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지성방에는 신앙생활에 유익되는 글 들이 많아서 근래에 들어 자주 오고 싶은 방(房)이기도 합니다.
최근 부터 오늘까지 예향 지성방의 관심사 였던 주제인 "칼빈주의 신학사상"의 핵심인 예정교리를 두고 회원들끼리 열띤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나, 올린 글의 제목과 댓글, 꼬리말 등에서 "위선", "가증", "허구성"이란 용어까지 둥장되는 것은 "지성방" 다운 면모를 갖추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면을 느낍니다.
예향 회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서, 교단이나 소속한 교회가 틀리지만 각기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혹은 신학을 공부 하신 분이나, 교역자분이나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분들도 있는 것을 적은 글을 통해서 느낍니다.
제가 올린 글이 개혁주의 신앙을 지지하는 교회원의 입장에서 적었기 때문에, 여기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교단이나 교회가 지지를 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며, 상호 생각과 주장이 다른 사실을 두고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유보하고 싶으며, 신학을 직접적으로 접하지도 않은 엷은 지식으로 신학적인 고찰을 할 만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글을 읽고 느끼는 생각을 적을 뿐입니다.
개혁교회(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회외)의 헌법에서는 교회의 삼대 표지를 "말씀전파", 성례시행" "권징집행"으로 적고 있으며, 교회직분자(목사,장로,집사 등)를 세울 때 헌법에서 정한 서약을 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느뇨? 하는 공통적인 것이 있고,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을 성경이 교훈한 도리로 신종하느뇨?를 장로교회에서 "예" 라는 대답과 함께 손을 들어서 공회 앞에서 고백하고 있고, 화란,케나다,호주 등의 개혁교회에서는 임직자(목사외)들이 그 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정한 신조에 서약 또는 서명함으로써 직분자를 그리스도의 권위로 세움을 받는 것이 임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신조 내지 신앙고백서에서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핵심 교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임을 서술하고 있고, 칼빈의 5대교리인 일명, TULIP(인간의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의 영향을 받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장 :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서 예정론을 확연하게 적고 있고(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G.I 윌리암슨 저, 나용화 옮김, 개혁주의신행협회 또는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골든 H. 클락 저 나용화 옮김 개혁주의신행협회), 이 예정론이 신앙고백서의 대 주제로 느껴집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에는 보편구원론이나, 예정론을 운명론으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분에 다른 예정론과의 상호 대치 될 수도 있음이 예상됩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날 교회가 아무리 부패되어 있고, 교회에 속한 목회자 이하 직분자들의 신앙 행위가 건덕을 잃는 정도를 벗어나서 타락의 경지에 이르러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는 것도 사실이며, 아직은 대부분의 장로교단이나 교회에서 행해지는 신조나 신앙고백들이 포함된 헌법에 역시 건재하고 있으면서 교회직원(목사, 장로, 집사)의 안수 받을때 서약의 내용에 "예정론"이 포함된 신조를 신종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장로교회의 교리(대소요리문답)를 믿는 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칼빈주의가 말하고 있는 이중예정론(선택과, 유기)도 인정한다고 봅니다(인정하라는 강요가 아니라, 헌법에 적혀있는 교리에서 그렇게 적고 있다는 말입니다).
선언적으로 믿었건, 믿음으로 받아 들였건, 결과론적으로는 볼때 성경과 교리(서약 내용에 명시)를 받아 들여야만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개혁신앙 장로교회의 정치입니다.
저 또한 장로교 출신이면서 역사적 개혁교회 쪽의 교리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며, 기독교강요를 받아들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함께 지지하는 입장에서 생각을 말씀드릴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각 지체에 속하는 예향회원님 들께서도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입장이지만, 소속하는 교회가 지지하는 신앙고백은 성경의 기본틀 안에서 약간은 생각에 따라서 이견이 있을 수도, 상호 충돌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예정론과는 직접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와, 이를 반박 할 만한 지식이 부족함을 인정하며,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지시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의 생각이 소중 하듯이, 자신이 지지하는 신조외 신앙고백 또한 소중함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고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음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는 인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판단할 권한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에서 말해 주듯이, 한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피선교국 으로부터 여러개의 교단을 통해 혼합된 교리가 먼저 도입이 되었고, 예정교리는 교회에서 대개가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대학부 SFC에서 조직신학 강의를 교역자로 부터 피상적으로 들을 때가 처음이었고, 헌법이나 교리집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얻은 지식이 전부이며, 교회학교 교사를 했으면서도 무지해서 가르칠 능력이 없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음), 개혁주의 신앙을 주창하면서 교리에 대한 교육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연고로 지지기반이 극히 약하여 교단분열, 자유주의, 교회연합주의 침투 등으로 정체성을 찾기가 상당히 힘드는 개혁신앙의 진원지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지식의 범위와 입장에서 위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으며, 칼빈주의와 예정론에 대하여 좀더 깊고 상세하게 적어 놓은 글을 발견하여, 먼저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맘으로 아래 글을 올립니다.
(상당히 긴 글이지만 끝까지 읽으면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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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 개바연(개혁주의 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한 연구 모임)
홈 피 : http://www.ireformed.net
제 목 : 개혁주의 예정론
글쓴이 : 김남진,김인석,민성기,윤성목
Ⅰ.서론
예정 교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켜 온 기독교 교리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교리는 개혁 신학에 있어서 타 신학에 대해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를 드러내는 교리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중대한 교리인 이 예정 교리는 어느 한 순간에 정착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의견이 있어왔고 논쟁이 되어 왔다. 미루어 살펴 보겠으나 개혁 신학에서의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과 칼빈, 그리고 도르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거쳐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현금에 있어서 예정 교리에 대한 많은 오해와 함께 그 입장에서 분명한 선을 갖지 못한 것은 여러 다른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확고하게 공식화된 내용에 대한 고백을 등한시하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 쉽게 변모됨으로써 앞서 고백되어 온 내용에 대해 다소 약화시킴으로 예정론에 대한 개혁 신학적 입장은 분명하게 그의 의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본 논문은 예정 교리에 대한 논의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우리의 신학의 틀을 마련한 칼빈의 기독교강요,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칼빈의 예정론과 도르트 신조의 내용을 소개한 후 칼빈과 도르트 신조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TULIP의 순서에 따라 비교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개혁 신학이 갖는 독특한 예정 교리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Ⅰ. 예정 교리 이해
A. ‘예정’의 정의
‘예정’이란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설정된 하나님의 계획이나 결정에 따라 발생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예정은 역사적 사건 자체들에 궁극적으로 종교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원인들을 초자연적인 세계 가운데 있는 대립적인 의지들의 투쟁에서보다는 한 인격적인 신인 하나님의 결정이나 행위에 돌리고 있다. 또한 그 결정이나 행위에 있어서 윤리적이며 목적론적인 목적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결정론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적 의지의 자발적 행위를 뜻하며,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선과 악에 대한 운명을 미리 결정하시거나 앞서 정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예정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팔머(E. Palmer)는 “예정이란 작정의 일부로서 작정은 영원토록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고, 예정은 그 작정의 일부로서 인간의 운명 즉 천국과 지옥을 가리킨다. 예정은 선택과 유기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알란 셀(Alan Sell)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교리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선택되어 구원얻도록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유기되도록 결정하셨다. 이로 인해 ‘이중예정’이란 용어가 생겨났다. 유기의 목적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고 하였다.
벌콥(L.Berkhof)은 “예정이란 말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피조물, 즉 천사, 인간,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라 말할 수 있다”라고 정의하였다.
칼빈(J.Calvin)의 경우에는“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부터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으며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 후손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 고 하였다.
도르트회의 결정문서에서는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시고 믿도록 하시며,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함께 강팍케 됨으로 내버려 두심과 이는 그 선택이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임과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으로 보고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그의 마음대로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을 따라서 자유롭게 장차 될 일을 불변하게 정하셨으나(엡1:11;롬11:33;히6:17;롬9:15,18)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가 아니요(약1:13,17;요일1:5) 위법이 피조물의 의지 속에 주어진 것도 아니요 또한 자유나 자유의지를 배앗긴 것도 아니고 오히려 확립되었다(행2:23;마17:12;행4:27,28;요19:11;잠16:33)”고 예정에 대해 밝히고 있다.
예정 교리는 그 핵심 내용을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오직 성경에서만 그 분명한 근거를 삼고 있다. 예정 교리는 결코 결정론적이 아니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충돌하지 않고, 그분의 지혜로우시고 자유로우신 작정을 펼쳐 나가심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예정 교리는 구원에 있어서 결코 인간이 중심이 되거나 그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이루어짐을 명백히 나타내는 교리이며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그 영광을 돌리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예정 교리는 지극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정을 기초로 하기에 어느 누구도 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반발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Ⅱ. 예정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개혁 교회의 전통에 있어서 예정론은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다. 이러한 복음의 총괄이며 계시의 중심적 내용이 되는 은혜의 선택에 대한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에게로 올라간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예정론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어거스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 여기서는 예정론에 대해서 시대적으로 간단히 약술하도록 하겠다.
A. 초대 교회 교부들
초대 교부들은 비록 예정에 관해 언급하였나 그 개념이 불투명하여 예정을 인간의 행동들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로 보았다. 특히 암부로시우스와 오리겐과 제롬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은혜를 선용하리라고 에견하신 대로 사람들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셨다고 생각했다. 그 뿐 아니라 어거스틴도 오랫동안 이러한 견해를 가졌었다. 그러나 후에 이 생각을 강경하게 반박하였다.
