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어제 선배 신부님과 산책을 하며 마음의 한 구석에 있던 것을 꺼내 놓았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과연 바르고 유익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견디어 내고만 있다는 생각에 공허함을 느낍니다.’
이런 저의 말에 선배 신부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몰라.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히 당장 계산된 기대에 불과하지.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면 강신부가 느끼는 것은 틀림이 없을 거야. 그러나 모든 일이 지금 당장만을 위해서 일어나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행하는 것도 아니란 걸 잊지 마. 지금이 소중하고 중요한 이유는 지금에만 있지 않아. 더 존귀한 것을 위해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중요할 수 있거든. 그러니 지금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직무인지 몰라. 그런 의미에서 강신부는 잘 하고 있는 거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이 시대 한 사람으로 사는 저에게 감추어져 있던 신비 하나를 보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논리 합리성 현실성을 보면 참고 견디어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지금을 지금에만 단정 짓지 않습니다. 미루거나 꿈을 꾸는 개념이 아니라 참되고 위대한 신비에 닿아 있는 줄을 잡고 한 걸음씩 당기며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지금이 소중한 이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만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 속에서 참고 견디고 있는 이유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보 성인이신 요셉 성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지금을 더 큰 목적과 영원에까지 맞닿아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주 하느님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