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길거리마다 축제 기분이었다.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엔 휘황찬란한 불꽃이 춤을 추었고 골목마다 경쾌한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갈수록 연말의 분위기는 들떠가는 것 같았다. "남의 생일날 꽤 악받치게 노네." 내가 이렇게 한마디 했다. 다혜가 곱지 않게 흘겨보았다. "크리스마스가 왜 남의 생일이야?" "좌우간 그거 외제 아냐." "지금 찬이가 입고 있는 옷은 뭐야?" "그렇게 따지니까 외제군." "너무 흉내내지 마. 꼿꼿한 나무는 부러지지만 휘청휘청하면서도 꺽이지 않는 "넌 마치 배고픈 역사선생 같은 소릴 하고 있구나." "그런 소리 그만해. 좋은 날 만나서 좋은 소리 놔두고...... 쓸데없이." 다혜가 팔짱을 힘주어 꼈다. "어디 갈래?" "글쎄 말야. 서울은 너무 갈 곳이 없는 도시야. 도시 계획을 이렇게 해 놓고 발 뻗고 자는 사람들 보면 용해." 다혜가 투덜거렸다. 정말 서울이란 데가 젊은 사람들 기죽이게 만들어진 것은 확실했다. "그런 사람들 데려다가 지옥 설계하라고 하면 기찰 거야." 다혜가 웃었다. 사람들 표정은 모두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더러 한복 입은 입은 여자들 장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저 한복이 우리 전통복장인 줄 알고들 있겠지." "그럼 누구 거야?" 다혜가 저돌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도 한복을 꽤 즐겨 입는 여자 가운데 하나였다. "김춘추라고 알지." "말해 봐." "그 친구가 떼놈 끌어들여서 영토를 삼분의 이 이상이나 줄여 놓고 당나라에 여자 조공 바쳐가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우리나라 복장을 중국 것으로 고치게 해달라고 빌어 가지고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중국 옷을 입힌 거야." "혹시 꾸며대는 거 아냐?" 다혜가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본디 신라복장이란, 텔레비전 보면 그런 거였단 말야." "그렇게 유식한 거 믿어도 돼?" "식민지 사관에 몸 바치는, 왜색 칠한 학자가 아니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지." 다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서낭당을 미신이라고 파 없앤 사람들도 아직 청정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갑자기 왜 그래 ? " "나도 가끔은 썩 괜찮은 선생을 만난다구. 이러고 돌아다니니까 돌대가리라고 생각하면 안돼. 나도 한땐 무초 스님 밑에서 종아리 맞아가며 공부하던 놈야" "그래서, 서낭당이 어쨌다는 거야" 다혜가 장난기 서린 말투로 물었다. "사람들이 서낭당에다 절하고 빌고 하니까 행위가 나라를 좀 먹는다 어쩐다 으름장놔서 다 없애버렸잖아." "별걸 다 아네." "나도 별걸 다 아는 때가 있지. 그런데 사실은, 그 서낭당을 미신이라고 몰아 붙일 게 아녔어. 그건 단순한 헝겊 쪼가리나 걸고 돌멩이나 던지는 것이 아녔어. 그건 우리 백성들의 병기 창고였어." "병기 창고?" "그래, 병기 창고. 옛날에 방어무기는 두개골이었고 공격무기는 돌멩이밖에 더 있겠니?" "후훗, 말 된다." "우리 백성들이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 공격용 무기, 돌멩이를 모아 두었던 곳이 바로 서낭당이었어. 그러니 계가 이루어 마을을 지켜준 그곳을 좀 위했다고 해서 그걸 미신이라고 한다면 나라를 지켜 목숨을 바친 조상들은 왜 떠받드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글쎄 말야." "그나저나 다시 봐야겠어. 그런 걸 어떻게 알았지?" "엉터리 학자 말고 진짜 학자 한 사람이 내 선배 가운데에도 있어." "맨날 똥통학교라더니...... ." "왜놈 책 베껴먹지 않고 진짜로 공부하는 내 선배가 전국을 누비며 캐낸 거야. 서낭당의 위치, 마을과 서낭당의 지형적 관찰과 고증을 통해 캐낸 거야. 아무튼 서낭당을 없앤 친구들은 하늘 나라에 가서 상장 받을지 모르지만 우리 후손들에게 떡 치듯 두들겨 맞게 될 거야." "그만해.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야. 우리 어디 가서 한잔 꺾지." 다혜가 흥분해 하는 내 행동을 막기 위해서 나를 끌어 당겼다. 하나님, 내 말 틀렸습니까? 더러는 옳은 소리 한다는 거 아시죠. 내가 공부 못한 게 기쁘실 겁니다. 나 같은 독종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쳐봐요. 여럿 잡았을 겁니다. 우리는 인파 속에 휩쓸려 명동 쪽으로 걸었다. 통행금지가 없어진 밤은 언제고 젊은 사람들에겐 희망 같은 걸 던져주는지도 모른다. 그 짧은 4시간의 구속력을 젊은이들은 미워하고 있었다. "어디 갈까? 흔들면서 마시는 데 갈래?" 지났어. 고고홀에 가기엔 우린 늙었어." "그럼 어디 갈 거야?" "조금 걷다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명동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그리고 가는 거지 머." 다혜는 가고 싶은 곳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명동 바닥에 아직도 근사한 게 있다면 성모마리아 상이 있는 성당 같았다. 그 옆에서낭당의 돌무더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얼마나 젊은 사람들이 더 아름다운 추억을쌓아가고 있을까. 강가에 나가 예쁜 조약돌을 주워 들고와서 그곳에 던지며 두 사람이 끝까지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기도 할테고,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할아버지 사진사가 대를 "나를 위해 아무 스케줄도 짜지 않았단 말야?" 다혜가 물었다. "짰지." "뭔데." "가볍게 한잔 하고 호텔에 가서...... ." "저렇다니까. 