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2005년 《월간문학》 시조 등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받아
시집 『별이 뜨는 방』 출간
2010년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시인의말
시조단에 이름을 올린 지 올해로스무 해입니다.
철모르고 첫 시집을 내고· · · 오랜 시간이 흘러갔지만
한 번도 이 길을 놓친 적은 없습니다.
걷다 보면 엇길이고 가다 보면 샛길이었으나,
시조와의 동행은 언제나 기쁨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묵정밭을 일구는 심정으로
앞으로도 기꺼이 헤매면서 바람만바람만 가겠습니다.
2025년 가을, 배인숙
오지선다형에게
열심히 살아가라고
제대로 찾아보라고
'마'까지 슬쩍 얹고
매섭게 지켜본다
가짜에
진짜는 하나,
찾을 수 있나 본다
필터 갈기
우리 사는 웅덩이는 불순물만 고여 들어
흡반의 몸뚱이에 끝도 없이 달라붙는다
물줄기 길목을 막고 붉은 등을 켜 든다
무심히 걷는 발에 풀도 흙도 짓밟히고
무심히 던진 말에 대못을 치는 가슴
무심히 지은 죄목이 새까맣게 적혀 있다
가로등
깊게 허리 꺾으시고 품어 키운 자식 생각
가르마 곱게 타듯 아버지 불을 켜신다
어둠을 지운 골목길 달처럼 환하시네
빈자리 둘레 따라 그리움도 깊어 가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불빛도 여러 갈래
잠 못 든 그날 밤인가 뜬눈으로 서 계신다
품절이 임박합니다
눈과 귀 훔치는 솜씨 잽싸고 노련하다
데시벨 올라가는 TV속 광고 시간
이 정도 뭐 대수냐며 오리발도 여러가지
아차, 싶은 순간 은근슬쩍 끼워 넣기
이쪽저쪽 눈치 보며 요리조리 피해 가기
요지경 스리슬쩍 고개 알면서도 넘어간다
콩 아리랑
숨길 가쁜 오르막 꼬부랑길 아리랑고개
쓰고 달고 시금떨떨 콩 비린내 나는 골목 바쁘다rh 허둥지둥 등허리에 콩 튀어도 알콩달콩 재미나게 콩 한쪽도 나누리오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얼쑤 맛깔 난다 콩깎지는 덮어쓰고 번갯불에 콩을 볶아 콩고물은 묻혀 먹고 노란 콩은 콩 시루떡 검은콩은 콩조림 호박범벅 울콩 넣고 쌀밥에는 완두콩 싹을 틔운 콩나물 발효 식품 된장 간장 생긴 대로 깜냥대로 쓰리얼쑤 맛깔 난다
메주콩 뭉근히 삶는 날, 동짓바람 후끈하다
해설
구체와 실존으로 그린 사람살이의 진경
― 배인숙 시조집 『오지선다형에게』
임채성 시인
시조는 시인의 체험이 시적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되는 개인 체험의 산물이다. 그 체험이 작품 안에서 어떤 형태와 색깔로 만들어지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시인에게 달려있다. 사물을 대하는 시각과 관점, 세계관에 따라 주관적 진술의 차원을 넘어 객관적 형상화로 매조지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개인적 체험은 대개 우리 주변의 자연 사물이나 사건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사유를 통해 형상화된다. 배인숙 시인 또한 일상적 체험 위에서 몰입하는 사유와 감각적 언어로 진단해 가는 자기 모색의 언어가 돋보인다. 특히 대상물의 외양 묘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이 구현할 가치 체계를 되돌아봄으로써 사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이러한 깊이의 사색은 은유적 성취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저것 안 가리고 마음대로 보았다고
들은 말 못 삭이고 그냥 흘려 버렸다고
반 뼘의 그늘이 내린 내 얼굴을 보아라
어느새 서너 갈래 잔주름을 들여놓은
거울 속 한 여자가 자꾸만 낯이 설다
날짜가 지난 계약서, 잉크 몇 점 번져 있는
- 「초상화」 전문
초상화와 자화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누구를 그렸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초상화는 타인의 얼굴을 그린 것이지만, 자화상은 자기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고 그리면서도 자화상이 아니라 ‘초상화’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을까. 대체로 시적 자아의 자화상은 시인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연속적이고 순차적인 흐름에 따라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함께 사회적 책임과 역할까지 함의한다. 복잡다단한 세계에 발을 딛고 선 현대인의 초상은 물질주의에 함몰된 욕망의 그림자를 품고 있으며, 젊은 날의 꿈을 잃고 방황하는 추레한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주관적인 시선이 아닌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으로써 ‘초상화’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배인숙 시인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자아의 외피는 “반 뼘의 그늘이 내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저것 안 가리고 마음대로 보았”기 때문이며, “들은 말 못 삭이고 그냥 흘려 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물불 안 가리고 살아온 생활자’로서의 모습과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집쟁이’의 