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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은 다문화(多文化)·다인종(多人種) 사회(社會)였다.
(조선(朝鮮)의 다문화(多文化)사회(社會)·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은?)
○〈조선(朝鮮)은 고대(古代)로부터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 이어왔다. 또한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民族)이었다.〉는 것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해설(解說)이었으며, 지금(只今)도, 그 논리(論理)는 변함이 없다.
더하여〈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라는, 반도(半島) 땅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땅이라고 대못을 박아 놓았다. 무궁화(無窮花)는 정말 반도(半島)의 꽃이며,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상징(象徵)할까?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상징(象徵)할까?
또한 21세기 요즘에도 언론(言論)에서, 이탈(離脫)주민(住民)과의 인터뷰 또는 방송(放送)을 보면 :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을 자주 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주 쓰는 “남남북녀(南男北女)”란의 본래(本來) 뜻과 부합(符合)되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言及)한〈조선(朝鮮)은 단일민족(單一民族)이었을까? 또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을까? 무궁화(無窮花)삼천리(三千里)란 말은?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이 반도(半島) 땅을 말하는 것일까?〉한 번 냉정(冷靜)하게, 논리적(論理的)으로 따져보자.
➨ 결과론(結果論)이지만, 이는 식민사학(植民史學)에 의한 식민지(植民地)백성(百姓)들을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조작(造作)된 치욕(恥辱)의 역사(歷史)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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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궁화(無窮花) : 자세한 것은 전회(前回)에 이미 게재(揭載), 설명(說明)하였다. 다만 무궁화(無窮花)를 :〈순화(蕣花)·순화(舜華)·순화(舜花)·황화(皇華)〉라고도 한다. 이러한 말은 인터넷 검색창(檢索窓)을 치기만 하면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순화(舜華)=순화(舜花)” 란 뜻이 무언가? 순(舜)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순(舜)임금의 꽃(華)〉이란 뜻이 되기도 하는데, 순(舜)임금이 누군가? 그가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의 임금이었는가?
순(舜)임금은 : ‘우순(虞舜)’을 말하며, 이름이 중화(重華)로써, 오제(五帝)중의 한 분이시다. 동이(東夷)로써, 기주인(冀州人)이라고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주(冀州)는 ‘동이(東夷)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기주(冀州)가 중화(中華)의 핵심(核心)지역이었다는 이야기는, 곧 이곳이 동방(東方)의 중심(中心)이요, 동국(東國)의 중심(中心)이였다는 말과 같다.
무궁화(無窮花)가 오제(五帝)중의 막내이신 “우순(虞舜)의 꽃”이라고 한다면, 무궁화(無窮花)는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상징(象徵)했다고 볼 때,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우순(虞舜)이어야 하고,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대륙(大陸) 땅의 제국(帝國)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이 틀렸는가?
※ 참고(參考) / 삼황오제(三皇五帝)
➊〈공안국(孔安國)의 상서(尙書)서(序)·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손씨(孫氏)의 주(注) 세본(世本)〉등에서는 : 〈복희(伏犧)·신농(神農)·황제(黃帝)를 삼황(三皇)이라고 했으며, 오제(五帝)는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唐)·우(虞)〉라고 하였다.
➋〈황제(黃帝) 본기(本紀) 주석(註釋)〉에서는 : 〈오제(五帝)를, 소호(少昊)·고양(高陽)·고신(高辛)·당(唐)·우(虞)〉라고 하였다.》
〈무궁화(無窮花)〉가 조선왕조(朝鮮王朝) 또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라면, 우순(虞舜)의 후국(後國)이란 말과 같고, 우순(虞舜)이 동방(東方)사람이었다면 (五帝本紀:註釋:會稽舊記云舜上虞人,去虞三十里有姚丘,即舜所生也.周處風土記云舜東夷之人,生姚丘.括地志又云:姚墟在濮州雷澤縣東十三里.孝經援神契云舜生於姚墟), 그 직계(直系) 조상(祖上)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 모두 동방(東方)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이며, 동방(東方)은 곧 동역(東域)이고, 동국(東國)이며, 진단(震旦)이기도 하다. 이곳엔 구이(九夷)들이 살았었다. (五帝本紀:虞舜者,名曰重華.重華父曰瞽叟,瞽叟父曰橋牛,橋牛父曰句望,句望父曰敬康,敬康父曰窮蟬,窮蟬父曰帝顓頊,顓頊父曰昌意:以至舜七世矣.)