생각한다는 게 저런 것뿐이라니까." "이거 왜 이래. 호텔에 가서 뜨거운 커피 마시고 콜택시를 불러 집 앞까지 얌전하게 모셔다 드린다 이거야." "내가 졌다." 다혜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취직했다고 사기쳐 놓고 내 입술만 더럽힌 죄를 어떻게 보상해 줄까 생각했어?" 다혜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끼득거리기만 했다. 입사한 뒤에 별로 일다운 일도 해보지 않은 채 사표를 썼기 때문이었다. "널 다 준다면 끝내주는 데 취직할 용의도 있지." "나 위해서 취직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는 잠깐 침묵했다. 서로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오늘 첫날밤 해 버릴까?" 내가 애원하듯 말했다. 다혜 얼굴이 금세 장난기가 서려졌다. "그렇게 내가 갖고 싶어?" "미치겠다." "다른 여자들한테도 그랬어?" "사람 잡고 있네. 이거 왜 이래." "좀 지나치다는 생각 안 들어? 만날 때마다 "난 네 마음을 모르겠다. 그까짓 거 뭐가 대단하다고. 지금이니까 그렇지 조금 지나봐. 그런 건 개도 안 물어간다구." "개가 물어가라고 팽개치기나 한대."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 넌 감정도 욕망도 호기심도 없니? 우린 어차피 죽어. 살아 있을 때 해보고 싶은 거 못해 보면 언제 하겠니. 넌 너무 지독한 거 같아. 난 널 강제로 갖긴 싫어. 네가 스스로 옷을 벗을 때까진 참을 거야." "결혼하면 어련히 안 벗고 배길까." "요새 첫날밤부터 악쓰며 사는 사람 어디 있니. 넌 어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너무하잖아." "걱정마. 결혼할 때 건강진단서 떼가지고 갈 테니까." 신체검사 받으면 될 걸 가지고, 점수 후하게 줄게." 다혜가 내 등짝을 후렸다. 사람들이 그런 우리 두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가서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하자." 우리는 복작거리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모든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쌍쌍이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모두 젊었다. 축제는 확실히 젊은이들 것이었다. 오늘밤은 어디를 가나 젊은이들 뿐이었다. "이제 낼모레면 우리 나이가 스물 셋이 돼.세월 참 빠르구나. 삼십을 눈 앞에 두고있으니 말야." "삼십? 그때 우린 어떻게 변해 있을까." "빤하지. 다혠 아이를 두엇 낳아 가지고 쭈글쭈글할 테고 나는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등뼈가 휘어지게 일하고 있겠지." "이거 참 애매한 나이야. 우릴 어른 취급할 테고 어른들은 우릴 아이들 취급할 테니 말야." 다혜 말이 맞았다. 우리 나이가 애매한 나이였다. 대개의 사내들은 군대에 가 있거나 군대에 가야 하는 나이였고, 대개의 여자들은 결혼문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는 나이였다. "동갑내기끼리 결혼하면 남자가 손해라던데. 넌 쉽게 늙을 거고 난 천천히 늙을 테니까 말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나보고 오늘밤에 들어가지 마라 이 말야?" "들어가. 이따가 성당 앞에 가서 기도하고 들어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도 다혜를 소갈머리 없는 계집애라면, 스물 세 살을 목전에 둔 보통 계집애라면, 지금쯤 현대과학의 힘을 빌어 네댓 번쯤은 어머니가 되려다 말았어야 할 계집애였다. 더구나 나처럼 만날 때마다 조르는 사내가 있으면 진작 마지못한 듯 끌려 다녔어야만 했다 화는 삭지 않았지만 다혜의 그런 고집이 싫지도 않았다. 그만큼 정숙하려는 그녀의 의지가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다혜는 데리고 놀 여자는 아니었다. 데리고 살기에는 가장 알맞는 여자일 수 있었다. 졸업식이 끝난 후에 나는 어머니에게 다혜를 소개할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국민학교 교장선생의 딸이란 사실과 간호원 출신이란 사실만 가지고도 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당에게 곧잘 기가 죽는 면이 있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심야미사가 시작된 뒤였다. "우리 저기 가서 기도해. 서로를 위해서 말야." 다혜가 내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성모상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다혜는 자꾸 나를 끌어 당겼다. 되도록 앞쪽으로 가서 기도를 할 모양이었다. "여기서 대충 하자니까 그래."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왕이면 앞으로 가지 왜 이래." "너야 하나님하고 친하니까 그렇지만 나야 어디." "죄받을 소리만 하구 있네." 우리는 앞 쪽으로 나갔다. 성모마리아가불꽃 속에서 성모마리아는 엷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찬이, 저기 봐. 명식씨 아냐?" 다혜가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명식이가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한 쪽 발이 짧아서 약간 기운 자세였지만 녀석의 얼굴은 진지해 보였다. "저 녀석 공부하라고 올려 보냈더니 여기 와 있군." 명식이는 지금쯤 암자에 있어야 할 녀석이었다. 설악산에 다녀온 뒤에 바로 짐 싸가지고 떠난 녀석이었다. 한두 번 내려왔었지만 볼일을 보면 후다닥 짐을 챙기던 녀석이 지금 성모마리아 앞에 기도를 하고 있었다. 다혜가 내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녀석은 13평짜리 아파트를 끝내 거절했다. 