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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와 서양미술의 만남 2편 - II. 서양화속으로 불었던 일본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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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와 서양미술의 만남 1
II. 서양화속으로 불었던 일본풍
1.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고흐는 파리에 오기 전 머물렀던 안트웨르펜에서부터
이미 방의 벽을 우키요에로 장식할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파리에 와서 더욱 우키요에에 빠져든 고흐는 수백점의 우키요에를 모아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그 전시회를 곳이 바로 아래 그림에 나오는 탱부랭 이라는 카페인데, 몽마르뜨에 있었고 고흐의 단골집이었죠.
Agostina Sagatori Sitting in the Cafe du Tambourin
Paris, February-March 1887, Oil on canvas, 55.5 x 46.5 cm
Amsterdam, Van Gogh Museum
저 여인은 카페의 주인입니다. 고흐의 누드화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림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죠?
고흐가 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술로 위안을 찾는 여인의 무력한 고독감을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뒷벽에는 그가 모은 우키요에들을 잔뜩 걸어놓았죠.
그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깊은 생각에 빠져 표정을 잃은 여인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여인의 모자와 함께 우키요에도 이국적인 엑세서리가 되고 있습니다.
고흐는 우키요에를 수집하거나 그림의 배경에 넣는 것을 넘어서 직접 모사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Vincent van Gogh
Japonaiserie: Flowering Plum Tree(after Hiroshige)
Oil on canvas, 55.0 x 46.0 cm, Paris: September-October, 1887
Amsterdam: Van Gogh Museum
우타가와 히로시게
[명소에도백경], 가메이도의 매화저택, 1857
Vincent van Gogh
Japonaiserie: Bridge in the Rain (after Hiroshige)
Oil on canvas, 73.0 x 54.0 cm, Paris: September-October, 1887
Amsterdam: Van Gogh Museum
우타가와 히로시게
[명소에도백경], 오하시(大橋) 아타케의 소나기, 1867
위의 고흐의 작품과 히로시게의 작품을 비교해 보시죠.
일전에 고흐의 재창조와 오마쥬를 보여드렸지만,
저 정도면 모방을 통한 창조가 아니라 남의 작품이 그냥 너무 마음에 들어
똑같이 따라 그렸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옆 테두리에는 장식으로 한자를 ‘그렸’다는 것과 우
키요에가 아니고 유화라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히로시게의 몇몇 작품들은 고흐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특히 <아타케의 소나기>의 경우는
전편에서 말씀드렸던 <요츠기도리 수로의 끄는 배>와 함께
고흐가 일본에 가서 직접 제작한 판화 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작품을 보고 고흐가 끌리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고흐의 따라 그리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Vincent van Gogh
Japonaiserie: Oiran (after Kesaï Eisen)
Oil on canvas, 105.0 x 60.5 cm, Paris: September-October, 1887
Amsterdam: Van Gogh Museum
Paris Illustré
Paris Illustré 라는 잡지에 우키요에 작가인 케이사이 에이센의 작품이 표지를 장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위쪽 고흐의 그림은 그 잡지의 표지에 있던 에이센의 작품을 모방한 것입니다.
작품제목인 ‘오이란’ 은 몸을 파는 일본 기녀를 말합니다.
춤이나 악기 연주등 주로 예능인이었던 ‘게이샤’ 와 구별되는데
머리에 꽂는 비녀의 수도 오이란이 더 많았습니다.
또 오이란은 오비(기모노를 입을 때 허리에 두르는 띠)를 (손님 접대시)풀기 쉽게 앞으로 묶었고
게이샤는 뒤로 묶었다고 합니다.
고흐는 작품의 모티프로 계속 우키요에를 사용했습니다.
Portrait of Père Tanguy,
Oil on canvas, 92.0 x 75.0 cm, Paris: Autumn, 1887
Paris: Musée Rodin
Portrait of Père Tanguy
Oil on canvas, 65.0 x 51.0 cm, Paris: Winter, 1887-88
Collection Niarchos
저 뒤에 걸린 것들이 다 우키요에 입니다.
카페의 여주인 때와는 달리 뒷 배경의 우키요에들이 아주 생생합니다.
