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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ㅣ
2014. 3. 16. 금계
내가 세균 옮을까봐 하루에 손을 서른 번씩 씻으며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유모차를 밀고 다니던 손자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퇴직하고 또 세월이 솔찬히 많이 흘러간 셈이다. 새봄이 올 때마다 번번이 놀랍고 반갑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슬슬 조바심이 앞선다. 과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새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손자손녀가 설빔으로 예쁘게 차려입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또 삼천리금수강산에 봄빛이 무르녹는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삼학도 난영공원에 갔다. 벌써 동백이 빨갛게 피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쑥을 뜯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농약을 뿌렸을지 모른다고 귀띔을 해서 불안하여 죄다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봄은 이미 보름 전부터, 한 달 전부터 화냥기가 발동하여 얼어붙었던 대지에 꽃을 피우고 흘레를 붙이려고 발싸심을 하고 있었지만, 꽃샘바람에다 북경 발 미세먼지에다 감기까지 덮쳐 꼼짝없이 방콕 신세였다. 이제 감기도 떨어졌겄다, 비도 내렸겄다, 기온도 올라갔겄다, 어제는 삼학도 구경했으니, 오늘은 기어코 우수영 다녀올 예정이다. 가고 싶으면 당신 차 함께 타고 가고, 가기 싫으면 나 혼자 버스 타고 갈란다 했더니; 자기는 안 가겠다고 하면서도, 버스터미널까지는 실어다주겠다 한다. 곱게 실어다줄 리 만무했다. 기어코 핸들을 돌리면서 아내는 투덜투덜,
“하여튼 역마살 끼어갖고 큰일이여, 어제 삼학도 공원 바람 쐬었으면 그만이제, 하루도 안 쉬고 또 우수영이여, 이 년 반이나 거기 중학교 근무했으면서 뉘도 안 나나봐. 혼자서 뭔 재미로 쏘다니는지 몰라.”
작년 봄가을에 똑딱이 싸구려 카메라 한 대 주머니에 담고 목포 언저리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장부다리, 청계, 무안, 일로, 몽탄, 삼호, 독천....... 그러고 보니 우수영이 빠졌다. 이 좋은 날씨에 풍광명미한 우수영 가면 어쩐지 좋은 사진 여러 장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겨레 기자가 쓴 책 보면, ‘꼭 가보고 싶은 바닷가 마을 15군데’ 가운데 화원과 우수영이 나와 있지 않던가.
그 어마어마한 경부고속도로도 3년 안에 건설했는데 그리 멀지도 않은 목포와 우수영을 잇는 도로공사는 지지부진 십 년 넘어서야 완공되었다. 이제야 겨우 버스는 말끔하게 단장한 사차선 도로를 신명나게 달린다.
40분 만에 우수영에 도착했다. 반갑다. 한의원이 가장 먼저 나를 반긴다. 나는 한약 체질이다. 며칠 전 감기에도 한약방 약 지어다가 데워 마셨더니 사나흘 만에 후다닥 나았다.
정류장에 내리니 소망약국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 번은 어깨가 심하게 아파서 여러 군데 찾아다녀도 낫지 않는다 했더니 선생들 밥 해주는 건국이 어머니가, “소망 약국 가보시이요. 누가 거기 약 먹고 나았답디다.”
신통도 하여라. 거기 약 먹고 사나흘 만에 감쪽같이 멀쩡해지던 것이었다. 후배 교사가 어깨 아프다기에 가보라 했더니 의약 분업이 된 후로는 약사가 의사 처방 없이 마음대로 약을 조제할 수 없다고 하더란다.
홍콩반점 문을 살짝 밀어보니 휴일인지 잠겼다. 젊은 식당 주인은 틈만 나면 중학교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즐겼다. 실력도 솔찬한 편이었다.
은이 선생이 생각난다. 은이 선생은 한복을 즐겨 입었다. 홍콩반점에서 짜장면을 함께 먹을 때에도 날아갈 듯한 한복 차림이었다. 주인한테 뭐 좀 가져다주라 했더니 커다란 보자기를 목에다 둘러주었던가 어쨌던가.
