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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와 서양미술의 만남 2편 - II. 서양화속으로 불었던 일본풍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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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와 서양미술의 만남 1
우키요에와 서양미술의 만남 2
II. 서양화속으로 불었던 일본풍
3. 드가 (Edgar Degas, 1834-1917)
드가는 인상파에 참여했지만 풍경에 치중한 모네, 피사로, 시즐리 등 다른 인상파화가들과는 달리
인물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르느와르도 인물을 즐겨 그렸지만
그 역시 인상주의에 동참하던 시절에는 빛이 가득한 야외에서 작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주로 실내에서 작업하면서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탐구하던 드가와는 다릅니다.
드가는 친구인 티소와 함께 일찍부터 우키요에 컬렉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화가들이 일본취향을 그림에 직접 드러낸데 비해
드가는 일본공예품, 의상 등을 작품속의 모티프로 이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일본판화의 독창적인 구성과 시점에 나타난 잘라냄과 비대칭의 미학을 주목하고
이를 자신이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발레 연습장면을 통해 드가는 다양한 자세와 여러 각도에서 신체를 관찰했는데
특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을 통한 독특한 각도에서
다양한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포착해내었습니다.
드가의 이 그림들은 잘라내기와 비대칭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보통 여러 사람이나 사물을 그리다보면 일부가 잘리는 경우도 생기죠.
그런 그림들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화가도 지금 드가가 했듯이 저렇게 어중간하게 잘라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키요에 에서나 보던 것입니다. 마치 잘못 찍은 사진들 같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순간의 포착, 혹은 보고 싶은 부분만 확실히 부각하는 스냅사진 같은 구성입니다.
화면 바깥의 세계를 암시하여 공간이 확장되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들이 화면 가장자리를 이용한 잘라냄이라면,
이제 보실 작품들은 그림속의 장치를 이용한 잘라냄입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무희들의 모습이 막으로 잘려있습니다.
우타마로의 작품과 상당히 유사한 구성이죠.
드가가 아니면 막이 오르내리는 저 순간을
누가 포착해서 그리려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발레리나가 아라베스크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 유명한 그림에서도
커튼에 가려 뒤쪽에 있는 남자와 다른 무희들이 모습이 잘려있습니다.
잘라냄과 비대칭, 조망적 시점이 다 들어가 있네요
모자를 써보고 있는 장면인데 점원인지 동행인지 모를 사람을 거울로 가려버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어중간하게 말입니다. 그 거울은 화면을 수직으로 잘라서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의 판화에서 보던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모자상점을 배경으로 한 여러 점의 시리즈중 하나입니다.
그림의 모델은 드가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미국의 여성화가인 메리 커셋인데
이 분 얘기는 밑에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왼쪽의 계단이 발레리나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발과 옷자락만 보입니다.
오른쪽엔 역시 얼굴의 중간에서 잘려진 여인이 있습니다.
역시 오른쪽 무대장치가 잘려있고 모델은 왼쪽으로 쏠려있는 비대칭구조입니다.
그리고 창살로 화면안에 프레임을 구성하고 밖의 경치를 넣은 것도
히로시게의 판화에서 사용되었던 구성입니다.
제일 왼쪽 여인의 신체 절반을 잘라내었고,
원근법을 이용한 사선 구도,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
왼쪽은 번잡하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비어있는 비대칭등
우키요에에서 차용한 여러 특징들이 고루 발견됩니다.
잘 보면 화면 밑부분으로 무엇인가 크게 삐져 나와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다가 손가락이 살짝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주네요.
바로 눈앞에서 시야를 가리는 물체를 배치하는 것은 히로시게의 독창적 구성이죠.
이 두 그림이야 말로 히로시게 판화의 영향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거의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성을 사용한 작품으로 보이네요.
윗 층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시점, 잘라내기,
눈앞을 가리며 그림의 한쪽을 크게 차지하는 대형 사물,
대각선 구도등 종합선물세트 입니다.
3.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미국인이지만 주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했던 휘슬러는
누구보다도 일찍, 그리고 열성적으로 일본풍에 빠져들었습니다.
우키요에는 물론이고 도자기, 우산, 기모노, 부채 등 여러 가지의 일본 상품을 수집했습니다.
주로 일본 미술의 양식과 규범을 응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그림속 소재로써 많이 이용했습니다.