초대 교회에서의 예정론은 그리 많이 발전되지 않았으나 이교의 운명론과 영지주의적 자연주의에 반하여 인간의 도덕성과 자유,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초대 교회는 절대적 예정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가르치지 않았고, 하나님의 경륜은 예지에 의해서 요구되는 보상과 심판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본질적으로 이런 입장이 희랍 교회의 입장이었다. 결국 사람은 자연적 선을 행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그에게 제공되는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협동하여(신인협동설) 사역하며 이 사람은 구원에 이르도록 예지되고 예정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상태중에 버려두시고 멸망에 이르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방식에서 펠라기우스는 초대교회의 견해를 취했으나 그의 합리주의와 고행적 도덕주의로 말미암아 이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고 받아들여졌던 어떤 요소들을 약화시켰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신학이 하나님은 선하시고 옳다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기인하는 모든 피조물도 그 본성이 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타락은 전체적인 인간의 타락이 아니라 각자 개인적인 것이요, 구원은 인간의 자유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B.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회심에 이른 동안 마니교의 이원론, 아카데미의 회의론등 수많은 지성의 편력을 거친 후 로마서 연구를 통해 ‘예정’에 대한 신학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적인 “오직 은혜로만”의 사상을 재발견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그 선택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죄인이 회개하여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이 모두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이러한 일을 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일까? 그는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의 죄에 대한 대책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은 아니며, 하나님은 시간 이전과 시간 밖에서 자유롭게 이 일을 결정하셨다. 그의 예정론은 유기에 대해서 불명확한 점이 없지 않으나 선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였고 유기에 대해서는 인간의 죄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사상의 특징이었다.
펠라기우스의 견해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의 견해는 흔히 ‘은혜의 신학’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은혜란 말을 보다 넓은 의미의 자연적 은혜로 사용하였고 완전의 상태에서라도 아담으로 하여금 능히 그의 정직(uplightness)을 유지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시인한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신분으로부터 낮은 수준의 존재로 떨어져버린 것을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상태의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스스로를 원시적 지위로 회복시켜보려는 인간의 온갖 노력은 원죄로 말미암아 생긴 타락 때문에 무력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구두끈을 들어올림으로서 스스로를 일으킬 수 없다. 인간의 온갖 노력은 헛수고가 되는 것이며 그는 떨어져 버린 수렁속으로 한층 더 깊이 빠지고 만다.“인간은 아직도 자유롭지만 다만 죄 짓는 데에만 자유롭고 더욱 깊이 빠져 들어 가는데 자유로울 뿐이다.”(man is still free but only free to sin, to sink ever lower). 결국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와 그 결과적 타락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 곧 모든 인류에게 유전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예정적 은총을 주장하였으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는 고백을 하였다. 그가 쓴 “성도들의 견인에 관하여”(Concerning 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수반됨 없이 어떠한 인간도 그들의 자의지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자력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성도들에 대한 예정은 성도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확실히 계시되고 성도는 예정되었고 불리움바 되었고 의롭게 되었고 영광을 받은바 된 자들로서 그들이 중생하기 이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며, 그들은 결코 멸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예정과 은총에 관하여”(On Predestination and Grace)에서 주님은 그가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그냥 주신다고 하였다. 바로 하나님은 자비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 그들이 행치 아니한 것은 어떤 자들에게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유로운 은혜를 주실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행한 것을 드러내실 수 있다. 결국 어거스틴은 유기를 인정하는 면에 있어서 이중 예정적 성격을 고백하였다고 할 수 있다.
C. 중세시대-토마스 아퀴나스
에베소 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 A.D. 431)에서 펠라기안주의와 네스토리안주의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안주의자들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529년 오렌지 공의회에서(the Synod of Orange) 반어거스틴주의가 아르레스의 감독 카이사리우스가 주창한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물리치고 어거스틴의 원죄와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이미 418년에 열린 카르타고의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하고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옳은 것으로 확인한바 있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정론에 대해 상당한 자유를 허락하였다. 즉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은 선택자들 뿐 아니라 만인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특히 중세의 대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중예정과 절대 예정을 동시에 주장함으로서 상당히 예정에 대한 개념들이 흐려졌다.
그의 예정론은 섭리론의 일부로 다루어지고 있다.‘예정’은 신의 적극적인 뜻에서 온 것으로 영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유기’는 소극적인 것으로 영생을 얻는데 실패하도록 버려둠으로서 영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예정의 원인을 “신의 선택적 사랑”이라고 하였다. 신은 자비에 의해 예정하시고 그의 선에 의해서 유기 하신다. 따라서 예정을 하시거나 유기를 하시거나 간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의에 의한 것이다고 하였다.
아퀴나스에게 있어 문제점은 인간이 스스로 행하는 자유의지마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면 그 자유의지는 자유의지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자유의지는 조종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유기를 “인간이 원래 타락한 상태를 그대로 간과하심”으로 봄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순됨이 없이 잘 조화를 이루고 인간의 유기에 대한 책임성이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문제를 남기게 되는데 반해 아퀴나스에 와서는 다시 자유의자가 ‘섭리론’속에 파묻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단지 수동적으로 따르는 양상을 맞게 되고 인간을 선택하시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그리고 자유의지가 참된 자유의지인가? 하는 의문이 제시됨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은 더욱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D. 종교개혁 시대
1. 루터
루터는 중세후기 스콜라주의자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에 반대하여 오직 은총과 신앙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예정을 ‘그의 작정에 따라서 그가 받아들이고 전파되고 제공된 은혜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지정하시는 하나님의 두렵고 숨겨진 의지’로 파악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 숨어있는 의지와 연관해서 신자는 그가 선택받았는가 하는 고통스런 질문을 던짐으로 숨어있는 하나님의 예정의 심연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부르심과 세례 속에서, 말씀 선포의 직무를 통해서 그에게 다가오는 예정을 붙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왜 인간을 버리시는가?’라는 예정의 비밀에 대한 ‘왜’라는 질문을 던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어느 인간도 그러한 질문을 하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정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우리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죽음(1546) 후 그의 제자들은 예정에 관한 루터의 견해들을 완화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1577년 여러 가지 교리적 논쟁들을 해결하고자 시도한 루터교의 신앙고백(Konkordienformel, formula concordia)에 이르러서 예정에 관한 루터의 명료한 견해는 현저하게 침식당하고 말았다.
2.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공로와 행위들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예정론을 발전시켰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는 행위와 지식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선의 영원한 능력과 불변의 행위이다” 그리고 그는 “제1원인”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제2원인들은 단지 비유적으로 말하는 원인들로 보았다. 하나님은 영혼이 몸을 지배하는 것처럼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섭리는 우주의 사건들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통치와 관리이다. 이것은 모든 우연적 발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로운 행위들을 부인하게 해준다. 모든 것이, 심지어는 악 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고 있다. 이와같은 결정론들이 쯔빙글리의 예정론 교리에 내포되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있고 오직 선택 안에서만 신앙이 발생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의한 공로들을 부정한다.
3. 칼빈
예정의 교리는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 교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자신의 신학 체계의 골격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삼았던 칼빈은 예정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중예정을 주장하였다.
칼빈의 예정 사상은 그의 체계적인 저서 ?기독교강요?의 증보판과 더불어 신학적 위상이 변화하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1536) 제 2장 “신앙에 관하여”(De fide)에서 교회를 정의하기 위해서만 예정교리를 사용했다. 그는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는 그의 교회로 불리우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1537년 “제네바 요리문답”(Genevan Catechism)에서 칼빈은 예정 교리를 신의 결정(God's decrees)에 대한 목회적이고 실존적인 경험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칼빈은 인간의 불신앙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종교적 경건성이나 자기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세상 창조전 행하여진 하나님의 신비로운 주권적 작정에 있다고 밝힌다.
그는 예정 교리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서 예정이 없는 구원은 뿌리없는 나무와 같으며 하나님의 사역이 중구난방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예정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목수와 동일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정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인간의 겸손을 무시하게 한다고 함으로서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교리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정 교리가 성경이 요구하는 것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이중 예정 교리를 가르쳤다. 이는 칼빈이 예정에 대하여 가르친 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은 영원한 예정에 의해 선택자와 유기자로 구별하셨다고 보았고 그 선택과 유기를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의 작정,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보았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예정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불렀고 이 작정에 의하여 각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를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로 결정하셨다고 밝힌다.
이로 볼 때 칼빈의 신학은 한 마디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서 하나님 중심 사상의 표현은 곧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총의 종합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4. 도르트 회의
도르트 신조는 교리적인 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었다. 도르트 회의를 가지게 된 역사적 배경은 알미니우스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1603년 레이든(Leiden) 대학의 교수로 임명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제네바에서 베자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스승 베자와는 달리 그는 예정론에 있어서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자비하시고, 죄와 유기 가운데 버려진 다른 이들에게는 공의롭게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구원론을 배척하고, 만인 구원론 및 구원의 불확실성을 수용하였다.
알미니우스의 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에서 떠나있다는 것을 인식한 고마루스(Francis Gomarus)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신앙 자체가 예정의 결과로서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과연 누가 신앙을 가질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알미니우스의 죽음도 이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1610년에 회합을 가지고 항변서(Remonstrant)를 작성하였고, 정부의 보호를 요구하였다. 이에 고마루스파가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두 집단의 싸움은 네덜란드의 교회와 사회를 양분시켰다. 결국 마우리스 왕은 1618년 도르트회의를 소집하였고 재판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 개혁교회들로부터 대표들을 초대하였다. 이 회의는 알미니우스파가 주장한 교리를 정죄하였고 개혁주의 교회의 구원론의 핵심이 되는 (1)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rverance of the saints) 이라는 TULIP교리를 채택하였다.
결국 도르트 회의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칼빈주의적 기본 골격인 도르트 신조를 결정한 일에 있다. 이 도르트 신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는 성경적 교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변증한 것이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만큼 인간의 어떠한 조건과 노력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도르트 회의의 결정에 있어서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그대로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5. 칼 바르트
바르트의 예정론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그의 이중 예정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이중 예정은 전통적으로 말하여 온 절대적 결정(선택과 유기)으로서의 이중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는 구원의 선택을 결정하셨고 하나님 자신에게는 인간의 저주와 죽음을 결정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에 대한 위협이나 응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심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즉 복음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예정론을 “선택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르트의 선택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이란 버림 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내어 주시기로 예정한 아버지의 결정이며 아버지께서 순종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를 내어 주기로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되심이 예수의 인간성으로 인하여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욱 영광스럽게 유지하고자 하는 성령의 결정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예정은 아버지의 단독행위가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사이에서 공동으로 일어난 삼위일체적인 사건으로 본다.
