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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
가톨릭 신자들은 낯선 지역을 가게 되면 먼저 주변 성당부터 찾아보곤 합니다. 그곳이 제법 유서 깊은 곳이라면 성당의 외관이나 내부 장식을 꼼꼼히 살펴보지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나 성스러운 조형물을 바라보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져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작품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고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계시’(revelatio) 그 자체에 있습니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신비입니다. 이 계시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완전한 계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이 우리 실제 삶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감각 능력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 존재와 관련됩니다. 중세 신학자 보나벤투라는 인간 내부의 ‘고귀한 형상’(nobilis forma)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는 아름다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사례를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를 통해 찾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거친 대리석 덩어리에서 하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을 조각으로 드러냈지요. 즉, 그는 그저 대리석 안에 있는 본래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그 주변물을 ‘제거’했다고(ablatio) 합니다. 이미 대리석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형상이 숨어 있기에 조각가는 붙어있는 주변 대리석을 치워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 내부에는 각각 고귀한 형상이 주어져 있습니다.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형상은 하느님의 계시를 지각하게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지각 능력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본질적인 형상을 찾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나벤투라 성인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붙어 있는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아름답고 고유한 형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순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아닌 내 능력만을 돋보이게 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시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불순물을 제거한다는 것은 인간의 선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주관하는 결정적인 한 사람인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란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고단하고, 반복되는 삶은 피로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단함 속에서도 헌신할 때에 우리 안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이 지니는 정당성입니다. 비록 고통과 어려움의 상황 안에서 상처받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여 세상을 해방시키는 아름다움의 창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가톨릭교회는 매해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와 함께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지냅니다.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뿌리를 확인하고 일치를 지향하며 함께 기도하는 주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몇 차례의 분열을 겪었습니다. 1054년, 로마 가톨릭과 동방 교회는 상호 파문을 하면서 단절되었고, 동방 교회는 스스로를 ‘정교회’(正敎會, Orthodox Church)라고 불렀습니다. 1517년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가 갈라졌으며, 이후 개신교는 여러 종파로 분화하였습니다. 1534년에는 영국의 ‘수장령’ 제정으로 성공회(聖公會, Anglican Church)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교 일치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건 19세기 후반입니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년 재위)는 당시 동방 교회를 일컫던 ‘이교인’과 프로테스탄트를 칭하던 ‘열교인’이라는 부정적인 용어 대신 “갈라진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교회 일치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1958-1963년 재위)은 동방 교회와 개신교의 대표들을 공의회에 초대하였고 ‘그리스도인 일치촉진사무국’을 창설하였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1963-1978년 재위)은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1964)을 발표하여 교회 일치에 신학적 전망을 제시하였습니다. 1999년에는 가톨릭교회와 루터교세계연맹이 ‘의화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2006년에는 감리교도 함께 참여하여 합동 선언문에 서명하였습니다.
한편,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폴 왓슨 신부는 1908년 ‘교회 일치 기도 주간’을 제안해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2월 22일인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 당시에는 1월 18일이었고, 25일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든 교회가 하나 되자는 취지였습니다. 1968년부터는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가 공동으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1968년 1월, 명동성당에서 최초로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한데 모여 일치 기도회를 열었고, 이후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상시적이고 안정적인 일치 운동을 위해 ‘한국그리스도교일치회의’가 조직되었고, 2014년 5월에는 교회 일치를 위한 공식기구인 ‘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올해 신앙과직제협의회가 발표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담화문의 제목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우리 모두 외면과 배척이 아닌 이해와 포용으로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다짐하며 이에 필요한 은총을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가톨릭 신학]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 : 자연법
본당에 나가 특강을 하다 보면 신자분들께 “신부님, 이것은 죄인가요, 죄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저는 마태오복음 19장 16절의 부자 청년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는 모든 신앙인이 품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윤리적 선이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그것을 실천해야 할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다소 의아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윤리는 때로는 엄격해 보이며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합니다.
하지만 과연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이 정말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 의지는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보편적인 구원 성취를 위해 인간에게 분명한 지도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는 ‘자연법(lex naturalis)’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도덕 법칙이고, 보편적인 윤리를 위한 객관적인 토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연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연법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십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자연법은 불변하며 언제나 근본적으로 유효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원칙은 하느님의 법이므로 결코 파기될 수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설사 어떤 시대가, 어떤 문화가 이를 어긴다 할지라도 결국 이성이 올바른 질서를 불러일으켜 다시금 되살아나게 합니다. 하느님의 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윤리적 가르침은 모두 이 자연법, 즉 계명에서 비롯됩니다. 사형 제도, 안락사, 낙태 등과 같은 민감한 문제들에 대한 판단이 이 계명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이 법은 이미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에게 새겨주신 것이므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특정 문화와 사상이, 각각의 개인이 여기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때로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가 비롯되고 죽음의 문화가 탄생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계명을 어기는 죄를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교회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완고하게 여겨진다면, 혹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된다면 이 자연법의 개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연법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가장 객관적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생활교리] 주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날!”
