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87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JkS9OSoEFY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말씀과 삶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
대선 후보로 나서겠다는 분의 계속되는 망언이 세간의 화제입니다. ‘손발 노동? 그것은 이제 인도도 안한다.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다.’ 신성한 육체노동을 향한 그의 천박하고 저급한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이웃 국가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보편 인류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나자렛의 목공소에서 손과 발을 이용해 열심히 가구를 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틈나는 대로 육체노동의 고귀함을 강조해왔습니다.
저 역시 요즘 틈만 나면 하는 일이 손과 발을 이용한 육체노동입니다. 청소, 빨래, 건물 관리, 예초, 벌목, 쓰레기 분리수거 등등...
손발 노동을 해보니 육체노동이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실감합니다. 쓰레기 수거하시는 분들 한 며칠 쉬시면 도시 전체가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노고는 또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분들이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며, 이른 봄부터 좋은 토양을 조성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시는 모습은 정말이지 눈물겹습니다.
좋은 토양, 백배의 열매, 말은 쉬운데...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라리나 사이비 신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드러내는 전형적인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뿐이지 실천이나 결실이 없습니다. 반면에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인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씀과 삶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인지라, 듣고 배우고 익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속에서 백퍼센트 적용하며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경고의 말씀 앞에서는 마음이 찔려 반성을 합니다. 때로 부끄러움도 느끼며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 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분들은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좋은 토양을 갖춘 분들이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그간의 노력들을 백배 천배로 보상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우리 영혼의 토양을 갈아엎고 보살펴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나가야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c1W728rllo
++++++++++++++++++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믿으려는 사람과 알려는 사람의 차이>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데, 군중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단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비유는 항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일종의 ‘법칙’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그 밭을 사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판다는 것이라든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비유는 어떤 효과를 줄까요? 그런 법칙을 만든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만듭니다. 집단 카드섹션 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법칙을 만든 사람이 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설’(說)을 믿는 사람과 ‘론’(論)을 믿는 사람, 그리고 ‘법’(法)을 믿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설을 믿는 사람은 어떤 개인의 주장을 믿는 것이고, 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집단의 이론을 믿는 것이며, 법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지식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법칙’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비유’는 이런 법칙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을 유일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심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이치나 법칙은 더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미 주님이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치를 통해 ‘왜?’를 묻습니다. 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처럼 그 이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법칙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카드섹션을 보며 그 그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독한 사람의 의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를 통해 그 비유를 만든 이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신 이유는 당신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애니메이션 단편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입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주인공인 여자는 도시에서 가장 싼 집을 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집은 도시의 철거 작업으로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공중으로 들려져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철거 회사의 파업으로 철거가 중단되어 결국 그녀는 그 공중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바람만 불어도 위태위태한 공중에 들어 올려진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고양이로 변해버린 전 남자친구입니다. 사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도시는 온통 고양이들의 세상입니다. 여자는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인 전 남자친구를 위해 매번 파이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파이를 먹으며 생선을 구워주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떠납니다. 그러다 또 파이가 먹고 싶으면 다시 찾아옵니다. 여자는 이 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고양이 남자친구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일까요? 달동네로 이사 온 한 여인은 도시에 살지만 도시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도시 사람들은 고양이로 보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줄 때는 다가오지만 언제 할퀴고 달아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전 남자친구도 욕망에 사로잡힌 고양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먹히고 맙니다. 자신도 이젠 도시의 고양이들 중 일부가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과 벗어난 존엄성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돈과 성욕,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도 그런 고양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매우 공감이 가는 애니메이션이니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씨네몽땅’에서 이 영화를 논평했습니다. 제목이 ‘욕망의 도시에서 가장 싼 집에 사는 여자가 겪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감독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감독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이 혼자 서울에 정착한 지 7년이 되었던 2008년에 제작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서울에 살게 된 뒤 도시에 관한 특별한 정서를 갖게 된 감독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내면세계를 이미지화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박지연 감독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은 단순히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박지연 감독을 더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듣는 그리스도의 비유는 제가 하는 강론과 같습니다. 이 묵상들을 들으시는 분들은 비유를 먼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묵상들은 제가 저에게 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 묵상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부님은 참 솔직해서 좋아요.” 저는 제가 솔직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묵상을 보시는 분들은 묵상을 통해 저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이겠지만 결국 당신 자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직 군중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그러나 요한복음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넘어서서 아는 수준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몸뚱이입니다. 몸만큼 머리를 아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어야 그분께서 더 깊은 묵상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제자들은 하느님을 더 이해하는 만큼 세상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깊은 묵상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겨 먼저 매사에 그분의 몸이 되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 다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더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8,4-15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절) 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가 들은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12절) 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 땅이 굳어있기 때문에 씨가 심겨지지가 않는다. 마음이 굳어 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 것이다.