또한 그의 선택론의 특징은 종합이라는 데서 볼 수 있다. 즉 그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종합, 칼빈주의적 전통과 알미니우스의 전통의 종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 주체와 객체로 말하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버림을 말함으로서 예정론을 하나로 종합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는 칼빈의 이중 예정의 틀을 사용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선택의 가능성 및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서 그의 예정론이 만인 구원설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칼빈주의적인 이중 예정과 동시에 온 인류에 대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알미니우스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복음의 빛으로 해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바르트의 예정론에는 창조론과 화해론의 중심이 되는 선택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예정론 사상을 이해한 것이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하나님의 자유한 의지의 사건으로 보며, 이것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포괄된 것으로 말한다. 또한 화해론의 중심 내용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그의 선택론은 화해론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르트의 선택론의 특징은 숙명이 아닌 인간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인 긍정에 대하여 응답하고 복종해야 하는 자유인데 이것이 곧 인간의 현실적인 자유라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긍정에 부정으로 응답한다면 그 인간은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요 자유를 상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긍정함으로 인하여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버림에서, 선택으로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결국 인간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공동체와 함께 믿는 자로서 선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선택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은 사명의 선택을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정의 주체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여 제한 속죄를 포기하려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루터주의는 될 지언정 역사적인 개혁신학의 예정론과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Ⅲ. 개혁주의에서 예정론의 위치
개혁주의에서 예정론은 확실히 타 신학에 대한 개혁신학의 두드러지는 핵심 내용이 된다. 여기에서는 주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와 도르트 회의의 내용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다룸으로 개혁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A.기독교강요 3권 22장,23장,24장에 나타난 칼빈의 예정론
칼빈의 예정론의 구성의 특징은 에베소서가 아니라 로마서의 배열을 따랐다. 에베소서는 예정론으로 서두를 시작하지만, 로마서는 예정을 후반부에서 다룬다. 로마서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를 언급한 다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과, 의롭게 된 자들의 성화에 대하여 이야기 한 후 9장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관련하여 에정을 다루고 있다. 물론 바울이 구원의 서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로마서 8:30에서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떤 순서를 따라 진행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정을 구원의 서정의 맨 마지막에 넣음으로서 예정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구원 받은 사람에게 적용해야 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로마서의 배열과 마찬가지로 칼빈도 예정론을 기독교 강요에서 취급할 때 제 1권의 신론이나 제 2권의 기독론이 아닌 제 3권의 성령론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성령론 중에서도 신앙과 중생과 회개, 그리고 칭의를 언급한 후 예정론을 소개하고 있다.
1. 이중 예정(선택과 유기)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며, 유기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인데 선택과 유기를 포함하는 칼빈의 예정론을 이중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이중 예정은 칼빈이 처음 발견한 교리는 아니다. 이미 어거스틴은 예정론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인 선택과 공의의 표현인 하나님의 유기를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이중 예정은 칼빈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고 조직화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칼빈은 예정에 대한 근거는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롬 8:29-30에 있는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으니 이는 장차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과 동시에 그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성경을 증거로 삼고 있다. 계속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중 예정이라고 성경의 증거를 충실하게 제시한다(엡1:4; 롬9:11-13; 딤후2:19; 사53:1).
칼빈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한 것이 그의 의지와 행위와는 무관하듯이(창 25:13; 말 1:2; 롬 9:11) 에서가 선택되지 못하고 유기된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을 바울의 글을 인용하여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근거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동시에 유기에 근거로서 로마서 9:18에서“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버리시는 것도 동일하게 그의 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논술하였다. 그는 유기의 교리를 기독교강요 제 3권 23장 1절에서 3절, 로마서 9장과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증명해 나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신의 주권적 의지의 표현이며 인류 역사의 목적으로서 이해했다. 역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며 유기된 자와 선택받은 자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그분의 일이며 그분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이다. 그리고 칼빈은 로마서 9장등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예정 교리의 핵심사상은 바울에 있어서의 이신득의 내지는 구원론에 있음을 말하였다. 특히 그는 이와같은 주장을 더 강하게 나타내기 위해 요한복음(6:31-39, 44-45)을 다시 인용하였다.
칼빈이 말하는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며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섭리이며 하나님 능력에 의하여 실현될 인간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선택하신 최종 목적은 선택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고 보았다.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유기에 있어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이것은 그리스도는 선택의 근거는 되지만 유기에 있어서는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원죄와 자범죄도 역시 유기의 이유는 되지만 인간의 의지와 행위는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선택과 유기의 각기 다른 측면을 간단히 살펴 보았으나, 이 교리들의 동일한 면으로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 양자의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표 가운데서 계획된 것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2. 예정과 예지
칼빈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예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공로의 예지를 전적으로 부정함으로 인간의 공로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정론을 말하면서 보통 예정론과 예지를 혼돈한다고 지적하면서, 실제적으로 두 교리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나 전자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뻐하심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칼빈은 각 사람에 대한 예정을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1:4)고 말한다.
따라서 예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나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이다. 선택의 본래 동기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삼으려고 예정하신 자들을 값없이 선택으로 택하신다. 이것의 원인은 그 자신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추인 자기 자신의 선한 기쁨으로 만족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 스스로 기뻐하셨기 때문임을 칼빈은 말하고 있다(롬 9:19). 곧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3. 타락전 예정과 타락후 예정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되 과연 어떤 사람을 택하셨는가에 대한 입장에 따라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로 나뉜다. 즉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택하셨는가 아니면 타락하기 전에 택하셨는가이다. 창조 전에 택했다는 것은 그 백성이 타락할 것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택하고 적용면에서 타락을 허용하시고 그 타락한 인간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타락 후라는 것은 창조 전에는 동일하게 모든 사람이 구원 받도록 택하시는데 그 중에서 타락한 자들 가운데서 긍휼이 크셔서 그 중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택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장래에 일어난 사건들을 내다보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며 예지를 말하는 것은 무익하며,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그의 주권적인 예정하심의 증거인 것이다”라고 하여 타락전 예정을 시사하고 있으나, 그의 주장을 따르는 신학자들 간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디모데후서 1:9, 디도서 1:2, 로마서 16:25, 에베소서 1:4 등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카이퍼같은 학자는 하나님께서 타락 전에 예정하셨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자비와는 상반되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주장하지만 타락 후에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론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결여되고 만다. 왜냐하면 타락 후 예정론은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 2권 12장에서 성육신의 필요성에 대해 오시안데르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의 영원적인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담이 타락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타락전 예정과 타락후 예정중 전자를 가르친 것 같은 인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타락의 시기는 타락전 선택설이 더욱 타당하며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타락후 선택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하나 이것들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4.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칼빈에 있어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된다. 그는 “우리의 선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들여지고 그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생명의 샘이 구원의 닻이요 천국의 후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로 받아 들이신 자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엡 1:4)는 말씀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그들을 사랑하실 수도 없고 또한 그들이 처음에 먼저 그리스도에 참여된 자가 아니면 천국 기업의 영광을 얻게 하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선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구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요 17:6).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소홀히 하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결코 아버지와 아들을 선택론에 있어서 분리시키지 않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5. 예정과 구원
예정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에서 지적하였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원의 약속이 그 분 안에서 보장되듯이 선택의 인침을 받는 것도 그 분 안에서 이다. 선택이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확신을 찾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신의 구원에 보증을 받는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우리의 선택의 증거인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선택과 그리스도의 연합 사이의 관계를 일부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로 선택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 안에서 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만이 아니고는 사랑할 수 없었으며 먼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기 전에는 하나님의 유업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면 우리 안에서는 전혀 우리의 선택에 대한 확실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요 심지어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우리가 그의 아들을 떼어 놓고 하나님 만을 생각한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응시해야 할 거울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다면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강력하고 명백한 증거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데서 허락하시는 은혜의 선물들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우리의 구원의 바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견인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한데 묶으려고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는 실패되지 않는다.
6. 예정과 견인
칼빈은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기독교강요? 3권 24장 6-11절에서 밝히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도의 견인은 간단하게 표현하면 한번 구원 받으면 계속해서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번 믿으면 멸망할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는 것은 성경에 가장 중요한 사상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끝날까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어짐을 가르쳐 주며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유지케 되며 보존 하심을 받기 때문에 그를 아무도 빼앗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가지고 성도의 견인을 확증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줄을 우리가 확신 하노라”(빌 1:6).
B. 도르트 회의에서 예정론 논쟁
개혁주의를 대표한 도르트회의의 성직자들이 알미니안주의와 동의한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되 타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사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달리 그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타락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예정 안에 구원의 방편까지 포함시킴으로 행위로 구원하는 방식을 예정 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절하였다. 예정론은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과 확증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정론은 예정의 대상들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정론안에는 구원의 방식들에 대한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안에서의 논쟁점은 예정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 중요한 것은 예정론의 내용에 대한 것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죽으심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도르트회의(1618-1619)의 결정에 대한 그 중요성과 그 내용을 안다는 것은 예정론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알미니우스가 무슨 주장을 했기에 도르트회의에서 내려진 결정들이 오늘날 개혁주의 예정론을 살피는데, 도르트신조가 최소한의 전제요, 즉 더 이상은 포기할 수 없는 결정들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1609년에 알미니우스가 죽자 1610년에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신조를 다섯 항목으로 구체화시켜 항의각서라는 이름으로 화란과 서 프리스란드의 국회에 제출하여 무조건적인 예정을 주장하는 정통파(칼빈주의자)를 반박 하였고, 이에 대해 1611년 칼빈주의자들은 반항의 각서를 제출하여 정통파 입장을 재확인함으로서 도르트회의를 거쳐 도르트신조가 작성되는 칼빈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루게 되었다. 도르트신조의 알미니안주의를 반박하는 항론의 다섯가지 견지는 다섯가지 큰 제목아래 93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본문의 요점은 제1교리 제7조에서의 거룩한 예정에 대하여 밝히는바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의 목적이며, 이것으로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 이전에 자신의 주권적인 선한 뜻에 따라 단순히 은혜로 선택하신 어느수의 사람들의 중보자이며, 또 구원의 토대가 되도록 영원부터 임명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본래의 도덕적 상태로부터 타락한 전인류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제2교리의 제8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구원에 대해 말하며, 제3,4교리는 제3조와 제11조에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에게로 향한 인간의 회심과 그 방법에 대해 서술하고, 제5교리의 제3조에서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도르트회의에 있어서 “신적인 예정(선택과 유기)”에 대한 부분만을 항론파의 주장과 도르트 성직자들의 대답에 대해 아래의 도표를 통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 구원의 신적 기원을 가능한 인간론에 기초하고자 하여 전적인 은혜의 차원에 심한 손상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한 도르트 성직자들의 일반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시간상 어떤 이들을 신앙으로 선물하셨고 어떤 이들은 선물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나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행 15:8; 엡 1:11).
