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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묵상글 들 (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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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
그제 저녁 연수중인 형제들과 저녁을 하며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중 한 형제가 좀 센 농담을 제게 했습니다.
이에 제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고 상대도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때보다 그러고 나서 기분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런 말에 기분이 상하는 제가 한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이런 저를 생각하며 성찰을 했는데
마침 오늘 복음의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저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
다시 보게 되었고 그것을 보는 것이 너무도 쓰라렸던 겁니다.
아무튼, 저를 성찰한 결과 첫 번째 저의 문제는
그 정도의 말에 제가 아직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도'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이 제게 큰 실망입니다.
왜냐면 저는 자주 '준다고 다 받냐?' '상처를 준다고 상처를 받느냐?
싫으면 안 받으면 되지 왜 받느냐?' 뭐 이런 얘기를 자주 떠들고 다닌
저였는데 그런 제가 아직도 그런 말 하나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정도의 말로도 제가 영향을 받는다면
진짜 저를 무시하고 모욕하고,
그것도 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한다면
저는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무너질 것입니다.
성찰을 통해 발견한 저의 두 번째 문제는 저의 믿음 정도입니다.
그 형제의 농담이 아무리 셀지라도 저는 그것이 그 형제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어야 했는데 순간이나마 그것이 진담이 아닌 것을 믿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여인은 개에 비유되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선을 믿었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그런 말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런 말을 듣고도 주님의 사랑과 선을 아주 굳게 믿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물론 너무도 큰 겸손이 큰 믿음을 가능게 했을 테지만요.
아무튼, 저는 아무것도 아닌 농담 한 마디에 영향을 받았는데
전 같으면 허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이번에는 왜 영향을 받았을까요?
미풍에도 흔들리는 것은 미풍에도 흔들릴 만큼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그만큼 저의 정신이랄까 마음이 허약해진 겁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솔로몬의 예에 비춰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그 지혜로운 솔로몬이 말년에 지혜를 잃고 우상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믿은 것이 사실은 우상이 아니고 이방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열왕기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솔로몬 임금이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솔로몬이 나이를 먹으면서 약해지고 이제 젊은 아내들에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레이 여인들의 말을 믿고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약해질 때의 현상 중 하나가 의지하게 되고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거라면
그의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이 또 다른 현상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힘이 있고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때는
자식이 더 심한 말을 해도 용서하고 품어줬는데
나이를 먹어 이제 자식에게 의지하게 되면 자식 눈치를 보고
자식의 말 하나에 쉽게 서운해하고 어린 손자의 말에도 노여워하게 되지요.
저도 그제 그랬던 것 아닐까요?
그 형제의 말이 센 것이 아니라 제가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멘탈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요?
비록 몸이 약해지고 건강이 나빠져도 정신까지 무너지지 않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더욱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제가 되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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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이러한 냉혹한 처사에 당혹스럽고 저항감마저 생깁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강아지”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강아지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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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포기하지 않는 믿음
어떤 생선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천하고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한 여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의 일차적인 사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에 두셨지만, 감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당신의 원칙을 고집하지 않으십니다(손희송).
그리하여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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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우상숭배와 이방인 선교
진리와 오류는 다릅니다. 그런데 오류와 그 오류에 물든 사람은 구분해야 합니다. 오류는 틀린 것이지만 그에 물든 사람은 구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오류가 그에 물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를 죄로 더럽힙니다. 인식상의 오류가 실천상의 죄악을 초래하고, 죄악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또한 사람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 내시어 땅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을 돌보게 하셨다.” 이 진리를 따르면 인간은 구원을 받고 행복할 수 있지만, 거스르면 죄악이 생겨나 파멸합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대표적인 죄악이 피조물을 창조주 자리에 올려 놓고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그 우상은 권세나 재물 같은 힘이기도 하고, 탐욕이나 미움 같은 정서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는 말년의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고사를 전해줍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여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전해주시러 티로 지방으로 가셨다가 마귀 들린 딸을 둔 여인의 간청을 들으시고 도와주신 일을 전해줍니다. 마귀는 하느님 대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들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인간의 본성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독서의 교훈으로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행하는 우상숭배를 왜 타파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복음의 교훈으로는 우리가 아직도 우상숭배에 빠진 이들이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자들, 그 어느 진리도 알 수 없다고 여기는 불가지론자들, 또는 진리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먹고 사는 데에만 몰두하는 중생들에게 진리를 알려주거나 적어도 그 오류에서 벗어나도록 일깨워주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거나 그것도 독점하고 있는 것인양 착각해서 진리를 진리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강요하려는 종교적 독선입니다. 로마나 유럽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을 믿고 있었던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세에 이런 종교적 독선이 횡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대륙에 살면서 다른 종교를 신봉하거나 다른 신념을 지닌 이들에게 진리를 강요하는 바람에 진리가 전해지기는커녕 진리가 오히려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 버리는 불행한 선교실패 사례의 역사가 저질러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인 진리를 우상적인 방식으로 전하라고 하시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만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문제 대신 숙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을 우리가 배워서 우상을 타파하고 우상숭배자 및 이와 유사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지닌 양심과 이성과 의지에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가시고 위로해 주셨으며 가능한 한 고쳐주셨습니다. 공동선에 헌신하는 사명이요 책임이며, 진리에 따른 사랑의 방식입니다. 셋째, 마귀 들린 이들이 찾아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마귀를 쫓아내서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회악에 맞서는 사명이요 책임이며 진리에 따른 정의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넷째, 가르침과 치유와 구마의 사도직을 행하시면서 반대자들과 적대자들 그리고 무관심자들의 죄악에 휘둘려서 죄도 없이 죄인으로 몰리셨지만 그 억울함을 피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수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섣불리 신자를 늘리려다가 문제를 키우지 말아야 하고, 그보다는 숙제를 제대로 해서 진리에 충실하는 것이 부활의 길입니다. 영세자, 예비자, 성소자 등의 교세에 연연하지 말고 비록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아끼고 돌보면서, 서로 섬기는 가운데 행복한 대동세상을 이룩하면 그것이 부활의 시작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 안에 심겨진 그 진리의 씨앗을 하느님께서 키워주시고 퍼뜨리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에 대한 대책이요, 이방인 선교에 대한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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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음식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녁으로 이것을 먹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만들기는 너무 쉽습니다. 간장 한 종지에 깨와 참기름을 넣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계란 후라이 반숙을 만들면 끝입니다. 이를 밥에 넣어 비벼 먹으면 됩니다.