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절) 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 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에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절)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버리는 현상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좋은 땅에서는 뱁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건강한 싹이 나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신비’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자체이시며,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분이시고, 그 신비를 몸소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예수님께 달렸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길에 떨어진 경우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가 버려 올바로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말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마주하며 울고 웃고, 때로는 낙담하고, 때로는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자 마음의 밭을 잘 가꾼다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신앙의 항구함을 간직하는 방법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왕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사막에 샘이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황무지에 폭포수처럼 샘이 넘쳐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막에 숨어있는 샘을 ‘오아시스’라고 부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모습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지친 이들에게 샘물이 되어주는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은 거친 세상에서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여인은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께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께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도 예수님께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 2달 동안 신문사에 머물면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정성껏 돌봐주신 80이 넘으신 노사제도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내는 신문사에도 귀한 샘물이 되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웃에게 위로와 나눔의 샘물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신기루’도 있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현실에는 없다는 뜻인 것처럼 신기루는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 신기루를 만나면 사람은 결코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림의 떡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는 ‘신기루’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어서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상을 찾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하느님나라로 갈 수 없는 ‘신기루’였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은 결코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렇습니다.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섬김, 희생, 나눔의 삶을 살 때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신기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막의 샘이 되어주는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친절하게도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성서 말씀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들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밭이 좋은 밭입니까? 잡초가 무성하고, 자갈이 많은 밭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양분이 가득하고, 토질이 좋으며, 잘 다듬어진 밭이 좋은 밭입니다. 우리들 마음의 밭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상의 샘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잡초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밭에 기도의 거름, 나눔의 거름을 뿌려 주어야 합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음 땅 가꾸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한 해의 결실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자연이 제공한 결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마련한 신앙의 열매를 하느님 안에서 나눈다면 더없이 좋을 시간입니다.
한 해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농부는 기름진 땅을 만들고, 곡식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의 땅을 잘 가꾸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항상 좋은 땅과 같은 마음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길바닥인 때도, 바위투성인 때도,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습니다.
새가 쪼아 먹거나 발에 짓밟혀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게만 느껴지는 길바닥의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 안에서 그 관계가 깨져버린 바위투성이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여겼으나, 나를 옭아매 숨이 막혀버리게 하는 가시덤불 같은 만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는 이런 길바닥이나 바위투성이,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의 체험들이 있습니다. 서로 그런 체험들을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한 가족으로서의 깊은 정을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질 때, 우리 마음이 말씀의 씨앗이 싹트지 못하는 굳은 땅이 되거나 싹이 돋아나도 곧 짓밟혀 버리는 길거리 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이 싹이 자랄 수 없고 장애물이 많은 땅이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뿌리신 씨앗은 좋은 것이어서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선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이어서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열매 맺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잘 열매 맺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의 밭이지만, 그 밭에는 미움과 세상 걱정, 타인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상처들이 자라게 됩니다. 세상의 쾌락과 욕심으로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하는 밭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땅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입니다. 모든 곡식이 땅에서 자라듯 우리 안에 심어진 주님의 말씀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서 만들어진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천상의 밭으로 자랍니다. 말씀을 마음 안에 품고 인내로 여러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은 좋은 땅이 됩니다.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복음서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 비유의 뜻이 명료해서 사람들은 씨앗이 떨어진 네 곳, 곧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가운데 나는 어떤 처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흔히 묻곤 합니다.
이 복음을 읽는 신자 대부분은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보다는 뿌리가 내리지 못하는 ‘바위’나 인생 걱정과 재물과 쾌락의 덫에 걸린 ‘가시덤불’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비유는 제자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와 훈계 말씀이지만, 복음을 듣는 지금의 내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나 죄스러움에 빠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쉐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하느님과 신뢰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들의 율법 규정의 배타적 잣대로 이방인들과 소외된 계층들을 함부로 단죄했던 유다인들의 실상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시며,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처음 하느님께 부름받았던 이집트 탈출의 해방과 광야에서의 수련,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아는 것과 정말로 성경의 말씀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읽고 필사하고 외운다고 말씀이 저절로 내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닙니다.
내 영혼 안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내 영혼의 밭이 선한 의지와 기쁨, 자비와 인내, 겸손과 희생의 거름들로 잘 가꾸어져 있어야 합니다. 나는 좋은 땅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은 그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거나 땅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씨앗을 뿌립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도 그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뿌려집니다.
마치 “아버지께서는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햇살을 비추시고 옳은 이에게나 옳지 못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 45)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 곧 사랑을 실현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땅” 혹은 “밭”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듯, 열매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느 밭에나 동일한 ‘같은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수확량은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이에서 오게 됩니다.