주인공인 탕기 영감이 전면에 부각되어 존재감 자체가 굳건하기 때문이죠.
이 그림들에는 평면성이라는 일본판화의 특징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카페 여주인을 그린 초상화에서는 화면에 공간감을 주는 배경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작품은 일체의 다른 공간이 없으며 배경이나 인물묘사에서도
특별히 공간감이나 입체감을 느끼게 할 요소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특히 아래쪽 탕기영감을 보면 오히려 인물의 윤곽을 확실히 하기 위해
붉은 선으로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그래서 공간감은 커녕 배경에 가져다 붙인 콜라쥬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탕기영감은 파리코뮨에 참여하기도 했던 화상인데
화가들에게 값싸게 재료를 팔았고 불우한 화가들을 위해 별채에 조그만 전시실을 열어주는 등
화가들에게는 인망이 높았던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쇠라, 고흐, 고갱, 세잔 등
후일 미술사의 주요 인물들은 탕기영감 덕분에 교류도 나누고 활동공간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저 신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대가들을 묶어 전시회를 하려면 도대체 얼마의 비용이 들까요....
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토요쿠니, 케이사이 에이센 의 작품들.
Self-Portrait with a Japanese Print
Oil on canvas, 44.0 x 35.0 cm, Paris: December, 1887
Basle: Offentliche Kunstsammlung, Kunstmuseum Basel--on loan from the Emily Dreyfus Foundation
그림의 제목이 '일본 판화가 있는 자화상' 입니다.
당연하게도 벽에 걸려있는건 우키요에인데 그 존재가 흐릿합니다.
역시 중심이 되는 인물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그 배경도 조화를 이루어야겠죠.
하나 더 찾아볼까요.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Oil on canvas, 60.0 x 49.0 cm, Arles: January, 1889
London: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고흐가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자르는 사건을 벌인 후에 그린 그림입니다.
고갱은 그를 떠나버렸고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려던 꿈이 있었던 고흐는
이 사건 후 모든 희망을 잃고 더욱 더 스스로 고립됩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동시에 입은 화가의 슬픈 눈과 굳은 표정이
뒤에 걸린 우키요에의 화려함과 대비됩니다.
고흐가 저 사건을 저지른 곳이 남프랑스의 아를인데
파리에서 남프랑스로 떠난 것도 일본과 관련이 깊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훨씬 비용이 많이 드는데도 남프랑스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봐.
우리는 일본미술을 좋아했고 그 영향을 느껴왔어. 인상주의자들도 다 같을거야.
그렇다면 왜 일본에 가지 않을까. 그건 남프랑스가 일본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야.” 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일본미술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이 넘치는 아를과 일본을 동일시 한 것이 엉뚱하긴 하지만
고흐의 목표는 일본 판화에서 보았던 밝고 화사한 색채를 생활 속에서 찾아 구현하는 것이었고
아를은 고흐의 그런 의도를 실현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Vincent van Gogh
Orchard in Blossom
Oil on canvas, 72.0 x 58.0 cm, Arles: April, 1888
Switzerland: private collection
우타가와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역참 중 이시야쿠시
우키요에에서 보았던 바로 이런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죠.
그래서 아를에 도착한 뒤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를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붙잡기만 하면 될 뿐,
굳이 일본 미술을 참조할 필요가 없다” 고 한 것입니다.
그는 아를 시절 초기에 꽃이 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그리며 일본적 모티프를 취합니다.
고흐는 왜 이렇게 일본미술에 빠져들었을까요?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모든 일본 미술품에서 보는 것처럼 순수하고 극단적인 명료함을 원한다.
그것은 결코 단조롭거나 허둥대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마치 옷의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단순하고 손쉽게,
일본 화가들은 몇 개의 분명한 선으로 형상을 만든다.”
(인고 발터, [빈센트 반 고흐],마로니에 북스, p15)
Still Life: Vase with Twelve Sunflowers
Oil on canvas, 91.0 x 72.0 cm, Arles: August, 1888
Munich: Neue Pinakothek
Still Life: Vase with Fifteen Sunflowers
Oil on canvas, 93.0 x 73.0 cm, Arles: August, 1888
London: National Gallery
고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해바라기 그림인데 평면화의 의도가 드러나죠. .
