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설레임을 안겨준다.
하물며 역사의 숨결을 찾아나선
답사여행이니 말할나위 있겠는가?
어린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랄까..
주마등 같이 차창을 스치는
초하의 신록의 물결
모내기를 마친 들판
바람결에 흔들리는 하얀꽃의 개망초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
남공주 나들목을 나온 버스
잠시후 공산성 관광안내소
주차장에 우리 일행들을 토해 놓는다.
아주머니 가이드를 따라 올라선 금서루(서문)
정지산이 바로 건너다 보이고 밋밋한 능선은
무령왕비 빈전(시체를 안치하고 삼년상 치름) 터란다.
여장 없이 쌓아진 성벽따라 올라갔으면 싶지만
일행들과 함께 성곽 내부도로를 따라 쌍수정을 향한다.
잠시 공산성에 대하여 알아본다.
공산성은 웅진시대
백제 왕도로 사비(부여)로 옮기기까지
64년간(문주왕 원년 475년~성왕 16년 538년)
백제의 수도로 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왕등
다섯왕이 머무르며 백제 중흥을 꾀했던 곳이며
나당 연합군에 패한 의자왕이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피했다 항복하고 포로가 된곳이기도 하다.
통일후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 웅천주도독이 있던 곳이다.
37대 선덕왕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기로 한
김주원이 갑작스런 폭우로 대궐로 못 들어오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대신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
통한의 아픔을 누르며 살아온 아버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늘 외직으로 밀려났다.
821년 웅천주 도독으로 발령 받자
이런현실에 불만을 품고 822년 3월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봉기에 호응하는 곳이 많았다.
무진 완산 청주 사벌등 네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진압작전이 수행되면서 곳곳에서 패하여 웅진성에 웅거하며
수성전을 펼쳤지만 열흘만에 함락되고 만회할수 없음을 안 헌창은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의 아들 범문이
825년 정월에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지만
북한산주 도독 총명에게 패하여 처형되고 말아 미수에 그쳤다.
고려 조선시대에도 도호부 목등 지방통치의 수부가 되었다.
조선 인조 2년 반정 공신 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도성으로 몰려들자 공주로 몽진을 떠났다.
행궁옆 쌍수라는 두그루 나무아래서 이제나 저제나 한양에서
좋은 소식오기만 기다리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함께 시름을 나눈 나무라고 정3품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세월이 흐르며 나무는 죽고 그자리에 정자를 세워 쌍수정이라 부른다.
쌍수정앞 왕궁터라고 하나 규모가 너무 작아보인다.
그래서 아마 26대 성왕이 백제중흥을 이루기에는
너무 작다고 생각하여 천도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많은 생각에 쌓였을 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왕
무려 천여년후의 인조 그때 그심정 착잡하였으리라..
북쪽에 금강을 두고 그리 높지 않은 110m 정도의 구릉에 축성한
천혜의 요새라고 하는 공산성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남쪽문인 진남루 공주 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는데 연초록의 무성한 나뭇가지만
시간관계상 동문쪽은 못오르고
임란때 영규대사가 머물렀다는 영은사를 거쳐
물을 붙잡아 두는 누각 만하루 공산성내에서
가장 멋진곳으로 금강을 시원하게 바라 볼수 있는 곳이다.
그밑의 연지는 금강의 수위에 따라 연지의 수위도
달라진다니 아마도 금강물과 내통하는 모양이다.
설치된 계단으로 보아
연못으로의 역할 보다 저수지의 기능이 더 크다하겠다.
북문인 공북루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금강물을 바라본다.
무성한 수풀이 우거진 고마나루 곰나루의 흔적을 본다.
진남루를 통하여 들어온
삼남의 나그네들 공북루를 통하여
곰나루에 나가 나룻배를 이용하였으리라..
지나온 세월 동안 거쳐갔을 수많은 인파
그들에 담긴 희노애락 그뉘라서 알리오만 머릿속에 그려본다..
송산리 고분군 그중의 무령왕릉 그리고 공주박물관
찬란했던 웅진시대 백제 문화유물 눈속에 아른거린다.
뜨락에 오시는 모든님들
늘 건강하시고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카페 게시글
사랑방
공산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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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0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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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