James McNeill Whistler
Nocturne in Blue and Gold: Old Battersea Bridge
1872-77; Oil on canvas, 68.3 x 51.2 cm; Tate Gallery, London
휘슬러는 작품 제목을 독특하게 짓기로 유명한데 녹턴 시리즈 중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죠.
템즈강 배터시 다리의 안개낀 저녁풍경을 묘사한 이 그림은
푸르스름한 대기와 수면의 효과가 멋진 작품입니다.
아래의 히로시게의 판화와 구성이 비슷합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명소에도백경], 교바시(京橋)의 대나무 뱃터
Caprice in Purple and Gold: The Golden Screen
일본 병풍을 배경으로 일본의상을 입은 여인이
히로시게의 작품으로 보이는 우키요에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구도와 화면 한쪽으로 중심이 되는 모티프(여인)를
몰아놓는 비대칭이 엿보입니다.
Variations in Flesh Colour and Green: The Balcony
이중 수평선과 오른쪽의 수직선 이라는 기본 구도가 아래 호쿠사이의 판화와 유사합니다.
일본 의상과 술, 샤미센을 켜는 여인등 일본풍이 물씬 느껴집니다.
잘림과 비대칭성도 얼핏 드러납니다.
일본의상과 공예품을 모티프로 한 그림들입니다.
Rose and Silver: The Princess from the Land of Porcelain
Purple and Rose: The Lange Leizen of The Six Marks
5. 메리 커셋 (Mary Stevenson Cassatt, 1845-1926)
Mary Cassatt
Maternal Caress, 1891
Drypoint and soft-ground etching 36.5 x 27 cm
기타가와 우타마로
<어머니와 잠자는 아이>
Mary Cassatt
The Letter, 1891, Drypoint, soft-ground etching and aquatint.
From a series of ten colour prints
기타가와 우타마로, <게이샤 히나츠루>
드가의 친구였으며 미국의 인상파 여류 화가인 메리 커셋은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묘사하는 신선한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에콜 드 보자르에서 열린 우키요에 전시회를 본 후 우타마로가 했던 주제와 구성으로
[A Set of Ten Color Etchings] 를 만들었습니다.
6.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1947)
고갱의 영향을 받아 나비파(Nabis-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의미)를 결성했었고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는
자포나르(자포니즘+보나르 Nabi japonard)라 불릴만큼 누구보다도 일본 미술에 빠져있었습니다.
Pierre Bonnard
Street Corner, 1897
From the series Quelques aspects de la vie de Paris, 1899
Lithograph in four colors, 27 x 35.5 cm
보나르 역시 우키요에의 예사롭지 않은 시점에 영감을 얻었습니다.
[파리 생활의 모습들] 이라는 연작판화에서 보나르는 히로시게와 마찬가지로
종종 조감시점을 사용하여 큰 길과 복잡한 뒷골목에 드러나는 도시의 활기찬 삶을 묘사했습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역참], 오츠
음영없는 평탄한 색면을 통해 마치 콜라쥬 같은 장식적 요소가 엿보이는 초기의 작품들.
<정원의 여인들>
보나르는 같은 주제를 담아 흔히 쓰이지 않는 긴 패널에 그림을 그려
일본의 족자나 병풍 같은 느낌을 주는 시도도 했습니다.
Promenade des nourrices, frise des fiacres
병풍으로 제작된 석판화입니다.
Ice Palace
이런 작품들에서도 원근과 음영에 의한 입체감보다는 평면성과 작가만의 색채감이 두드러집니다.
White Cat
7.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몽마르트 언덕의 보헤미안이었던 로트렉은
우키요에의 단순한 색과 형태가 가진 명료함을 포스터라는 광고 미술에 활용하였습니다.
늦은 밤 댄스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연구했고 샤라쿠가 했듯이 그들을 묘사했습니다.
샤라쿠가 극적 메이크업으로 과장되고 일그러진 가부키배우의 얼굴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듯이
로트렉도 차갑고 날카로운 현실관찰과 석판화의 특색을 살린 대담한 화면구성으로
새로운 포스터를 만들어냈습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도슈사이 샤라쿠, <하인 에도베 역할로 분한 오타니 오니지>
At the Moulin Rouge: La Goulue and Her Sister, 1892,
Lithograph printed in six colors
La Goulue Arriving at the Moulin Rouge with Two Women
1892, Oil on cardboard, 79.4 x 59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Yvette Guilbert Greeting the Audience
1894, Oil over reproduction on photographic paper, 48 x 28 cm
Musee Toulouse-Lautrec, Albi
Jane Avril
Color lithograph (first state), 189
샤라쿠의 작품속 인물들의 표정과 비교해도 더 아름답다고 하기 힘들겠죠.