특별한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쉽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맛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식사 대용으로는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분명 어렸을 때, 많은 음식을 먹었을 텐데 왜 이 간장밥이 기억났을까요? 그리고 이를 최고의 음식으로까지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풍요로움에서 먹는 간장밥과 어려울 때 먹는 간장밥의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장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만든 사랑이 듬뿍 담긴 음식이기에 최고의 맛으로 기억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어두움은 곧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단정이 행복한 삶 자체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여인이 마귀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청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며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여인이 표현한 ‘주님’이라는 호칭은 이스라엘 사람이 구약성경의 정신을 따라 하느님의 파견과 메시아를 부르는 전통적인 명칭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대시하던 민족 출신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 영역 밖에 있다고 생각되던 민족이었습니다. 이런 민족의 여성이 ‘주님’이라고 부른 것 자체가 놀랄 일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딸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임에도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간직해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는 더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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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고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내딛기로 합니다. 작은 약속들을 하나하나 지켰을 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A.J.슈발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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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녀 스콜라스티카 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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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代가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가족을 보았습니다. 10명이 넘는 가족이 성당 좌석 1줄을 채우고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손녀는 미사에 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들이 미사에 참례합니다. 매주 온 가족이 성당에 오는데 마치 잔치에 초대 받아 오는 것 같았습니다. 주일미사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 하자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온 가족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학업 때문에, 아이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봉사를 하기 때문에 가족이 따로 미사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학교에 갈 때 까지는 성당에 가지 않아도 눈감아 주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릴 때는 성당에 나오지만 대학교에 가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미사가 재미없어서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바쁘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신앙은 나중으로 미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 가족이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보니 마치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아이의 출산을 집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의 출산은 대부분 병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연분만을 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수술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신앙교육은 집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성경도 읽고, 묵주기도를 같이 바쳤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오면 연도를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이름은 세례명으로 불렀습니다.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신앙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어도, 성당에 가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으면 엄하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보다는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것들이 조금씩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스며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지혜로웠고, 백성을 사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세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고, 재물과 건강을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솔로몬은 이방인을 위한 성전을 세웠고, 이방인 아내를 위해서 하느님을 멀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솔로몬 곁에 계셨지만 솔로몬이 하느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것이 솔로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멀리한다면, 이방인의 신을 섬긴다면 비록 왕일지라도, 기름을 부음을 받은 선택된 하느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교만과 허영의 늪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불가의 조주 스님은 장례행렬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산 사람을 수많은 죽은 사람이 쫓아가고 있구나." 경허 스님은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 비추는 곳에 꽃 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육신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우리가 떠나야 하는 그곳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한다면 굳이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성이 있었고, 임금이 살았던 곳이기에 중요한 곳이고, 갈릴래아는 호숫가이고, 어부들이 살았던 곳이기에 시골이라는 생각도 어쩌면 주관적인 것 같습니다. 갈릴래아는 많은 상인이 다니는 곳이고, 그곳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전해진다면 갈릴래아가 더 중요한 곳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변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시로페니카아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병든 딸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의사에게 딸을 데려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성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 슬퍼하는 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바리사이의 경건한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방인이었던 여인은 아픈 딸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여인의 뜨거운 신앙을 보았습니다. 딸을 위한 엄마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겸손과 열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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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대의 사랑
- 정주, 환대, 경청, 우정, 치유 -
오늘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참 아름다운 축일에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환대, 아름다운 영적 우정입니다. 베네딕도와 스콜라 스티카 오누이 사이가 그렇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베타니아의 마리아의 사이가 그렇습니다. 어제는 수십년 동안 맞이하는 축일인데 새삼스런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 기막힌 하느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빠 베네딕도와 오누이 쌍둥이의 생몰연대(480-547)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쌍둥이 남매니 태어난 날은 물론이지만, 죽은 날짜도 같다는 사실이 참 신비로웠습니다. 이런 경우는 토마스 머튼의 수도원 입회 날짜(1942.12.10)와 방콕에서의 선풍기 감전사로 죽은 날짜(1968.12.10)와 일치함에서 느낀 신비로운 그분 섭리의 손길을 보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33장과 34장은 두 남매간의 아름다운 환대와 경청, 영적 우정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동생을 환대한 정주의 수도승이자 오라버니인 성 베네딕도는 사랑하는 여동생 성 스콜라 스티카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귀원한 것이 좌절당한 채 환대의 장소에서 밤새껏 누이와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 합니다.