가톨릭교회는 전례주년, 곧 한 해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것을 ‘자기 의무’로 여긴다. 특히 ‘주일 미사 참여’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제3계명)는 계명을 바탕으로 신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교회법』 제1247조). 사실 주일(주님의 날)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뿌리인 부활을 “매주 상기시키며 현재화시키는” 날로써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날”(『주님의 날』 75-76)이다. 주님 부활에 대한 체험과 선포로 복음 선포가 시작되고, 신약성경이 기록되며, 그리고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다면,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전례주년 전체의 토대이며 핵심”이자 “최초의 근원적인 축일”(『전례헌장』 106)이다.
때문에 성경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 공동체는 주일을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날로 여기며(1코린 16,2; 사도 20,7-12 참조),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성찬례 거행을 위해 계속해서 주일 집회를 가져왔다(『디다케』 14,1). 이렇듯 주일 준수는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에도 신자 공동체 모두는 주일에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 이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로서 살아간다.
다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주일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점점 약해지며, 주일미사 참여율 또한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바라건대 주일 준수를 단지 고정된 계명을 지키는 일로 축소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왜 교회가 주일 미사를 의무로 규정해 놓고, “이 의무를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가톨릭 교회 교리서』 2181)은 중죄에 해당한다며 강한 어조로 말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주일 의무는 신앙생활을 최소한도로 이어나가기 위한 필요성에 근거한다. 사실 주일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 온전히 참여”(『주님의 날』 81)하기란 매우 어렵다. 일례로 코로나19로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가 중지되었을 때 떠올려 보라. 미사에 대한 ‘간절함’에서, 미사 없이 지내는 ‘익숙함’으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 없이 지내는 ‘편안함’으로 너무나 쉽게 바뀌지 않았는가!
믿음의 대상은 하느님이시지만, 그 믿음을 얻고, 배우며, 그리고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특히 신앙공동체 전체가 함께 모이는 주일 미사에 꼭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 우리는 주일미사 참여를 통해 말씀과 성체의 놀라운 은총을 기반으로 동료 신자들의 기도와 영적 동반 그리고 형제애를 주고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신자로서의 신원을 확인하고, 무엇보다 ‘살아있는’ 신앙을 보존하고 키워나갈 수 있다. 한 마디로 주일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날”(성 요한 바오로 2세)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주일을 지킴으로써) 주일이 우리 신앙을 지켜주는 것일까?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주님 세례 축일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축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1월 6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내는데, 주님 공현 대축일을 1월 2~8일 사이 주일에 지내고 그날이 1월 7일이나 8일일 경우에는, 다음날인 월요일에 지냅니다. 2024년 주님 세례 축일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부터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구원 역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보았습니다.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려온 성부의 음성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잉태 순간부터 충만하였던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께서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의 직무를 수행하는 모든 순간에 함께하였습니다.