《集解徐廣曰:皇甫謐云:舜以堯之二十一年甲子生,三十一年甲午徵用,七十九年壬午即真,百歲癸卯崩. : 집해(集解)서광(徐廣)이 이르기를 : 황보밀(皇甫謐)이 말하는 바로는 : 순(舜)임금은 요(堯)임금 21년 갑자(甲子)년에 태어났다. 31년 갑오(甲午)에 징용(徵用), 79년에 임오(壬午)에 곧 진(眞), 백세(百歲)계묘(癸卯)에 붕어(崩御)하였다. 孔安國云:瞽叟姓媯.妻曰握登,見大虹意感而生舜於姚墟,故姓姚. : 공안국(孔安國)이 이르기를 : 고수(瞽叟)는 성(姓)이 규(嬀)이고, 처(妻)는 악등(握登)인데, 커다란 무지개(虹)의 뜻에 감응하여 요허(姚墟)에서 태어나, 고로 요(姚)성이 되었다. 目重瞳子,故曰重華.字都君.龍顏,大口,黑色,身長六尺一寸. : 두 개의 눈동자를 가졌으며(重瞳子), 그래서 중화(重華)라고 하였다. 자(字)는 도군(都君)인데, 임금의 얼굴(龍顏)은, 입이 크고(大口), 검고(黑色), 신장(身長)은 6척1촌이었다.》라고 주석(註釋)에서 설명하고 있다.
➨ 순(舜) 임금의 신체(身體)특징(特徵) : 중동자(重瞳子)란 두 개의 눈동자(瞳子)란 뜻이니, 네 개의 눈동자(瞳子)를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중화(重華)란 뜻도 이와 같다. 〈순(舜) 임금의 특징(特徵)은 : 한곳에 두 개의 눈동자(瞳子)를 갖고 태어났다고 하니, 결국 네 개의 눈동자(瞳子)를 갖고 있었고, 입이 크고, 몸의 색(色)은 검고(黑), 신장(身長)은 컸다.〉는 것이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위와 같은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들을 설명(說明)할 수 없다. 더하여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할 수 없다. 땅(地 : 土地)이 없는 곳에, 인간(人間)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들은 신(神)이다. 그러나 미안(未安)하고, 죄송(罪悚)스러운 이야기지만, 인간(人間)이 신(神)이 되고 싶어, 별의별 짓을 다해도, 신(神)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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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은 무슨 뜻일까?
〈남남북녀(南男北女)〉라고 하면, “반도(半島) 북(北)쪽의 여자(女子)와 남(南)쪽의 남자(男子)” 를 말하며, 이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男女)를 말하며, 그들의 근본(根本)은, 남(南)쪽 남자(男子)요, 북(北)쪽 여자(女子)다.
이를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남(南)쪽의 남자(男子)와 북(北)쪽의 여자(女子)』 를 비교(比較)할 때, 또는 잘 어울리는 남녀(男女)가 혼인(婚姻)을 할 경우, 천생배필(天生配匹)과 같다는 뜻으로도 사용(使用)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반도(半島)”에서 가능(可能)한 이야기일까? 결과론(結果論)이지만, 이는 전적(全的)으로, 잘못 인용(引用)된 것이며,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에 의한 폐해(弊害)중의 하나이다.