바로 33장의 내용이며, 34장은 이 아름답고 복된 만남후 3일만에 세상을 떠난 스콜라 스티카요 같은 해, 성 베네딕도 아빠스도 귀천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입니다. 베네딕도 전기 34장의 아름다운 내용을 인용합니다.
‘삼일 후에 성인께서 수도원에 계셨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으로 모셔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베전34,1-2).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화인지요! 이를 요약한 오늘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나 후렴 및 응송, 그리고 마리아의 후렴도 아름답고, 축일 미사때 불렀던 부속가의 가사와 곡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전문 가사를 인용합니다. 원래의 라틴어를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오늘은 틈나는 대로 불러볼 생각입니다.
“영원 평화 안식이 성녀 스콜라 스티카에 담뿍 안겨졌도다.
휴식소에 들어가 사랑하던 정배와 포근한 정 누리니,
사랑하는 그이를 얼마나 그리워해 열심히 찾았는고.
눈물로써 하늘을 움직여 비오게 해, 오빠 맘 누그렸네.
숭고하신 말씀이 천당복락에 대한 성 베네딕도 말씀,
갈망과 동경이며 동신이신 정배인 그를 일깨우셨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신부여, 면류관을 받으라.
백합중에서 살며 가득히 찬 행복속에 맘껏 취하러
강가에서 나아와 천당궁궐로 가는 동녀중의 비둘기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인도하여 영생 얻게 하소서.”
얼마나 감미로운 사랑과 아름다움의 부속가인지요! 새삼 축제같은 삶에 축제같은 죽음임을, 또 죽음은 천상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임을 깨닫습니다. 그곳에서 정주의 하느님은 지상생활을 아름답게 끝내고 귀가하는 성인성녀들인 우리를 사랑으로 환대하실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이요 환대의 영성입니다. 정주 수도승 생활을 하는 우리 베네딕도회의 특징적 요소가 환대입니다. 정주와 환대가 한 셋트입니다. 정주의 환대요 사랑의 환대를 통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 "정주-환대-경청-우정-치유의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런 영적 진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처럼 환대의 집인 나자로-마르타-마리아 삼남매가 정주하는 베타니아 집입니다. 이 환대의 집은 늘 예수님께 활짝 열려 있었음을 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수시로 찾았던 듯 합니다. 환대는 새삼스런 덕목이 아니라 옛 우리 조상들에게 일상화 되었던 덕목이었습니다.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처럼 전통 한옥집에는 반드시 환대의 방,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 집들이 결여하고 있는 손님 접대의 환대의 방, 사랑방입니다. 위키백과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한국식 전통 가옥에 존재하는 손님방의 이름이 사랑방이다. 바깥 사람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한옥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주거는 폐쇄적 구조가 아니기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당과 생활공간 사이에서 시야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 및 대외적 공간과 사적 공간인 안방을 분리하는 사랑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사람, 마리아와 마르타의 환대의 양식이 참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참 환대의 모범을 봅니다. 우선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경청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입니다. 둘간의 영적우정도 무르익어 갔을 것이며 마리아는 내적치유의 구원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새삼 마리아의 주님 환대와 경청이 우리 수도자들의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에도 그대로 실현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좁은 마음에 반발하는 마르타에 대한 애정 가득 담긴 주님의 충언 말씀도 활동주의에 중독된 이들을 깨우쳐 주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의 경청을 통한 주님 환대의 선택이 우선임을 일깨우며 마리아의 손을 들어 줍니다. 이건 마리아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올바른 분별의 지혜입니다. 이래서 미사의 구조도 경청의 말씀전례에 이어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나누는 성찬전례가 뒤를 잇습니다. 환대의 하느님이요 환대의 모범인 하느님입니다. 오늘 호세아서는 광야 여정중의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여기 광야의 ‘아내’가 상징하는 바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광야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리라.”
우리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서 환대해 주시는 주님 환대의 사랑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의 우리 환대와 우리의 주님 환대가 만나는 복된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수도원의 정주와 환대의 관계가 아름답게 묘사된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샘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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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매정한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어떤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마귀 들린 자기 딸을 치유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평소의 예수님 같아서는 여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실 법도 한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청을 거절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자녀’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강아지’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오늘날같이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시대라면 강아지라는
표현에 큰 거부감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당대사람들은
‘개’를 매우 부정적인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누군가를
개나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꽤 무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숨은 의도는 여인이 지닌 믿음이
드러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거칠었던 표현은 사실 그를 자극하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시험대에 오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자녀와 강아지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굳건한 믿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청들이 있습니다. 또 이를 들어주시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한 경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믿음의
시험대에서 매일 그분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속에서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절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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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이 불쾌하게 여기자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 것 같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계실 수가 없었다.”(24절) 그분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끈질긴 간청으로 주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티로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아마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 생활의 자세인가? 마치 유대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태도는 다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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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1, 28)
부스러기에서
길을 찾습니다.
부스러기의 역사를
다시금 써내려
가십니다.
작디 작은
부스러기도
넘치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부스러기 안에
스며있는 놀라우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부스러기의
겸손한 사랑은
결코 이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부스러기에도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부스러기의 힘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입니다.
