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3.11.26. 아가서 특강) 말씀/ 아가서 8:6,7 사랑의 실존 철학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오늘은 사랑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철학자, 문인, 사상가, 종교인들, 그리고 평범함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란 말을 써 왔습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에는 남녀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랑도 하찮은 사랑은 없습니다. 모두가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아내를 사랑합니다. 자녀를 사랑합니다. 목자를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성경도 보십시오. 구약부터 신약까지 면면히 흐르면 꿰뚫고 있는 주제와 사상이 사랑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서 멸망 받을 인생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므로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계시록에 가면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혼인 잔치로 피날레를 맞이합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사랑 없이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없는 신앙은 종교일 뿐입니다. 성경의 성경이라고 하는 아가서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8:6,7).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강하며.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말씀에서 사도 바울도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1,2) ‘방언’은 외국어를 비롯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아름답고 유창하고 논리 정연한 언어를 가리킵니다. 또 ‘천사의 말’은 천사들이 사용하는 천상의 용어로서 최고의 경지에까지의 언어를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런 천사의 말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고, 모든 미래사를 내다 본다는 것, 이런 능력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런것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는 영어로 ‘Im nothing’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구제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영어로 ‘I gain nothing’.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하고 나서 그런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일 자체를 무익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이 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모든 삶의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바탕을 이루는 생명입니다. 이 사랑이 말의 의미를 주고, 행동에 의미를 주고,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이 사랑을 놓쳐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면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귀한 것이 없습니다. 가치도 메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도 진보하고 변화되고 정말 의미 있으려면 사랑이 모든 삶의 동기와 목적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어디서 배웁니까? 이 사랑이 어디서 시작되는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사람을 받음으로서 사랑을 알게 되고, 옆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 일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환경과 어려운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실존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던 시절, 캠퍼스에서 아름다운 유태인 여자 게르투르트 마이어를 만났습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야스퍼스는 한 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녀 역시 소문난 천재인 그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마음껏 사랑하고 학문을 연구에도 몰두한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둘이 졸업을 하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스퍼스는 모교의 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주위의 친지들 모두가 부러워하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얼마가지 않아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고 유태인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야스퍼스의 아내인 게르투르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대학 당국에서 야스퍼스를 불러 명령을 하였습니다. “야스퍼스 선생, 지금 우리 조국은 유태인들을 분리하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선생의 아내가 유태인인 까닭에 아내와 이혼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스퍼스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는 철학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인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아내와의 결혼한 것을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침착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주된 관심은 실존 철학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삶의 심연과의 합일을 말하는 철학입니다. 아내는 제 삶의 심연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교를 사랑하지만 아내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실례합니다”. 그렇게 미련 없이 교수직을 버렸지만 야스퍼스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슬이 시퍼런 나치 정권은 그에게 일체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저술이나 강연활동도 ,심지어는 여행도 금지 시켰습니다. 그나 너무나 유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숨통이 막힌 야스퍼스는 참으로 못견뎌 하였습니다. 보다 못한 그의 아내는 자신을 버리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오히려 그런 아내를 야단쳤습니다. “어허, 몇 번을 말해야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이요. 다시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마시오.” 그러면서 오히려 아내를 위로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의 설득으로 칼 야스퍼는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할 결심을 하고 당국으로부터 스위스 여행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내는 독일에 남아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야스퍼스는 망명마저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아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8년 동안을 그는 그림자처럼 아내와 붙어 다녔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초인종 소리에도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에도 혹시 나치가 아내를 수용소로 끌고 가기 위해서 오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내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야스퍼스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서로 얼싸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의 빛나는 승리를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가족을 친구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야스퍼스가 이처럼 사랑의 실존적 가치관이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아내를 끝까지 지켜주고 행복하게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다면 그는 관념적 개똥 철학자에 머물렀을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철학자 야스퍼스를 진정 위대한 철학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였습니다. 그는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죽음보다 더 강하고, 결코 포기 없는 사랑,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배반하고 떠나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볼품없는 저도 사랑해주셨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정말 말씀이 흘러 넘치고 믿음이 흘러 넘치는 시대입니다. 승리하는 크리스천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생명력 있는 크리스천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풍요를 누리며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본이 되는 크리스천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근본을 파고 들어가보면 사랑 문제입니다.. 크리스천의 능력과 승리는 사랑에 있다고 봅니다. 죽음을 띄어 넘을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가서 8:6-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세상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야스퍼스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것보다도 아내를 더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랑의 실존적 가치를 최고로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문의 영광을 사랑하였습니다. 