○ 임하필기 제27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 남남북녀(南男北女)편을 보면,
《世以南男北女.謂之南方之男北方之女.其眞實則以咸關南北而言也.關北之女.碩大白晢. : 세상에서 남남북녀(南男北女)는, 남방(南方)의 남자(男子)와 북방(北方)의 여자(女子)를 말하는데, 그 진실(眞實)은 함관(咸關)의 남(南)쪽과 북(北)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관북(關北)의 여자(女子)는, 체구가 크고 살갗이 희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곧 남남북녀(南男北女)를 나누는 기준(基準)은 : 함관(咸關)【백과사전 - 咸關嶺(함관령) : 함경남도(咸鏡南道) 함주군(咸州郡) 덕산면(德山面)·홍원군(洪原郡)·용운면(龍雲面)사이에 있는 재. 북쪽에 차유령(車踰嶺)이 있음. 함경산맥(咸鏡山脈) 남서단(南西端)에 위치(位置)함. 이성계(李成桂)가 외적과 싸워 이긴 곳으로 달단동(韃靼洞) 승전기념비(勝戰紀念碑)가 있음. 】의『남쪽과 북쪽』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함관(咸關) 남쪽지방의 남자(男子)와 함관(咸關) 북쪽지방의 여자(女子)를 말하는 것이다.》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상식(常識)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또한 이곳에 『달단(韃靼)들의 마을인 “달단동(韃靼洞)”이 있었다.』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 이곳에서 말하는 “함관(咸關)”은 반도북방(半島北方) 함경남도(咸鏡南道)지방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음을 증거(證據)하고 있는데,
〈체구(體軀)가 크다〉는 말은 신체(身體)가 크다는 말이고,〈살갗이 희다〉란 말은 백인종(白人種)에 가깝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인종(人種)은, 반도(半島)와 대륙(大陸)에서는 찾을 수 없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一部) 및 러시아( Russia)지방의 인종(人種)에서나 찾을 수 있으며, 『살갗이 희다』란 말은 관북(關北)지방과 관남(關南)지방의 인종(人種)이 달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북(關北)지방과 관남(關南)지방이 같지 않으므로,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다. 이는 “조선(朝鮮)은 다인종 사회였다.” 는 것을 말해 준다.
○ 이러한〈관북(關北)의 유풍(儒風)〉을 살펴보면 :
《임하필기 제27권 관북(關北)의 유풍(儒風) : 함관(咸關)이북(以北) 지방은 가옥(家屋)이 토굴(土窟)과 같고 사람들이 짐승의 가죽을 입고 산다. 그러나 평소 유풍(儒風)을 숭상하여, 남자들은 모두 글을 읽을 줄 알고, 여자들은 다 길쌈을 할 줄 안다. 제사(祭祀)는 반드시 정성스레 지내되, 탁의(卓椅)를 설치하는 일이 없고 땅바닥에 척포(尺布)를 펴고 그 위에 과일과 어포(魚脯) 등의 제물을 벌여 놓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밤에는 강비(穅秕)의 기름을 짜서 삼줄기[麻莖]에 발라 벽의 구멍에 꽂아 두고 두 머리 부분에 불을 붙여 밖으로는 남자가 읽는 책을 비추고 안으로는 여자가 길쌈하는 곳을 비추는데, 글 읽는 소리가 베 짜는 소리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우렁차다. 이 때문에 회령(會寧)과 종성(鍾城) 사이에 석유(碩儒)가 많이 나왔으니, 예컨대 동호(東湖) 문덕교(文德敎)와 송암(松庵) 이재형(李載亨) 같은 여러 사람들은 북쪽 지방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관북(關北)과 관남(關南)은 생활환경(生活環境)이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 안에서도, 이질적(異質的)인 생활환경(生活環境)이 있었으며, 이는 자연환경(自然環境)과도 연결(連結)되는 문제다. 영토(領土)안에 한대(寒帶)와 열대(熱帶)와 온대(溫帶)가 있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나라였다는 사실(事實)이다.
○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가진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다양(多樣)한 사회(社會)를 구성(構成)하고 있었다.〈다민족(多民族)·다인종(多人種)·다문화(多文化)사회(社會)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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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朝鮮)은 원래(元來) ‘다문화(多文化)사회(社會)’였다.
