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4년이 흘렀다. 전주00장례식장에서 소고당 고산 선생을 배별하는 부군(시산 김환재)의 모습은 생각보다 의연했다. 덕을 쌓고 올바른 길을 위해서는 온몸으로 울었지만 오늘만은 대선비다운 고결하고 숭고한 품위를 잃지 않았다. 나는 부군의 양손을 잡고 “좋은 곳으로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고 입발림한 내 자신이 오히려 외람되었다. 그토록 언제나 모든 대소사에 직박구리처럼 부부 동행하는 도타운 금실우지 천정배필이었다. 아무리 부부가 살아생전 존경하고 사모하여 우러르는 앙망종신 했을지라도 헤어질 때는 불의의 사고가 아닌 바엔 똑같이 이 세상을 함께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듬해 부군은 소고당의 뒤를 따랐다. 그러기에 시산과 소고당의 부부인연은 숙명 이상의 천명이었다. 불우헌 정극인에 의해 비롯된 가사문학은 전남 담양의 송순, 장흥의 백광홍, 서울에서 태어나 16세에 선산이 있는 담양으로 내려와 자연 숭경과 자신의 풍류를 운치 있게 「성산별곡」에 담아낸 정철, 경상도 영천의 박인노, 해남의 윤선도, 그리고 정읍 칠보의 김경흠으로 이어오다가 전형적인 가사운율의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 전남 장흥 출신의 소고당 고단(高煓, 1922~2009) 여사가 혜성같이 나타나 가사문학의 가맥을 유일하게 이어왔음을 해남 출신의 법정스님이 보낸(1985.12.18) ‘소고당님께’란 서찰(『소고당가사 제3집전』) 속에 잘 나타났다. 아래에 소개하는 스님의 글은 한자를 모두 한글로 바꿨으나 띄어쓰기는 본문 그대로 옮겼다. “<관략> 규방가사가 지난 세월의 고전에만 갇혀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에도 그 숨결이 이어져 내리는 걸 대하니 기쁘고 감사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오늘의 언어로도 이런 가사가 전승되었으면 싶습니다. <하략>” 성은 김경흠은 정읍 칠보에서 태어나 평생 본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왔으나 필사본만 남겨져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에 비해 소고당 고단 선생은 시조부가 칠보에서 이웃 산외로 이사한 이후, 그곳과 전주를 오가며 『소고당가사 제3집전』(2010.3.)까지 펴내면서 살아생전 왕성하게 활동했다. 둔자가 00중학교장 재직 시, 소고당 선생의 부군이 정읍 관내 초·중·고 학교에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공교롭게도 둔자는 국어과 출신으로서 가사문학에 관심이 있다 보니 어르신과 아주 친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의 친가인 전남 장흥 평화마을에 ‘소고당가사문학비(장흥문화원, 2003)가 세워진 이후, 시가인 정읍 산외중학교 교정에 ‘소고당가사비’ 제막식(2007.5.) 때, 둔자는 소고당 고단 선생을 직접 뵙고 인사드릴 수 있었다. 둔자는 전라북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지난날(2010~2011) 관내 학생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칠보의 「태산선비문화관」에서 ‘상춘곡’을 토요일 방과후에 강의한 바 있었다. 이로 인해 이 고장의 불우헌 정극인을 비롯한 성은 김경흠과 그의 가계, 그리고 소고당 고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후, 칠보에서 ‘태산선비문화제가’ 매년 4월에 열릴 때마다 학생들과 일반인들로 하여금 ‘상춘곡 암송’과 ‘상춘곡 노래 부르기’ 대회에서 심사위원장으로서 즐겁게 활동해 오고 있다. 특히나 초등학교 2·3학년 학생이 ‘상춘곡’(39행 79구)의 난해한 한자 성어를 잘 이해하지 못할 텐데도 줄줄 외우는 깜찍함에 놀랐다.