너무 작아서
못 알아 본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이 너무 커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기쁜소식입니다.
우리자아의
교만을 깨뜨리는
부스러기의 교훈입니다.
빛나는 부스러기의
버릴 것 없는
고마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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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상숭배』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5-30).”
이 이야기는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개들’과 ‘돼지들’은 하느님을 안 믿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말씀, 복음, 성사 등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은 아예 구원받을 수 없는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길이 전혀 없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합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예수님)을 믿으면 된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이야기’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의 딸의 이야기는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인데, 그 딸이 마귀 들린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 덕분에 마귀에게서 해방된 일을,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것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교도’ 라는 말과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을 텐데,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매달리면서 딸을 고쳐 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간절한 심정으로 오긴 했지만, 그 여자는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고,
예수님께 간청한 일도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바란다면(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옳지 않다.’는 ‘주면 안 된다.(줄 수 없다.)’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라는
당신의 말씀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개’ 라는 말은, 떠돌아다니는 ‘들개’를 뜻하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을 가리키는 ‘강아지’로 바꾸셨습니다.
여자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바꾸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제가 강아지라는 것을(우상숭배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여자의 대답 사이에 많은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여자는 우상숭배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여자는 처음에는 딸 때문에 왔지만, 그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청한 것도 받았고, 청하지 않은 것도 받았습니다.
사실 그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일이,
딸의 회복보다 훨씬 더 큰 은총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예수님)을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안 믿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무신론자들도 있지만,
우상숭배나 미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우상숭배와 미신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모든 악의 시작이고
원인이며 끝이다. 그 숭배자들은 미친 듯이 열광하거나 거짓 예언을 하고,
불의하게 살아가거나 거침없이 거짓 증언을 한다.
생명 없는 우상들을 신뢰하기에, 악한 맹세를 해 대면서도
해를 입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그들에게 형벌이 내릴 것이다. 우상들에게 정신을 빼앗겨
하느님을 잘못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거룩한 것을 무시하면서
거짓으로 불의한 맹세를 하였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들의 범죄를 언제나 뒤쫓는 것은
맹세할 때에 이름을 부르는 우상들의 힘이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징벌이다(지혜 14,27-31).”
오늘날에는 옛날의 우상들과는 다른 형태의 우상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상이나 ‘재물’이라는 이름의 우상 같은 것들......
그리고 뭔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신’이라고 부르는 모습들도 우상숭배에 포함됩니다.
(요즘 흔히 쓰이는 ‘아이돌’이라는 말 자체가 ‘우상’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돌 그룹 가수들을 따라다니면서 열광하는 모습들이
우상숭배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정치인을 숭배하거나 그 사람에게 열광하는 모습도
어떤 경우에는 우상숭배로 보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은, 우상숭배와 미신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별 의식 없이 그런 것에 빠지거나 가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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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문자와 땅의 경계를 넘어 ♣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마르 7,29)
예수님께서는 앞 대목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율법의 문자적 경계를 뛰어넘으셨습니다.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율법을 율법답게 하는 근본정신을 되찾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 안에 있는 보편적 정신을 찾으러 율법의 문자들에서 떠나신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땅을 넘어서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십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와 문화와 종교와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국경을 넘어선 것입니다. 구원의 땅을 떠나 유대인들과 원만하지 않았던 이교인들이 모여 사는 티로에 가신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몸짓은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혁명적인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으로 들어가시어,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7,24) 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신중한 태도를 보이셨을까요?
뜻밖에도 예수님의 의도는 이교인인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부인에 의해 계시됩니다. 그 부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숨어계실 수가 없었습니다.”(7,24) 이교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듯이(3,7-8) 이번에도 그 더러운 영에 들린 딸을 둔 이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합니다(7,25-2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 하고 말씀하시며 일단 거절하십니다. 모두에게 구원이 주어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구원받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부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며 강한 믿음을 드러냅니다(7,28).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고서 마귀를 쫓아내주십니다(7,29). 이교인의 땅으로 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 망설이고 계실 때, 이교인 부인은 확고한 믿음을 통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메시아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을 감동시켰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이교인의 땅으로 가시어 스스로 나서지 않으신 까닭은 일종의 ‘수동적 기다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그들 스스로 마음을 열고 구원의 샘이요 메시아이신 당신을 인정하고 다가올 여백을 주신 셈입니다. 이렇게 보편적 구원은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다면 문자를 떠나 문자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생활과 신념과 습관을 담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경계에 매이지 말아야겠지요. 인간 중심의 경계선 장애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감동시키고 움직여 참 해방을 맛보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사랑이 꿈틀거릴 수 있도록 나를 얽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떠나 기쁘게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처럼 ‘다가가’ ‘그분의 발 앞에 엎디어’ 생명과 자유와 희망을 갈구하는 목마름의 날이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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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습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 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개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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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믿음이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이 섞여 사는 접경지역 티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려고 하셨으나, 그분이 오신 것을 어찌 알았는지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딸의 치유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인, 곧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나라인 유대인들에게도 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는데 이방인이 와서 청하니 순서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그러자 그녀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과 희망의 크기를 보시고 유대인들에게도 충분히 주지 못하신 치유의 은총을 그 여인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믿고 원하기만 한다면 이방 신을 믿는 사람에게라도 언제든 당신 은총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이 이방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분명 자신이 믿는 신들에게 악령을 쫓아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 되니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에겐 출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힘은 희망에서 나옵니다.
