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구보
구보 박태원.
TV 퀴즈 프로그램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소설 제목이 독특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가
인터넷 신문 기사에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란 책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구보는 박태원의 호다.
인터넷의 젊은 시절 박태원의 사진을 보면 상당히 개성있는 사진이다.
호빵 머리에 뿔테 안경.
그런 그의 사진은 그의 소설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하다.
일제 시대에 쓰여진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박태원처럼 위트있고, 당시 서울의 모습을 자세히 그린 작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박태원의 유머감각은 책을 읽는 내내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매력있는 소설이다.
그는 일제 시대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서
세태풍속을 묘사한 작품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난 후 월북하여 북한 종군 기자로도 활동을 한 이력이 있어서
한동안 남한에서 그의 작품들이 금서로 찍히기도 하였다.
그는 이른 나이에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실명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갑오농민전쟁>1,2부를 출간하고,
오랜 투병 끝에 1986년 사망하였고,
사망 후 그의 구술을 정리하여 <갑오농민전쟁> 3부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1. 수염
스무살 어느날, 거울을 보니 거뭇거뭇 수염같은 것이 돋아난다.
남자라면 누구가 수염이 처음 자라는 것을 신기해하면서도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소설 속의 주인공도 수염을 기르고자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잘 자라지 않는다.
가족, 친구, 이발사 등 주변에서 자라지 않는 수염에 대해 비꼬면서 이야기하는 것에
창피해햐는 소심한 주인공.
생각만큼 자라지 않는 수염.
아침마다 거뭇해진 얼굴을 상상하고 거울을 보지만, 어제와 다르지 않은 얼굴.
주인공은 수염 기르기를 포기하고 신경쓰지 않고 산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유심히 쳐다본 거울 속에 거뭇하게 자란 수염을 보고 기뻐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 책에 실린 박태원의 첫번째 소설이 <수염>이다.
수염을 기르기로 마음먹은 스무살 소심남의 에피소드인데,
그 문체가 위트로 범벅이 되어 있고,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하고 싶다.
이 소설로 인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치가 부쩍 오르게 된다.
2. 낙조
<낙조>라는 소설은 64살의 최주사가 주인공이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끼니와 술은 자신이 벌어서 해결한다는 신조가 남다르다.
얼마나 남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하는고 하니,
최주사에게는 딸이 있는데, 데릴사위를 들여 같이 살다가
최주사의 아내가 먼저 죽자, 얹혀사는 기분이 들어 자신의 집을 딸과 사위에게 주고
나와서 혼자 지내고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에게 십수년 전에 꾼 돈이 기억나 갚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그가 넉넉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약방 행상일을 하기 때문에 수입이 계절마다 차이가 있다.
그래서 밥을 굶는 경우도 때론 있다.
하지만, 그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이 있으니 술이다.
술을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알콜 중독자이기도 하다.
그는 술을 먹고 나면, 허풍이 썩힌 옛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젊은 시경 나라에서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가 주요 레퍼토리이다.
그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자신 나름 즐기며 보냈다.
어느날, 친구의 부음을 듣고, 하루종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생명이 귀하게 여겨지기도 하여
개를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들들 혼내기도 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고찰도 술을 먹다 보면 잊혀진다.
술을 먹고 나선 저녁 거리, 떨어지는 낙조를 본다.
떨어지는 낙조를 보며 인생무상을 느낀다.
인생의 황혼기.
나의 인생의 황혼기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지금처럼 조급하고, 바쁜 모습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 최주사처럼 그저 하루하루 즐길 수 있는 유쾌한 노인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3.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 소설은 1930년 서울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한 소설로도 유명하다.
이 소설이 박태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다른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기야 재미있다고 대표작이 되고 훌륭한 작품은 아니니까.
주인공은 26살의 노총각 소설가 구보씨.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아들이 결혼하지 않고 있는 모습에 어머니의 걱정은 쌓여가고...
구보씨는 어머니의 바램대로 월급쟁이가 되기는 싫고,
소설가가 되기를 원하고,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수입이 없어 가정을 꾸릴 수 없다 생각하여 결혼은 뒷전이라 생각하고...