비록 강퍅할지라도, 이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 부드럽게 하고 굽히어 믿도록 하시고 그의 택자들과 아닌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강?w케 됨으로 내버려 두신다. 이 선택은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롭고 불변하며 전지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선택도 불변하고 번복되지 않으며, 깨어지거나 이미 선택한 자들이 다시 버려지거나, 수에 있어서 변경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선택은 세상의 창조 전에 이루어 진 것이며, 택자들의 수는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 택자들이 다른 자들보다 더 좋거나 가치가 있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곤비한 자들, 즉 처음 정직하였으나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죄와 부패안에 있는 온 인류로부터 택하여졌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며, 이런 은혜로운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향들이나 역사들의 모든 가능한 조건으로부터 구원의 조건으로 택하셨다는 점이 아니라, 확실한 어떤 사람들을 일반 죄인들의 수로부터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은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를 영원 전부터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로 즉, 구원의 기초로 세우셨다. 이 구원의 길은 혹은 수단까지 결정하였다. 즉, 택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도록 그가 친히 그를 주시고 능력있게 그의 로고스와 영을 통하여 같은 교통으로 부르시며 만나시며, 혹은 그를 믿는 참된 신앙으로 선물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히 여기시고, 그의 아들과의 교통 가운데 능력있게 보존하여 마지막 그의 긍휼을 증명하도록 영화롭게 하시어 그의 사랑스러운 은혜의 부요성을 찬양하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롬 8:30). 그러나 그 선택은 원인과 조건으로서 예지된 신앙과 신앙의 순종, 거룩, 혹은 다른 좋은 성향이나 능력으로부터 일어나지 않고, 즉 택함을 입을 인간 안에서 미리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은 구원의 모든 은택의 샘으로서 그로부터 신앙과 거룩, 다른 구원의 은사들, 마지막 영생까지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엡 1:4).
역시 택자들은 그의 때에 그들의 구원이 영원하고 불변의 선택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 지각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폐되고 깊은 곳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을 때 지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즉,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자녀다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갈증과 죄를 넘어 의를 향한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이 모든 실패할 수 없는 열매들을 자신들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선택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신약에서나 구약에서 하나요,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기뻐하신 뜻은 하나요, 유일하며, 그것을 통하여 영원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되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은혜와 영광과 구원과 그가 준비하신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선택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간과되었다. 따라서 택자들은 더욱 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열망하며 버림을 받은 자들은 즉, 하나님과 구주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정욕에 빠진 자들에게는 무섭고 흠없는 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도르트 회의에 결정된 내용을 살펴볼 때 예정론에 있어서의 개혁신학적 입장은 분명하게 정리된 것임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정론에 있어서의 여타의 많은 입장들은 바로 도르트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점검되어져야 한다. 이 결정은 개혁신학의 예정론에 있어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고백인 것이다.
C. 웨스트민스터에서 예정론에 대한 입장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정론에 대해서 제 3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예정론에 대한 내용은 실제적으로 도르트 회의의 결정들을 그대로 받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래와 같이 예정론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이 고백서는 예정론에 있어서 작정과 예정을 구별하였다. 이 구별은 작정의 대상들로 인하여 구별된 것이다. 일어나고 존재해야 할 모든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작정 아래 기술하고 있고 사람들과 천사들에 관해서는 예정이라는 용어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정 안에서 선택과 유기가 구별되고 있다.
그리고 창조와 섭리, 타락에 앞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자들의 예정과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예정에 대하여 말하고 이에 따라서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의 허용에 대한 작정이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을 말하지 않으며 창조와 섭리에 대한 작정을 말하지 않는다. 칼빈의 입장(기독교강요 초판 2권 73)을 따르면 창세전은 예정에 택자들의 구원의 성취 방법도 포함하고 있다. 즉 택함을 받은 자들이 타락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적으로 부르심(내적 소명=중생)을 받게 되고 의롭게 되며(칭의) 양자가 되고 성화되어 구원이 완성되기 까지 보존(견인)되는 구원의 방식까지 예정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3장 6항, 11장 4항).
중세 스콜라주의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예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불변적인 자신의 뜻을 따라 작정되고 예정되었으며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시고 죽으신 것은 바로 이런 택자들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11장 4항).
다만 예정의 선택에 있어서 도르트 회의는 타락한 인간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으나(타락후 선택설)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작성한 청교도들은 타락전 선택설을 기초하여 그 입장을 표명하였고 다만 타락후 선택설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이것은 도르트 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을 확인한 셈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 성격이 아주 철저한 칼빈주의요, 가장 엄밀한 칼빈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도르트 회의 위에 서서 훨씬 개혁된 것이다.
Ⅳ. 칼빈과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 비교
칼빈은 1536년에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섰고, 1559년에 최종판을 완성하였다. 도르트 신조는 1618년에 작성되었다. 이 둘 사이에는 약 60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따라서 두 사상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생각한다. 실제적으로 칼빈의 예정론과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본인은 일반적으로 TULIP이라고 알려진 틀에 맞추어서 서로를 간단하게 비교하고자 한다.
A. 유사점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본래 선으로 향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여 비참한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으며, 인간의 성품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그 정신과 의지는 전적으로 새로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무엇이든지, 사람 속에 있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육신에 이르기까지, 또는 이해력과 그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되었다.(롬2:12; 롬8:7) 그 결과 지성과 의지에 손상을 입어 분별력이나 판단 능력과 수행 능력을 잃게 되었고, 의로움, 정직함,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 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도르트 신조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여 저주 아래 있고, 영원한 죽음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며(롬5:12), 이 신조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타락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타락한 자손을 낳았다고 하였다. 결국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부패와 영적인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칼빈과 도르트신조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고 있다. 차이점은 인간의 타락을 칼빈은 예정과 분리시켜 인간론에서 다루고 있는 반면 도르트 신조는 인간의 타락에서 예정론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칼빈에 있어서 선택은 공로의 예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즉 선택은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구별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선택하였다는 것이다.(살후2:13; 엡1:4,5,11; 요15:16) 바로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결코 사람의 공로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도르트 신조는 선택이 예지된 신앙, 신앙의 복종, 성결, 혹은 앞서야 할 필수 요건으로서의 사람에게 있는 다른 어떤 좋은 자질이나 성정, 혹은 선택이 의존할 어떤 원인과 조건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이 신앙과 신앙의 복종과 거룩 등에 이르도록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모든 구원의 미덕의 원천이며 여기서 신앙, 성결, 그 밖의 구원의 선물, 또한 마지막에는 구원의 결과, 성과로서의 영원한 생명이 생긴다고 하였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칼빈은 하나님이 만인을 평등하게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고정된 법칙을 만드심으로서 스스로를 구속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 즉 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는 것을 금하시고 마게도냐로 데려가신 분은 이 보배를 기뻐하시는 자에게 나누어 주실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계신다.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어떻게 구원의 약속이 택하신 백성에게 특별히 정해져 있는가를 더욱 분명히 선언하였다. 즉 차별없는 인류가 아니라 오직 그들만이 그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만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한데 반하여 그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오직 택한 자를 구원하는데 있다. 바로 성부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성자로 말미암아 속죄되고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별됨으로서 선택, 구속, 성화는 언제나 동일한 사람을 상대로 이루시는 것이다.(요10:14-15; 요17:6,9,10; 행20:28)
도르트 신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살리시며 구원하는 효력이 의롭게 인정받는 신앙을 주시고 그것으로서 그들을 실패없이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선택된 모든 사람에게 보급시키는 일이 성부하나님의 가장 높으신 계획이고, 가장 자비로운 뜻과 목적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이 은혜를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죄와 과오 이외에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돌려야 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비의 풍성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은혜를 입었다면 구원에 대한 수용과 거절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제한 속죄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야박하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주도권을 일관성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교리이며 실제로 대속의 은혜가 구원 받은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이 교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칼빈은 말하기를 부르심은 말씀의 들음에만 의존하지 않고 거기에 성령의 조명이 있음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분명히 인간은 자신의 충동에 떠 밀려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 없으며 경건한 자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칼빈은 그의 요한복음 6:46의 주석에서 택자와 비택자에게 똑같이 베풀어지는 외적인 부르심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복음의 말씀이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죄인 자신의 무능력에서 오는 무지 때문에 복음 앞에 선 인간은 본래부터 눈먼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부터 눈먼 자들은 성령께서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회심하게 하실 때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미치게 하신다고 하였다. 성령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여시고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죽어 있는 의지를 살리신다. 이것은 우리의 협력없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가 살아 있게 만드시는 일이다.
5. 성도의 견인(Perserance of the saints)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이름을 아는 지식을 주시고 자기 교회의 품안에 취하여 넣으신 자들은 그의 보호와 관심 아래 받아들여진다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는 받아 들여진 모든 자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지켜지도록 그에게 위임하신다. 따라서 참 신자는 타락할 수 없으며, 유다는 구원이 아니라 직분적인 선택을 받은 경우이다고 하였다. 칼빈은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주권이 반드시 성취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도르트 신조는 신자들이 내재하는 남은 죄와 이 세상의 유혹 때문에 은혜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어려우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성실하시며, 그들을 은혜 안에 깊이 머물게 해서 마지막까지 강력하게 붙들어 보존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신앙과 은혜에서 아주 탈락하는 일이 없고, 또 그들의 후퇴를 계속하되 멸망하는 일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변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공적과 중보와 보존이 무효화될 수 없고, 또한 성령의 인치심이 파기되거나 혹은 말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칼빈과 도르트 신조는 예정의 내용에 있어서 차이점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알미니우스가 칼빈의 예정론을 벗어나서 예지 예정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칼빈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선택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미니우스는 믿을 것을 예견된 자를 선택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칼빈주의가 칼빈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가 칼빈으로부터 멀어졌다.