완전히 행복해지려는 희망은 한 사람을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 평균 3,000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죽여 화장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총살을 당했습니다.
탈출할 수 없어지자 유대인들은 낙망하여 무기력하게 자기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레히’라는 사람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같은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끔찍한 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소용없는 일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다들 총살된 거 보면 몰라? 우리에게 희망은 없어.”
하지만 레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니다.
분명히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답은 찾으면 보입니다.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시체가 트럭으로 던져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레리는 이 광경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레리는 일과가 끝나고 작업자들이 막사로 돌아갈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트럭으로 올라가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시체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시체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차갑게 굳은 시체들이 몸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트럭이 출발하여 덜컹거리며 수용소 담장 밖으로 나가서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 안으로 시체들을 쏟아부었습니다.
레히는 밤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시쳇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알몸으로 40㎞를 달린 끝에 나치의 만행이 없는 자유의 땅에서 빛나는 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출처: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마빈 토케이어, 함께북스]
레히는 어떻게 남들이 절망할 때 희망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기를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절망에 속하지 않고 희망이 있음을 믿고 싶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선택입니다.
이 선택을 할 때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믿지 않아서 좋은 건 뭔데?’
우리는 믿음이 증거가 있어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믿음과 희망은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그대로 멈추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분명히 있음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믿지 않으면 뭐가 좋을까요?
한 봉쇄 수도원에 무신론자가 왔습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만약 신이 없다면 당신들이 하는 고생은 다 헛수고가 될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도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믿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공동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느님이 안 계셔도 이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산 것에 대해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의 행복을 선택했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지도 희망하지도 않고 하느님 뜻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참으로 행복합니까?
믿지 않으면 그저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모시며 허무함만 남기는 탐욕과 쾌락과 헛된 명예만을 추구하는 집착의 삶만 남습니다.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생존하기 위해 현세의 고통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살다가 하느님이 계시면 정말 후회할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도대체 믿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으며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뭐가 좋아서 선택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편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단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입니다.
희망하든지 절망하든지.
어느 유명 박물관 벽면에 사람과 악마가 장기를 두고 있는 아주 특이한 그림이 한 폭 걸려있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악마가 사람을 상대로 ‘체크’(장기에서 ‘장군!’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체스게임 용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그림을 오랫동안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장군’을 외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리고 또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젊은이는 펄쩍펄쩍 뛰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박물관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되었기에 경비원들이 그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젊은이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또 큰 소리로 “이건 거짓말이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또 쫓겨났습니다.
이제는 아예 경비원이 그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그가 박물관 문 앞에서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짓말이야! 저 그림은 거짓이야. 끝장이 아니라 희망은 남아 있어. 아직 한 수가 남아 있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그 그림 앞으로 가서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았습니다.
얼핏 악마가 인간을 완전히 이긴 것으로 보이나 그 젊은이에게는 완전한 ‘체크’(장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아직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은 내가 죽지 않는 한, 내가 포기하기로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저 양자택일일 뿐이고 내가 그 길을 선택할 때 비로소 그 증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 정 중앙에는 인간에게 한 수를 알려주기 위해 안타깝게 훈수를 두려 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악마는 그냥 체념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증거를 따름이 아니라 나의 선택입니다.
사형 집행 때 믿는 사람은 100% 행복하게 죽음으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끝까지 발버둥 친다고 합니다.
믿지 말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좋아요. 그런데 안 믿어서 좋은 건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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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묵상과 기도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나서, 베네딕토 성인이 세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베네딕토와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열왕기는 솔로몬이 주위 여러 나라와 교역하고 그 이방신들을 받아들였음을 전합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이 곧 이스라엘 하느님, 당신에게서 돌아섰음으로, 계약과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그의 아들에게서 나라를 떼어 내겠다. 고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고백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가 보아라. 마귀가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인 그의 믿음의 고백으로 그의 딸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솔로몬 임금이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 이처럼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그때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크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짓고,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뜻을 품고, 내 계약과 내가 너에게 명령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그러나 이 나라 전체를 떼어 내지는 않고, 나의 종 다윗과 내가 뽑은 예루살렘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1열왕 11,4-13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마르 7,24-30
실천
솔로몬 임금은 나이가 들어 이방인들의 여러 신들을 모셨습니다. 시돈, 암몬, 모암 등의 신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외국 왕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산당을 지어 향을 피우고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정치적인 이유 등등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거스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신학자들은 솔로몬 아들 대에 와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게 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들 때문에 마음이 갈라질 때 균열과 분열이 일어난다. 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딸의 치유를 위해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다가오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음으로 고백하며, 엎드립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니 네 딸에게서 나갔다."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주님, 구원자로 고백하는 이이면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됨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구원자, 주님임을 고백합니다. 그것을 이웃에게 전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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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생활묵상: 2% 부족