成隱 金景欽 선생의 歌詞(20☓20cm 筆寫本) 조선후기 태인(지금의 정읍시 칠보면)에 살았던 성은 김경흠(金景欽,1815~1880)의 가사는 주로 도덕 가사가 주류였다. 「삼재도가」, 「경심가」, 「불효탄」 등은 필사본 가집 『가사』에 전한다. 작품의 내용은 대부분 효가 주제였다. 만물을 귀함과 천함으로 구분하여 사람과 짐승이 서로 다른 점을 지적, 사람 중에서도 불효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며 효의 실천궁행을 강조했다. 작품의 전편全篇은 주로 4·4조(145구) 위주로 종래의 가사체 형식을 빌려 우리 전통시가를 그대로 전승했다. 「불효탄」(칠보면 『향토사』, 1940.9.)의 처음과 끝부분은 이렇다. “愚昧 너히들은 不孝歎을 드려셔라(어리석은 너희들은 불효 탄식 들어보소) 天開地闢 万物길졔 貴賤으로 겨시니(천지가 개벽하여 만물이 생겨날 제, 귀천으로 생겼으니) ~ 白玉의 검은때는 갈면다시 히려니와(백옥의 검은 때는 갈면 다시 희어지나), 이내 몸 지은허물 갈가망전혀없다.(이내 몸 지은 잘못을 지울 가망은 전혀 없다)” 성은 김경흠을 비롯한 그 자손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청사를 빛나게 했기에 이 기회에 잠깐 소개하겠다. 큰아들 춘우정 김영상(金永相, 1836~1911)은 1895년(고종32)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가 운명을 개탄, 두문불출하다가 정읍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궐기한 병오창의(丙午倡義, 1906.6.4. 최익현 등 38명)에 동참한 후, 일제의 은사금 사령장을 찢어버렸다는 불경죄로 끝내 옥중고혼이 되었다. 그의 「절명시」와 함께 『춘우정 문고』가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손자 김균(金㽦,1888~1978. 김경흠의 증손)은 일본이 싫어서 칠보의 깊은 은석동에서 제자들과 논밭을 일구며 학문을 가르쳤고 시문‧비문‧상량문 등의 글을 담은 문집 「염재집」이 전한다. 특히, 『大東千字文』(1948)을 편찬, 중국 주흥사의 『千字文』과 함께 지금까지도 학생들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은 원래 사대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우리의 민요적 율격인 3음보에 향가와 고려가요, 그리고 한시 등의 내용 위주로 발전하면서 4음보 율격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양반 집안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여성들의 슬픔과 원한, 남녀의 애정, 그리고 고된 시집살이의 고통 등이 담긴 여성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작품이 성행하면서부터 이를 ‘규방(내방)가사’라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선조 때의 허난설헌(본명 허초희)의 「규원가閨怨歌」는 유교사회에서 여인의 한과 서러움을 담은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영·정 때부터 민간에 널리 유행하면서 일반 부녀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이러한 파급효과는 조선 말기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부녀자 사이에 급속히 번져 약 6,000여 편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시대 변화에 따라 소고당紹古堂 고단高煓의 규방가사는 남존여비로 말미암은 시집살이의 고달픔이나 우울하고 암울한 슬픔의 소재를 멀리하고 당당한 부녀의 도와 아름다운 고향과 자연, 그리고 역사를 주로 담고 있어 크게 주목받고 있다. 호남지방 중에서도 당시 태인현 고현내(지금의 정읍시 칠보)는 가사문학의 비조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을 담아낸 터전이었기에 소고당의 가사문학 역시, 만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소고당은 선장본 가사집 세 권(1991.1999.2010)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작고하기 5년 전, ‘자랑스런 전북인’ 대상(문화예술부분, 2005.10)까지 수상하였다. 이어 부군(詩山 金煥在)마저 그 이듬해에 ‘전라북도 장한어른상’을 수상하고, 소고당이 작고한 다음해인 2010년에 운명 함으로써 부창부수夫唱婦隨를 부창부수婦唱夫隨로 부부의 연을 매듭지었다. 덕분에 둔자는 학교 재직 시, 어르신(부군)의 부탁으로 「가사문학반」을 조직, 운영했던 좋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소고당 가객은 전남 장흥읍 평화리 죽심원에서 창평고씨 고경명 15대손으로 1922년에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1533~1592)의 3부자는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했다. 당시 60세의 고경명 의병장이 쓴 절절한 ‘마상격문’이 전한다. 한편, 고경명 의병장의 후손 중 일부가 전남 창평을 떠나 장흥의 평화마을에서 살았다. 장흥은 제암산·억불산·사자산·천관산 등 명산이 많은 까닭으로 소설가 이청준·한승원·송기숙·이승우 등과 시인 김제현⸱백수인⸱전기철⸱위선환 등 100여 명이 넘게 배출, 이곳에서는 글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하여튼 작가가 많이 나온 고장이다. 억불산 자락의 소고당의 친가 평화마을의 무계고택(霧溪, 전남문화재 제161호)를 찾는 관람객의 발길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수백 년 된 팽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세월의 무게감이 후덕한 탓이리라.