우수영 장날은 4일 9일이어서 오늘은 조용하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몇 년 안 보는 사이에 지붕을 올리고 현대화했다. 예전에는 햇빛 쨍쨍한 노천시장이었다. 어쩌면 그때가 더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숭어는 울돌목 거센 물살에서 노는 우수영 숭어가 으뜸이지만 다른 고기들은 대부분 진도에서 올라왔다.
우수영 장날이면 박 교장은 행정실장을 대동하고 새벽같이 시장으로 나가서 팔딱팔딱 뛰는 횟감을 샀다. 숭어, 농어, 참돔, 감성돔, 우럭, 상어....... 교장 관사에서 낮까지 회를 떴다. 수업 없는 시간이면 고 선생님까지 회 뜨는 일을 도왔다. 회를 다 뜨면 접시에 담아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퇴근 무렵 선생들을 과학실로 불러다가 먹였다. 가끔은 닭고기나 돼지 삼겹살도 구웠다. 거의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이었다. 먹이는 데에는 이겨낼 장사가 없었다. 모두 고분고분 수말스럽게 교장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다.
‘잘 계시는지 몰라.’
퇴직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좋은 일 많이 하셨으니 복 많이 받고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할 텐데.......
우수영중학교는 정남향이어서 볕이 잘 드는데다가 바람도 덜 닿아 참 아늑했다. 1997년 3월, 내가 해남중학교에서 이동발령을 받아 처음으로 학생들 앞에 선 입학식 날도 오늘처럼 운동장이 환하고 따스했다. 어찌나 편안하던지 서 있는데도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올 정도였다.
내가 수십 년 겪어본 바로는 해남이 가장 인심이 후했고, 그 중에서도 우수영이 가장 사람들 마음씨가 넉넉했다. 남녀학생들도 흉허물 없이 남매처럼 지냈고, 체육시간에 텅 빈 교실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아무 탈이 없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도서실을 맡은 인연으로, ‘즐거운 도서실’이라는 교단 수기를 써서 교육신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운동장에 못 보던 건물이 두 곳 들어섰다. 골프연습장과 체육관. 골프연습장은 전에 테니스장이었다. 테니스장을 방바닥처럼 반질반질하게 다듬던 체육과 김 선생이 그립다.
과학실에서 날마다 고 선생님과 셋이서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내가 아사삭 꽃게를 깨물어 먹으면 당뇨로 이가 약한 김 선생은 먹고 싶어 졸도할 지경이라 했다. 나보다 겨우 한 살 위인데 벌써 세상을 등진 지 여러 해 되었으니 안타깝고 허전하다.
운동장 나무는 여전하다. 더운 여름날이면 나는 국어교과서와 공책을 가지고 나오라 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히고 글씨도 썼다. 나는 일 년 내내 교실에 죽치고 앉아 수업하는 방식이 딱 질색이었다. 언젠가는 충무횟집 앞바다 흔들리는 바지선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끝 종이 난 후에도 더 놀다 가자고 떼를 썼다.
그 날도 운동장 나무그늘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참인데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동생 내외가 승용차로 놀러왔다.
“이렇게 공기 좋은 데서 아이들과 지내는 형님 신세가 참 부럽소.”
나는 늘 동생한테 미안했다. 아버님은 장남인 내가 의대로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교사가 되었다. 장남 대신 차남이 의사가 되어 칠남매나 되는 형제간들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내가 병원에 들르면 늘 흔연스럽게 맞아 맛있는 식당으로 안내해서 밥과 술을 사주었다. 또 내가 전교조 문제로 해직 당했을 때에는 복직할 때까지 4년 반 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눈망울 초롱초롱한 아이들과 함께 사는 교사들이야 행복하지만 의사는 결코 행복하지 못한 직업이었다. 어쩌다 동생 곁에 앉아 있으면 환자들은 하나같이 진찰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우는 소리를 했다.
이래저래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까. 신장이 나빠져서 두 번씩이나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동생 기일은 5월이다. 해마다 그 날 금성산 산소에는 동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그 때 누군가 묘소 앞에 서서 ‘봄날은 간다.’ 노래를 서럽게 부르던 것이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교정에도 봄이 무르익었다. 개불알꽃이던가. 작지만 아주 해맑고 앙증맞다. 목련은 꽃망울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얼마 후면 하얀 꽃망울을 터뜨려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
나 근무할 때 없던 것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간의 흐르면 어김없이 삼라만상이 변화한다. 날마다 학교도 변하고 교사도 변하고 학생들도 변한다.