오늘도 늦이막히 일어나서, 고독을 즐기며 거리를 나선다.
전차 안에서 작년에 어머니가 소개해준 만난 여인을 보고
알은 체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여인은 전차에서 내리고 만다.
그 일로 인해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예전에 짝사랑했던, 지금은 애엄마가 된 벗의 누이를 생각하기도 한다.
다방 구석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
다방에 일하는 소녀는 행복할까 생각하면서,
자신은 얼마나 가져야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다방에서 혼자 차를 마시다 다시 거리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오래된 친구와 만나 아는 척 하기도 하였다.
즐기던 고독은 어느새 외로움이 되어 그는 벗에게 전화하여 만나기도 하였다.
그렇게 서울은 어둑해져 밤이 오고 집에 가려고 하니,
자신만 걱정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울컥해진다.
그는 내일부터 집에서 착실히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을 하며,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4. 애욕
나쁜 여자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겪는 가슴앓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구보씨의 친구 하웅이라는 사람이 있다.
하웅은 미술가이자, 마로니에라는 카페의 주인이다.
그는 한 불량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 여인은 하웅 말고도 다른 남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여인에게 있어 하웅은 많은 남자들 중에 한명이었다.
이런 사실을 구보도 알고 있기에,
친구에게 진심으로 그 여자와 헤어지라고 충고하였다.
하지만, 하웅은 자신에게만큼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을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여인은 하웅을 배신하고 연락을 끊는다.
그제서야 하웅은 그 여인과 관계를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가
자신을 3년동안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가 점지해준 여인과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고향 내려가기 직전, 배신한 여인으로부터 편지 하나를 받는다.
하웅은 갈등을 한다.
사랑없는 결혼이냐, 고달픈 사랑이냐를 놓고 갈등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달픈 사랑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소설은 끝났다.
소설의 제목 애욕. 사랑의 욕구.
그렇게 나쁜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사랑인가?
과연 하웅은 그 여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아마 다시 상처받고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때는 그를 기다리던 고향의 여인도 떠나고 철저히 혼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5. 길은 어둡고
아버지는 만주로 떠나시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향이가 주인공이다.
술집에서 여급으로 일하여 고단하지만,
그가 그런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순진한 처녀 향이.
그는 몸과 마음을 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남자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애 셋 딸린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몰래 살림까지 차렸다.
향이에게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몰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대판 싸움까지 벌였다.
그리고 남자는 향이를 찾지 않았다.
시련당한 향이는 고통스러웠다.
사랑 하나로 힘든 생활을 버티고 있었는데, 그 사랑마저 무너져서 그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다른 남자로 사랑을 대신해 보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비오는 어두운 밤거리를 걸으며 무심결의 그는 예의 그 남자를 찾고 있었다.
순진한 한 처녀의 도시의 사랑과 배신.
6. 거리
가난한 소설가가 엄니, 형수, 조카들과 단칸반에 살고 있고,
집주인은 기생 3자매를 둔 영감이다.
그러면서 주인 눈치 보며, 집안 식구들 눈치보며 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소설가를 그리고 있다.
7. 방란장 주인
미술가인 주인공은 방란장이라는 다방을 차렸으나,
돈벌이가 변변치 않아 집세는 밀리고,
일하는 여자인 미사에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군소리 없이 일하는 미사에.
이 어려운 상황은 친구에게 이야기하자,
친구는 미사에가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며
미사에와 결혼하라고 한다.
이에 주인공은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에 잠긴다.
진정한 사랑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오고,
행복은 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8. 비량
가난한 소설가 승호와 카페 여급인 영자의 사랑.
승호는 1년전 부잣집 딸인 혜숙과 소개로 만나기로 했지만,
그런 만들어진 만남이 아닌 운명적인 사랑을 선택하고, 영자와 만나 사랑을 하였다.
뜨거웠던 사랑은 얼마 가지 못하고,
가난한 생활 걱정을 해야했다.
결국 영자는 자신의 몸까지 팔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승호는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혜숙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갖는다.