이온음료 이름 중에 2%가 있습니다. 이 음료를 광고할 때 2%부족할 때 이 음료를 마셔라는 내용으로 했던 광고로 기억합니다. 저는 TV와 거의 인연을 끊은 지 20년에 가까운 세월이라 요즘 TV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고작 폰에서 나오는 뉴스로 조금 아는 정도입니다. 이 광고를 구상한 카피라이터가 생각한 내용은 아마 이런 내용을 착안해서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인체에는 많은 수분이 차지하지만 그 수분 중에서 약 2%가 부족하면 갈증을 느끼는 생체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원리를 광고에 적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광고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간혹 대화를 하면서 남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은 2%가 부족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말 같지만 여기에는 많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은연중에 ‘2% 부족’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마음속으로 합니다. 요즘 새로운 일을 하면서 일종의 피드백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현장 근로자의 설명을 듣고 저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그 사람에게 피드백을 해 주는 그런 구조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각 기업체는 기업체마다 업무구조가 다 다르며 외국에서 들여온 첨단장비도 그 기업 환경에 맞게 세팅을 해서 수입을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제조국에서는 그걸 감안해서 그에 맞는 장비를 세팅을 해서 제조해 판매를 하기 때문에 원래 자기네들이 처음 제조했을 때랑은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시트템에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려면 원래 제조국 회사와 인터페이스가 잘 구축되어져 있어야 하는 실정입니다. 만약 국내에서 문제가 발생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 형태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점검한 후에 방법이 없을 때만 원래 기업에 문제점을 보고한 후에 어떻게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전체 업무의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크게 양분하면 두 가지의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현장에서 장비를 다루는 사람과 저, 거기서 나온 자료와 시뮬레이션을 가동해서 나온 결과물을 통해서 최종판단한 내용을 근거해 기업체 간부와 상의를 한 후에 만약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조국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피드백이 잘 이루어지기 위한 첫 단추가 바로 저와 장비를 다루는 사람과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이 잘 될 때도 있지만 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현장에 있는 분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 설명을 듣고 어떻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분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은연중에 2% 부족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내뱉곤 하는 것입니다. 이건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약간의 아쉬움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제가 설명을 이해를 했을 때 이걸 이렇게 설명을 했으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했더라면 설명을 하는 사람이나 설명을 듣는 사람이나 어려움 없이 잘 소통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한두 번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 차례 방문하는 기업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나 조직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법을 잘 제정을 해도 어떻게 하다 보면 서로 모순이나 결함이 생겨 법의 사각지대가 있듯이 말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나오는 2% 부족이라는 말의 개념을 신앙에 적용해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묵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운전하면서 많이 묵상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2% 부족은 어떤 의미일까요? 작고 미세한 부분 흔히 우리가 영어식 표현을 사용해서 표현한다면 디테일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디테일한 설명은 자세한 설명이라 보기보다는 하나의 작은 배려입니다. 그 작은 차이 만약 그게 2%라고 한다면 그냥 단순히 2%의 차이의 결과치만 부족하다는 게 산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실제는 2%보다도 더 큰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산상으로는 98%의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98%나 90%나 그 의미가 별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나 실제 현실에서는 100%가 되었을 때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섭씨 백도에서 끓었을 때 완전히 끓어 소독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전에는 어느 정도 끓긴 끓어도 완전한 소독의 단계로 진입을 하지 못한 상황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의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실제 능력의 부족으로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면 그것도 이해를 할 수가 있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상대를 배려하려는 작은 정성만 있으면 지금까지의 제 경험치로 본다면 그 정성이 2%라는 것입니다. 그 2%의 작고 미세한 설명을 곁들여서 했더라면 설명을 하는 사람도 여러 차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설명을 듣는 사람도 쉽게 빨리 이해를 해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어려움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묵상을 통해서 신앙에 접목해 본 것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걸 ‘사랑 실천’에 이 개념을 적용해봤습니다. 이젠 역발상의 개념입니다. 나는 아주 작은 전체 100이라는 수치에서 2%밖에 안 되는 작은 정성으로 사랑을 실천했는데 실제 계산상으로는 그 사랑이 수치적으로는 2%에 불과하지만 결과는 2%가 아니라 50%, 70%처럼 25배, 30배 이상의 사랑 실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가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주 한여름입니다. 사막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습니다. 동전 자판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갈증이 나서 음료수 하나를 먹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니면 생수도 해당될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때 그 사람 수중에는 동전이 800원 밖에 없었습니다. 지폐든지 동전이든지 1000원이 있어야 음료수든 생수를 먹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동전을 800원 가지고 있다고 해서 80%의 양만큼이라도 먹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동전 200원이 없으면 아예 전혀 먹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때 누군가가 행인이 있어서 이런 상황을 보고 만약 200원을 이 사람에게 적선을 하게 된다면 이 사람은 비록 누군가의 작은 도움으로 목마름 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200원의 가치이지만 실제 200원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이 사람은 전혀 갈증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동전 800원도 그 상황에서는 별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때 200원의 가치는 20%의 가치를 가지는 게 아니고 100%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하는 작은 사랑도 원래는 작은 사랑일 수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마치 이런 경우처럼 원래의 가치보다 다섯 배의 결과를 이룰 수 있는 상황으로도 전개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눈에는 비록 작은 사랑이 될 수 있지만 이게 마치 부메랑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되돌아오고 이게 다시 부메랑이 되어 마치 서로 서로에게 피드백이 되어 선순환의 고리가 된다면 이 원리가 신앙으로 발전을 하게 되면 신앙 안에서는 그 세계가 바로 천국이지 다른 천국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사순이 다가옵니다. 사순 하면 여러 가지 말이 떠오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자선입니다. 자선도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오늘 제가 묵상한 개념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사랑은 크기도 중요하지만 의미에 따라서는 크기도 때로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랑이라도 그걸 실천하느냐 실천하지 않느냐에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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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열왕11,4-13)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 그때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크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짓고,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5.7)
'아스타롯'(Ashtaroth)은 바알신의 아내로 여겨지고, 티로와 시돈 사람들에 의해 풍요와 번식의 신 그리고 쾌락과 사랑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따라서 이 여신을 위한 제사에는 보통 음란한 행위가 의식의 한 순서로 행해졌다 (판관2,13; 10,6; 1사무7,4; 12,10).