교수로서 명예, 철학, 모교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아내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스위스로 가서 안전하게 살고 싶은 자기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아내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죽음의 위협도 넘어트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나치의 핍박과 위협도 꺼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8:35- 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로 살수 있습니까? 어떤 핍박에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믿음이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고 합니다. 사랑은 어떤 불도 꺼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실존적 사랑의 철학을 붙잡으면 됩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모든 신앙이 무너지고 깊은 좌절 속에 낙향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만이 앞으로 어떤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고, 주님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떄문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큰 소리치며 의지적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근거로 제자의 길을 갔을 때 그는 주님의 양들을 위해서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실패감도 사랑으로 극복하고, 죽음의 두려움도 사랑으로 극복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문제는 사랑에 있습니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사랑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명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을 조금만 더 사랑해도 돈의 욕심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영광을 쫓아 살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기에 세상을 떠날 수 없지만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에 절대적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사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결론 아가서 8:6.7절을 읽겠습니다.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8:6,7).
주일 생명 말씀(2023.11.19. 추수 감사예배) 말씀/ 시편 106:1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 11월 19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외부적인 행사는 없지만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헤를 기억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추수감사의 유래는 본래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받은 은혜를 영원히 감사하도록 지키라고 명하신 감사절기로 시작됩니다. 이를 근거로해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추수 감사예배는 19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영국의 청교도들에게서 시작됩니다. 청교도들은 오월의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뒤 첫해 겨울에 혹독한 추위와 질병, 기아 때문에 102명중 47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 인디언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짓고 첫 수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디언들을 식사에 초청하고 축제를 즐겼습니다. 미국이 독립한 후 의회는 1년에 한번 온 나라가 축하할 수 있는 감사의 날을 지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워싱턴 대통령은 그것을 11월 26일로 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평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요? 감사와 행복은 한 뿌리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하고 무엇을 감사해야하는지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수없이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107:1,136:1-9)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6-17), 데살로니가 전서 5: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감사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날만이 아니라 안 좋은 날도, 일이 잘된 날도 잘 안 된 날도 감사, 성공한 때도 실패한 때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렇게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자 집에 태어나고, 훌륭한 부모를 만나고, 건강하고 똑똑하고 재능이 많아서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아이들은 공부를 잘 해서 수능 성적이 좋고, 좋ㅇ느데 취업학, 사업은 날로 번창해진다면 감사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몸은 자주 아프고 힘들고 하늘 일마다 잘 안되고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면 그래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라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가난하게 살아보고, 특별히 재능이 많지도 않고, 크게 성공한 것도 없고, 아들은 어릴 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고, 또 하필이면 넘어져서 팔다리가 부러질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하는 이유는 어떤 열악한 조건이라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할 때 좋은 것들이 보이게 되고, 감사 할 때 운명이 섭리로 바뀌어지고, 감사할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감사하다보면 점점 그 불행도 행복으로 바뀌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체험해보고 있습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닙니다. 먼저 감사함으로 우리는 우리 삶의 운명의 문을 두두리고 행복을 창조해나갈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까? 감사하면 그렇게 됩니다. 감사하면 됩니다. 하나님께도 감사, 부모님께도 감사, 이웃에게도 감사, 자연과 모든 만물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행복한 자가 될 것이며 삶의 운명이 섭리로 바뀌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아직 이해를 못할 때 감사부터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소중함의 가치’를 알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공기, 해빛, 물...그 가치를 알게 되면 감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실패의 가치?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면 살패할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절망이 또 다른 소망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절망의 순간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파봄으로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아픈 것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배고픈 것이 배부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가난의 시절도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스시다 고노스케는 내셔날 창업주입니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회장님은 이렇게 큰 성공을 이루었나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가 일을 하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합니다” 그 세 가지는 ●가난하게 태어난 것, ●못 배운 것, ●허약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못 배웠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배우는 자가 되었고, 약하기 때문에 평생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단련한 결과 90이 넘도록 건강을 유지하며 세계적인 성공 기업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이렇게 운명을 마꾼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에 태어날 때부터 불구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닉부이치치는 양손 양발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일을 다하고 얼굴과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건강하지만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흐마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갑니다. 