이날 독서로 봉독되는 이사 42,1-4.6-7은 ‘주님의 종 첫째 노래’의 일부인데, ‘메시아의 도유와 파견’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도유와 파견에 관한 주제는, 주일일 경우 제2독서로 봉독되는 사도 10,34-38(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위의 내용들은 이날 감사송에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새로운 세례의 신비를 드러내시고,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이제 주님 세례 축일로써 주님 성탄 대축일부터 시작된 성탄 시기가 끝이 나고, 다음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축일에 이어지는 주간은 연중 제1주간이 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를 씻는 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로 물든 인간과 맺은 유대 관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는 장엄한 순간, 세례를 통해 당신을 낮추시는 겸손과 죄인을 향한 연민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연중 시기를 새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가톨릭 신학] 가톨릭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
신학(神學 Theologia)이란 하느님(Theos)에 대하여 이야기(logos)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 즉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올 한 해 동안 이 자리를 통해 4명의 젊은 신학자들이 ‘가톨릭 신학’이라는 주제로 연재하게 됩니다. 교의신학, 윤리신학, 성서신학을 전공한 신학교 교수 4명이 천주교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하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주제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가톨릭 신학’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드리고, 신앙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일미사 때 고백하는 ‘신경’(信經)은 ‘믿을 교리를 기도문’으로 만든 것입니다. 신경은 믿을 교리, 즉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 핵심은 성경과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인데,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것,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신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성부)하시고, 인간을 구원(=성자)하시며, 성화(=성령)시키신다고 합니다. 특히 하느님 구원 계획 전체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하게 드러납니다.(「계시헌장」 4항 참조) 따라서 가톨릭 신학과 신앙의 출발이자 핵심이며 결론은 이 두 가지, ‘삼위일체 하느님’과 ‘그리스도 중심성’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창세기 1,1의 말씀이 요한복음의 첫 시작에서 새롭게 해석됩니다. 말씀이 창조 이전에 계셨고, 그 말씀이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고, 결국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어줍니다. ‘하느님 말씀’이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고, 우리 삶에 대한 답입니다.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귀와 마음에 잘 새겨듣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안에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자 중심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과 은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가요? 신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그러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가능하고, 하느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날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가정을 통해 드러난 사랑과 덕행을 본받고자 제정된 축일입니다. 통상적으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에 지내지만, 작년처럼 주님 성탄 대축일이 주일일 때는 12월 30일에 지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비교적 최근에 생긴 신심 축일입니다. 성가정에 관한 공경은 17세기 이후 유럽의 여러 신심 단체들을 중심으로 등장했는데, 19세기 특히 캐나다에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처음 공식적으로 성가정 축일을 장려한 교황은 레오 13세(1878-1903 재위)인데, 그는 성가정 축일을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셋째 주일’에 지내도록 제정하였습니다. 이후, 보편 전례력에 포함되었다가 빠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는데, 교황 베네딕토 15세(1914-1922 재위)가 1921년 이 축일을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첫째 주일’에 지내기로 정함으로써 보편 전례력에 다시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에서는 성가정의 빛나는 모범을 언급하면서 우리의 가정 역시 하느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 저희를 천상 성사로 길러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성가정을 본받아, 현세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마침내 영원한 천상 가정에 들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시작하는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모두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주님 은총 속에서 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기고] 가톨릭교회는 동성 결합을 인정하는가?
12월 18일 자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서명하신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대하여>라는 선언문이 화제입니다. 지면도 제한된 짧은 기사의 제목만 보고 ‘가톨릭교회가 동성 결합을 합법으로 인정한 것인가?’ 하는 오해도 빚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에서 작성한 설명글을 바탕으로 이번 선언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 선언은 성과 결혼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변경하거나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톨릭 전례 행위’의 맥락에서 이해해 온 ‘축복’ 행위의 개념을 더 확장하는 선언입니다. 확장된 ‘축복’의 대상에 동성 커플이나 가톨릭교회 가르침을 벗어난 혼인 상태에 있는 이들이 포함되지만, 이 축복이 동성 결합 자체에 대한 교회의 승인 또는 ‘역사적인 전향’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선언의 핵심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축복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신분, 어떠한 혼인의 상태(가톨릭교회 가르침을 벗어난 혼인 상태나 동성 결합의 상태 등)에 있더라도, 그들이 청하는 ‘사목적’ 축복을 허용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것이 본 선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동성 커플이 원할 경우 가톨릭 사제가 이들에 대해 ‘축복을 집전해도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집전’은 전례 의식의 거행을 의미하기에, 이들에게 전례서와 전례 의식에 따른 축복을 집전하는 것은 문헌이 발표된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또한 이번 선언문은 동성 커플을 축복하는 것이 교회의 전례 행위로 인정되거나, 더 나아가 교회가 동성 결합 자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 의식이나 복장, 몸짓, 문장 등이 사용되는 축복을 해서는 안 되며, 가톨릭교회의 전례인 미사의 형태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의 결혼식 형태를 띠어서도 안 된다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동성 간의 성행위는 ‘그 자체로 무질서’로서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깊이 뿌리박힌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더라도, 그들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여 받아들이며,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사목 현장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 동성애 행위와 동성 결합을 교리상 ‘죄’로 인식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나 동성 커플에 대한 인식도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이번 선언은 동성 결합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동성 결합의 형태를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교회 내의 시각 변화에 큰 의미를 줄 것으로 분석됩니다. 동성 결합의 형태를 살고 있는 이들도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그들의 바람과 그들 개개인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교회 구성원이 분명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이 선언의 주된 내용입니다. 교회의 공적 권위로 행하는 전례 행위로서의 ‘축복’이 아니라, 커플들 개개인에게 사목적 배려로서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