Moulin Rouge: La Goulue
1891, Lithograph in four colors (poster), 191 x 117 cm
로트렉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이 작품은
판화가로서의 로트렉이 있게 한 중요한 작품이죠.
몽마르뜨 언덕위의 빨간 풍차로 유명한 댄스 홀 물랭루즈의 포스터입니다.
일본 판화에서처럼 아무런 음영도 없는 평탄한 색면의 효과를 한껏 이용했습니다.
실루엣으로만 처리된 앞쪽 남자의 모습과 뒤쪽 관객의 모습도 그렇고,
음영이 없는 흰색과 노란색의 조화가 그렇습니다.
또 화면왼쪽으로는 다른 무용수의 노란색 치맛자락을 잘라내어 크게 그려넣었는데,
이는 드가의 예에서 보았듯 히로시게의 독특한 구성을 참고했으리라 생각됩니다.
8. 그리고 평면성에 관하여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Olympia
1863, Oil on canvas, 130.5 x 190 cm
Musee d'Orsay, Paris
이 그림, <올랭피아>는 마네의 앞선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에 이어
당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입니다.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주제에 맞춰서만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는 이 작품속 여인에 대해
‘금방 목욕을 마친 스페이드의 여왕’ 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니까 트럼프 카드의 그림처럼 명확한 윤곽선과 평탄한 색면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겠죠.
기존의 화단에 반기를 들었던 사실주의의 기수 쿠르베조차 이렇게 평했다면
‘회화란 이런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던
비평가들이나 일반대중들의 평가는 더 혹독했을 겁니다.
Titian
The Venus of Urbino
before 1538, Oil on canvas, 119 x 165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마네의 작품보다 수세기 먼저 그려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모티프라던가 구도의 측면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교됩니다.
가장 뚜렷한 차이는 공간감입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경우 우측 상단의 상당부분은
원근법으로 정교하게 배열된 바닥무늬에 할애되었습니다.
화면의 깊이감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그러나 마네는 뒷 배경을 벽과 커튼으로 막아버리고
3차원적 공간감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인물표현에 있어서도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명암표현을 통한 음영효과로
3차원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올랭피아>는 거의 평탄한 색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쿠르베의 말처럼 평면적 장식성을 가진 카드 속 그림처럼 된 것이죠.
한마디로 마네는 깊이를 부정하고 2차원의 평면성을 강조한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될까요?
르네상스 이래 서구의 회화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현실을 구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인체나 사물의 관찰을 통한 정교한 소묘, 원근법, 명암표현등의 각종 방법을 정립해왔던 것이죠.
그런데 마네는 오랫동안 당연시 되어왔던 그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대신 색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 뚜렷한 윤곽선의 데생과
피부색의 미묘한 뉘앙스로 육체의 볼륨을 표현했습니다.
마네는 그림이란 이러이러하게 그려져야 한다는 관습이나
이상적인 미의 추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대상의 볼륨을 나타내려는 것은
2차원성을 강조하는 이 작품 전체의 경향과는 반대되는 것이긴 합니다.
마네는 아직 완전히 평면화로 나간것은 아니죠.
하지만 그의 이런 시도 덕분에 그 후의 미술가들이 공간성을 버리고
평면에서의 색채추구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데 큰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마네의 이런 시도에 대해 주절주절 써놓은 것은 이러한 평면화의 시도가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 하는 분석 때문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다카시나 슈지(高階秀爾)는
“정확한 데생만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기법은 평탄한 색면의 장식적 효과와 더불어
필시 마네가 일본의 우키요에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
“<올랭피아>의 데생은 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보다
일본의 우키요에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상 다카시나 슈지, [명화를 보는 눈]p189-191, 눌와)
마네 역시 우키요에의 열렬한 컬렉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Portrait d'Emile Zola
1868, Oil on canvas, 146 x 114 cm
Musee d'Orsay, Paris
에밀 졸라의 초상 입니다.
