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사를 말하면서 ,특히 한국군의 전투기록을 살펴보며 늘상 빠지지 않는 기록이 바로 해병대 청룡여단의 "짜빈동 전투"일 겁니다.
세세한 이야기는 어차피 여기 회원들이시라면 자세히 아실테고.....
이 짜빈동 전투에서 몇몇 분들이 의문점을 가지신다고 하시더군요.
1.북월맹군,즉 훈련 수준이 상당한 정규군 인데다가 당시 주력이었던 월맹군 제 2사단은 월맹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일 정도로 실전경험과 엄정한 군기,상당한 수준의 군기를 자랑했습니다.그런데 작전 개요를 보면 약간은 무모했으리 만치 몰아붙히다가 큰 타격을 입었지요.
2.전투 종료후,월맹군의 전사자는 250여명 정도로 최종집계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의문을 가지시더군요.
"아니 사단이라면서? 250여명이라면 겨우 2개중대(사실 그 2개 중대에 내가 포함된다면 그런 말을 하는 놈을 죽도록 패버리겠지만;;;) 정도의 손실인데 그렇게 작정하고 쳐들어 왔으면서 왜 2개 중대가 손실을 입었다고 후퇴했지?
사실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지만,제가 당시의 월맹군 지휘관도 아니고 해서 달리 알길은 없었는데....짜빈동 전투 이전의 기록과 유명한 베트남전 영화인 "We were Soldiers"를 보고 난 후 어느정도 윤곽이 잡히더군요.
1.짜빈동 전투 이전에 바로 월맹군의 정규부대와 국군 해병대가 맞붙은 전투가 있었습니다.짜빈박 전투라고 불리우던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는 베트남 파병 중 가장 큰 패패에 속하는 피해를 입게 되죠.(자세한 것은 이 카페의 자매 사이트인 대한민국 해병대 군장 연구소로 가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기타 국지적인 전투에서 상대적으로 육군에 비해 늦은 장비 배치와 현지 적응으로 인해 북월맹군에게 다소 끌려가던 해병대를 월맹군에서는 대규모 전면전이나 정규전 대 정규전에서 실력이 떨어지는 부대로 평가했을 가능성입니다.한마디로 만만하게 보였다는 거죠.실제로 베트남 파견후 처음부터 높은 전과를 올리던 육군(특히 맹호)에 비해 상당히 대조를 이루었다는 것이고(물론 육군이라고 해서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아닙니다.단지 승리의 빈도수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죠.) 게다가 이러한 "만만한" 부대가 중요 거점을 확보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자부심이 높았던 부대인 월맹군 2사단 측에서는 얼마간의 방심이 있었을수 있었겠죠.(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나름대로 훈련도 잘되고 군기도 있는 엘리트 정규군일수록 거만해지는건 사실입니다.보통 적을 깔보게 될수록 아군의 사기가 올라간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칫하면 적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또한 월맹군의 정보부족이 한몫 했을수도 있지요.
보통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에는 1개 중대가 주둔합니다.(당연한거 아냐;;;)뭐 지금하고 보병중대의 구성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은 보병 3개 소대와 화기반(화기소대라 하기엔 숫자가 좀 적지요..)그리고 포병관측장교(요즘은 화력 지원장교라고 하더군요.어디까지나 육군에서..)를 주축으로 한 포병 관측반이 배치됩니다.(보시면 2차대전식과 한국전쟁식에서의 미군 보병중대 편성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미군이 주로 전략지역의 중심에 대대규모로 기지를 만들어 전략촌 중심 경계를 한데 비해 한국군은 중요 거점마다 중대급 기지를 세우고 각 중대기지간에 사단 여단 직할 및 각 중대별로 1개 소대씩 수색대를 보내어 중간을 이어주는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미군의 방식은 기지 자체가 공격받을시 이를 격퇴하고 병력의 피로도를 줄일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었으나 문제는 베트남이란 지역이 그리 만만한 지역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미군의 경우 이미 마을주변이나 도시 주변에 치안이 확보되어 있고,또 지역의 자체 치안이 확보되어있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좋을지도 모르나,베트남처럼 낮에는 우리편,밤에는 적으로 돌변하는 상황에서는 유연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반면 한국군의 경우 상황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가 가능했지만,반대로 기지가 적의 대규모 병력에 대해 방어하기가 다소 어렵다는게 단점으로 존재했죠.
