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매년 9월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올해 강사로 초대받은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厭世主義)가 사실 장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은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경험을 쌓는 데 40년이 걸리며 그것에 대한 해석을 다는 데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선 70년은 무조건 살아보라는 것이다. 70년을 채우지 못한 인생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70살을 넘기면 이제 더이상 사는 데 의미가 없는지 묻는 분들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ṣad)’*의 견해에 따라 자연스러운 인간의 수명을 백 살로 보았다. 그 이유는 아흔 살을 넘겨야 사람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뇌졸중과 같은 큰 병에 걸리지 않고 경련도 없이, 숨이 가빠 힘들어 하거나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도 없이 식사를 마친 후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살기를 멈추는 죽음”이다. 따라서 10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때가 이른 죽음이다. 또한 ‘구약성서’에는 인간의 수명을 70세로 정하는데, 건강하다면 80세가 인생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짦고 긴 인간의 수명은 숫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충분히 늙어서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젊을 때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다. 많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질병도 비정상적인 것이며 또한 자살도 더욱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니다. 인간은 70~100세 사이에 언제나 죽을 수 있지만 사투를 벌이지 않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늘 해야 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젊을 때보다 인생의 지혜를 더 알게 된다. 행복이 쾌락의 증가보다는 고통의 감소나 부재에 있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노년에는 돈이나 명성, 권력을 더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큰 고통 없이 숨을 거두는 죽음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겨야 한다. 건강을 더 얻으려고만 하지 말고 적당히 잃는 법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젊어지려 애쓰지 말고 잘 늙어가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파니샤드(Upanishad) : 구전되어온 인도 철학의 사상들을 문헌으로 모은 것이다.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이란 뜻으로, '(스승의 발아래에)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브라만교 성전인 《베다》에 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베단타(Vedānta:《베다》의 끝·결론)'라고도 한다. 우파니샤드는 주로 대화ㆍ문답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고(古)우파니샤드'만으로도 수백 년의 기간에 걸쳐서 다수의 사상가의 손을 거쳐서 작성된 것이므로, 내용적으로는 각종 잡다한 사상을 포함하며, 상호 모순되는 주장이 수록되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근본 사상은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Ā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필연적인 일이자 동시에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죽음의 준비 작업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음이 너무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100세까지 잘 늙어서 몸의 힘이 서서히 빠져야 마지막에 살려고 발버둥치는(사투를 벌이는) 일이 없게 된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우리가 흔히 복(福)을 누리며 별다른 병치레 없이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 즉, 호상(好喪)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100세의 장수를 누리기 위한 비법을 쇼펜하우어는 다음 두 가지 예를 들어 말한다. 등불에 비유하자면 “기름은 얼마 없지만 심지가 매우 얇아서 오래 타는 경우와 심지가 무척 굵지만 기름도 많아서 오래 타는 경우가 있다.” 기름이 생명력이라면 심지는 생명력을 소모하는 방식이다. 서른여섯까지는 ‘원금에 붙는 이자’처럼 오늘 생명력이 다 떨어져도 내일이면 다시 생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원금을 갉아먹는 손실처럼 적자가 커져 쉽게 원상복구가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손실에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건강뿐만 아니라 돈(자본)도 아껴 써야 한다. 청춘이 행복했던 시간이고 노년은 슬픈 시간이라고 한탄하지 말고 우리는 “청춘의 힘을 아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이든 신체든 젊을 때 너무 혹사해서 소진해서는 안된다. 쇼펜하우어가 예로 들 듯이 어릴 때 천재라고 소문이 났던 조숙한 사람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정신력을 소모하면 나중에 늙어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가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생명력을 소진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재산(돈)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는 헤겔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민간 철학자. 염세주의 철학의 창시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칸트의 직계라고 자임하면서 세계를 표상으로 간주했다. 헤겔과는 견원지간이었으나 칸트를 흠모하여 아침형 인간이 되는 것만 빼고는 모두 칸트를 본받았을 정도다. 학자를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뒤늦게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했다. 철학 교수와 여성들을 혐오했고,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말년에는 오직 개 한 마리와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인간과 자연,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의지라고 주장했다. 대표작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인류는 내게서 몇 가지를 배웠고 그걸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철학에서는 행간의 눈물과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와 다들 죽고 죽이느라 아우성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
◦인간의 가혹하고 불쌍한 많은 운명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불행과 고뇌를 겪을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우리보다 더 불행한 자를 바라보는 것이다.
◦인생이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인생을 견뎌 냈다"라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만족이 부족할수록 남들에게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독서는 스스로 사고하기의 단순한 대용품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면 남의 생각에 자신의 사고가 끌려 다닌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누릴 능력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마음을 온통 돈에 바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진정한 연관성을, 종종 그것들이 일어나는 동안이나 그 직후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인간은 헛되이 신들을 만들지만, 신들에게 구걸하고 아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의지력이 초래할 수 있는 것 만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결점이나 악덕은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결점이나 악덕만 알아챈다.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
[출처: 동아일보 2024년 10월 14일(화)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Daum·Naver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