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한 수] 군주의 회한
昨夜風兼雨, 簾幃颯颯秋聲.
(작야풍겸우, 렴위삽삽추성.)
지난밤 바람 불고 비까지 몰아쳐,
발이며 휘장까지 쏴 하는 가을 소리.
* 颯颯(삽삽) : 비바람의 의성어
燭殘漏滴頻欹枕, 起坐不能平.
(촉잔루적빈의침, 기좌불능평.)
촛불 가물대고 물시계도 그칠 즈음,
뒤척뒤척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보고,
일어났다 앉았다 평온치 않은 마음.
* 漏滴(루적) : 물시계의 물방울이 떨어지다. 시간이 가다.
世事漫隨流水, 算來一夢浮生.
(세사만수류수, 산래일몽부생.)
세상사 유수처럼 제멋대로 흘렀으니,
돌아보면 한바탕 꿈인양 덧없는 인생.
醉鄉路穩宜頻到, 此外不堪行.
(취향로오의빈도, 차외불감행.)
취향(醉鄕)으로 가는 길이 평탄해 자주 가느라,
딴 길은 아예 갈 엄두도 못 냈지.
* 醉鄉(취향) : 당나라때 왕적(王績)이 술을 좋아해서 「취향기(醉鄉記)」를 지은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술취했을 때 느끼는 몽롱한 느낌을 가리킨다.
―‘오야제(烏夜啼)’ 이욱(李煜·937∼978)
취향(醉鄉), 삶의 지향을 망각한 채 주색(酒色)에 탐닉한 미망(迷妄)의 세계. 시인은 그곳을 향한 길이 평탄하였기에 ‘딴 길은 아예 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비바람 속 가을밤을 지새우며 ‘덧없는 인생’에 심란해한다. 놀랍게도 이 노래의 주인공은 일국의 제왕에서 망국의 신하로 전락한 혼군(昏君). 그 탄식과 회한마저 군주라기엔 너무나 연약하고 무기력하다. 한데 문학사는 이 혼군을 ‘천고사제(千古詞帝)’, 역사에 길이 남을 사(詞)의 제왕이라 치켜세운다. 망국의 한이 서린 애상미(哀傷美)와 굴곡진 삶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이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고 인정한 때문이리라. 시인의 비극이 문학의 광휘(光輝:환하고 아름답게 눈이 부심)로 남는다는 아이러니를 실감한다.
시인은 당과 송 사이 반세기 남짓 존속했던 오대(五代) 시기 남당(南唐)의 황제. 마지막 임금이라 후주(後主)라는 칭호가 따라붙어 통칭 이후주(李後主)라 불린다. ‘오야제(烏夜啼)’는 곡명,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이욱(李煜, 937-978 ): 자(子)는 重光(중광), 號(호)는 鐘隱(종은)]은 오대십국시대의 10국(十國) 중에 하나인 남당(南唐)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촉한의 마지막 황제 유선과 함께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건국하고, 세력을 확대해오자, 이에 겁먹은 이욱은 당제국에서 강남국(江南國)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가 아닌 '국주'(國主)를 자처했으나, 조광윤(趙匡胤)에게 나라가 멸망당했다.
남당이 망한 후 개봉에 끌려와서 살다가 송태종(宋太宗) 재위 기간, 생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진말 항우의 애첩 '우미인(虞美人)'이란 사(詞)를 지었다가 이에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
황제로서의 능력은 실격자로, 국정을 제대로 살피는 것보다는 문학 작품을 짓고 부르는 데 더 열중했다. 때문에 시인으로서는 일류급이었지만, 황제로서는 삼류라는 평가조차 과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황음무도하거나 자신의 취미를 위해 백성을 혹사시키거나 가혹한 징세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욱이 사망한 것을 들은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예술가 황제로 송휘종 조길과 함께 이름이 높고, 예술 때문에 나라를 망친 황제로 또 함께 이름이 높다.
남당의 수도인 금릉성이 포위된 마당에도 문학 작품을 짓고 노래 부르는 데 열중할 지경이었으니... 실제로 그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서화(書畫)와 음률에 정통한 만능 예술인 이였다. 그러나 송 휘종이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황제로서 자기 취미를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킨 반면에, 이욱은 자기 취미를 위해 혹독한 징세를 하거나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도 예술적인 면에서 일대 종가를 이루어 송대 문학가 4인방을 꼽으면 꼭 들어갈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당대 서적에서도 황제로 태어나지 않고 문학가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중 '사(詞)의 명인으로 유명하고, 훗날 송나라에서 태동하게 되는 송사(宋詞)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首(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년 10월 18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