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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순간, 미열(微熱) 4
어느덧 4월,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보름째 접어들었다. 오늘은 프리랜서 분들과 상주하는 직원들이 모두 모여 공동작업을 하는 날이다. 저마다 바쁜 스케줄이 있는 터라 이렇게 모이기가 수월치 않은데, 다 모였다는 건 밤샘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모였을 때완 달리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자들은 힐을 벗은 채 머리를 질끈 묶었고 화장의 반이 없어졌다. 인원이 교체됐나 싶을 정도로 너무 못 알아보겠다. 남자들은 타이를 풀고 셔츠를 가슴까지 풀어헤쳤다. 이건 정말 좋은 현상이지 싶네.
나는 아예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형이 쉬는 날이라 차를 가져왔는데 마침 트렁크에 추리닝이 있었다. 얄프리한 면소재에 조금은 헐렁해서 앞의 볼륨이 부각되는 회색추리닝. 다들 날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편안함을 부러워하는지, 앞의 불룩함을 부러워하는지.
그나저나 디데이까진 아직 3개월가량 남았는데도 벌써 녹초가 된 기분.
그렇대도 이 짜릿한 기분은 뭘까? 리더는 아니어도 중대한 프로젝트의 일원이라는 게 이토록 뿌듯하고 흡족할 수가 없다.
난 이 벅찬 기분에 박차를 가해 시나리오를 펄럭펄럭~ 절도 있게 넘긴다. 수정이 더 필요한 부분엔 포스트잇을 팡팡! 붙이고, 칭찬받은 대사는 형광펜으로 확확- 긋는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형광펜 심이 다 부러졌다. 이거 진짜 부러지기 쉬운 거 아닌데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뭐해?”
필립 형이다. 셔츠를 많이도 풀어헤쳤다. 샤프하고 지적인 얼굴 반면 두툼하게 튀어나온 근육질 가슴골. 오줌 누고 왔는지 바지 지퍼도 반밖에 안 올렸다. 얼마나 바쁘게 열심히 일했으면.
“시나리오 점검하고 있었어요.”
난 덕지덕지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일부러 보이면서 한손으론 몰래 부러진 형광펜 심을 탁 튕겨낸다.
“그래? 난 시나리오 학대하고 있는 줄 알았지.”
“학대라뇨. 말도 안 되는 얘길 하고 계시네요.”
“봐, 너덜너덜해졌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네 눈엔 이게 안 보여?”
“흠.”
보인다. 다시 출력해야겠다.
“지금 야식 먹으러 갈 건데요, 모두 엘리베이터로 나와 주세요!”
누군가의 말에 다들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도 질세라 서둘러 뛰쳐나가며 뒤를 돌아보니 다들 책상이랑 일한 파일들을 정리하고 있다. 결국 나만 서둘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엘리베이터에 도착하니 도일 씨가 서있다. 그것도 혼자 맨 앞에. 이거 봐. 나만 서두른 거 아니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난 도일 씨를 앞질러 구석자리에 짱 박혔다. 여기가 명당이랄까. 중간은 어정쩡해서 어색하고, 문 쪽은 자기 모습이 비쳐서 민망하다. 그나저나 다들 야식 한번 먹겠다고 꾸역꾸역 들어온다. 16명 정원을 다 채우고 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서야 겨우 문이 닫혔다.
그런데 나 조금, 위치가 이래서는, 고의도 아니고 본의도 아니지만 여기서 어떻게, 이거 자세가 너무 이상해.
도일 씨와 수직으로 선 탓에 그의 팔이 내 가슴에 닿았고, 그의 손등이 내 거기에 닿았다.
얇은 면추리닝이라 완전 잘 느껴진다. 그의 손등과 가운데 손가락을 잇는 돌출된 뼈가 내 앞에 느껴질 정도니. 이렇다면 그의 손등에도 내 육체적 변화가 생생하게 전달될 텐데 이거 큰일이다.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조금씩 몸을 움직였더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앞이 점점 더 커져서 내 발기과정을 그의 손등에 라이브로 전하고 있다.