B. 차이점
1. 시대적인 상황이 다르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것은 복음주의적 신앙의 확신을 갖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파리를 탈출하여 피신해 있는 상황에서였다. 1533년 만성절날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교 학장으로서의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빈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은헤에 의하여 구속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칼빈은 1533년 초 루이 뒤 틸레와 함께 잠적하였고, 틸레의 장서들을 이용하면서 기독교 강요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핍박 아래 있던 칼빈은 자신의 신학 사상의 변호를 위해 글을 썼고 로마 카톨릭과 가장 차이나는 부분인 구원론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르트 신조는 개신교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당시 화란은 로마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연합주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국가적인 결속력이 약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예정론 논쟁은 국가의 분열을 초래할 만큼 심각하였다. 따라서 도르트 신조는 국가와 교회의 통일을 위해 한 쪽의 주장을 무력화 시켜야 했고 정통 교리를 확립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도르트 신조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세우기 위해 예정론을 체계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주제가 다르다.
기독교 강요의 주제는 책 표제와 같이 경건과 구원에 관한 총체적인 교리였다. 칼빈은 구원의 관점에서 예정론을 취급하였다. 즉 예정론을 구원의 확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신조의 주제는 다만 예정론이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문제를 삼고 나온 것이 예정론이었기에 이에 맞대응하였던 정통 칼빈주의자들도 예정론의 논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도르트 신조는 예지 예정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예정론을 체계화하였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론은 부분적으로 교리로 다루어졌지만 도르트 신조에 있어서 예정론은 전체적인 교리로 취급되었다.
3. 목적에 있어 차이가 있다.
칼빈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참되고 순수한 지식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기 위하여 기독교 강요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도르트 신조는 논쟁의 결과 예정 교리의 확립을 위해서 작성되었으며,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해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도르트 신조는 칼빈이 쓴 예정의 교리를 축소 내지 간결하게 집약시켰다. 따라서 이 교리를 불신자의 전도용으로 사용하거나 신자들의 무책임한 신앙형태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신자들의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적용해야 한다.
2.4. 한국교회에 있어서 예정교리에 대한 이해
2.4.1. 한국교회사의 회고
초기 한국 개신교회가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선교사들의 수고를 통해 복음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그 선교사들도 역시 자국의 신학적인 영향아래 놓여있었고 각기 전제가 다른 교파들에서 파송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한국의 초기 개신교는 혼합된 교리위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한국 장로교는 한국교회 부흥의 모범이 되고 크게 영향을 끼친 초기 감리교의 집회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말은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근저에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혼합된 상황 속에서 1907년 독노회를 세웠고, 1908년 12신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선교지의 특수한 상황들 속에서 예정론에 있어서 유기론이 없으며, 알미니우스주의가 빠졌던 사고의 위험성을 허용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선교가 시작되던 해로부터 1920년대 중엽까지는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에서 지배적인 신학으로 통하였다.
1930년대 중엽까지는 한국 장로교 안에는 보수적인 신학사상이 지배적이었으나 감리교는 신학적으로 개방적이었다. 따라서 감리교 내에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부각되었다. 즉 하나님의 내재가 초월보다 강조되었으며, 인본주의적인 윤리에 더 많은 관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인본주의적인 윤리에 더 많은 관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지상에 이상 사회 건설이 실현될 것을 믿는다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든가, 의로우심과 심판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예수님의 탄생은 물론,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재림에 관하여는 아무 말이 없다. 이렇게 30년대 중엽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이 정통신학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40-50년대 한국 교회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분열의 시대를 겪었다.
1960년대의 급변하는 사회 상황은 복음 전도에 적절한 시기로 등장했다. 한국 교회 선교 80주년이 되는 1965년은 복음화 운동의 해로 정하여 초교파적인 조직을 갖추는 전동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때 보수주의 교회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까지도 W.C.C.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분열 속에 있었던 한국 개신교회는 연합이 추진 되었는데, 연합의 내용은 대형 집회를 통한 전도 집회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복음화 운동이 가속화 되어 독립적인 여러 선교 단체들을 통하여 대학생과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단체들이 지역교회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들은 독특한 그들의 성경공부와 전도 방법을 사용함으로 신학적 문제점을 가중시켰다.
여기에 성령의 은사 운동은 또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국 교회 안에 부흥 운동이 그 초기에는 성경 공부와 회개 운동이 주 흐름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에 급속히 확산된 성령운동은 성령의 은사를 중심으로 특별히 대형집회를 통해서 신유, 혹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이러한 은사 운동을 통해서 한국 교회는 성령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 확립이 없이 무분별하게 교회 안에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하여 기복신앙과 인간 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오늘날에도 같은 맥락에서 정통교리에서 벗어나있고 신학의 근거도 없는 신앙 운동들이 여러 방면에서 도출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제3의 물결(빈야드)의 체험 중심의 신앙과 다락방 운동의 인간적 구원운동 등을 들 수 있다.
2.4.2. 그릇된 이해
2.4.2.1. 복음 전도 방해 요소로서의 예정론 이해(보편구원론 추구)
초기 한국교회는 선교적 차원에서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장로교회의 핵심인 예정교리를 철저히 받지 못하였다. 다만 선교 지향적 목적을 위해 보편구원론적으로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보편구원론이란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떠한 일정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교리는 선교적 차원에서 설득력이 대단히 강한 교리로서 유아기적인 초기 한국교회에 쉽게 접목이 되었다.
또한 1907년 한국 장로교회가 독노회 조직과 함께 교회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12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를 위해 작성하고 채택한 것이었다. 12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보이나, 1890년에 작성 채택된 영국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도 참작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12신조의 내용에 이중예정에 대한 고백이 없는 것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려는 경향을 따른 것임을 알수 있으며, 초기 한국 교회의 단일 교회 형성에 대한 정황에 따라 예정론에 있어서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없었고,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신조였다. 이것은 한국 초기 선교지 신학의 한계이며 유아기적인 교회로 분별력이 없던 시기였다.
보편구원론은 “예정론이 택함을 받지 못한자에게 전도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강하게 반대하게 된다. 보편구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전세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을 근거로 주장한다. 딤전2:3,4에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전 인류’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겔33:11에 하나님은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는 말씀과 벧후3:9에서도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그들은 보편구원론을 주장한다.
2.4.2.2. 예정론을 운명론으로의 오해
우리의 의식속에는 동양 사상의 전제들이 남아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더라도 이러한 의식의 혼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예정론을 결정론 혹은 기계적 숙명론과 혼동하여 이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예정 교리를 운명론으로 대체하여 적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정 교리를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면 전자는 어떠한 부작용을 낳게 되었는가? 이것은 운명론으로 생각하게 함으로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자가 마땅히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신앙의 도리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자연히 그의 생활에서 절제와 인내는 사라지고 자유함 속에 방탕함만이 드러나지만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도 갖지 않게 된다. 또한 구원에 대하여 결정론적으로 보아서 전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후자는 예정 교리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기 때문에 잘못된 교리로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은 편파적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유기하신다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예정 교리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2.4..2.3. 예정론에 대한 복음주의의 이해
한국 교회에 자유주의의 도전이 심각해질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복음주의 이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근본 원리가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와 달리 특별히 강조한 부분은 “개인적 회심의 체험과 경건한 삶 등을 강조하는데 있다. 따라서 복음의 개인적 체험을 강조한 나머지 칼빈주의 근본 원리인 예정교리를 간과하는 개인주의, 주관적 자발주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있다고 할 때 인간은 어떻게 자유와 책임 있는 행동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인간의 구원 서정에 삽입하게 되는 우를 범하였다. 예정을 구원의 서정에 삽입하게 될 경우에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책임과 개인의 회심 체험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칼빈주의 개혁신앙에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일들의 배경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신학적 전제의 그 출발이 정통 칼빈주의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 신학 형성에 있어서 1930년대 중국의 신학자 차유명(Chia, Yu Ming)과 박형룡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박형룡 박사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전수에 있어서는 몇 가지 부족한 점들이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미국화된 정통주의를 한국에 소개한 것이다. 미국화된 정통주의라 함은 당시 미국을 강타한 근본주의의 영향아래 있었던 개혁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이후 발전된 유럽의 개혁신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한국의 사회 정치 종교적 상황과 더불어 토착화 되고 변형된 정통주의로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송길섭 박사는 이렇게 전수된 근본주의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본주의는 일제 식민주의와 신사참배 항거에 큰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부정적 영향으로는 첫째, 보수주의를 신학의 절대적 체계로 우상화시켰고, 둘째, 교회의 연합정신을 약화시켰고, 셋째, 이천년 교리사의 신학흐름을 외면하였다”.