중학교 교문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여기가 우수영(문내면)의 중심부 번화가인 셈이다. 차량들이 즐비한 본새로 봐서 시골치고는 아직 활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 많지 않고 한가한 탓인지 이상의 권태로움이 연상되는 적막감까지 감도는 거리다.
만약 호남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국가는 없을 것이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명량대첩비는 1597년 9월 16일 충무공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 숙종 14년에 건립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들이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어버렸다가 해방 후 우수영으로 되돌아왔다. 2011년에 원래 세워졌던 바윗등 위로 옮겨 비각을 세웠단다. 현재 정화사업이 진행되는 도중이라서 주변이 엉성하고 조금 황량해보였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바윗등 위에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개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지고 지우는 책임과 의무,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처한 조상들의 고뇌 따위를 더듬어 보았다. 또 지금 일본의 무데뽀(막무가내) 총리.......
오늘은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우수영초등학교를 조금 꼼꼼히 구경하리라 작정했는데 웬걸 폐쇄 안내문이 나붙었다. 네 소규모 학교를 합쳐서 올 3월에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시골 인구가 차츰 줄어드는 모양이다.
선두리에 법정스님 생가가 있다. 예전에는 양철지붕이라면 으레 빨간색이 대부분이었는데 우수영에는 유난히 파랗고 고운 양철지붕이 많다. 다른 유명 인사들의 생가는 대개 성역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법정스님 생가에는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근처의 촌로들한테 들어보니 곧 관청에서 생가를 사들여 보완하리라는 소문도 들린단다. 하기야 저서도 더 이상 출판하지 못하도록 한 당신께서 생가니 뭐니 수선 피우는 일을 달갑게 여길 리도 없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나의 삼대할머님과 작은할아버님이 나주 금성산에 다섯 칸 초가를 짓고 불상을 모셨다. 거기에서는 곡식을 처마 밑 디딜방아에 바수어 먹고 무 배추가 귀한 여름에는 고구마 잎과 줄기로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쳐 먹었다. 고춧가루가 없을 때에는 풋고추를 갈아 김치를 담갔다. 나는 이미 어려서부터 산중에서 무소유를 몸으로 배운 셈이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천민자본주의에 오염이 되었기로서니 나는 지금도 명품이니 짝퉁이니 그런 말들이 오가면 꽤 불쾌해진다.
소유라는 낱말은 나라는 낱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내가 없으면 소유도 없다. 나로부터 나라는 생각을 떼어내는 것이 불교의 요체다. 우리는 모두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태어나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 곳은 나라는 말도 필요 없고 소유라는 말도 필요 없고 어떠한 말도 필요 없는 곳이다.
선두리 법정 스님 생가에서 가까운 곳에 여객선 터미널이 들어섰다. 목포에서 제주까지는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이곳에서 제주까지는 쾌속정으로 두어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쾌속정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대합실 직원한테 물어보니 목포로 정기 검사 받으러 갔단다. 웬 거북 배만 우람하게 햇살을 받고 있다. 아마 이 근처를 돌아다니는 유람선인 모양이다.
여객선 터미널 대합실 벽에는 바닷속을 그린 그림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어서 바다 냄새를 물씬 풍긴다.
15년 전에는 이 터미널 부근의 ‘충무횟집’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박 사장은 미술과 김 선생과 친구처럼 다정했는데 시원시원하면서도 통이 큰 쾌남아였다.
그의 어장은 양정리에 있었다. 거기까지 함께 배 타고 따라가 보면 끌어올리는 덤장그물 속에서 고기들이 팔딱팔딱 뛰었다. 횟집에서 먹으면 유료였지만 횟집 수족관에 붓기 전 배 위에서 먹으면 무료였다. 갑판에 주질러앉아 싱싱한 횟감에 소주에 잔뜩 취해서 고성방가를 해도 누가 잡아가지 않았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 건물에서는 어디에도 ‘충무횟집’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에는 집을 매매한다는 안내문만 을씨년스럽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명자나무 꽃이 화사하다. 매화도 만개했다. 부지런한 봄꽃들은 꽃을 먼저 피우고 잎이 나중에 나온다. 겨우내 추위를 이겨낸 무 이파리도 봄 햇살을 푸짐하고 받고 있다.