그 역시 상황이 난처했는지 흠흠, 헛기침을 내뱉는다. 일부러 내뱉는 게 티 날 정도로. 정말 이런 은밀한 모습을 들켜버리니 뭐라 해명할 방법이 없다.
난 최대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변명을 떠올려본다.
‘누구라도 가운데를 누르면 딱딱하게 서는 법이에요. 물컹물컹한 게 이상한 거죠. 나한테 무슨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러는 게 건강한 거예요. 보다시피 나 아직 젊잖아요?’
모르겠다. 이렇게 준비한들 그에게 말로나 할 수 있을지. 아니지, 말하는 게 더 이상해. 그래봤자 내 무덤 내가 파는 꼴인데. 그냥 가만히 있자. 모른 척. 자는 척. 죽은 척. 드르렁. 헉! 죽은 척한다는 게 헷갈려서 코를 골았어.
살짝 실눈을 떠 층수를 바라보니 7층. 조금만 버티면 곧 1층이다. 난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6층. 5층. 4층. 3층……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혹시 하고 내려다보니 역시.
그가 서서히 손을 돌리기 시작했다.
4화 느끼고 싶다면 욕심일까, 이런 터치
사계절 시나리오가 모두 완성되자 두 번째 현장답사가 결정되었다. 장소는 춘천의 삼악산. Y대 천문학과 부교수를 섭외하여 직접 밤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관측할 거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실제를 보고 시나리오를 또 수정하겠다는 뜻이겠지. 이젠 좀 지겨워지려고 한다.
“자고 와?”
형이 내 짐들을 살펴본다.
“1박2일 코스로 텐트치고 야영한다는데, 말이 그렇지 밤에 별 봐야 해서 잠은 안 재울 것 같아. 우리 아트디렉터가 좀 그런 면이 있거든.”
침낭, 믹스커피, 플래시 오케이, 아이패드 오케이, 속옷, 양말 오케이.
“외박이잖아.”
“그렇긴 해.”
그러고 보니 그렇다. 형이랑 살면서 첫 외박이다. 대학 때 졸업여행간 것 빼면. 부모님도 외국에 계셔서 명절 때면 매번 형네 집으로 갔었다.
“걱정되네.”
“걱정은. 내가 애도 아니고.”
“애일 때부터 봤으니까.”
“스무 살이 애야?”
대학에 입학하여 형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난 새내기, 형은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 우린 서로 전공이 달랐지만 영화동아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땐 참 형도 풋풋했고, 열렬했었다. 내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스무 살이면 애지.”
“그렇담 뭐야, 형은 나를 애라고 생각했으면서 그러고 그랬단 말이지? 몰랐네, 형 취향이 그런 줄은.”
“푸후.”
형이 어이없다고 웃는다.
‘히히.’
가끔 형을 놀리는 것도 재미있다니까.
“자, 이거.”
형이 페레로로쉐 초콜릿을 건넨다.
“선물세트네?”
완전 큰 박스다. 세 가지 맛이 두 줄씩 담긴 거.
“산에 가면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 비상용이야.”
“족히 일주일은 무슨 일 생겨야겠다. 이거 다 먹으려면.”
다시 캠코더, 노트북, 충전기 오케이, 세면도구, 스킨로션, 라텍스베게 오케이.
“베게도 필요해?”
“안 필요한가?”
하기야 안 필요할 것 같다. 처음 하는 외박이라 내가 잘 몰라서.
“준비 됐으면 가자. 태워줄게.”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둘러멘다. 그리고 잠시 집안을 둘러본다. 왜 그러는지 모르게.
날씨가 너무 좋다. 따뜻하고, 화창하고, 바라보이는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 한가득. 스테레오에서 에릭 베넷의 노래가 감미롭게 흐른다. 살짝 열린 차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스민다. 이런 게 편안한 행복이겠지.