2.4.3. 바른 이해들
개혁주의 예정 교리가 한국교회에 바르게 접목되었는가? 하는 점을 묻는다면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낙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개혁주의 예정론이 한국교회 역사를 통해 어떻게 자리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보자. 먼저 루이스 벌콥과 바빙크 신학이 박형룡, 박윤선 박사로 말미암아 한국에 소개되었다. 비록 박형룡 박사에게 있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적 정통주의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약점들이 있지만, 당시 한국 교회를 흔들고 있었던 진화론, 고등비평, 비교 종교학, 사회적 복음신학등을 비판한 점에서는 그 분의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
박윤선 박사를 통해서 바빙크 신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예정론의 뿌리를 한국교회에 내릴 수 있는 발판으로 볼 수 있다. 박윤선 박사는 웨스트민스터를 거쳐서 화란으로의 유학등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조들을 개혁주의 신앙의 체계로 보았으며,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바빙크, 카이퍼, 워필드, 하지, 메이쳔, 벌콥등으로 보고 있다. 그는 개혁주의 예정론을 부각했다기 보다는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가 개혁주의라고 정의하였고 그 원리들을 하나님의 주권, 성경의 권위, 종으로서의 인간관,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와 수용 그리고 일반은총의 수용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상고할 때 그는 화란 신학의 노선에서 칼빈을 수용하며 개혁신학을 정립했음을 알수 있다. 또한 그는 C. Vantil의 지도아래서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 리델보스 등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박형룡, 박윤선 박사의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이어받아 개혁주의 준거점이 될 수 있는 예정교리를 오늘날까지 지속해온 신학자를 든다면 신복윤 박사를 들수 있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 사상을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특별히 예정교리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으로 표현하여 일체의 유한한 피조물과는 독립된 것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에서만 기원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는 자연의 과정을 정하시고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과정을 지도하시며 그의 작정은 영원하며 불변하고 거룩한 것이며, 자혜로운 것이며 주권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지는 예정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예정에 뒤따르는 것이며 예정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만약 예지가 앞선 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와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 예지요, 예지 예정이 아니다”
그는 또한 예정론에 있어서 돌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따라 결정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타락전 선택설은 먼저 택자와 유기자를 작정하신 후 창조하셨고 그 계획에 따라 타락을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택자들을 위해 보내시고 적용을 위해 성령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셨다. 반면 타락후 선택설은 먼저 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고,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그 후에 타락한 인간 가운데 어떤 자를 선택하시고 어떤 자는 타락한 상태로 내버려 두시기로 작정하셨고 택자를 위해 구원자를 준비해 주시고, 적용을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타락전 선택설은 순서가 보다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반면 타락후 선택설의 순서는 영적이며 논리적이며 역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2.5. 개혁주의 예정교리에 따른 21세기 개혁교회상 확립
2.5.1. 개혁주의 예정론 재인식
예정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냉혹함과 황무함, 공통적인 이론이 아닌 창조주와 피조물(인간) 관계가 가깝고 가장 생명적이며 가장 중요한 설명이며 우리 신앙의 은혜의 근거요 그를 향한 찬송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정론에 대한 한국 교회의 진리의 무지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구원관’이 왜곡되었고, 이로 인한 개인의 신앙모습 또한 주관적이며, 감정적 요소에 호소하는 신앙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예정론은 신앙에 주는 참된 유익이 분명하며, 그 신앙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즉,예정교리는 성도들이 환란과 곤고와 위험한 자리에 있게 될 때 안전감과 용기의 근원이 되어서 항상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담당케 함으로 꾸준히 덕행을 지켜 나가게 한다(행 5:41).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예정론에 대한 무지는 전반적인 현상으로 개교회 성장과 부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 해석과 설교가 이용되는 것으로부터 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성도의 신앙은 기복적, 미신적, 신비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러한 신앙은 그들에게 환란 속에서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했으며, 구원의 확실성 마저도 사라져 버리게 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의 것(조건, 노력)으로 돌려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등장했던 알미니우스적 신앙으로 돌아서 버리는 것인데, 이들의 특징은 열심과 노력, 의지에 따르는 신앙 즉, 신앙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이다.
앞에서 예정론의 역사적 배경들을 살펴 보았듯이 개혁주의 교회 안에 예정론은 신앙과 신학의 중요한 준거점이 되며, 특히, 알미니안적 요소가 이 시대의 교회에 들어와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를 성경적 신앙으로 돌이키는 준거점이 된다. 알미니우스와의 논쟁에서의 도르트 회의 승리는 우리의 개혁 신학과 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신조는 오늘의 교회에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정론을 가르치며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 조차도 포기할 때 개혁 교회의 미래는 어둡게 될 수밖에 없다.
2.5.2.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서의 예정론
학문의 발달은 그 자유로운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오늘날 대학제도의 발전은 칼 대제 때 자유학문이 신학의 준비단계로서 신학과정에 자리를 내어 줌으로서 발전되었다. 그러한 발전과정에서 자유학문들이 신학과 분리됨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독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발전된 학문은 역으로 신학에 영향을 끼치며 시대 정신들을 주도해 나갔다. 교회 역사에 등장한 각 신조와 고백들 - 돌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등 - 은 바로 시대 정신에의 항거로서 작성된 것들이다.
특별히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이성에 대한 기대와 과신은 인간의 영혼이 하얀백지와 같아서 교육을 통해서 참된 인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시대를 지나면서 교육을 통해서 참된 인간을 만드는 일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사회전반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과거에는 사회의 문제들에 관해서 종교가 어느 정도 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육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회의로 인해 혼돈 속에 놓여있는 교육 현장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사회의 구조 악들의 억제 역할을 담당해야 할 종교의 영역이 같은 형식으로 - 인간 중심의 체계들 - 인하여 잠식당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있는 역할자로서의 기독교도 동일하게 인간 중심의 논리에 뿌리를 둔 이단 사설 혹은 혼합주의적 사상들에 그 문을 열어 놓은지가 오래되었다.
이렇게 전체적이고 철저하게 왜곡된 혼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다른 곳에서 그 해결책을 찾기에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해결책이라도 그것은 부분적이며, 표면적인 것일뿐 근본적인 절대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체 이루어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 속에서 대안으로는 칼빈주의 예정론으로부터 출발이 그것이다. “과거에 이신 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는데 그것은 사회적 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가치기준들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는 영원한 구원의 핵심이 인간론 중심으로 바뀌어 졌다.” “그러나 예정론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 하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극히 겸손케 한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주고, 정치사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이신칭의론보다 훨씬 더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다.”
예정교리는 단순히 사변적인 기독교 교리로 보기에는 너무나 근본적인 문제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치와 사람의 위치를 규명해 주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찾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끝없는 욕망을 억제한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도 더 깊은 위기와 좌절로 몰고가지 않는다. 그것은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 자체 원리를 위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은혜를 버렸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은혜 속에서 확신을 세우는 것이다.
결 론
칼빈과 도르트 신조는 그 내용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상은 성경을 근거로하여 논리를 전개하며, 성경으로 결론을 맺는다. 다만 도르트 신조는 알미니안 주의를 반박하기 위하여 예정 교리를 조직적이고 체계화 하였다. 그러므로 예정론에 대한 개혁 신학적 입장은 도르트 신조로 인해서 더 확고하게 정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정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받는 것도 좋은 일이나, 고백되어진 내용들을 다시금 성경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정을 도르트 신조가 만들어진 상황처럼 논쟁을 위한, 또는 변증을 위해서 예정론을 언급하기 보다는 오히려 칼빈처럼 구원의 확신을 위한 고백으로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로우심의 계획이므로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이시지 않는 것은 사람의 지적 호기심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 교리에 대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함부로 과장하지 말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에서 산출된 것이 아니고 전연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정론의 고백을 순수하게 받아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8항에는 다음과 같이 예정론의 유익점을 소개하고 있다.
“지극히 신비로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예정의 목적은 일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과 영생얻은 줄을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하나님께 찬송과 경외와 존귀를 돌리게 되며, 진실히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은 이 교리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근면해지고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예정 교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상의 나태와 책임의 회피를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겸손함과 부지런함과 선행의 자극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함에 그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첫댓글송구하지만.. 글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정교리는 하나도 어려운게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를 길게 늘이기도하고 아주 줄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근데 마지막 결론에도 나오지만.. 이 논문의 결론도.. 한쪽눈은 감은채 모든 것을 안다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마지막 결론부분을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한쪽눈으로 보죠.. 만약 이글을 올리신 님께서.. 천국가기로 특별히 결정된 사람이라면.. 님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당연히.. 마지막 부분의 희망차고 소망이 넘치는 말들을 할 수 있겠죠.. 가령 겸손함이니 부지런함이니 선행의 자극제니 하나님께 영광돌리니.. 하시면서 말이죠...
그러면 이제 지금 보는 눈을 잠시 감으시고.. 그동안 뜨지 않았던 반대쪽 눈을 함 떠보실래요? 그눈을 떠니까.. 님 자신을 보니 창세전부터 수천억년전부터 지옥가기로 유기된 자요 정해진 자더라는 거지요... 자 이제 마지막 축복이라는 그 글귀들을 볼까요? 칼빈의 지옥 예정교리가 나태와 책임의 회피를 위한 도피처가 아니며 겸손과 자비와 은총과 선행의 자극제가 되는 그런 진리의 극치요 신비와 오묘함의 극치의 하나님의 더할나위없는 은총이며 사랑인가요?
칼빈론자들은 말이죠... 결코 자신은 천국운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믿는답니다.. 아무도 지옥가기로 예정되었다고는 결코 믿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확신이 넘쳐서 그런게 아니에요.. 지옥에 떨어질 운명자가 혹 될까봐 두려워서.. 임의적으로 천국 택자, 예정자로 믿고 싶은거에요.. 아니라구요? 그럼 제가 증명해보죠.. 님이 다니는 교회에 몇명이나 되나요? 설문지 함 돌려보실래요? 과연 자신이 구원받았고 거듭났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기로 100% 확신하는자가 얼마나 되는지?? 사실상 칼빈론자 중에는 구원에 있어 확실한 근거와 믿음을 가진 자들 그렇게 많지 않아요.. 막연히 구원받겠지 이런거죠.. 저도 그런 생활 정말 오래해봐서
잘 알아요...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아세요? 칼빈의 예정론에 기초한다면... 현재 내가 십자가의 어떠한 복음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이것보다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천국가기로 결정났다 다른 사람처럼 지옥가기로 정해진 자가 아니다라는 반대급부에 대한 신념이.. 더욱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근거가 되는데요.. 그럼에도.. 지금당장 죽어도 구원받았다. 천국에 간다라는 확신을 가진 자들이.. 진실로 음밀히 말하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럼 그 근거를 어디서 찾는지 가르켜 드려요?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라도 내게 올수 없다는 말씀을 곧잘 인용하면서.. 택자라고 사탕유혹하죠.. 그럼 이것이 왜 잘못된 미혹인지말
씀드려요? 그럼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중에 교회한번 않나본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 그때는 하나님이 불러서 오지 않았고 자기가 올때만 부른건가요? 아주 모순된 사탕발림식 유혹이죠... 진리는 한쪽눈만 감고 아웅하는 편법이 아니에요... 만일 그렇다면.. 왜 자신이 불택자로 유기된 자로의 가능성은 왜 않열어두는거죠? 그렇게 천국운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크게 확신해서 그런가요? 혹시 그렇게 믿고자하는 자기 신념은 아닐까요? 혹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보다하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목숨걸고 주장하는건 아닐까요? 만일 100%가 아니라면.. 그 빈자리만큼의 지옥운
명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시고 그부분에 자신이 속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래놓고도... 사랑의 하나님이니 겸손이니 은총이니.. 이런 망언을 할수 있는지요... 또 님의 가족들은 그렇게 천국운명자인것을 확신하나요? 어떤분에게 이렇게 질문하니까.. 하는말이... 사도행전을 인용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전혀 칼빈의 예정론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칼빈의 운명론을 믿는데요.. 자신이 하는말이 뭔지도 분별도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앵무새지저귀듯이.. 보이는대로 말하는거죠.. 정말 그 간수가 주 예수를 믿으면.. 자신 뿐아니라 가족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칼빈의 예정론이 말여요.. 한면만 보고.. 은총이니 겸손이니 어떻니.. 이렇게 말하지마세요.. 정녕 코끼리 뒷다리 만져놓고.. 나는 코끼리를 다 안다는 어리석은 주장일뿐이에요... 칼빈의 교리는 한편에선 하나님을 찬양해놓고..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을 마귀로 둔갑시키는 심히 추잡한 교리에요... 칼빈론자들은 한면만 보고 자신은 그곳에 포함되었다는 헛된 망상적 믿음을 가지고 우기고 있기때문에.. 반대편에 속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으려하니까..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천국가면 행복이고 겸손이고 은혜고 충만이고 사랑이고 그러는 거에요... 자신이 저쪽편에 속했다고 해봐요.. 그러면 완전히 180도 바뀌어 버릴꺼에요.. 한마디로.
