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활동하는 모임 회원인 드레버만님께서 작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 생각나서 한번 올려봅니다.
개인적으로 소화가 안되거나 숙취를 해소할 때면 동치미를 마시곤 한다. 선지국이나 해장술, 아니면 활명수·소화제·요거트 같은 것도 있지만 그거야 언제든 사먹을 수 있는 거다. 그러니 집에서 담근 동치미와는 비교할 수 없다. 속이 정말 안좋을 때 마시는데 정말 아껴 먹는다.
4대강 공사로 배추·무우 경작지가 줄어들고, 수해 직후 채소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지금은 동치미는 커녕 김치도 담가먹기 힘들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봄철과 가을철 발효 음식인 동치미를 미리 담가뒀다면 매끼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겨울에 담가먹던 할머니의 '동치미'
'동치미'의 의미를 찾아보니 동침(冬沈)에서 유래됐단다. '겨울에 담가먹는 김치'라는 뜻이란다. '동치미 무우'는 고랭지(산야가 600m이상되는 곳)산을 사용하며, 끝으로 갈수록 단단한 재래종이 좋다고 한다. 북한이나 강원도에서 출하된 채소들을 말하는 것 같다.
동치미를 담그는 물은 깊은 산 또는 우물에서 나오는 '샘물'이어야 한단다. 농촌에 조차 상하수도가 생긴 요새 같은 때는 동치미 담글 물을 따로 마련해야 할 터이다. 아니면 부자연스런 동치미 맛을 누리든지, 알아서 선택할 일이다.

동치미가 담긴 항아리 모습.
(강원도 철원군 서면 무레미마을 홈페이지)
할머니와 동치미
동치미는 잘 담그면 남주기 아까울 정도다. 특히 제 할머니가 담가 준 '동치미 맛'은 지금도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나도 동치미를 담그고 나름 육수도 만드는 등 평양냉면을 요리하려고 몇 번 시도해봤지만 맛이 신통치 않았다. 포기하고 어머니한테 가져다 먹는다.
"어머니 게 맛있다"며 가지러 가면 방긋 웃는 표정으로 "그렇게 좋니?"라고 말씀하시며 퍼주곤 한다. 어머니는 산행 길 약수물을 떠다 동치미를 담그셨다. 그냥 수도물이나 정수기 물로는 그 맛이 안나기 때문이란다.
하기사.. 할머니는 '이북출신'인데다 그분 손맛이 좋으니, 잘 나가는 식당도 하셨을 법 한데 그건 생전 안하셨다. 농사일과 허드렛일로 사셨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뵈었을때 그분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요새 TV광고처럼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안으며 "아이구 내 새끼"라고 하던 스킨쉽도 없었다.
그냥 방긋 웃으시며 "왔냐?"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집안 남자들은 삽질 빼고 쓸모가 없어..
당신 며느리들 한테도 "어렵다"며 한 마디 말도 안꺼내시고 집안 일을 혼자 하시던 분인데, 당신 아들, 사위들이야 동네 여기저기 술자리에 불려가 새벽까지 오질 않고, 며느리들과 딸들은 미안해서라도 일을 도와드렸던 것으로 안다.
그때 무슨 연구소에 다니며 시집도 안간 고모가 "우리집 남자들은 김장독 묻을때 뒷마당 흙파는 것 빼고, 이 집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말이 어쩌면 당연하게 들렸다. "하아이구 맞어"라고 깔깔대며 맞장구 치던 숙모들과 고모.. 할머니는 그때도 말이 없었다.
저녁이 되자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왔다. 그때 미군부대에서 얻었다며 레드와인 한 병을 갖고 왔는데 내가 오후에 고모가 했던 이야기를 해주자, 남자들과 마시려고 했던 와인을 들고 집안 여자들이 모인 마루로 가셨다.
그리고는 여성들 앞에서 뭔가 시범을 보였다. "이건 남자가 따는거예요. 어머니. 제가.."하고는 그 큰 몸집으로 낑낑거리며 콜크마개를 따려고 했지만 쉽게 나오질 않았다. 집안 여자들은 "오빠 뭐해?"라고 깔깔거리고 웃었고, 아버지가 겨우 와인마개를 따내자 하루종일 침묵하던 할머니가 한 마디 건냈다. "그래도 남자가 하는 것도 있구나.." 웃음이 떠나질 않았던 그때였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명절이 되야 찾아오는 당신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 빼고, 방학 때 놀러간 나와 친척동생들은 첫날 빼고 구경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찢어진 그물과 대나무 낚시를 들고 고기잡으러 다니곤 했다.