[펌글 : 이영아의 여론(女論) : 조선은 원래 ‘다문화 사회’였다. (중앙일보 2010년 12월 09일 기사, 수정 2010.12.10. 00:11)] 를 참고(參考), 인용(引用)한 내용(內容)임. [전회(前回)에 게재(揭載)된 내용(內容)을 일부 보완(補完)한 것임]
○ 프랑스의 고고학자·철도기사였던 ‘부르다레’는 ‘경의선’ 부설을 위해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신체검사를 했다. 그는 이때 측정한 조선인들의 몸에 대해 ‘상트르(E. Chantre)’와 함께 연구,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림은 그의 논문 ‘한국인, 그 인류학적 스케치’(『리옹 인류학회지』 제21권, 1902)에 수록된 한국인의 모습.
구한말 많은 서양인이 외교·선교·무역·탐험 등의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이들은 조선에 대한 견문록을 여럿 남겼는데, 이 기록들은 당시 서양인들에게 비친 조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이 자료들을 보면,『서양인들은 조선인이 다른 동양인들에 비해 체격조건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➊ 프랑스 고고학자이자 철도기사였던 ‘부르다 레(E. Bourdaret)’는, 조선인들의 평균 신장을 조사해보니,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큰 162㎝였다고 기록했다.(En Coree』, 1904)
➋ 영국 지리학자 비숍(I.B. Bishop)도, 조선 성인남성이 평균 163.4㎝의 키에 잘생긴 용모와 좋은 체격을 지녔다고 언급했다. (『Korea and Her Neighbors』, 1897).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 다인종 국가로 보였다는 점이다.
➌ 네덜란드 의사 ‘지볼트(Fr. von Siebold)’는, 〈조선인들의 외양에서 ‘코카서스’ 족과 ‘몽골’족의 특성이 모두 보인다.〉 고 말하였고(『Nippon』, 1840년대),
➍ 프로이센 상인(商人) 오페르트(E.J.Oppert)도, 조선인을 서로 다른 두 민족이 혼합된 인종이라고 생각했다.(『A Forbidden Land: Corea』, 1880).
➎ 이탈리아 외교관 ‘로제티(C. Rossetti)’도, 조선인이 동방인과 남방 인들의 혼혈이라 말했고(『Corea e Coreani』, 1904),
➏ 영국인 화가 ‘랜도어(A.H. Savage Landor)’는, 조선인이 “마치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인종의 표본이, 그 조그만 반도에 정착한 듯하다”고 보았다. (『Corea or Cho-sen』, 1895).
이처럼 조선인을 여러 인종의 혼합으로 본 서양인들의 기록은 최근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한국 단일민족설의 ‘허상’에 대한 논의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➐〈이광수의『조선민족론』(동광, 1933) 이전(以前)까지는, 조선인이 단일(혈통)민족이라고 표현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➑ 신채호(『독사신론』, 1908), 박은식(『몽배금태조』, 1911) 등은,〈조선인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인정하고 있었다.〉(박찬승, 『민족, 민족주의』, 2010).
그런데 일제강점(日帝强占)기나 남북(南北)분단(分斷) 등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에 의해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 이민·국제결혼이 확산되는 것을 낯설게 생각하거나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원래부터 한국은 다양한 외양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여러 인종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다문화사회’였으니 말이다. 마침, 오늘은 세계 인권선언일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 문화연구소 연구원>
● 그림설명 : 프랑스의 고고학자·철도기사였던 “부르다 레”는 경의선 부설을 위해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신체검사를 했다. 그는 이때 측정한 조선인들의 몸에 대해 상트르(E. Chantre)와 함께 연구,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림은 그의 논문 ‘한국인, 그 인류학적 스케치’(『리옹 인류학회지』 제21권, 1902)에 수록된 한국인의 모습.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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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半島)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인 특색(特色)으로 보면 : 〈반도(半島) 땅은 다문화(多文化)니, 다인종(多人種)이니 하는 말〉등은 생뚱맞게 들리는 곳이다.