지극히 유아기적인 관점이고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거죠.. 아기들은 자기 좋은것만 알지... 전혀 반대편의 생각은 하지 못하죠... 아기들만 그런줄 아세요? 아주 흉악한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는 사악한 자들도요... 자기편에 좋은것만 생각할 줄 알지.. 타인의 고통엔 전혀 무관심이에요.. 그들이야 죽든 말든 지옥운명이든 말든 그들의 고통은 생각지 못해요.. 물론 자신이 지옥운명자라고는 조금도 생각않해보죠.. 심리구조가 유아기나 아니면 범죄자같은 영적 무감각에 빠져버리는거죠.. 그러니 칼빈이 자신의 무엇에 맘에 않든다고 58명이나 잔인하게 죽이지 않았겠어요.. *^^*
정녕 칼빈의 운명론적 예정론이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자신이 지옥운명자로 영원토록 지옥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할 자로 창세전 수천억년전부터 결정받았다 할찌라도... 그 교리는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은혜요 겸손이요 선함이요 선행의 원동력이다라고 해야하는거에요.. 그럴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칼빈론자들은요 한 쪽으로만 겸손 어떻고 떠들지요.. 자신이 지옥운명자로 낙인찍혔다고 실제로 그렇다면.. 오히려 그 교리를 저주하고 나설 사람들이에요.. 않그런것 같죠? 그런지 아닌지 본인이 함 테스트해보세요..
"레마의말씀님" 제가 위에 올린 글(펌글)을 소개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먼저 적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향회원 거의가 교단내의 어느 교회에 소속되었다는 가정하에서 교회 헌법에서 명시되어 있는 신앙고백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 실상을 잘 모르분이 혹시 있을까 해서 알려주고 싶은것 이었습니다. 개신교 헌법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최근에 개정된 흔적이 없는한, 교회직원(목사,장로,집사)이 공회앞에서 성경 및 교리(대소요리문답 및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를 두고 서약하는 행위가 필요에 따라 행해 지고있는 것도 우선 알아야 하고, 더 큰 이유는 이 교리 안에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분명히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회에서 이 신조를 빼고서 서약을 하는 것은 이치상, 신앙양심상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정론을 받아들이든지, 직분을 받지 않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모순되지 않을 것입니다. 각 교단과 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묵인한채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이라면 직분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며 교회의 본질상 어긋나는 일이며, 이런 사실을 직분을 받을자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심각하게 우려하는 점은 개개인이 예정론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분을 받을때 신앙고백을 했으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모르고 하는 것 입니다. 이런 뜻에서 유럽쪽의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서약 및 서명까지 한답니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직분을 맡기지 않기 까지 교리서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채택한 교리(특히 예정교리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 주기적인 살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단(교회)은 일치된 신앙고백 위에(예정론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바로 서 있어야 영적인 혼란이 초래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교단(교회)가 예정론을 지지한다면, 강단에서 가르치는 목사(장로)가 교인들은 물론 교회학교 교사 및 어린심령에 이르기까지 먼저 가르쳐야 하며,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도 지지하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가야 만이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단이 침투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교리적으로 너무 약하며, 교회성장과 세력확장과 치부에만 관심이 있고 이런 일에는 너무나 미온적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는 어릴때 부터 교회학교 교육을 통한 철저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거나, 알미니안주의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을 그 곳에서 목회를 했던 목사님으로 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셩경(특별계시)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강림과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승천, 재림 등의 진리를 우리가 논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성령의 능력만으로 이해 할 수 있고, 이 성경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이나, 우리가 다 믿고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예정교리도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원리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말기를 경고 했고,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후 1:20~21)으로 교훈하고, 또한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오류를 범하지 말도록 더 엄격하게 경고"(계 22:19)하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자가 주장하는 교리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드래도, 성경 자체는 아니므로,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인 성경과 동등시 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로 봅니다. 그래서 교리가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신학 일지라도,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면 전혀 가치가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레마의 말씀님께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님이 생각하고 있는 예정론에 대한 정의와 그 길을 파악했기 때문이며, 제게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습니다.(제가 맡은 육신의 일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다만 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다르니 각자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면 될 것이지 날 더러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해 보라는 권유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님의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여 불 필요한 소모전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 이요, 정녕 필요를 느끼신다면 님이 계신 교회에서 하셔도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칼빈주의자들을 두고 "유아기적 사고방식"이라는 평을 했습니다.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예정론이 "유아기적 사고방식"라고 님께서 견해를 밝히신다면, 님께서 이 칼빈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예정론을 예향 지성방에 소개해 주십시요. 만약, 님의 글이 "유아기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성숙된 사고방식"으로 제가 느껴진다면 님에게 존경을 보낼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저 역시 님의 인격은 존중을 하면서 님이 쓴 글에 대해서는 "유아기적 사고방식"으로 평가를 할 수 있음을..
아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도 예향의 각방을 통해 님의 글들을 접했으나 내 자신의 맘에 닫는 글들을 별로 접하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는 평범한 수준에서 머무는 정도로만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님은 예정론이 쉽다고 말씀하시나, 저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소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몇번이나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역시 "신비" 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러나 님에게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해명하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으니 심려 마시길 바랍니다. 님으로 부터 답 글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님이 말씀하시는 예정론에 대한 견해를 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상호간에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ON-LINE 공간이라 상대방을 알 수가 없긴 하지만, 꼬리말을 적을 때는 상대방의 연륜이 님과 다를(높고 낮은 경우) 수도 있음을 아시고, 보다 신중하게 글을 적어 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서로가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글 속에 그사람의 인격이 숨어 있고, 사람의 인격을 글이 대신하여 무제한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글을 주고 받는 중에 상대방의 인격을 읽을 수 있고, 단순히 적은 글만 보고 인격을 오판하는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해서라 생각됩니다(훈계로 들으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리플을 단 것은 글을 옮기신 진실로님... 개인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며...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론의 어떠함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저의 예정관은 본 방의 칼 바르트의 예정론이란 글이 있는데... 그분의 예정론과 거의 유사합니다.. 관심이 없으시다면.. 상관없으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글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강요는 아니니...
레마의말씀님... 님의 의도가 칼빈주의를 겨냥한 것 임을 리플의 글을 통해 이미 알았기 때문에, 내가 오해를 했다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올린 "칼 바르트"의 예정론 또한 접했고, 제가 올린(펌글) 속에도 들어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와 다른 것 임을 알았읍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하지 말자 한 것입니다. 그래도 친절히 안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첫댓글 송구하지만.. 글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정교리는 하나도 어려운게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를 길게 늘이기도하고 아주 줄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근데 마지막 결론에도 나오지만.. 이 논문의 결론도.. 한쪽눈은 감은채 모든 것을 안다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마지막 결론부분을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한쪽눈으로 보죠.. 만약 이글을 올리신 님께서.. 천국가기로 특별히 결정된 사람이라면.. 님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당연히.. 마지막 부분의 희망차고 소망이 넘치는 말들을 할 수 있겠죠.. 가령 겸손함이니 부지런함이니 선행의 자극제니 하나님께 영광돌리니.. 하시면서 말이죠...
그러면 이제 지금 보는 눈을 잠시 감으시고.. 그동안 뜨지 않았던 반대쪽 눈을 함 떠보실래요? 그눈을 떠니까.. 님 자신을 보니 창세전부터 수천억년전부터 지옥가기로 유기된 자요 정해진 자더라는 거지요... 자 이제 마지막 축복이라는 그 글귀들을 볼까요? 칼빈의 지옥 예정교리가 나태와 책임의 회피를 위한 도피처가 아니며 겸손과 자비와 은총과 선행의 자극제가 되는 그런 진리의 극치요 신비와 오묘함의 극치의 하나님의 더할나위없는 은총이며 사랑인가요?