그리고 '밀콤'(Milcom)은 암몬의 주신으로 '몰렉'(Molech; 2열왕23,10-13) 혹은 '말캄'(Malcam; 예레49,1; 아모1,15) 으로도 불리웠다. 이것은 팔레스티나 원주민들이 믿는 신으로서 밀콤을 위한 제사에는 어린 아이, 특히 신생아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2역대28,3).
이같은 의식에 사용된 밀콤 신상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는 수소 형상이며 팔을 벌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당시 암몬 자손들은 이를 불로 달궈지게 한 후에 그 팔에 아이를 안겨 태워서 제사를 바쳤다고 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혐오스러운'에 해당하는 '쉭쿠츠'(shiqquts; the detestable, the abomination of)를 밀콤에 대해, 그리고 열왕기 상권 11장 7절에서는 모압의 우상인 '크모스'와 암몬의 우상 '몰록'에 대해 첨가해서 설명하고 있다.
'쉭쿠츠'(shiqquts)는 '싫어하다'(시편22,25), '역겨워하다'(신명7,26), '부정하다'(레위20,25)라는 뜻을 가진 동사 '샤카츠'(shaqat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우상 자체나 우상 숭배 의식과 관련된 행위를 지시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2열왕23,24; 예레16,18).
즉 이것은 보기에도 매우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행위임을 가리키는 강경한 어조의 단어로서, 여기서는 밀콤 등 여러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가 지니는 극도의 사악성과 비윤리성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쉭쿠츠'(shiqquts)는 '밀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가치관을 포함한 표현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상이 비록 매력적으로 보이고 대중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의 제사 행위를 통해 표면적으로도 부각되는 것들의 사악함과 잔인함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열왕기 상권 11장 7절의 '크모스'(Chemosh)는 모압의 수호신으로서 태양과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우상은 손에 창과 칼과 방패와 같은 무기를 들었고, 그의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는 형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를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고 음란하였다.
모압인들은 자신들이 그 신의 자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크모스'에게 자기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다(2열왕3,27).
또한 '몰록'(Molech)는 '밀콤'의 다른 명칭이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으니 설명은 생략하지만, 원래 '몰록'에 해당하는 '몰렉크'(mollek)는 그 자음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금'이라는 뜻이다.
암몬인들은 자신들의 신을 '멜레크'(mellek) 즉 '임금', '왕'으로 불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경멸하기 위해서 '치욕'을 뜻하는 명사 '뽀셰트'(bosheth)의 모음과 결합시켜 '몰레크'(mollek)로 발음한 것이다.
열왕기 상권 11장 7절은 과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이(1열왕5,3) 이제는 혐오스러운 우상들을 위해 산당('빠마';bamah; an high place)을 지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솔로몬은 우상들을 위해 산당을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당을 지은 것이다.
즉 사랑하는 왕비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이방 국가들과의 평화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신의 실리적 목적을 이루고자 산당을 지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가장 큰 우상은 하느님께서 마땅히 계셔야 할 자리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대신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웠던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자녀가 먹을 빵
(마르7,24-30)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알려 지시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당신을 알리러 오신 것 아닌가요?
앞부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사람의 생각과 뜻으로 바뀌어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밖으로 나오면 나쁜 생각들, 온갖 죄가 됩니다. 라고 묵상했습니다.
그렇듯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 곧 하늘의 생명(구원), 그 福을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사람들은 땅의 평화, 그 복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들의 생각, 관점으로 찾으려 하나~ 그 주님으로는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 더러운 영, 거짓 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바꾸어 하느님의 뜻을 거짓으로 더럽히는 말입니다. 뱀이 아담을 속였던 그 거짓말입니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 왜 강아지. 개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묵시22,15) 15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
= 개는 온갖 죄악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 양식(씨)을 먹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한 일을 해야 할 신앙인들이 사람의 말로 받아 법이 되어 열심한 행위로 해 버리면 짐승(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1,29-30)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온갖 푸른 풀-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인간들의 온갖 열심한 종교행위를 말합니다. 아담이 자신의 부끄러움, 그 죄를 가리려 스스로 해 입은 그 열심, 그 행위의 옷이 무화과나무 잎 옷입니다.(창세3,7)
그러나 진짜 죄를 없애 주시기 위해, 덮으시는 옷, 곧 하느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이 죽어 남긴 가죽, 그 의로움의 옷을 다시 입혀주십니다.(창세3,21)
그 어린양의 죽음, 그 희생, 그 예수님의 대속,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말씀을 하늘의 일, 구원의 참 진리로 께닫게 되면~ 그리스도의 피로 온갖 더러운 부끄러운 죄, 악에 물든 양심까지 모두 씻겨 깨끗해 졌음을 깨닫고 믿게 될 것입니다.(히브10,22)
사람은 - 그 복음, 약속의 말씀으로 깨끗해진다. 하셨습니다.(1티모4,4-5참조)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 자신이 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위해 살아온 짐승임을 바로 인정합니다. 그리고는 자녀들이 먹는 하늘의 참 양식을 청합니다.