그때 개구리도 구워먹어 봤는데 시골아이들과 어울리면 별미를 맛볼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시골은 지금과 달리 계란과 고기가 귀한 때다 보니 아이들은 사냥꾼의 본능을 이어받아 동네어귀를 돌며 곳곳에서 먹을 것들을 찾아냈다.
한때 흥행1위였던 '집으로'라는 영화를 다섯 번씩이나 본 이유가 시골 집에 놀러가면 집 보다 "무척 배가 고팠다"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집에가고 싶어 있는 투정 없는 투정도 다 부렸지만 그 때마다 할머니는 성냥곽에 모아둔 박하사탕을 입에 넣어주시고, 그냥 웃기만 하셨다.
할머니표 평양냉면의 진수는 동치미
어렸을 때 추석이면 시골 할머니 댁으로 가곤 했었는데, 그 때 며느리·딸들과 함께 동치미와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자주 봤었다. 특히 동치미를 담그면 뒷마당 오른쪽에 서 있는 감나무 옆자리가 늘 그 동치미 독을 파묻는 곳이었다. 고목 감나무 그늘에 가려져있어서 그랬던 듯 싶다.
봄에 담근 동치미와 육수로 만든 평양냉면 점심을 먹은 뒤 삼촌들이 나서서 구덩이를 여러 곳 파놓는다. 그곳에 깨끗이 씻은 항아리들을 묻은 뒤, 그 안에 담가놓은 동치미를 넣곤 했다. 초저녁까지 여러 번 그 일을 반복하곤 했다. 특히 동치미 젓갈로 '전치젓'을 사용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허름한 창고에 쌀은 없고, 뭔놈의 고구마와 감자포대만 그리 많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다 냉면 재료였다. 아님 밥 지을 때 함께 쩌 먹거나. 그 걸 좋다고 먹던 가족들. 서울이라면 라면과 떡볶이가 더 자주 밥상에 올랐을 텐데, 어른들은 "고향맛이 바로 이것"이라며 맛나게도 먹었다.
저녁이 되면 숯불로 돼지갈비를 굽고, 아이들 시켜 사온 소주와 동동주를 즐겨 마시던 어른들. 할머니는 그 때도 가만히 계시질 않고, 주변을 쓸고, 쑥을 태워 모기를 쫓곤 하셨다. 자식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먹고 마시고 놀았고...
뭔놈의 고구마·감자가 이리 많아?
특히 여름이면 할머니 댁에서 평양냉면을 자주 맛봤는데, 평양냉면을 만들때 사용되는 육수는 동치미와 꿩고기·쇠고기 육수를 반반 섞은 것이었다. 아니면 닭으로 만든 육수를 섞거나. 그래야 제맛이 난다고 했다. 하루종일 끓이는 육수는 바로 그거 였던 것이다.
서울에 있는 자식들이 "돈 드릴테니 가스불을 사용하시라"며 여러번 권유했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궁이만 고집하셨다. 군불을 떼고 사신 것이다. 감자와 고구마가 들어간 밥과 냉면도 손수 만드셨는데, 돌이켜보면 그 일이 '장난'이 아니었던 듯싶다.
방학 때 다니러 갔을 때마다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게 있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자식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몇 주를 두고 먹을 걸 준비를 하시던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난 그 때문에 사촌 동생들과 이것저것 나르며 고생하곤 했다.
사실 당신은 자식들을 위해 소와 돼지를 팔았고, 힘든 농사일도 모자라 남의 집 품앗이나 허드렛일까지 했다.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렇게 자란 자식들은 서울로 유학가 자리잡고 산 뒤부터는 명절 빼고는 얼굴 한 번 안비친 매정한 후대들이다.
명절 빼곤 얼굴한번 안비치는 자식들...
어디 그뿐인가. 때 되면 시골 할머니 집에 와 담가놓은 그 많은 김치와 된장, 동치미, 고추가루, 심지어 고물 냉장고에 얼려놓은 냉면육수까지 다 가져가는 사람들이었다. 자식들은 늘 가져가기만 하는 뻔뻔한 인간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좋다고 나눠주시던 분이었다.

그 유명한 옥류관 금강산지점의 평양냉면
마지막 가시던 길. 주인없는 동치미 항아리가 초라해보여..
언젠가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뛰어갔다. 서울 친척들과 강남터미널에서 만나 심야에 총알택시를 잡아타고 시골에 도착하니 동네 할머니들과 고모들이 먼저 와있다. 집이 어릴 적 기억보다 작아보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식구들 모두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조금있다 다 나오더니 내게 한 마디 했다. "너부터 가봐라. 너만 찾으신다." 안에 들어서니 마른 장작처럼 누워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대학병원에서 "어렵다"며 수술을 포기하고 그 해 시골집에 쭉 누워계셨던 것이다.