어디쯤에서 게으른 낮닭이 청승맞게 운다. 어느 골목에서는 낯선 나그네가 나타났다고 하얀 개가 담장 너머로 모가지를 길게 빼고 으르렁거린다. 올 들어 최고로 좋은 날씨다. 바람도 별로 없어 봄볕이 푸짐하게 포근하다. 아마도 20도는 넘었을 게다. 나는 우수영 이 골목, 저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린다. 사람 사는 모습들이 반갑고 정겹다. 구태여 잘 사는 집 못 사는 집을 따지지 말 일이다. 한번 북망산으로 가기만 하면 비단에 싸여가나 거적에 싸여가나 그것이 그것이다.
오후 한 시, 나는 버스정류장 부근의 우정식당으로 들어간다.
“잘 계셨소? 오늘은 나 혼자 왔소야. 여기저기 기웃거렸더니 배가 솔찬히 고프요야. 밥 한 술 주실라요?”
있는 반찬에 요기라도 하라면서 반찬을 주섬주섬 챙긴다. 아주머니도 안녕하지 못했단다. 대장, 위장에 탈이 붙어서 일산 딸집으로 올라가 보름가량 묵으면서 치료를 받고 어제 내려왔단다. 아직도 덜 나았는데 혼자 놔둔 남편이 걱정되어 부랴부랴 짐을 쌌단다.
우리 집과 나이들이 엇비슷할 터였다. 지금은 두 쪽으로 나뉘어 남자는 곡식을 취급하는 성남상회를 운영하고 여자는 밥과 술을 파는 우정식당을 운영하지만 20년 전에는 두 군데를 합친 곳이 우정식당이었다. 해남중 근무하던 94년엔가 하루는 윤 선생 차를 타고 황산중 계시는 고 선생님한테 놀러갔다가 함께 우수영중 전 선생한테 놀러 와서 네 명이 우정식당 앉아 술을 마시다가 거나하게 취해 노래까지 부르고 시끌벅적 야단법석을 피웠다.
그 뒤로 나는 목포의 식당에 싫증이 나면 가끔 색다른 분위기를 맛보려고 우정식당으로 왔다. 승용차로는 30분이면 족했다. 나는 차가 없지만 목포에는 내 자가용이 열 대쯤 된다. 아무 차한테라도 부탁하면 그만이다. 자주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이따금 들르다 보니 단골이 되었다. 간재미회도 맛나고 낙지 연포도 맛있었다. 아주머니의 음식솜씨는 아주 각별한 구석이 있다.
두부 된장국, 깡다리젓, 총각김치, 갓 뽑아 버무린 마늘장, 발품을 두어 시간 팔아 굴풋한지라 밥맛이 그야말로 꿀맛이다. 밥 먹고 나니 커피까지 한 잔 타 준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자 손사래를 친다. “돈 받을라고 밥 차려드렸겄소?”
버스 정류장에서 목포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정류장 바로 옆은 택시회사다.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앞 유리창에도 봄 햇살이 쟁강쟁강 부서진다. 겨울처럼 시들시들하고 야윈 햇살이 아니라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쫀득쫀득한 햇살이다.
목포로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 금호도가 보인다.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이제 여기저기 메워져 육지와 이어졌다. 금호도가 섬이었을 때에는 물도 바닷물이었지만 지금은 방조제가 막아져 민물로 바뀌었다. 물빛도 겨울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끝)
첫댓글 봄이 눈물납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우수영시절이 홍매화처럼 붉고도 서러운데 어이 혼자신지요... 곧 저도 물러날테니 옛날처럼 뵙되 시장통 아니면 선창가 북적이는 어느 모퉁이거나, 종일 파도소리 듣는 조촐한 포장마차 나무의자에라도 앉아 선생님과 함께 갈매기처럼 끼룩끼룩 취했으면 좋겠습니다.
봄날을 함께 만끽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