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필流水筆
- 차주일
일생을 인생으로 정리하는 사람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낡은 만년필과 잉크 한 병
모국어 만년필을 두고서, 거듭
외래어 fountain pen이라 말하는 까닭에
명사보다 명사가 품은 뜻을 오래 생각하게 되네.
선물이 유산으로 개명되는 경로를
맑은 샘물은 하류에 이르러 탁수로 고이지.
근원이 뜻을 찾는 노정이란 것 보여 주기 위해.
맑은 도착은 없다는 것 증명하기 위해.
발원과 하류; 무채색으로부터 무채색으로까지,
걸어가는 사람을 거슬러 가야만 도착하게 되지.
탁본으로 해석하는 음각어陰刻語처럼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음音으로
수평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훈訓으로 구별하는
사람에겐 신이 모르는 만년 내력이 있지.
사람의 뜻이 삶이란 걸 알아차리면
두 다리가 펜촉처럼 제자리에 서게 돼.
단색의 흑黑이 다의多義의 현玄으로 읽히는
수평으로 일평생 직립을 걸어 낸 발이 멈추면
온몸은 수평으로 돌아가고 두 발만 직립이 되지.
나가 나에게 걸어 온 것 증명하기 위해.
일생이었는지 인생이었는지 구별하기 위해.
ㅡ계간 《시와반시》(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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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통과하는 구어와 종이에 남는 문어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구어는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달리 들리고 곧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어
나중에 되새김하면 현실감이 한참 떨어지게 되며 실제와 달리 왜곡되기도 합니다
불후의 명문으로 칭송받는 문장이 여럿 남아있습니다만, 세월따라 해석은 분분합니다
음音과 훈訓이 다른 삶이어서 누구에게는 일생이고 누구는 그저 인생이 되고 맙니다
단색의 흑黑이 다의多義의 현玄으로 읽히는 세상살이에서 홀로 똑똑한 척하기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