장흥 무계 고택 (長興 霧溪 高永完 古宅)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89에 소재한 전남 문화재자료 제161호 한편, 시조부媤祖父 규당 김영채(1883~1971) 참봉은 정읍시 칠보에 살다가 바로 인접 산외면 평사리에 집을 지어 옮겼는데(1939년) 그곳이 바로 소고당의 시댁 종가가 되었으나 이들 부부가 작고하자 지금은 규방의 온기마저 싸늘한 채, 소고당 고단의 가사 「소고당 찬가」만이 소고당을 을씨년스럽게 지키고 있다. “상두산 둘러있고 용두산 굽이치며/ 독고봉 봉우리에 백운도 머무르고/ 온갖비조飛鳥 춤을추니 이승지 이터전에/ 소고당 좋을시고 예로부터 맥이흐른/ 평사락안 길지로다 남쪽에 있던대문/ 북향으로 옮겨달고 바깥행랑 새로지어/ 앞뜰에 꽃을심고 후원별당 방들이니/ 활연흉금 시원하다 화조월석 이터전을/ 춘당추월 소요하니 인후하신 우리조상/ 추모음덕 새로워라 모성숭조 이가문을/ 슬하자손 만세영으로 영세무궁 이복지에/ 천추만대 누리과저” -1976 모춘 평사리에서 소고당 안주인 고단 식識 소고당은 시댁 일문이 자리 잡고 있는 산외뿐만 아니라, 인근 일원까지 두루 화소로 삼아 가사작품들을 일궜다.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빼어난 산천의 자연 경계의 아름다움을 가사문학으로 그려낸 시댁의 지명을 딴 「산외별곡」(292구 73행)은 도강(道康, 전남 강진의 옛이름)김씨 대종부로서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 받들고 가문의 화목과 가족들의 두터운 애정으로 감싼 정성이 넘친다. “가세가세 어서가세 산외집에 어서가세/ 전라도땅 정읍산외 평사낙안 바삐가세/ 고운고개 염재고개 완주정읍 경계까지/ 연화도수 좋은경치 화죽리랑 도화동을/ 언뜻보고 지나갈재 진계리 정량리라/ 운전안계 평도사평 능암약동 용머리에/ <중략> 겨울홍시 산외건시 식혜강정 산자엿을/ 벗님네야 많이들소 영산홍 자산홍이/ 활짝피어 나비올때 서울손님 다시오고/ 수수기장 구해다가 별미밥을 지어두고/ 햇쑥뜯어 절편찌고 진달래 화전이며/ 새참한 쑥부쟁이 머위뜯어 양념해서/ 인아족척 귀한손님 끊임없이 내왕하며/ 우리동기 대소지친 남녀노소 모여앉아/ 조상의얼 되새기며 만대유복 전코지고/ 이기쁨 이흥취로 산외별곡 지었거니/ 시댁고향 정읍산외 평사낙안 만만세여” -2007년 정읍산외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산외별곡 가사비’에서 부군 시산 김환재는 전주향교 전교를 지냈고, 소고당은 전주시 유도儒道회부녀회장과 한국여성예림회 전북지회장, 그리고 연묵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에서도 부부는 적극적이었다. 이런 행적은 가사문학에 대한 감사패 수상에 즈음한 답사에서 잘 노정되고 있다.
硯墨會長 시절 회원전 기념 左 두 번째 소고당, 세 번째 강암선생 ”강암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 회원님들과 더불어 연묵회의 한 자리를 더럽힌 지도 어언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중략> 아무 짝에도 쓸모 없고 알맹이 없는 졸작인데 꿈에도 생각지 아니한 감사패를 저 가슴에 안겨주시니 기쁨보다 부끄럼이 앞서고 제가 많이 뻔뻔스러워졌다 싶어서 정말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더욱 더 정진하여 소멸되는 규방문학을 이으라는 채찍으로 알고, 열심히 노력해서 회원님들의 성원에 보답할까 합니다” -辛酉 1981년 4월 高煓 소고당은 유림 대종가의 맏며느리로서 여러 형제와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쫓기다 보니 50대 중반부터 가사문학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천부적인 시적 재능이 뛰어났기에 그 짧은 세월 동안에 세 권의 가사집을 펴낼 수 있었고 전국 종부宗婦 모임에도 적극적이었음을 ‘제2회 종부대회 개회사’에서 잘 비춰지고 있다. “<관략> 불천위 조상을 모신 종부님들 남달리 오대 봉사하시며 문중의 공인으로 생활하신 종손 종부님 그 노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효와 