게다가,보병이 3개 소대가 존재하는데 1개 소대가 수색을 나간다면 실질적으로는 중대 기지라고 해봐야 달랑 2개 소대가 남습니다.
아무리 고정화되고 강력한 화력을 지닌 진지가 있고 후방에서 포병이 아무리 화끈하게 지원해준다해도 결국 실병력이 적으면 밀릴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으니 월맹군 측에서 중대기지를 공격할려고 마음먹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문제라면 당시 짜빈동 해병 중대전술 기지 안에 4개나 되는 보병 소대나 있었다는 거겠지요.(일단 총쏠 사람이 하나라도 많아지면 전투에서 유리해지는건 당연한 겁니다.)
기타,후방에서 지원해주던 포병의 역활같은것은 많이 언급되었으니 언급을 삼가하겠습니다.
2.250여명의 전사가 과연 사단급 작전에서 후퇴할 정도로...게다가 작전 이후 월맹군 2사단이 재편을 필요로 할 정도로 큰 피해였었나?
일단 편제라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특전사만 봐도 중대라고 해야 13명이지 않습니까?
당시 월맹군은 중장비를 맘놓고 가지고 다니고,대규모 병력이 대놓고 이동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정규 편성된 병력이 적었습니다.
당시 월맹군의 1개 사단의 병력수는 약 4000여명,한 개 사단은 2개 연대와 지원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은밀하게 움직이거나 땅굴 생활을 하기에 적합하고 중장비 없이 적을 타격하기 쉬운 편제로 구성이 되다 보니 그렇게 나온것으로 보입니다.(대신,미군을 비롯한 연합군보다 부대 단위별로 중기관총,박격포,로켓 직사화기등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한마디로 오로지 사람으로만 적에게 타격을 주기 쉬운 편성이었습니다.
단순 산술적으로 계산해 봐도 1개 연대가 2000여명으로 구성,게다가 공격에 참여했던 부대는 2사단 소속의 1연대 일뿐,2연대는 후위에서 대기하던 중 포격으로 인해 피해만 입고 공격에 참여하지도 못합니다.
일단 계산적으로 2000여명중 250여명....1/10을 넘어가는 숫자입니다.게다가 평균적으로 전투에서 부상자는 전사자 비율의 1:3입니다.일단 전사자의 경우 월맹군이 시신은 남겨두고 갔기 때문에 계산하기가 쉬웠으나 부상자의 경우는 계산이 어렵습니다.(월맹측 발표는 믿을만한게 못되는것이 이 친구들은 한번도 제대로된 계산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전쟁 끝난지 30여년이 다 되어가는데 전쟁기간중 전사자 숫자조차도 내놓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계산대로라면 전사자가 250여명,부상자 수는 약 7~800명 선이 됩니다.합한다면 공격에 참여했던 1연대는 병력의 반을 잃은 것입니다.
실제로 보유병력의 20%를 잃게 된다면 그 전투는 실패라고 하는데(몇몇 예외는 있습니다만,)반수나 병력을 잃고도 부대를 후퇴 시키지 않을 지휘관은 없을겁니다.
이렇게 1개 연대가 전투력을 잃었다면 나머지 1개 연대는 사단이 재편성되기 까지 실제로는 사단급 작전에 참여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이들만 독자적으로 떼놓거나 흩어놓고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군사작전을 이해하신다면 아실겁니다.구성부대가 스페어 부품처럼 이리저리 유용되면 부대 조직을 재건하는데 엄청 골아퍼지고 명령 계통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은 2연대 역시 월맹으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이런 저런 정황증거로 알아본 것이기에 일부 다른 증거가 발견되면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만,한가지 확실한것은 어쨌던 대승임에는 가능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