단지 색의 대립을 통해 서로 다른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을 뿐
꽃병이 있는 위치가 벽과 맞닿은 바닥인지 탁자의 끝부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명암처리를 했지만 꽃병에는 굵은 테두리를 두르고
비교적 평탄하고 단일한 색으로 칠했습니다.
전편에서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평면성은 우키요에의 특징입니다
Vincent's Bedroom in Arles
Oil on canvas, 72.0 x 90.0 cm, Arles: October, 1888
Amsterdam: Van Gogh Museum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방이죠.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암과 그림자는 없애버리고 일본 판화처럼 자유롭고 평평하게 색을 칠하려고 해.” 라고 말했습니다.
Les Alyscamps: Falling Autumn Leaves
Oil on canvas, 73.0 x 92.0 cm, Arles: November, 1888
Otterlo: Kröller-Müller Museum
아를에 있는 알라스캉 거리를 그린 그림입니다.
위 고흐의 그림과 이 우키요에들을 비교해보세요.
위에서 내려다보기, 대각선구도, 원근법, 수직과 대각선의 대비 등
우키요에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도들을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을 동경하고 찾아간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고흐는 파리 시절 체득한 인상주의의 경험과 우키요에의 연구를 통해
밝은 색상의 대비, 형태의 단순화와 평면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고흐를 고흐로’ 만든 감각적인 색채를 폭발시키게 된 것입니다.
2.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빛을 그리려 했고 그래서 변화하는 빛을 따라 평생을 보낸 모네는
서양미술의 큰 줄기를 바꿔놓은 인상주의의 핵심인물입니다.
다른 인상파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모네도 일본의 미술에 빠져들어 우키요에와 공예품들을 모았는데
우키요에가 보여준 밝은 색의 평면적 사용, 비대칭구도, 근경과 원경의 겹침 등은
모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La Japonaise
1875, Oil on canvas, 231 x 141 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모네의 아내인 카미유 동시외가 모델이 된 이 그림은
당시의 일본 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바닥엔 돗자리가 깔려있고 벽에는 일본풍 부채가 잔뜩 붙어있는데 마치 풍선이 떠있는듯 합니다.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무라이를 두텁게 수놓은 붉은 옷이나
금발의 가발을 쓴 카미유가 부채를 들고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다분히 극적으로 의도된 연출처럼 보입니다.
주로 야외에 나가서 눈부신 햇빛을 그려내던 당시 모네의 화법과는 차이가 많은 그림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유행이나 당시 대중의 취향에 맞아서인지
두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2천 프랑이라는 거금에 팔렸습니다.
다소 의도적으로 시류에 영합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지만
그때는 인상주의가 대중에게도 비평가에게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불우한 시기였으니
모네 자신도 좀 놀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모네의 그림을 우키요에와 비교해 볼까요.
모네가 꼭 우키요에에서 구도를 빌리진 않았겠지만
그도 열광적인 우키요에 컬렉터였기 때문에 아주 영향이 없었다는 것이 더 이상하겠죠.
비교해 보니 이런 유사점이 있더라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Claude MONET
Garden at Sainte-Adresse, 1867, 98.1 x 129.9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가츠시카 호쿠사이
[후가쿠 36경], 오백나한사에서 본 풍경
두 개의 수평선이 치밀하게 배치된 배치된 구도가 아주 유사합니다.
Garden of the Princess, Oil on Canvas, 1867, 91 x 62 cm
Allen Memorial Art Museum, Oberlin College
우타가와 히로시게
[명소에도백경], The Eight Streets and Sujichigai
높은 곳에서 조망한 시점, 화면 중하단의 다이아몬드구조,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건물의 존재까지 상당히 유사한 구도입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도카이도 53 역참], 눈 그친 가메야마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강이나 길, 다리가 커브를 그리고
화면을 분할하는 구도는 히로시게의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후가쿠 36경], <도카이도의 호도가야>
우타가와 히로시게, [명소에도백경]중에서
모네가 지베르니의 포플러 숲에서 그린 연작입니다. 호쿠사이의 구성과 비슷합니다.