이는 씨앗이 싹을 잘 틔우도록 ‘땅을 일구는 일’과 잎이 잘 자라고 꽃이 잘 피어나고 열매가 잘 맺도록 ‘나무 자체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귀 기울임과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이요,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결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은 자신을 떠나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구원에 공동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들 입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됩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가 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할 인인지요!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주님!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을 일구게 하소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소서.
형제들 가운데 당신 사랑 번져가고, 세상이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루카 8,4)
<내 마음의 밭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던지신 첫 말씀과 여러 고을들을 두루 다니시면서 선포하신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인 가난한 이들, 죄인들, 세리, 창녀, 여자 등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삶의 소재를 이용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농사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는 '예수님'이시고,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씨가 뿌려지는 곳'은 '내 마음의 밭'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내 마음의 밭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내 마음의 밭을 잘 살피고 가꾸어서, 지금 우리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때는 너를 바라볼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내 마음의 밭이 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내지 못하는 '길'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의 모습은 아닌지를 먼저 잘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없고 나무랄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
오늘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도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합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https://youtu.be/hwaQIX-qsf0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품에 하느님 말씀>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때에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내 품에 하느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이
내 품에 안기니
행여 날아갈세라
사랑으로 보듬어야지
행여 메마를세라
바람으로 적셔야지
행여 숨 막힐세라
믿음으로 열어야지
하느님의 말씀이
나를 품을 수 있도록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몸무게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 2만 보 이상을 걷고, 무거운 덤벨과 바벨을 들면서 근육운동도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운동했어도 체중의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폭식을 하면 앞자리가 휙 바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단식’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몸이 좋아졌는데?”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중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지만, 몸이 좋아졌다는 말에 다시 힘을 얻어 계속해서 운동합니다. 지금의 몸을 갖는데 거의 6개월이 걸렸습니다.
6개월 꾸준히 하니 조금 티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마음의 근육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묵상, 미사,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이 단련되어야 그 크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좋은 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를,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표현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라 할지라도 길이나 바위, 가시덤불에 뿌려지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농부는 거름을 주고 땅속에 묻혀 있는 자갈도 골라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변화시킬 우리의 노력은 무엇입니까? 앞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기도와 묵상, 미사, 사랑의 실천 등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돈이나 지위에 연연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백 배의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이라면 모두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의 큰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어떤 삶을 사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이 나에게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고, 하느님께도 당연히 자신에게 다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요구만 하는 사람입니다.
2)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자신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줄 모르고, 또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합니다.
3) ‘내가 받은 만큼만 베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계산적인 사람으로 소위 ‘빚지고 못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받은 것을 알고 또 받은 만큼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4)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지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늘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4번 유형이 너무 소극적이 아닐까도 싶지만, 감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 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지금을 기쁘게 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4번 유형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요?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가 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려면 사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 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절망은 없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2-3.5)
아침 성무일도 시편이 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전례영성, 순교영성과 더불어 시편영성 역시 가톨릭 교회의 정통적 영성입니다. 어제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지난 밤 역시 달빛, 별빛 밝았던 청명한 하늘이었습니다. 새삼 코로나로 인한 마스크가 없다면 얼마나 좋은 가을이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득 예전 24년전 써놨던 짧은 시가 생각났습니다.
-“산처럼
머물러 정주하면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흡사 지난밤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강론 제목도 반가웠습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절망은 없다-”였습니다. 우리 모두 ‘삶의 농부’입니다. 삶의 농부들인 우리들은 ‘농부 하느님(요한15,1)’을 닮아 삶의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탓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뿐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더불어 생각난 한자 말마디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님께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습니다. 새벽, 멀리 독일에서 보내준 수녀님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카톡 편지에 감동했고 감사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존경하올 프란치스코 신부님! 안녕하세요. 요즈음 대피정을 하면서 신부님의 저서를 영적독서로 삼아 읽고 있지만 이번에는 더욱 동감이 갑니다. 그래서 침묵 시간을 깨고 신부님께 제 마음과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피정중에 읽어가는 글 마디마디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고 있습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늘 영육으로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독일의 고즈넉한 수도원에서 기도의 손을 합장하고 토마 수녀 올림-
아름다운 글과 말과 환경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살아갈 힘을 줍니다. 광야曠野인생은 낙원樂園인생으로 변모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코이노니아 자매회 카톡방의 덕담德談들이 마음 훈훈하고 따뜻하게 했습니다. 회원중 한 분이 평화방송에 청중으로 나왔는데 한 회원님이 재치있게 사진에 담은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흐미 부끄럽습니다. 가톨릭 청춘 어게인 추석편입니다.”
“아, 예고편이었네요. 노래를 따라하는 모습이 예뻤어요.”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참석자들도 예쁘지만 글라라 자매가 박수치며 미소짓는 모습이 너무 예쁘네요.”
