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많은 민족
◆더러운게 정(情)이다.
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은
정(情)과 법(法)이다.
정(情)은
관심과 사랑이고,
법은 강제이고 엄포다.
세계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으로
네 사람을 선정했다.
인도의 석가(釋迦 ․ 기원전 562~432),
중국의 공자(孔子․기원전 551~479),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
이스라엘의 그리스도(기원전 4~기원후 30)이다.
이를
‘세계의 사성(四聖)’이라고 한다.
석가는
불교(佛敎)를 창시한 분이고
불교의 중심 사상은 자비(慈悲)다.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공자는
유교(儒敎)를 대표하는
중국의 사상가로
중심 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타고 난 어진 마음씨와
자애의 정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덕’이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거리에서
문답식으로 설교(변증법)를 했고,
대표적인 사상은
‘악법도 법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신약을 완성한 예수이고
핵심사상은 ‘사랑’이다.
사랑은
‘아끼고 위하며
한 없이 베푸는 일’이다.
이 네 성현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진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법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면
어떤 벌을 받는가를 명시한 행동규범이고,
네 성인의 가르침은
관습법(慣習法)에 근거한
온화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정(情)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하여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나,
인이나 사랑은 광의의 것이고,
정은
개인에게로 향하는 협의의 사랑이다.
정은 한 번 붙으면
쉽게 떨어지지도 않는다.
믿었던 사람이 배반했을 때 행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 어머니들이
‘더러운 게 정(情)’이라고 하셨다.
고통을 참으면서 낳아
모든 정성을 다해 기르던
어린 자녀가
저 세상으로 갔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우리 고향에
무서움을 많이 타서
밤에는
부엌에도 나가지 못하던
새댁의 첫 애기가 죽었다.
눈이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던
애기를 잊을 수 없어
엄마는 눈물로 살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매일 밤
애기 무덤에 가서
잔디를 움켜쥐고 울었다.
그래서 애총에서
귀신이 운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엄마의 자식에게 쏠리는
정이 그러하리라.
정에는
여러 명칭이 있다.
가족 사이에는 애정(愛情),
친구 간에는 우정(友情),
연인 사이는 연정(戀情)…….
정은
오랫동안 접촉하여
자연스럽게 싹틀 수도 있지만,
일방적으로 생길 수도 있다.
상대방의 마음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 달라붙는 경우다.
그런 경우를
짝사랑이라고 한다.
짝사랑은 때로는 크나
큰 상처를 남긴다.
자신을 짝사랑하다 죽은 총각 때문에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기생이 된 황진이.
선덕여왕의 행차를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 연정을 품었다가
여왕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슴없이
몸을 불사른 걸인 지귀.
정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도 있다.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면 그리워진다.
나는
여덟 살 때 고향을 떠나
같이 놀던 동무들이 보고 싶고,
그들과 놀던
팽이돌리기, 연날리기, 물놀이를
꿈속에서까지 같이 했다.
고향은
비록 말은 못하지만
찐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정이라고 보고 싶다.
정은
짐승에게도 있다.
강아지를 부르면
반갑다고 달려 와
깡충깡충 뛰어 오르는 것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어느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특징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했다.
사귀기가 힘들지,
한번 사귀어 놓으면
간까지도 빼 준다는 글을 읽었다.
한국 사람의 성향도
여러 층이 있겠지만
한 사람만 보고
그런 결론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서양 사람보다
한국 사람에게 정이 많다는 것은
여러 외국인들의 견해였다.
왜 한국인에게는
서양 사람보다 정이 많을까?
유럽에선 14세기 중반
전염병 페스트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때 사회 체제는
장원(莊園)제도였는데
페스트 이후 바뀌었다.
소작농민들이 많이 죽어
일손이 부족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도시로 나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도시 생활의 특징은
부모-자식으로 구성되는 핵가족이다.
핵가족 제도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개인주의는
우리가 ‘깍쟁이’라고 부르는
이기주의자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유교 사회로
3, 4대가 한 지붕 밑에서 살던
대가족 제도였다.
그런 가정은
가장(家長)의 권위가 컸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사상도
널리 퍼졌다.
봉제사는
부모님께 효도하다가 돌아가시면
살아 계실 때와 같이
3년 동안 밥상을 차려
궤연(几筵) 앞에 놓아 드리고,
그 후에는
기일(忌日)에 제사 지냈다.
접빈객은
손님이 오면
괄시하지 말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런 풍습의 DNA가
한국인의 몸에 배어 있어
핵가족화 된 현대에도
자연스럽게
정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이름에도 정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 이름은‘순이’다.
내 누님과 여동생의 이름에도
순이가 붙었다.
양순이, 옥순이, 금순이.
우리나라 여성의 이름에는
순이를 붙인 이름이 많다.
앞에
무슨 자가 붙든 끝에
‘순이’가 붙으면
순이라고 부르고 싶다.
순이는 예쁘지도,
화려하지도,
밉지도 않은,
수수하게 생긴 시골 처녀여야 하고,
말이 없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정이 있어야 한다.
초등학생 때 같은 반에 순이가 있었다.
그녀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매였다.
얼굴은 통통하고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였다.
2학년 때
나하고 같은 책상에 앉았었다.
우리 학교는
각 학년 4개 반이 있었는데
새 학년에는 섞어 놓았지만
순이와 나는 3, 4, 5학년까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5학년 때
비 오는 날
내 우산을 같이 쓰고
순이네 동네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더니
이튿날
옥수수 한 개를 슬그머니
내 책상에 넣어 주었다.
그 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서 피란 나와
순이를 만나지 못하다가
60년대 중반 광화문에서 보았다.
점심시간에 밖에 나갔는데
앞에 제복을 입은
두 처녀가 나란히 걸었다.
헤어져서
한 여성이 내 앞으로 가다
뒤돌아보는데
‘순이다’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걸음을 빨리 했지만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순이가 사라진
골목 입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있으면
그 자리에 서서
행인들을 살펴보는 것이
습관화 되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다.
나는 가끔 임진각에 간다.
내 고향이
임진강 건너에 있는 비무장지대여서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어서였다.
강 건너에 보이는
순이가 살던 동네는 없어졌지만
깜장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 순이는
80이 넘도록 내 가슴에 살아 있다.
요즘
우리도 서양을 닮아
개인주의로 가는 경향이 있다.
더불어 살아갈 때,
남과의 접촉이 많을 때 정도 깊어지고,
미움도 커진다.
사람을 신간(人間)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다.
나는 가끔
깊은 산 속에 들어 가
혼자 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아름다운 것을 보고
누구에게 얘기하고 싶을 때 어떻게 참나.
미칠 지경일 것이다.
성현들은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비하하는
말까지 나온다.
자랑을 너무 많이 할 때를
경계하는 말이다.
하지만
자랑하고픈 심정이 들때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국인은
정 많은 민족이라는 말을 영원히 듣고 싶다.
조 흥 제 |
첫댓글 그렇습니다 더러운게 정이기도 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정에 대해 잘 배워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