찾아갔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 600여 명이 모여 있는 강당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위로의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자 강당 곳곳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풍운의 꿈을 안고 왔지만 너무나 힘이 들던 차에 고국에서 온 대통령의 위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것입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닦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던 박 대통령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박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연설문 대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먼 이국에 찾아왔는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 이룩하지는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남의 나라에 와서 일하지 않는 나라로 만듭시다. 반드시.” 박 대통령도 끝내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일의 관리들도 눈물을 훔치며 강당은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1970년대까지 독일에 파견된 광부가 약 8,000명, 간호사가 약 1만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아끼고 아껴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월급은 당시 외화가 부족해 절절매던 한국으로서는 단비와 같은 돈이었습니다. 독일에 간 광부와 간호사는 인구의 0.05% 수준이었지만, 한때 이들이 고국에 보내온 돈은 국민 모두가 번 돈(GDP)의 2%에 해당할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2) 전쟁터와 사막을 누빈 경제전사들
1960~1970년대 독일이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면, 베트남과 중동은 건설 근로자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남한과 북한처럼 자본주의 체제를 택한 남베트남과 공산주의를 택한 북베트남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남베트남은 체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도로를 닦고 철도를 놓고 항구를 짓는 등
사회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대결인 ‘냉전’이 치열한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도 남베트남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남베트남의 건설 현장에 우리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근로자들을 대거 채용한 것
“월급 350~400달러. 별도의 숙식비 180달러 포함 총 530~580달러 지급.” 1966년 4월 신문에 실린 광고 문구입니다. 국내의 건설 근로자 월급의 15배쯤이었고, “장관보다 월급이 많다.”는 말도 돌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베트남은 전쟁터였습니다. 북베트남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점점 전선 확대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또한 베트남은 1년 내내 무더운 열대 지방이었기 때문에 모기떼와 사투를 벌이고 말라리아 같은 열대성 전염병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건설 현장 지원자는 언제나 넘쳐났습니다. ‘총칼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굶주림이었던 시절입니다'
베트남에서 우리 건설 근로자들이 보여준 투지는 대단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악조건 속에서 임무를 완수한 것은 물론이고, 공사 기간까지 정확히 지켰습니다. 일을 잘 하면 금방 소문이 나는 법입니다. 베트남에서의 성과를 눈여겨본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 의뢰가 들어왔고, 일본 등 주변 국가들에서도 차츰 건설 공사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베트남에서 쌓은 경력은 1970년대 중동 건설 특수로 이어졌습니다. 1970년대 석유로 돈을 많이 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 카타르, 리비아 등 중동 국가들은 도로와 항구, 발전소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습니다. 중동은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모래사막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베트남, 태국 등에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 건설사들은 적극적으로 중동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마침 동남아시아 건설 붐이 끝난 터라 장비와 인력을 그대로 중동 현장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건설사들이 따내지 못한 현장도 외국 건설사들이 우리 건설사에 하청을 주거나 한국인 근로자들을 채용할 정도로 한국의 건설 능력은 세계적으로 알아주었습니다. 중동 파견 근로자가 한때 20만 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베트남에서 무더위와 모기떼와 사투를 벌이던 건설 근로자들은 중동에서는 40도가 넘는 뙤약볕, 거센 모래바람 등과 싸워야 했습니다. 피부가 햇빛에 노출되면 화상을 입기 때문에 긴 팔에 긴 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일해야 했고, 뜨겁게 달궈진 장비 때문에 장갑도 꼭 끼어야 했습니다. 모래 폭풍이 불면 거의 질 할 정도여서 마스크를 꼭 써야 했고, 밥알에 모래가 섞여 모래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을 끝내고 들어와 샤워하려고 수도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고 작업을 하는 등 현장은 잠깐도 쉬지 않았습니다. 휴일이 있어도 하루라도 일당을 더 벌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내가 일한 만큼 고국의 가족들이 윤택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베트남과 중동 건설 특수는 1960~1970년대 우리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트남 건설 근로자들이 고국에 보낸 송금액이 1억 6,600만 달러로 당시 무역 외 수입의 16.3%에 달했습니다. 중동 건설 특수가 한창일 때는 중동에서 송금되는 돈인 ‘오일 달러’가 전체 외화 수입의 80%를 넘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1970년대는 중동에서는 전쟁이 자주 발생하면서 국제 석유 값이 폭등했습니다. 이를 ‘석유파동’ 또는 ‘오일쇼크’라고 합니다.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하던 많은 나라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석유로 발전소를 돌리고 석유로 자동차를 운행하고, 석유에서 뽑은 원료로 화학제품도 만들고 각종 재료를 뽑아내던 우리나라는 석유를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석유 값이 올라 돈이 넘치던 중동에서 돈을 벌어 오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베트남과 중동 건설 특수를 통해 많은 건설사들이 세계적인 건설회사로 거듭났는데, 그중 한 곳이 현대건설이었습니다. 현대건설은 베트남과 태국, 중동 등의 건설 현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자동차, 조선 등 다른 산업에 투자의 밑천으로 쓰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태국, 중동 진출은 또 다른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 지역에서 한국 기업과 한국 근로자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산 제품에 대한 이미지와 신뢰도도 같이 높아진 것입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상사맨’들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팔고, 사막에 난로를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추운 지방에 냉장고가 필요 없고, 더운 나라에 난로가 필요 없으니,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전혀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알래스카도 여름에는 더워 냉장고가 필요하고, 사막도 밤에는 추워 난로가 필요합니다. 현장에 가봐야만 알 수 있는 정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섬유제품을 비롯해 1970년대부터 전자제품 등도 본격적으로 생산했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1975년 세금과 대출 혜택을 주면서 종합상사들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해외에 물건을 파는 기업을 보통 ‘OO상사’라고 불렀고, 해외 시장 개척 업무를 하는 직원들을 ‘상사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해외를 돌아다니거나, 해외 지사에 거주하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물품을 팔았습니다. 단추부터 양말, 옷은 물론 전구, 손톱깎이, 라디오, TV, 난로, 세탁기 등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았고,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도 주문만 받으면 어떻게든 만들어 팔았습니다.
중동에서 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는 군대에 군복을 납품한 상사맨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쑥쑥 늘어갔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국민들은 1960년대부터 광부로, 간호사로, 건설 근로자로, 상사맨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일을 하고, 경력과 기술을 쌓고, 물건을 팔면서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단순히 돈을 번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제품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열대 정글과 적도의 사막, 혹한이 몰아치는 알래스카 등 어디든 가리지 않는 진취적 도전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가진 저력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