칼빈론자들은 말이죠... 결코 자신은 천국운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믿는답니다.. 아무도 지옥가기로 예정되었다고는 결코 믿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확신이 넘쳐서 그런게 아니에요.. 지옥에 떨어질 운명자가 혹 될까봐 두려워서.. 임의적으로 천국 택자, 예정자로 믿고 싶은거에요.. 아니라구요? 그럼 제가 증명해보죠.. 님이 다니는 교회에 몇명이나 되나요? 설문지 함 돌려보실래요? 과연 자신이 구원받았고 거듭났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기로 100% 확신하는자가 얼마나 되는지?? 사실상 칼빈론자 중에는 구원에 있어 확실한 근거와 믿음을 가진 자들 그렇게 많지 않아요.. 막연히 구원받겠지 이런거죠.. 저도 그런 생활 정말 오래해봐서
잘 알아요...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아세요? 칼빈의 예정론에 기초한다면... 현재 내가 십자가의 어떠한 복음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이것보다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천국가기로 결정났다 다른 사람처럼 지옥가기로 정해진 자가 아니다라는 반대급부에 대한 신념이.. 더욱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근거가 되는데요.. 그럼에도.. 지금당장 죽어도 구원받았다. 천국에 간다라는 확신을 가진 자들이.. 진실로 음밀히 말하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럼 그 근거를 어디서 찾는지 가르켜 드려요?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라도 내게 올수 없다는 말씀을 곧잘 인용하면서.. 택자라고 사탕유혹하죠.. 그럼 이것이 왜 잘못된 미혹인지말
씀드려요? 그럼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중에 교회한번 않나본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 그때는 하나님이 불러서 오지 않았고 자기가 올때만 부른건가요? 아주 모순된 사탕발림식 유혹이죠... 진리는 한쪽눈만 감고 아웅하는 편법이 아니에요... 만일 그렇다면.. 왜 자신이 불택자로 유기된 자로의 가능성은 왜 않열어두는거죠? 그렇게 천국운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크게 확신해서 그런가요? 혹시 그렇게 믿고자하는 자기 신념은 아닐까요? 혹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보다하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목숨걸고 주장하는건 아닐까요? 만일 100%가 아니라면.. 그 빈자리만큼의 지옥운
명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시고 그부분에 자신이 속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래놓고도... 사랑의 하나님이니 겸손이니 은총이니.. 이런 망언을 할수 있는지요... 또 님의 가족들은 그렇게 천국운명자인것을 확신하나요? 어떤분에게 이렇게 질문하니까.. 하는말이... 사도행전을 인용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전혀 칼빈의 예정론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칼빈의 운명론을 믿는데요.. 자신이 하는말이 뭔지도 분별도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앵무새지저귀듯이.. 보이는대로 말하는거죠.. 정말 그 간수가 주 예수를 믿으면.. 자신 뿐아니라 가족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아님 사도가 하는말이.. 너가 천국운명자면 믿게될 것이고.. 네가 믿든지 않믿든지 천국운명자든지 지옥운명자든지 네 가족은 자신의 운명대로 정해진대로 천국이나 지옥이나 갈 것이다이렇게 말해야.. 정답아닌가요? 그 간수와 가족들을 구원과 천국,지옥을 담보로 사도가 약올리는 걸까요?
칼빈의 예정론이 말여요.. 한면만 보고.. 은총이니 겸손이니 어떻니.. 이렇게 말하지마세요.. 정녕 코끼리 뒷다리 만져놓고.. 나는 코끼리를 다 안다는 어리석은 주장일뿐이에요... 칼빈의 교리는 한편에선 하나님을 찬양해놓고..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을 마귀로 둔갑시키는 심히 추잡한 교리에요... 칼빈론자들은 한면만 보고 자신은 그곳에 포함되었다는 헛된 망상적 믿음을 가지고 우기고 있기때문에.. 반대편에 속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으려하니까..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천국가면 행복이고 겸손이고 은혜고 충만이고 사랑이고 그러는 거에요... 자신이 저쪽편에 속했다고 해봐요.. 그러면 완전히 180도 바뀌어 버릴꺼에요.. 한마디로.
지극히 유아기적인 관점이고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거죠.. 아기들은 자기 좋은것만 알지... 전혀 반대편의 생각은 하지 못하죠... 아기들만 그런줄 아세요? 아주 흉악한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는 사악한 자들도요... 자기편에 좋은것만 생각할 줄 알지.. 타인의 고통엔 전혀 무관심이에요.. 그들이야 죽든 말든 지옥운명이든 말든 그들의 고통은 생각지 못해요.. 물론 자신이 지옥운명자라고는 조금도 생각않해보죠.. 심리구조가 유아기나 아니면 범죄자같은 영적 무감각에 빠져버리는거죠.. 그러니 칼빈이 자신의 무엇에 맘에 않든다고 58명이나 잔인하게 죽이지 않았겠어요.. *^^*
정녕 칼빈의 운명론적 예정론이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자신이 지옥운명자로 영원토록 지옥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할 자로 창세전 수천억년전부터 결정받았다 할찌라도... 그 교리는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은혜요 겸손이요 선함이요 선행의 원동력이다라고 해야하는거에요.. 그럴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칼빈론자들은요 한 쪽으로만 겸손 어떻고 떠들지요.. 자신이 지옥운명자로 낙인찍혔다고 실제로 그렇다면.. 오히려 그 교리를 저주하고 나설 사람들이에요.. 않그런것 같죠? 그런지 아닌지 본인이 함 테스트해보세요..
유아기적 사고방식으로.. 나는 확실히 천국운명자야.. 라고 잘못 짚었다가 나중에 영원불못에 떨어지면 낭패를 볼수도 있쟎겠어요.. 제글은 글쓴분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며.. 모든 칼빈의 운명론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하는말이랍니다.. 오해 없으시길...
"레마의말씀님" 제가 위에 올린 글(펌글)을 소개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먼저 적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향회원 거의가 교단내의 어느 교회에 소속되었다는 가정하에서 교회 헌법에서 명시되어 있는 신앙고백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 실상을 잘 모르분이 혹시 있을까 해서 알려주고 싶은것 이었습니다. 개신교 헌법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최근에 개정된 흔적이 없는한, 교회직원(목사,장로,집사)이 공회앞에서 성경 및 교리(대소요리문답 및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를 두고 서약하는 행위가 필요에 따라 행해 지고있는 것도 우선 알아야 하고, 더 큰 이유는 이 교리 안에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분명히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회에서 이 신조를 빼고서 서약을 하는 것은 이치상, 신앙양심상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정론을 받아들이든지, 직분을 받지 않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모순되지 않을 것입니다. 각 교단과 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묵인한채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이라면 직분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며 교회의 본질상 어긋나는 일이며, 이런 사실을 직분을 받을자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심각하게 우려하는 점은 개개인이 예정론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분을 받을때 신앙고백을 했으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모르고 하는 것 입니다. 이런 뜻에서 유럽쪽의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서약 및 서명까지 한답니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직분을 맡기지 않기 까지 교리서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채택한 교리(특히 예정교리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 주기적인 살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단(교회)은 일치된 신앙고백 위에(예정론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바로 서 있어야 영적인 혼란이 초래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교단(교회)가 예정론을 지지한다면, 강단에서 가르치는 목사(장로)가 교인들은 물론 교회학교 교사 및 어린심령에 이르기까지 먼저 가르쳐야 하며,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도 지지하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가야 만이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단이 침투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교리적으로 너무 약하며, 교회성장과 세력확장과 치부에만 관심이 있고 이런 일에는 너무나 미온적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는 어릴때 부터 교회학교 교육을 통한 철저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거나, 알미니안주의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을 그 곳에서 목회를 했던 목사님으로 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셩경(특별계시)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강림과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승천, 재림 등의 진리를 우리가 논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성령의 능력만으로 이해 할 수 있고, 이 성경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이나, 우리가 다 믿고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예정교리도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원리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말기를 경고 했고,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후 1:20~21)으로 교훈하고, 또한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오류를 범하지 말도록 더 엄격하게 경고"(계 22:19)하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자가 주장하는 교리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드래도, 성경 자체는 아니므로,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인 성경과 동등시 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로 봅니다. 그래서 교리가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신학 일지라도,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면 전혀 가치가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레마의 말씀님께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님이 생각하고 있는 예정론에 대한 정의와 그 길을 파악했기 때문이며, 제게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습니다.(제가 맡은 육신의 일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다만 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다르니 각자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면 될 것이지 날 더러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해 보라는 권유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님의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여 불 필요한 소모전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 이요, 정녕 필요를 느끼신다면 님이 계신 교회에서 하셔도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칼빈주의자들을 두고 "유아기적 사고방식"이라는 평을 했습니다.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예정론이 "유아기적 사고방식"라고 님께서 견해를 밝히신다면, 님께서 이 칼빈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예정론을 예향 지성방에 소개해 주십시요. 만약, 님의 글이 "유아기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성숙된 사고방식"으로 제가 느껴진다면 님에게 존경을 보낼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저 역시 님의 인격은 존중을 하면서 님이 쓴 글에 대해서는 "유아기적 사고방식"으로 평가를 할 수 있음을..
아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도 예향의 각방을 통해 님의 글들을 접했으나 내 자신의 맘에 닫는 글들을 별로 접하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는 평범한 수준에서 머무는 정도로만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님은 예정론이 쉽다고 말씀하시나, 저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소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몇번이나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역시 "신비" 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러나 님에게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해명하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으니 심려 마시길 바랍니다. 님으로 부터 답 글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님이 말씀하시는 예정론에 대한 견해를 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상호간에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ON-LINE 공간이라 상대방을 알 수가 없긴 하지만, 꼬리말을 적을 때는 상대방의 연륜이 님과 다를(높고 낮은 경우) 수도 있음을 아시고, 보다 신중하게 글을 적어 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서로가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글 속에 그사람의 인격이 숨어 있고, 사람의 인격을 글이 대신하여 무제한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글을 주고 받는 중에 상대방의 인격을 읽을 수 있고, 단순히 적은 글만 보고 인격을 오판하는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해서라 생각됩니다(훈계로 들으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리플을 단 것은 글을 옮기신 진실로님... 개인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며...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론의 어떠함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저의 예정관은 본 방의 칼 바르트의 예정론이란 글이 있는데... 그분의 예정론과 거의 유사합니다.. 관심이 없으시다면.. 상관없으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글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강요는 아니니...
레마의말씀님... 님의 의도가 칼빈주의를 겨냥한 것 임을 리플의 글을 통해 이미 알았기 때문에, 내가 오해를 했다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올린 "칼 바르트"의 예정론 또한 접했고, 제가 올린(펌글) 속에도 들어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와 다른 것 임을 알았읍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하지 말자 한 것입니다. 그래도 친절히 안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