삶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 결과, “어느새 서너 갈래 잔주름을 들여놓”기에 이르렀다. “날짜가 지난 계약서”처럼 젊은 날의 이상이 사라진 현실, 신산한 삶의 이력이 ‘잔주름’으로 나타난 “거울 속 한 여자”가 “낯이 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시인의 이러한 자기 응시는 그 외 다수의 시편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집이 무어길래/ 평생 지고” 살면서 “오늘도 메마른 땅을/ 목을 늘여가는 나”(「달팽이」)이거나 “공중을 가로질러/ 하늘길을 끌고 가”지만 “줄에 매달려/ 벗어날 수 없는 새”(「케이블카」)와 같은 존재로서, “디지털 홍수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다// 쉽고도 가까운 길 눈앞에서 다 놓”친(「내 이름은 컴맹」) 이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인이 진단하는 자아의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 안에 갇혀 있거나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뒤처진 불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초상화」가 그리는 세계는 세속적 현실 너머의 이상세계를 꿈꾸고 있다 할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홍옥을 따며」는 “사과 한 알이/ 제 이름을 얻”기까지, “익어서/ 그리운 열매가/ 내 손안에 안”길 때까지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과 한 알이 열매를 맺어 탐스럽게 익어가는 것은 우리 삶의 과정과도 같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온갖 풍상과 희로애락을 겪는다.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각고의 과정을 겪어낸 ‘홍옥’은 화자의 ‘오늘’이자 시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달가운 단비만 먹고 나무들이 컸겠는가”라고 자문하는 「재래시장 숲」에서도 엿보인다. 이는 “제 몫의 햇살 한 뼘, 그만큼의 비바람에// 더러는 생가지가 꺾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그런 역경을 이겨낸 삶이야말로 결실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에피그램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현재와 자아를 응시하며 유토피아적 이상에 가닿기 위한 성찰과 관조의 단계로 나아가려 한다.
사람과 사회 속에서 적립된 체험적 사실들은, 한 시인의 시 세계 속에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온갖 희로애락을 경험한 후 얻게 되는 새로운 깨달음은 성찰과 관조의 경지로 이끄는 촉매제다. 성찰과 관조는 창조적인 미래로 가기 위한 일종의 ‘쉼’이라 할 수 있다. ‘시지프 신화’처럼 삶이라는 행위는 주어진 목적과 목표에 따라 똑같은 것을 반복 재생할 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쉼의 시간이 필요한데, 쉼은 ‘무위(無爲)’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무위’는 게으름이나 무기력, 공백이 아니라 고유 논리와 시간성, 언어 구조를 지닌 인간 실존의 찬란한 형태다. 그러므로 무위에서 빚어지는 성찰과 관조는 목적과 효용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삶을 편안케 하는 해독제이자 에너자이저가 된다.
엇모리, 자진모리 장단을 따라가다
굽이쳐 아스라이 가풀막 재 오를 때
점 찍듯
들이키는 숨
그런 향기 같은 것
오르막길 내리막길 인생 고개 몇 구비를
숨차게 넘어가다 쉰 목이 메어올 때
약속에
없는 숨결을
뉘 몰래 뱉는 것
- 「도숨」 전문
배인숙 시인에게 있어 시조를 쓴다는 것은 상처받은 자아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쏟아내는 일종의 화학물질과도 같아 보인다. 삶의 난장을 쉼 없이 달려온 시인은 삶의 고빗사위에 이르러 잠시 숨 고르기를 시도한다. 그래서 ‘도숨’이 필요하다. ‘도숨’이란, 판소리나 민요의 긴 대목을 노래할 때 가사 중간에 관객들이 모르게 들이마시는 숨을 말한다. 즉, 소리 사이에서 호흡을 고르거나 소리를 길게 뽑아내기 위한 기술적 호흡법이다. 노래하는 중간에 호흡이 딸리거나 부족해질 때 장단이나 가락의 쉬는 부분에 도숨을 넣으면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질풍처럼 몰아치는 “엇모리, 자진모리 장단”의 삶은 얼마나 숨이 가쁠 것인가. 몹시도 가파르고 비탈진 고갯길을 오를 때, “점 찍듯/ 들이키는 숨”이 필요하고, “인생 고개 몇 구비를// 숨차게 넘어”갈 때도 “뉘 몰래 뱉는” 숨결이 필요하다. 이러한 숨 고르기를 통해 시인은 사유와 통찰에 이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성찰과 관조라는 미학적 경지에도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배인숙 시인은 “산다는 건/ 군살을 버리는 일”(「다이어트」)이라며 삶의 여정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기 위하여 사유하며, 이를 통해 자각한 것을 시로 형상화하는 데 공을 들인다. 