사랑에 조건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소설이다.
9. 진통
짧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다.
아랫집에 사는 남자. 윗집에 사는 여자.
남자는 윗집 사는 여자가 궁금하다.
어느날 여자가 방바닥을 노크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남자의 천정에서 들린다.
남자는 혹시나 하고 윗층을 찾아가자, 문틈으로 '아스피린'이라는 메모를 전달해주는 여자.
남자는 약방에 가서 아스피린을 사다가 여자에게 준다.
이후 여자는 계속 남자에게 심부름을 요청하고 남자는 이를 해준다.
그리고 여자에 대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고, 여자도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한참동안 소식이 뜸한 여자.
그리고 어느날 고통을 호소하는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다급히 윗층으로 올라간 남자.
그 고통소리가 아기를 낳을 때의 산통임을 알고, 씁쓸해하는 남자.
자신에게도 아랫배 진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윗집 여자의 실체를 알게 된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10. 성탄제
영이와 순이. 두 자매.
영이가 언니고, 순이가 동생이다.
영이는 카페 여급으로 일하고, 몸을 팔면서 집안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순이는 그런 영이가 못마땅해하고, 창피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언니와 가끔씩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순이의 학비가 전부 영이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어느날, 영이가 임신을 하게 되고,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
학비 조달이 어려워진 순이도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지만, 순이도 언니의 길을 그대로 따른다.
카페 여급이 되고, 어느날 낯선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날 아침 남자를 시켜
식구들에게 자장면을 시켜 준다.
그런 순이를 보면서 언니 영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가난. 돈. 인간 세상을 슬프게 만드는 것들이다.
11. 골목안
세 아들과 두 딸을 둔 영감의 이야기.
골목 안 가난한 집에 살고 있는 영감.
직업은 집주릅(부동산 중개업자).
첫째, 둘째 아들은 집나간 지 오래.
세째 아들은 장애가 있어 상급학교에 진급하지 못하고,
그나마 첫째 딸 정이가 카페 여급을 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
둘째 딸 순이.
17살 순이는 22살의 정문주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정문주는 지역 유지의 갑부집 아들로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다.
문주네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알고, 문주를 시골로 보내고,
사람을 시켜 순이네 찾아와 영감을 만나 문주와 만나지 못하게 이야기하였다.
막내 아들의 학교 학부모 모임에 나간 영감.
어찌하다 자식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온갖 뻥을 보태어 훌륭한 자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
부모마다 방식이 다르지만, 모두 똑같지 않을까 생각된다.
12. 음우
음침한 비.
29일째 내리는 장마비.
주인공은 가난한 소설가.
집안 여기저기 안새는 곳이 없다.
자다가 일어나 비오는 곳에 양동이를 받쳐본다.
건넌방이 가장 심각하다.
주인공의 책들과 책상들이 비로 엉망이 되었다.
어느날 아내가 사랑방에 손님이 왔다고 한다.
주인공은 사랑방에 갔더니 손님은 없고,
잘 정리된 책상과 원고지와 펜 등 글을 쓸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내의 이런 깜짝 이벤트에 감동을 먹은 주인공.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내의 깜짝 이벤트에 읽은 이 또한 유쾌함을 느꼈다.
그런 선물은 오랜 장마의 반짝 개인 하늘보다 반가웠을 것이다.
13. 재운
이 소설의 주인공도 소설가이다.
빈 방에 세를 주었다.
세를 사는 사람들이 터주를 놓고 비는 것을 주인공의 아내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그런 아내의 시선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
그런 집에서의 에피소드를 모은 소설이다.
...
14. 다시 한번 총평
이 책에서 소개한 박태원의 소설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 또는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소설가, 미술가 등의 가난한 지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랑, 가족을 유머있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박태원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하는 재미가 이 책에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박태원이 그대로 글 속에 들어 있었다.
기회가 되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책제목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단편선)
지은이 : 박태원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페이지 : 494 page
펴낸날 : 2005 년 4월 18일
정가 : 9,500원
읽은날 : 2010.05.17 - 2010.05.24
글쓴날 : 2010.05.24,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