에밀 졸라는 마네의 그림 <피리부는 소년>이 살롱에서 낙선했을때,
심사위원들을 비난하면서 마네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주었습니다.
마네는 졸라의 초상을 그려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가로서뿐 아니라 드레퓌스 사건때는
행동하는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죠.
우측 상단에 우키요에 한 점이 보이고 좌측에는 일본 화조도 병풍이 있습니다.
우키요에 옆에는 벨라스케스의 <바커스의 승리>를 모사한 그림과 <올랭피아>의 사진이 있습니다.
깃털로 된 펜 밑으로 졸라가 마네를 옹호하기 위해 작성한 팜플렛도 보입니다.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대상을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 형태를 명확하게 하고
음영이 없는 평탄한 색면으로 칠하는 것을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e)이라고 합니다.
우키요에의 평면적 화면처리와 중세의 스태인드 글라스에서 힌트를 얻어
베르나르와 고갱 등이 추구했던 방법인데 고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브르타뉴 사람들이 설교 때 들었던 야곱과 천사의 싸움을 환영으로 본다는 주제의 작품입니다.
판타지 종교화라고나 할까요.
빨간 색과 흰색 사이의 대비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
종교적인 환영을 내용으로 한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작품의 기본 구도는 아래로 내려다 보는 가운데 굵은 나무 줄기가
화면을 가로질러 새로운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천사와 야곱이 대치하는 환상의 구역과
지역의 민속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의 구역을 분할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대각선 분할은 호쿠사이나 히로시게가 자주 보여주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구도가 전적으로 우키요에의 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고갱은 간결하지만 뚜렷한 선으로 대상의 윤곽을 그렸고
그 안을 명암 표현없이 단일한 색으로 평탄하게 채색했는데
이 역시 우키요에의 평면적 화면처리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림 속 여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브르타뉴의 민속의상입니다.
브르타뉴는 고갱이 가난에 쫒겨 이사 간 시골지역인데
고갱은 나중에 <황색 그리스도>에서도 이 민속의상을 입은 여인들을 등장시켰습니다.
The Yellow Christ
1889, oil on canvas, 92.5 x 73 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역시 종교적 환상회화로 볼 수 있습니다.
고갱의 특징인 평탄성과 감정을 표현하는 색채는 위에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곰브리치는
“일본 미술은 그들에게 대담한 단순화를 위해
입체감이나 다른 세세한 것들을 희생시킨다면
그림에서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반 고흐와 고갱은 둘다 깊이감을 경시하고
색채를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이 길을 일정하게 밟아갔고...” 라고 하여
우키요에의 평면성이 19c 후반의 미술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E.H.곰브리치, 앞의 책, p553)
고갱의 생각을 이어받아 보나르, 뷔야르 등과 함께
나비파(Nabis:히브리어로 ‘예언자’ 라는 뜻)를 결성했던 모리스 드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회화란 전쟁터의 말이나 벌거벗은 여자나 그밖의 어떠한 대상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일정한 질서에 따라 모아진 색채로 덮힌 평탄한 면이다”
이에 대해 다카시나 슈지는
"20C 의 회화는 드니의 이 정의에서 출발하다고 말해도 좋다" 고 말했습니다.
(다카시나 슈지, 앞의 책, p327)
이렇게 본다면, 우키요에가 서양의 회화와 그 발전에 준 가장 큰 영향은
어쩌면 원근과 음영을 무시한 평면적 구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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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3편에 걸쳐 우키요에가 19c 중.후반의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살펴 보았습니다.
자화자찬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3편에 걸쳐서 올린 그림들, 특히 1편에서 우키요에의 특징분석이나
2, 3편에서 그 영향을 받은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골라 일일히 비교 한 것은
상당부분 제가 취사선택한 것들 입니다.
겹치는 부분은 있겠지만 어느 사이트, 어느 책을 찾아도
제 글처럼 자세한 분석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드가의 경우는 저도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번 글을 쓰면서 캐치하게 되서 스스로 참 기뻤습니다.
이런 테마의 연재를 한 의도는 저번 편에도 말씀드렸고 결과가 제 스스로 만족스럽진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논문 낼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정도로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올린 3편의 게시글 들은 모두 옮겨온 글입니다
원본 글의 링크를 올려 놓았으니 원본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첫댓글
새로운 공부도 되였고 잘보았습니다
お疲れ様でした。
감사합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