백인대장이 자신의 열성 그 모든 것은 자격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한 말씀을 청했던 그 믿음인 것입니다.
(마태8,8)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 자신이 하늘의 참 양식- 그 한 말씀이 개, 죄인임을 고백했기에 ~ 이제 주님의 그 한 말씀이 여자를 용서, 자유로 지배하십니다. 그 한 말씀이 그 여자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1테살2,12 로마5,20-21참조)
그러니 사람에게 선악의 말, 그 법으로 속였던 그 마귀의 힘, 그 법의 힘을 잃은, 곧 법의 그 단죄의 힘이 쫓겨 나간 것입니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 마귀는 나갔지만 누워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엄마가 딸에게 자기가 받은 하늘의 참 양식을 먹여야 합니다. 그것이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의 큰 계명의 완성인 것입니다.
사람의 도덕과 윤리의 말, 사람의 규정과 교리 그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 계명인 십자가의 복음- 그 예수님을 참 진리, 참 양식으로 먹여 일으켜야 합니다.
(탈출15,25)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십자 나무로, 쓴물이 단물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계명입니다.
그 계명, 말씀을 진리의 양식으로 먹이지 않으면~ 나갔던 마귀, 곧 사람의 말이 다시 들아와 다시 죄인으로 만듭니다.(마태12,43-참조)
(히브1,3) 3 아드님(예수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내)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아멘 -*^ㅇ^*-
2022년 02월 10일 목요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매정한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어떤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마귀 들린 자기 딸을 치유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평소의 예수님 같아서는 여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실 법도 한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청을 거절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자녀’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강아지’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오늘날같이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시대라면
강아지라는 표현에 큰 거부감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당대사람들은 ‘개’를 매우 부정적인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누군가를 개나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꽤 무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숨은 의도는 여인이 지닌 믿음이 드러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거칠었던 표현은 사실 그를 자극하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시험대에 오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자녀와 강아지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굳건한 믿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청들이 있습니다.
또 이를 들어주시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한 경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믿음의 시험대에서 매일 그분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속에서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절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마르7,24~30)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원문의 성경은 마르코 복음 7장 26절에서 그 여자가 청하고 있는 것과 마르코 복음 7장 27절에서 예수님 역시 그 여자의 요청을 거부하시는 대답을 모두 미완료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5장 22~26절에는 마르코 복음보다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그 여자가 예수님께 소리지르며 자신의 딸을 고쳐 주기를 원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이에 제자들이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 주어 빨리 보낼 것을 요청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4)고 딱 잘라 대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도와주기를 간청한다.
바로 이런 상황 아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르코 복음 7장 27절에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만 그 여자의 계속적 청원과 예수님의 계속적인 거부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과정을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거부의 말씀을 하신 사실을 소개하며, 의도적으로 그 여자의 소원에 대해 보다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반대로 예수님의 계속적 거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간청하는 그 여자의 믿음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7장 27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5장 26절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직역하면 '너는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게 되기를 허락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다'에 해당하는 '아페스'(apes; let)의 기본형 '아피에미' (aphiemi)는 '허락하다'는 뜻이며,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동사는 잃어버린 양으로서의 유대인들을 향한 사목이 예수님께는 우선이기 때문에(마태15,24), 그 일을 하도록 당신을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먼저'로 번역된 '프로톤'(proton; first)은 여러개 중에서 '첫번째'라는 뜻으로서, 이 단어 또한 지금 예수님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유대인에게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단어는 둘째, 셋째 등의 다음 순서가 있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추후에 이방인에게도 있을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로마1,16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가까이에서 듣고 수많은 기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어도, 여전히 영적 무지와 불신앙적 거부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많은 슬픔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유대인들이 당신을 거부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는 자신의 사명을 다시 고취하기 위하여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자가 도움을 구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가 갖고 있는 유대인을 향한 당신의 관심을 그 여자에게 내비추고 계신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비록 표현적으로는 이방인인 그 여자를 무시하는 투의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만, 그 이면에는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기에 경멸적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유대인을 향한 자신의 관심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한 그 여자가 하느님의 은혜로운 기적을 과연 수용할 믿음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신 것이다.
한편, '강아지들에게'로 번역된 '토이스 퀴나리오이스'(tois kynariois; to their dogs)의 기본형 '퀴나리온'(kynarion)은 야생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나 '작은 강아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강아지들'이란, 앞에 사용된 유대인을 의미하는 '자녀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여 '개들'(강아지들)로 지칭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을 향하여 갖고 있는 당신의 우선적 관심을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표현을 빌려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 여자를 향한 경멸조의 말씀을 던지신 것이다. 결코 예수님께서 이방 여자를 경멸하시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그런 경멸조의 말을 듣고도, 오히려 자신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아지의 처지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렸다.
그 결과로 그 여자의 딸은 즉각 치유받았으며, 그로써 이방 여자의 놀라운 믿음이 증명되었고, 예수님께 칭찬까지 받게 되었으며(마태15,28),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역사(役事)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유대인이 식탁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껏 누린다면, 자신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지극히 겸손하고도 진실로 강한 의지와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써 이렇게 놀라운 주님의 축복을 이끌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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