충을 엄훈자교의 가르침 속에 위계질서의 전통을 유지해 온 우리들의 가정이 요즈음엔 그것이 무너지면서 마땅한 대안도 없이 嚴과 慈라는 부모의 음양 체계가 사라졌다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중략> 끝으로 오늘의 모임을 공동 주최하여 주신 전주일보사와 전북은행을 비롯한 여러분의 협찬과 후원에 진심으로 감사한 인사를 올리면서 두서없는 말씀으로 인사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癸酉 1993년 6월11일 한국여성예림회 전북지회장 高煓 소고당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고 강호 지식인들과 교유도 활발했던 편린을 대구의 권영철 교수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구구절절 금성옥진임이 잘 드러나 있다. 내용이 길지 않기 때문에 전문을 『소고당가사 제3집전』에서 인용하여 소개한다. “지난번 뵈옵게 된 것은 무한히 기쁨니다. 섣달 대한도 지나고 조용히 내리는 비는 대지를 촉촉이 적셔 풍성한 가을을 약속한 듯합니다. 이때 양위분 기력 안녕하오신지도 모르면서 준비해 뒀던 마고자와 조끼차는 이제야 우송하오니 粗品이오나 笑納하소서 화갑수신華甲晬辰이 되오셔 슬하 번영하시니 만당성연으로 질추의 노름과 반의의 영효로서 가작 하셨을 일 외오 상상하면서 늦게나마 하경드립니다. 전번 말씀드린 대로 정춘덕씨 차편에 민 박사와 두 분 선생님 꼭 누지에 왕림하소서. 만일 민 박사가 못 오신다면 혼자 오시기 적적하실 터이니 저의 비족한 분과 같이 오셔도 좋습니다. 그럼 근간 뵈올 날을 고대하면서 두서없는 말씀 이만 줄이나이다.” -戊辰 1988년 7월18일 전주에서 고단 드림 소고당의 규방가사는 최명희의 『혼불4』에서 「조표자가弔瓢子歌」가 소개된 바 있고, 국내뿐만 아니라 뉴저지주 프린스턴대학교 동양도서관 이종숙이 2002년 3월6일, ‘고단님께 드립니다’란 서찰(『소고당가사 제3집전』)에서 보이듯이 미주까지 파급되었다. 서찰 속 한문은 한글로 바꿔 표기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난여름, 시동생 김환종 선생 내외분 편에 보내 주신 『소고당가사사집상하』 전권을 오늘 일자로 동양도서관(Princeton Univer sity East Asian library)에 속한 책으로 카타로그가 끝났습니다. 아마 이 『소고당가사집』을 펼치는 사람마다 고단님의 난초 같은 은은한 향내 나는 인품을 흠모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심 비옵니다. 귀국하는 길이 있을 때는 찾아뵙겠습니다.” 여자는 성년이 되면 결혼하는 것을 ‘시집간다’라고 한다. 시댁으로 간다는 말이다. 소고당은 친가에서 18년을, 시가에서 69년을 살았다. 그러나 모든 여성 기혼자의 가슴에는 친가를 눈감기 전까지는 잊을 수가 없는가 보다. 소고당은 시집간 지 57년이 되어서도 「친정길」(1996년 모춘)을 노래하며 친정의 그리움을 달랬다. 한자는 한글로 고치고 띄어쓰기는 본문을 따랐다. “고향이 그리워서 서둘러온 친정길/ 우리 친정 장흥평화 수려한 산천이여/ 사면을 바라보니 신구감회 갈마든다/ 동창에 달비치고 황혼에 매화피니/ 달구경도 하려니와 봄소식도 즐기리라/ <중략> 구대세거 고향땅에 태어난 이사람은/ 출가한지 오십칠년 백발노인과 늙은몸이/ 부모부재 친정에 근친이 웬말일꼬/ 숙모종숙모 생존하니 어찌친정 아니리오/ 산천은 의구한데 우리지친 뵐길없네/ 인명은 재천이거늘 마음대로 생존하리/ 칠십소가 제질들아 일곱박사 고맙다만/ 더욱더욱 연마하여 가문을 빛내거라/ 시절인연 다시만나 우리숙질 종남매간/ 동백산 찻등에가 상춘곡을 읊어보자“ 둔자는 우리 고장이 가사문학의 발원지며 규방가사의 온상지로서의 자긍심, 그리고 소고당 이후 규방가사의 맥을 잇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뜻에서 가제 『불우헌에서 소고당까지의 가맥 탐구』를 편찬코자 원고를 다듬다 보니 어느덧 탈고(330여 쪽)에 이르렀다. 조품이 세상에 나오면 소고당께 어찌 자랑할까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집필자 이제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