실낙원을 쓴 존 밀턴은 44세에 실명을 하였는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주께서 내 육안을 어둡게 하심으로 주님만을 볼 수 있는 심안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를 보면 감사할 조건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음마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주 안에 죽는 자는 복되다 하였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안다면 죽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삶의 가치를 모르면 살아 있어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장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찾아 감사하려면 감사할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감사하란 말인가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가치, 일어서고 넘어짐의 모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고 찬찬히 들여다보고 음미해보면 감사해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게 되고, 나는 행복에 겨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메세르데스 소사의 Gracias a la vida (Thanks For Life) 의 ‘삶에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노래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를 보면 “아, 이런 것들도 감사제목이구나”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하늘의 많은 별, 그리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또렷하게 구별 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귀뚜라미와 까나리오 소리, 망치소리, 터빈소리, 개짖는 소리, 소나기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이런 소리들을 밤낮으로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귀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춰주는 빛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는 단어의 소리와 문자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 너의 맑은 두 눈의 깊이를 볼 때 그것을 알고 떨리는 심장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행운과 불행을 구별할 수 있게 한 웃음과 눈물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드립니다. ..... 여기에 보면 감사제목이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큰 집을 사고 좋은 일자리를 얻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에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귀뚜라 미소리’ ‘망치소리’ ‘도시의 웅덩이’ ‘사막’ 그리고 ‘맑은 눈의 깊이, 웃음과 눈물을 준 삶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이런 것들도 감사제목 이라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맑은 공기 편히 숨 쉴 수 있는 것도 감사, 밝은 날의 햇빛도 감사, 건강도 감사, 지구촌에 12억이 굶주리고 있는데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감사, 마음껏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환경이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것도 감사,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감사제목이며 감사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 이 소연 박사가 우주를 다녀와서 한 말이 있습니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내려올 때쯤 든 생각은 과연 내가 지구에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지구에 무임승차하며 살면서 오히려 해를 끼치는 존재이진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주에서 숨을 한번 들이키려면 장비며 인력이며 돈이랑 엄청나게 큰 대가를 지불해야만해요. 하지만 지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마음껏 숨을 쉬며 살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던거죠. 저는 그 감사함을 앚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야를 우주가지 넗혀서 보니 지구에서 숨쉬는 것 그 하나만으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거기는 물도 없습니다. 지구에서 물을 마음껏 마시고 쓸 수 있는 것도 감사입니다. 감사를 못하는 것은 감사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사할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감사는 모든 것을 밝고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감사의 결과 나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단도 시험하지 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밝기 때문에 어둠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감사는 긍정이고 선이고 역사를 뒤바꾸고 상황을 역전시키는 능력입니다. 딤전 3:4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 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을 적극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결과는 행복이며 승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감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감사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고 합니다. 시편 136편에만 26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청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땅과 궁창을 지으시고 빛들을 지으시고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자연 만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곡백합, 하늘과 땅과 바다, 가족을, 부모 형제, 남편 아내, 자녀, 이웃, 사업장 일터를 주셨습니다....그리고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너무나 고귀한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인해서도 평생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하였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다보면 없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행복해집니다. 칼 힐티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감사를 꼽았습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날입니다. 70가가이 살아오고 40년동안 목회를 하였지만 가장 행복하고 버람을 느끼는 한 해였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큐티와 독서모임입니다. 새벽마다 하루도 빠짐 없이 목숨을 다해 큐티 말씀을 섬기다고섬겼는데 알고보니 제 자신이 가장 많이 받는 한 해였습니다. 그것도 꼭꼭 씹으면서. 지체들의 댓글도 거의 일일이 달았는데 그면서 영적 지체드르 영적 상태를 알 고 선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독서모임을 섬기면서는 그렇기 위해서 자신이 반복하며 읽고 세기며 온 힘을 다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도 결국 제자신이 더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큐티 말슴의 경우는 나와 우리 지체들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100사람 이상을 보내지는데 또 다시 여기저기서 단톡으로 소개되고 퍼져가는 볼 때 말씀의 생명력과 위력을 느끼며 우주교회가 자랑스럽고 감사가 되었습니다. 슈트트가르트 이화순 선교사님도 가족 감사방에서 큐티로 말씀의 뜨거운 교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감사헌금을 보내주셨고, 경주 수양회에 갔더니 저를 보자마자 김영미 목산님은 큐티 말씀을 답글은 길게 못 달아도 잘 보고 또 나누고 있다고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이본 디모데 선교사님으로부터 정미영 양호선생님이 보내주님 말씀으로 감동을 받고있다고 카톡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로서 우주교회로서는 가장 행복한 소식이고 감사제목입니다. 또한 매주 수요일 독서모임도 큰 감사제목입니다. 직장의 일을 마치고 피곤할텐데 다시 독서모임을 하러 교회에 오는 지체들을 보면 감사입니다. 최광휴선교사님은 함평서까지 오시고,또 끝나고도 늦게까지 은혜를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분 한분이 감동입니다. 그렇게 매주 배우고 나누며 2년동안 성장하더니 마침내 독서모임에 교회다니지 않는 네 분이 새로 참여하여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쁘기도하고 흥분되고 설레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모임 끝나고 김종식 기원님은 책상 밑에서 가방을 꺼내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가방이 과거에는 술 담는 가방인데 이제는 책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가방을 메고 나가는 모습이 너무 감동이 되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여지는 것뿐이 아닙니다. 한분 한분 속에 일어나는 봉지 않는 내면의 성장은 최고의 감사제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큐티 독서를 하면서 건너가기를 실천하여 세계적으로 이태리 알프스 돌로미티 독서 트래킹고 로마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누구나 꿈구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으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일생 일대 한번 하기 어려운 큰 경험과 배움을 얻었습니다. 잡다한 여러 모임은 없지만 주일 예배 와 매일 큐티, 그리고 독서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들을 바라보니 감사가 됩니다. 저는 우리 우주교회 지체들 한분 한분이 천 이요 만이라도 믿습니다. 현재는 겨자씨 같이 작지만 주님의 정언에 심겨져서 큰 나무가 되고, 온갖 새들이 날아와 우주적으로 변창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결론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우리 어려운 일 아닌데 감사로 힘차게 이 문을 엽시다. 우리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는 역사를 이룹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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