〈반도(半島) 땅이, 일만(一萬)년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땅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이 땅에는, 그것을 확실(確實)하게 증명(證明)해주고, 증거(證據)해 주는 수많은 유물유적(遺物遺蹟)으로, 행복(幸福)해 하고 있을 거다.〉
과연(果然) 그런가?
2017년 04월 27일〈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朝鮮은 聯邦帝國 즉,中潮가 있고 또 수많은 帝后國들로 이뤄진 聮合體라면 多文化, 多人種 社會가 옳은듯 싶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半嶋로 移植되면서부터 單一民族化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런 서술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과거 중조가 다스렸던 조선에는 수 많은 단일인종, 단일민족이 存在하였스므로 이들을 登用한 朝政에는 다양한 의복을 갖춘 인종들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러나, 朝鮮이 滅亡한뒤로 歷史를 再篇하는 과정에서 統治의 한 축이었던 人種이 반도로 오면서 多文化, 多人種의 社會는 끝을 맺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과거와는 반대가된것이죠. 소수민족으로 地方의 帝后가 된겁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그렇습니다. 본시의 옛 조선왕조는 위로는 천자(天子), 아래에는 많은 제후(諸侯)들의 나라가 있었고, 이들은 천자(天子)의 명에 따라 자신들의 영토와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다양한 문화, 인종, 종족, 부족들이 조선(朝鮮)왕조(王朝)의 울타리안에서 살았으며,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존중하면서 공존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였다고 봅니다.
단일민족이니, 백의민족이니 하는 말들은, 식민지시대에 총독부에서 신지식인들이 하수인이 되어 전파되었죠. 일제에 부역(친일분자)한 자들에 의해 당시 조선의수많은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고 봅니다. 이 자들의 주장이 단일민족이니 백의민족이니 하는 것들이죠.
사진이 재미있군요. 코카서스인, 적도인, 남중국인, 동북아인의 전형적인 얼굴이네요. 땅이 컷다는 얘기는 여러 민족이 포함되었다는 얘기이니 당연히 다민족국가였겠지요. 지금 지나처럼. ㅎ
조선은 다문화[多文化] 다인종[多人種] 사회였다. 조선사 역사의 기록으로 생생히 전해지고 있으며, 당연한 우리 역사의 사실이 무슨 큰 비사라도 되는 듯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 이겠습니까 ?
일만년 조선사의 역사에서, 다문화, 다인종의 사회는 이미 상고 시대인 고조선으로 부터 고구려로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근세 조선의 말기에, 평양은 이미 인구의 반이 다인종 이었습니다. 전라도의 나주도 이와 비슷 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으로 생생히 전해지는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역사가 어떠한 역사 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
고구려 동명성제의 탄신일도 사월 초 팔일 입니다.
안녕하세요.
우린 그동안 실체가 없는 허상만을 쫓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세와 서남 만인들과 왜> 무리들이 만들어준 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이전투구만을 벌였던 야만인 제후국으로, 제후국 백성으로 묘사되어, 말썽이나 일으키는 무지몽매한 나라요, 백성들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외적이 쳐들어와도 싸울 생각은 안하고, 대국에 "살려달라"는 구걸표나 작성해 보내는 이런 나라가 조선왕조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이런 조작된 식민사학의 가르침대로 "오늘도 대한민국은 대국에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자주니 자립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말들은 사치스러운 것일까요? 요즘 정치가나 관료들이 하는 짓을 보면 힘빠집니다.
외교라는 단어조차 무색케하는 이런 관료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높은 관료 자리에 앉힌 자들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아도 쌉니다.
역사교육은 대단히 중요한 과목중의 하나라고 보는데, 우리나라는 누구도 이를 중요하게 생각치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통과의례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습니다.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는 순간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준 반도조선왕조!
언제나 허물어질까? 결단코 허물고야 말것이라는 각오를 다집니다.
서문님, 환국고려님!
감사드리며, 두 분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