난 넌지시 형을 바라본다. 은빛 보잉선글라스 아래 우뚝 솟은 조각 같은 콧날, 다정하게 부드럽게 다문 입술, 매력적으로 드러난 예리한 턱선, 길게 뻗은 목 줄기를 따라가면 브이넥 사이로 두드러진 쇄골이 보인다.
누가 봐도 미남이다. 어쩌면 내가 과분해해야할까. 이런 형이 우리 형이라.
“왜?”
형이 내게 묻는다.
“뭐?”
나도 묻는다.
“싱겁긴.”
형이 내 머릴 쓰다듬는다. 머릿결 새로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부드럽네, 하며. 나는 린스해서 그래, 대답하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매일 느끼고 싶다면 욕심일까. 이런 터치, 사소한 스킨십.
“다 왔다.”
청량리역 앞에 도착하자 형이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난 고개를 비틀어 형의 입술을 조금 더 키스하고 차에서 내린다.
“다녀올게.”
그리고 손을 흔든다. 형에게.
차가 출발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난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인지 필립 형이 서있다.
“인성, 안녕~”
그가 가슴께로 손을 든다.
“어쩐 일이에요?”
난 형의 차가 멀어진 걸 확인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기차타고 가려고. 마침 너도 그런다기에 기다렸지.”
도일 씨가 픽업한다고 했지만 나 역시 기차타고 싶어서 시크하게 거절했다.
“그렇구나. 우리 같이 앉을 수 있을까요?”
“매표소 가보자. 평일이라 가능할 거야.”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를 이끈다.
이것은 다른 터치.
기차에 오르자 생각보다 승객이 없었다. 거의 텅텅 비었다. 굳이 좌석을 안 바꿔도 됐을 만큼.
난 배낭을 짐칸에 올리고 필립 형이랑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그는 짐이 별로 없다. 딱 일할 것만.
“형은 되게 간편하네요? 속옷 안 가져왔어요?”
“하루쯤이야 뒤집어 입음 돼.”
“어우, 양말은요?”
“뒤집어 신음 돼.”
“침낭은요?”
“도일이가 텐트 챙기겠지. 정 뭐하면 너꺼에 들어가고.”
“한 침낭에 둘이요?”
“군대에서 많이 그러잖아. 혼자 자면 추울 수도 있고. 도리어 내가 들어가 준 걸 고맙게 여길걸?”
“뭐 그렇다고 쳐요.”
쿨하시기는.
서서히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우린 미리 준비했던 맥주와 육포를 꺼내 먹었다. 대낮에 기차에서 맥주를 마시니 기분이 괜히 좋아진다.
“잠깐만요.”
난 아이패드를 꺼냈다. 알람소리가 들린 걸 보면 마침 마늘을 수확할 시간.
“룰 더 스카이 하네?”
“혹시 형도 하세요?”
난 마늘을 손끝으로 빠르게 누르며 물었다.
“나야 좀 됐지.”
그 역시 패드를 꺼내어 보여주는데, 헉! 62레벨! 난 이제 겨우 50레벨 됐는데 장난 아니다. 그는 섬을 별 모양으로 확장하여 모서리마다 용용이, 용순이, 교회, 병원, 동물원, 아 어떡해! 라푼젤이 금발을 늘어뜨리는 릴리의 집까지! 그것도 두 개씩이나!
“어? 이거 도일 씨 아니에요?”
릴리의 집에 도일 씨 사진이 팝업되어 있다.
“맞아, 지정석 달라고 하도 졸라서 해줬어. 너도 하나 해줘?”
“진짜요? 네, 해주세요! 저도 릴리의 집으로! 대신 제꺼 초콜릿샵은 형 지정석 해드릴게요.”
“그래, 그럼.”
그가 영문자 두 개를 별로 구매하여 내 이니셜 ‘IS’를 새겨준다. 나 또한 내 초콜릿샵에 그의 이니셜 ‘PL’을 콱콱 박는다. 그나저나 필립 형의 섬으로 들어가 도일 씨를 친구추가하고 그의 섬을 방문해보니 이거 뭐랄까, 왠지 미칠 것 같다.