춘삼이 형이 약속대로 아파트를 사줬지만 녀석은 한사코 그걸 거부했다. 모든 걸 사법고시에 패스한 뒤로 미뤘다. 합격하지 않는 한 산에서 내려오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떠났었다. 우리가 뒤로 물러나 명식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 자리에서 떠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녀석의 뒷덜미를 잡았다. 명식이는 졸린 듯한 눈으로 뒤돌아 보고 씨익 웃었다. "이게 정신 못 차리고...... ."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명식이는 뒤뚱거리며 돌아섰다. 녀석의 손에 찬송가 책이 들려 있었다. "싫다는 이 저잣거리에서 있을 게 뭐야." "다혜씨도 오셨군요." 명식이는 다혜에게 말을 건 뒤에 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이거 밤이다. 다혜씨랑 까 먹어라. 내가 산에서 따온 거다." "임마, 어딜 가려고 서둘러. 갈 데나 있어?" "하늘 아래가 다 내 집이다. 어디 가면 잘 데가 없겠니." "너 뭐 먹을 거 있다고 내려왔어." 내가 채근하듯 물었다. "서유리라고 알지? 설악산에서 만난 애. 오늘 약속했거든. "서유리하고 약속? 이거 미치고 펄쩍 뛰게 만드네." 설악산에서 명식이의 총각딱지를 떼어준 천사 같은 여자 이름이었다. 지금쯤은 춘삼이 형이 좋은 자리를 내주어서 그런 고생은 하지 않을 여자였다. "그때 한 약속이지. 이번 크리스마스에 여기 와서 서로 기도해 주기로 약속했거든. 걔 신자였거든." "그래서 내려온 거냐?"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명식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났냐?" 서로 얼굴만 봤어. 내 옆에서 기도하다가 이걸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갔어." 명식이는 묵주를 내밀었다. "한마디 말도 안했단 말야." "애초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난 초저녁부터 올 줄 알았지. 걔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내가 넣어준 밤을 반 뚝 깨물어서 반을 내 입에 넣어주고 갔어. 우린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그러기로 약속돼 있어." "독하다, 독해." 나는 안 가겠다고 버티는 명식이를 끌고 성당에서 내려왔다. 다혜가 군밤을 사들고 서 있었다. "나 잠깐 봐." 나는 명식이를 세워놓고 다혜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서유리가 누구야?" "나중에 다 얘기해 줄게. 우선 저 녀석 저녁이나 먹여야 돼. 초저녁부터 저러고 있었대." "알아. 그 여자가 이걸 주고 갔어." 편지 한장이 들어 있었다. 현금은 명식이를 위해 써 달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난 여름에 유리에게 주었던 수고비와 같은 액수였다. "이 땅은 아직도 믿을 수 있어.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운 땅이야." 내가 이렇게 말했다. 다혜가 영문을 모른 채 따라왔다. "갑자기 왜 이래. 뭘 잘못 먹은 거 아냐?" "이따가 얘기해 줄게. 그런 일이 있어. 저 녀석 저녁 먹이고 푹 재워줘야 돼." "나도 알아. 유리라는 그 여자하고 무슨 일이 있었지? 설악산 가서 재미 실컷 보고 딴소리 하고 있어." "그게 아냐. 아름다운 일이란 것만 알아." 우리는 을지로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절룩거리며 걷는 명식이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명식이 옆에 앉아서 설악산에서 벌어졌던 명식이와 서유리라고 하는 여자 얘기를 했다. 물론 명식이가 알고 있는 대로만 얘기했다. "명식씨는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다혜가 이렇게 말했다. 밥을 우겨넣던 녀석이 크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난 계속 행복할 겁니다." 우리는 시끄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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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1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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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안당
08.04.18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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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브밤에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소설 잘 읽었습니다
미혜
08.04.18 08:01
감사히 잘봤읍니다~!
새처럼
12.08.31 12:27
좋은글 감사 합니다,,^^^
그리운남촌
14.08.26 14:20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0 10:51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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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이브밤에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소설 잘 읽었습니다
감사히 잘봤읍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