단지 세로로 죽죽 뻗은 여러 나무들을 배치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무를 통한 새로운 프레임을 구성하고 그 사이로 풍경을 바라본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엡트강의 뱃놀이>
우타가와 히로시게,<오키섬의 타키비 신사>
배와 두 사람이라는 중심 모티프가 어중간하게 잘려있습니다.
이러한 비대칭의 잘림구도.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은 히로시게가 자주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아르장퇴유의 철도교>
우타가와 히로시게,
<오카자키 부근 야하기강의 야하기다리>
화면위쪽을 가르는 다리의 구도가 유사합니다.
포플러 연작과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던 건초더미 연작입니다.
화면 오른쪽에만 중심을 둔 비대칭구도이며 중심 모티프인 짚더미와 후지산이 잘린 점도 비슷합니다.
절벽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바다풍경이 유사합니다.
화면안에 프레임을 구성하고 멀리 보이는 경치를 구성한 점이 유사합니다.
유명한 작품이죠. <카퓌신 대로>입니다.
확대한 부분을 보면 사람의 형체가 뭉개져 있습니다.
모네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한 비평가는 카퓌신 거리를 걷고 있으면
자기도 저렇게 변하느냐며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화면을 대각선으로 분할한 구도가 유사합니다.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며 고생하던 모네는
1880년대 중반부터 작품이 팔리게 되었고 결국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지베르니에 사 모은 땅에 큰 집과 정원을 짓고 자신의 낙원을 건설하게 되죠.
요즘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모네가 자신의 정원에 놓은 일본풍 다리(우른쪽 아래 사진)를 그린 그림입니다.
모네 편은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의 MONET & JAPAN 색션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드가, 휘슬러, 커셋, 보나르, 로트렉, 마네, 고갱은 다음 편으로 올리겠습니다.
이미 다 써놓긴 했는데 분량도 많고,
무엇보다 그림을 일일히 사이즈 조정해서 외부링크 시키고 옮기는게 손이 너무 많이 가네요.
그동안 작품정보를 제대로 올리는걸 원칙으로 했는데 귀찮아서 뒤쪽에는 좀 빼먹었습니다.
앞선 글들도 그랬습니다만, 이번 우키요에와 서양미술에 관한 테마는
공부도 많이 했고 시간도 많이 들여서 정말 정성껏 썼습니다.
처음엔 그냥 흔히 알려진 몇몇 작품 소개만 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궁금하거나 의문나는 점이 많이 생기더군요.
모네의 <일본 여인> 처럼
그냥 일본의상을 입고 공예품을 들고 있는 그림은 많고 소개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우키요에의 영향이 그렇게 작품의 배경으로 쓰이는 것 뿐이었다면
그저 한때 예술가들의 취미생활 이외에 서양미술의 발전에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정말 구체적인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해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설명들이 써있는 책들은 많습니다만
제대로 알기쉽고 체계적으로 설명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하려면 거기에 맞는 도판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부족하니 피부에 와 닿지가 않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래서 나름대로 여러 책을 찾아도 보고 해외 사이트를 뒤지면서
스스로 납득이 될때까지 파봤습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긴 합니다만 다음 3편까지 다 진지하게 보시면,
관심있으신 분들께(그런 분들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저번에 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보는 베르메르> 라는 글이
PGR 자게에서 최소 조회수 경신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조회수에 신경 안쓴지는 오래되었지만 횟수가 300 이 안되길래
혹시나 싶어 READ를 눌러 역순위를 봤더니 .......
이런 와중에도 반대칭어장관리상태 님, ohfree 님 등등
제 글을 꾸준히 봐주시고 좋은 말씀 남겨주시는 몇몇 분들께는 참 감사드립니다.
이런 게시판에 글을 쓰는 이유는 자기만족도 있겠지만
남에게 보여준다는 목적이 우선하니까요.
첫댓글 고흐도 모네도 우키요에의 작품을 좋아해서 모으고 그 영양을 받아서 작품의 배경으로도 쓰면서 발전을 했다니 우키우에는 그시대의 정말 대단한 화가 였네요~
일본의 우키요에가
서양 현대미술의 초석입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줬구요
이어서 후기인상파, 야수파, 입체파를 거쳐
현대 추상 회화가 완성됩니다
우키요에가 서양 현대회화의 뿌리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