“푸하하하하하하!!!”
결국 난 빵 터지고 말았다. 그 잘나고, 시니컬하고, 도도한 도일 씨의 섬이란 업그레이드가 전혀 안 된 초라한 성과 꽃집 두어 개, 풍차 두어 개, 밭떼기 네 개.
‘아 너무 웃겨. 이게 뭐야, 완전 초보잖아.’
난 다시 내 섬으로 돌아와 밭에 비를 내리고, 뭐를 더 지을까 숍을 둘러본다.
“인성아, 이 사진.”
필립 형이 내 회전관람차에 띄워진 우리 형 사진을 가리킨다.
“왜요?”
“역시 그러네. 이니셜도 철호야.”
맞아, ‘CH’. 그런데?
“형이 우리 형을 어떻게 알아요?”
난 무슨 영문인가 싶어 물었다.
“네가 아까 차에서 내릴 때 얼핏 운전석을 보니 흡사하다했거든. 역시 철호였어.”
“어떻게 아는데요?”
난 재차 물었다.
“너는 어떻게 알아?”
“나야 우리 형이니까……” 아니지, 필립 형이 우리 형을 아는 이상 나와 성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렇담 친형이라고 할 수 없다. “사촌형이에요.”
“사촌형?”
“그러니까, 이종사촌. 큰 이모 아들이에요. 철호 형은 이모 남편 성을 따서 ‘최’씨고, 나는 우리 엄마 남편 성을 따서 ‘인’씨고……”
아, 내 대답 망했다! 아빠 보고 엄마 남편이라니. 이렇게 질문이 질문으로 되돌아오면 사람 휘말리고 만다니까.
“그렇다는 얘기지?”
그가 눈을 치켜뜬다. 의심스럽다는 듯.
“그렇다니까요!” 나는 소리친다. 당당하다는 듯. “그리고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우리 형을 어떻게 아시는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들킬 것 같아.
“철호와 대학 동창이야. 같은 산업디자인 전공. 우리 꽤 친했어.”
“그래요?”
“응, 군대가기 전까지는. 제대하고 나서 좀 소원해졌지만.”
“왜요?”
“그냥 사소한 걸로. 그나저나 도일이도 철호 알 텐데?”
“헉! 어떻게요?”
“근데 너 진짜 철호가 사촌형 맞아?”
질문이 또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맞다니까요!”
난 소리치는 수밖에.
“글쎄, 내가 봤는데, 너 차에서 철호랑……”
순간 입술이 바짝 타면서 침이 꿀꺽 넘어간다.
“뽀뽀했던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장난치지 마세요! 어떻게 사촌형이랑 뽀뽀를 해요? 형은 사촌형이랑 뽀뽀해요? 사촌동생이랑 뽀뽀해요? 어리면 귀여워서 그렇다 쳐요. 다 컸는데 말도 안돼. 그렇게 잘 안 보이면 안경을 쓰시던가요.”
난 횡설수설 필립 형의 정신을 어떻게든 교란시켜본다.
“알았어,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휴우.”
나도 모르게 너무 티 나는 한숨을 내뱉었지만 그런대로 잘 넘어간 것 같다. 이거야 원, 간 떨려서.
그러고 보니 우리 형 졸업앨범에서 필립 형을 본 것 같다. 핸섬해서 눈에 띄었거든. 하지만 도일 씨는 보지 못했다. 틀림없다.
그렇담 도일 씨가 우리 형을 어떻게 안다는 걸까? 우리 형도 도일 씨를 알까?
그럴 수도 있겠다. 중간에 필립 형이 있으니 친구의 친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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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블감하고 가여 ^,^
씨티에서 봤어~! 다 올려버려~~ㅋㅋㅋㅋ
ㅎㅎ 그럼 현충일에 한번더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