하루 중 동네 할머니들이 도와주고 말 벗을 하거나, 가끔 고모가 찾아와 수발을 든 것 외에는 늘 혼자셨다. 아니 누군가 찾아와도 그냥 싫다고 거절하시고, 도시로 나간 뒤론 그토록 매정하던 당신 자식들 소식만 기다렸다.
위독하다기에 갔더니 '왔니, 애비는..."
예전부터 형광등이 싫다고 하셔서 그 걸 치우고, 우리집에서 가져다 놓은 스탠드 조명이 은은히 할머니를 비추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니 할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왔니.." 할머니가 손을 내밀길래 내 손을 드렸다.
가까이서 보니 흰머리는 그대로인데 얼굴이 야위었고, 머리카락도 얼마 없었다. 그리고 잡아본 할머니 손도 기력도 없는 데다 많이 말랐다. 할머니 눈엔 백태가 퍼져 이미 볼 수 없는 형편이셨다.
그동안 "몸에 칼대는 게 싫다"고 늘 하셨다. 그 때문에 자식들 중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지병이 도저 삼촌들이 겨우 설득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도 "수술은 이미 늦었다"고 말한 상태였다.
그런데 금새 할머니는 느낌으로 "왔니"라고 말씀하신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참으로 많았나보다 싶었다. 그런 할머니가 보이지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묻는다.
"애비는..."
"빠른 비행기편이 내일쯤이라니까. 모레면 도착해요. 할머니..."

팔각성냥갑 속 박하사탕 한 알 주시곤...
한참을 내 손을 잡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던 할머니. "저기 팔각정 가져오련" 하고는 왼쪽 구석에 있던 성냥곽을 가리켰다. 그걸 갖고와 할머니 손에 드리니, 그 속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내 손에 꼬옥 쥐어주셨다. 그리고는 "됐다, 널 봤으니..." 그리고는 피곤하다며 다시 눈을 감으셨다.
그만 나가보라고 손짓하길래 인사하고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뒤를 보니 낡아빠진 금강경과 닳아 겉지가 벗겨진 검정색 성경책이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하나는 불당을 자주가시던 당신의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가 준 것이었다.
훗날 아버지 이야기로는 처음에는 "천주쟁이 아니냐?"라며 어머니 얼굴도 안보시던 할머니. 그 뒤로는 어머니가 거의 매일 시골집에 기거하며 할머니와 함께 뒷산 암자에 올라가 불당에서 불공 들이고, 가깝도록 쫓아다니다보니, 원래 말씀도 없던 분이 한 마디 하셨단다. 부엌에서 "그만하면 됐으니 눈치 볼것없다. 넌 천성이 착한 아이니까.."라고..
밖으로 나와 마당을 서성대다 문득 동치미가 생각나 감나무 아래쪽으로 가려던 순간. "아이고 어머님... 아이고 이를 어째." 울부짖는 소리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방으로 부리나케 들어가는 소리다. "어머! 엄마", "어머니!"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들린다.
감나무 아래쪽을 보니 빗물로 꽉 들어찬 동치미 항아리들이 보였다. 참 오랜 세월 할머니와 같이 살았지만 깨진 것 하나 없이 빛깔도 곱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5일장터에서 사왔다는 항아리. 헌데, 문득 하나 깨진 게 보였다.
동치미 항아리는 왜그리 초라해보이던지
아버지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소식을 듣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어린 아이처럼 우셨다. 너무 긴장해 다리가 풀린 탓인지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 덩치 큰 양반이 주변사람들 아랑곳없이 펑펑 울었다. 그때 본 아버지도 흰머리가 참 많았다. 너무 많이..
장례를 치루던 날, 할머니 묘소 앞에서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친척들이 "기독교식으로 해야돼", "불교식으로 해야돼" 언쟁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는 "나 죽거든 화장해서 임진강에다 뿌려달라"고 부탁했단다.
하여튼 불교식으로 정리해 봉분을 둥그렇게 하고서 제를 지냈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제서야 울며불며 묘자리·제사방식을 놓고 설왕설래를 했지만, 내겐 그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가장 큰 할머니 기억은 동치미다. 정말 내게는 귀한 음식이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할머니의 동치미는 어머니가 그 비법을 전수받아 요즘 해주시곤 한다. 평양냉면과 육수를 끓이는 법도 어머니가 잘 안다. 평소에는 냉동시켜뒀다가 정말 먹고싶을 때면 하나 꺼내다 해동시켜 먹는다.
기호식품이라는 게 요즘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지만, 할머니가 그리고 어머니가 만들어준 동치미는 그리 안된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그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채소나 물이 아무리 좋아도 그 맛이 안 나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