“글라라 자매님이 제일 멋지고 품위있어 보입니다!”
“신부님,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답니다. 진심어린 미소와 유머. 덕담과 칭찬등 긍정적 말마디가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입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래도(?)’ 라는 섬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고 권리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8,8ㄴ), 바로 오늘 말씀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오늘 복음을 바탕으로 강론하기가 무려 만32년이지만 늘 대할 때 마다 새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설명’이라는 세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원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말씀으로 초점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고, 후반부의 비유 설명은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로 초점은 씨가 뿌려지는 ‘토양’에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했다 싶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씨뿌리는 사람인 예수님 삶의 자세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온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는,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이 하나로 어울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토양에 관계없이,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좌절이나 절망, 실망, 원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말씀을 실행하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대로 밭을 탓하지 않는 참된 농부의 모습니다. 얼핏보면 실패의 연속인 듯 했지만 결과는 해피엔딩, 성공입니다. 전투에는 패배한 듯 했지만 전쟁에는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결과의 업적이 아니라 과정의 충실도요, 사실 진인사대천명 삶자체가 성공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전반부 비유의 결론 같은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탓할 것은 내 마음밭입니다. 문제는, 바꿔야 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길바닥같은 얕고 엷은 천박淺薄한 마음이, 돌바닥같은 완고한 마음이, 가시덤불같은 세상 걱정과 탐욕과 쾌락으로 혼란스런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이 좋아도 이런 마음밭이라면 별무소득別無所得입니다.
타고난 나쁜 밭은 없습니다. 이래서 부단한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항구한 한결같은 인내와 분투의 노력으로 시종일관 최선을 다하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수행생활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충실하다보면 하느님께서도 도와 주시어 언젠가 때가 되면 박토는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로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이란 중국의 고사성어도 이를 입증합니다.
반대의 경우 역시 진리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고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옥토沃土의 마음밭도 가꾸고 돌보지 않고 방심하여 방치하면 가시덤불 우거진 박토薄土로 변하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가 적입니다. 이래서 삶은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모데오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바로 이렇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수행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풍성한 수확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배밭의 가을 수확철이라 더욱 실감나게 와닿는 말씀입니다. 과연 잘 익어가고 있는 내 삶의 신망애信望愛 열매들인지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인내의 덕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이 모두를 제때에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6,15-16)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어떻게 열리는지 보여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에게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성자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는 인류를 위한 첫번째 오심입니다.
"악마, 시련,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신앙 여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위협이 되는 걸림돌들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는 "악마"가 앗아가 버리고, "바위"에 떨어진 씨는 "시련"의 때가 닥치면 말라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버리지요. 사람의 아들이 정성껏 하느님 말씀을 뿌리시지만, 75%의 씨들은 열매를 내지 못하고 스러져 버립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좋은 땅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머물러 말씀과 하나되고, 실제 삶에서 말씀을 적용해 실천하는 이들이지요.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그들을 통해 말씀이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땅이 아무리 척박하고 냉랭해도 결국에는 그냥 스러져버린 씨앗의 수량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셈법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자의 두 번째 오심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 여정에 "악마와 시련과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라는 복병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살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신 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그분을 맞이하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이 계명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지요.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1티모 6,16)
사실 주님은, 죄로 기울어져 있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무한한 거리를 좁히려 해도 우리 쪽에서 그분께 올라갈 수 없으니, 그분께서 육을 취해 내려오신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분은 우리와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시고자 말씀으로 현존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주님의 날까지 그분께 맞갖는 영혼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도 적고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럴싸한 신분도 아닌 변두리 인생이어도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이들은 행복합니다."(복음 환호송)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그리로 이르는 길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코스지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환대하여 머물다 보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미소하고 부족한 우리에게까지도 열릴 것입니다.
말씀을 품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말씀의 종이 되어 나날이 더 행복해지시길 기원합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pECRRGnLMY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말씀 없이
땅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말씀이
곧
주님이시다.
좋은 땅은
인내를
가르치고
열매는
인내를
먹으며
자라난다.
말씀 안에서
우리 마음을
숨길 곳이 없다.
말씀은
모든 곳에
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이지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씀은
마음에
늘 목마르다.
우리 마음이란
말씀에
머물러야 할
말씀의
마음이다.
이렇듯
말씀과
결합되어야 할
삶이다.
먼저
우리 마음에서
가장 좋은
말씀을
자라나게
해야 한다.
주님 말씀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다.
말씀이 있어
아름다운
마음이다.
말씀과
마음은
통해야 한다.
우리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말씀이시다.
마음을 빼앗긴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갈 때이다.
따뜻한 마음은
가을 햇살보다
더 귀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말씀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말씀의 인내로써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할
우리들 삶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