시공간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통찰의 본바탕이 되는 깊은 사색과 사유는 작품에 완숙미를 더한다. 시인은 “세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풀어내”는 ‘물소리’를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물의 율격’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연속적이면서 반복적인 소리의 리듬이자 “누군가를 향하여 세운 날”을 씻어주는 ‘언어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물의 지혜를 배우고 물의 덕을 본받으려는 화자의 태도는, “쏟아진 물만 먹고도 배고픔 전혀 없이// 기꺼이 온몸을 열어 그 무게를 받아 안는”(「스펀지를 닮다」) 스펀지에 마음을 기대기도 하고, ‘불순물’이 가득해 “물줄기 길목을 막고 붉은 등을 켜 드”는 “우리 사는 웅덩이”에서 「필터 갈기」를 시도하며, “웅덩이 깊은 저 속내 읽어볼”(「소(沼)」) 마음을 먹기도 한다. 이러한 시작 태도의 중심에는 의도하였든, 의도치 않았든 ‘물 흐르는 대로 살자’는 ‘무위자연’의 철학적 인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페르소나를 쓰고 정해진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배인숙 시인의 인생관도 셰익스피어나 채플린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가설무대 막이 오르면 “우리는 연습도 없이 드라마를 연기한다”고 한 「생방송」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인생은 연극이되, 리허설이나 리바이벌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라이브 ‘생방송’이다. 그리고 시인이 그리는 밝은 미래는 “잔설 뚫고 나온 봄”(「줄탁동시(啐啄同時)」)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봄은 추운 겨울을 견뎌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자 선물이다. 그러한 봄이 시인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이번 시집의 맨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아지랑이」는 시인의 삶과 문학적 지향점을 잘 드러낸다. 아지랑이 너머의 풍경은 흐릿하면서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시인의 봄은 선명하지는 않은 실체로 오고 있다. 이는 “열심히 살아가라고/ 제대로 찾아보라고// ‘마’까지 슬쩍 얹고/ 매섭게 지켜보”(「오지선다형에게」)는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가짜들 속에 숨어 있는 단 하나의 ‘진짜’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당찬 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확실하고 분명히 온다는 사실, 시인은 그런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봄을 갈망하는 시인의 마음은 시집 속 다른 시편에서도 발견된다. “연초록 물결 위에 진달래 포말들이/ 산자락 덮치”(「파도꽃」)며 오기도 하고, “자연의 빛 물감 풀어” ‘사방천지에 천연 옷감을 펼쳐 놓’(「꽃사태 지다」)기도 하며, 급기야 ‘이 땅의 끈질긴 목숨’으로 승화되는 ‘쑥’의 모습(「봄은 쑥쑥」)으로도 표출된다. 이를 통해 배인숙 시인은 “저린 몸 담금질하며 눈발 속에 홀로”(「매화」) 피어 있기를 갈구하며, 봄이 상징하는 신생과 재생의 생동감 넘치는 생명력을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 덧입히고 있다.
또한 안온한 조화와 화합을 꿈꾸는 시인의 바람은 ‘비빔밥’을 통해 구체화 된다. 이번 시집 속에 몇 편 안 되는 사설시조 중의 하나인 「비빔밥」은 대구와 반복이라는 리드미컬한 수사의 옷을 입고 더욱 맛깔나게 그려지고 있다. “밥과 나물 찰떡궁합”처럼 다양한 음식물의 조합인 비빔밥은 조화와 융합의 상징이다. 각각으로 떨어져서는 한 가지 맛밖에 낼 수 없지만 “고소한 맛 달큰한 맛 향도 짙어 깊은 맛 대표 선수 모두 모여 무치고 볶아내고 지지고 졸여 내어 고루고루 비벼”지면 서로 뭉치고 어우러져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기막힌 맛의 향연을 선사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환히 웃”으며, “동서남북 안 따지”는 그날까지 ‘비빔밥’ 같은 융화의 미래를 위해 시인은 “붓을 들고 열심히 구애”(「캘리그라피」)의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배인숙은 기억과 현재를 엮어 존재를 형상화하고, 그것의 의미를 성찰하며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시인이다. 그가 살려낸 가장 활력 있는 실존은 결국 우리의 생활 무대인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그녀는 세상의 온갖 존재들이 한데 어울려 부조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불완전한 완전주의자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생활인으로서 현실에 발을 붙인 현실주의자이며, 그러한 현실에서 안온한 미래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작품으로 구현하는 시인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