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춘화夫春花 김옥연金玉蓮, 부덕량夫德良】 "제주해녀 항쟁, 맨몸으로 수탈에 맞서다."
제주해녀항쟁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권익투쟁이자, 일제 수탈에 저항한 여성들이 주도한 최대 항일운동”(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지만,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32년 1월12일 제주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에는 평소보다 많은 주민이 모여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이날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파는 제주도해녀어업조합(조합) 지정판매일이었다. 마침 제주에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순시에 나선 조합장 겸 제주도사(현재 도지사) 다구치 데이키가 세화리를 지나갈 예정이었다. 며칠 전부터 구좌와 정의(현 성산읍) 2개 면 해녀들은 조합의 착취에 맞서 대규모 시위와 도사 면담을 계획했다.
1931년 12월 하도리 등지 해녀 30여명이 이 문제 해결을 촉구하러 배를 타고 조합본부(제주읍)로 가던 중 배가 부서질 듯 파도가 거세지며 행원리 부근에서 되돌아왔다. 이어 1월7일 해녀 100여명이 집단행동에 나서자 면장이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며 무마시켰다. 하지만 말뿐이었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해녀들은 12일 대규모 항의시위를 조직했다. 김 지사는 “평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잡혀갈 우려가 있어 오일장 날을 이용하자고 계획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11시30분께 세화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 구좌면 하도·세화·종달·연평리, 정의면 오조·시흥리 해녀 수백명이 모여 ‘일본인 악덕상인 파면’ 등의 요구조건을 외치며 세화 오일장을 향해 행진했다. 장터에 다다른 해녀들은 마을별로 한명씩 나서 조합을 비판하고 “죽음으로 항쟁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도사가 탄 자동차가 세화리에 나타나자 성난 해녀들은 주재소 앞에서 차를 포위했다. 놀란 경찰은 칼을 휘두르며 길을 내려고 했고, 이에 맞서 해녀들은 “우리들의 진정한 요구에 칼로써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한다”고 외치며 물러서지 않았다.
김 지사는 “주재소 앞에서 도사 차를 막았는데 그냥 가려고 했다. 내가 차 위에 올라섰고 부춘화는 주재소 담 위에 올라서서 12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해녀와 군중에게 시위하는 이유를 연설했다. 도사가 주재소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걸 해녀들이 끌고 들어갔다”고 말했다.
해녀들은 △특정 상인을 지정해 해산물을 파는 ‘지정판매’ 절대 반대 △미성년자와 40살 이상 해녀들의 조합비 면제 △일본인 악덕상인 파면 △조합재정 공개 등을 요구했다. 해녀들에 의해 주재소로 끌려가다시피 한 다구치는 ‘닷새 안에 요구대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김 지사는 “이궁이마라는 일본인 상인이 지정판매인이었다. 당시는 건복(마른 전복)만 받았다. 비 오는 날에는 전복이 평소보다 2~3배 더 잡히는데 받지 않았다. 감태(해초)도 직접 바다에서 베어낸 것만 받고, 파도에 올라온 것은 질이 떨어진다고 받지 않았다. 이전에는 받아주다가 안 받아주자, 그게 발단이 돼 해녀사건이 일어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도지사가 돌아간 뒤 약속과 달리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답이 없었다. 대신 일제 경찰은 구좌면 일대에 경계망을 펴면서 사건에 관계된 청년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해녀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화에서 모인 지 12일 뒤인 24일, 해녀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호미와 비창 등 물질 도구가 들어 있는 구덕(대바구니)을 지고 장에 가는 척 모였다. 김 지사는 “우리 해녀들과 장꾼들, 마을 사람 등 400~500명이 됐다. 세화로 가는 길이 꽉 찼다. 해녀들이 4명씩 팔짱을 끼고 하도리에서 서쪽(세화)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김 지사는 일어서면 얼굴이 알려질 우려가 있어 행렬 속에 ‘조침’(엉거주춤)앉아 12개 요구조건을 알렸다. 당시 해녀 고이생은 “부춘화와 김옥련이 해녀항쟁 필요성을 연설했고, 우리 스스로 집합했다고 말하도록 종용했다”고 말했다.
트럭에 나눠 탄 경찰들이 하늘로 총을 쏘며 달려왔다. 김 지사는 “빨간 모자에 검은 띠를 두른 경찰들이 착검한 총을 보고 해녀들이 무서워서 흩어졌다. 내가 ‘우리끼리 꽉 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지 때리려는 게 아닙니다’고 했지만 흩어졌다”고 말했다.
일제 경찰은 해녀들이 입은 흰 저고리 등에 마구잡이로 붉은 도장을 찍었다. 김 지사는 “흩어진 해녀들 일부는 세화리 아는 집에 숨기도 했지만, 경찰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도장 찍힌 해녀들을 연행했는데 100여명 정도 됐다”고 회고했다. 주도자인 김옥련과 부춘화, 부덕량 지사도 이때 연행됐다. 일제 경찰도 해녀들과 치열한 실랑이 끝에 상처를 입거나 옷이 찢기기도 했다.
시위가 계속되자 24일 밤 전남 목포에서 무장경찰 40여명이 급파됐다. 당시 <조선일보>(1932년 1월24일치)는 “제주읍 동문 외에는 경관을 배치해 통행인 주소, 성명을 조사하므로 일반은 통행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 경계는 전 제주도적으로 삼엄하여 마치 계엄령이 내린 듯하다”며 살벌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틀 뒤인 26일에는 경찰이 우도에 들어가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된 청년 11명을 검거해 호송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우도 해녀 800여명이 저지하고 나서자 공포 10발을 발사했고, 27일에는 종달리에서 해녀 100여명이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녀들의 시위에 놀란 일제는 지정상인 배제 등 해녀들의 요구 사항 대부분을 받아들였다.
시위에 앞장섰던 김 지사와 부춘화, 부덕량 등 3명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자, 일본 경찰에 연행된 해녀 100여명을 2월1일 석방했다. 하지만 주도자 3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될 때까지 6개월 남짓 미결수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고문은 말도 못하게 당했지요. 네모난 도장을 손가락 사이에 놓고 누르면 손가락에 홈이 파져버려요. 귀밑 급소를 누르면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쇠좆매(채찍의 일종)로 옷을 벗겨서 등을 때리고, 장작 위에 무릎을 꿇리게 하고 허벅지에 올라타서 밟아요. 그러면 몸이 망가져요.”
김 지사는 물고문이 가장 심했다고 말했다. 부춘화·부덕량 지사도 고문을 받았다. 김 지사는 “학교 걸상 같은 데 눕혀 묶어놓고 머리채를 잡아 코에 물을 길어 넣었다”며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을 따오는 것만큼만 숨을 참으면 이겨내겠지 생각했는데, 코로 물을 들이부어서 기절했다”고 전했다.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된 청년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일제는 해녀들과 투쟁방식 등을 논의했던 야학 교사와 청년 등을 상대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들어가 오문규, 김순종, 강관순 등 40여명을 검거했다. 또 그 배후에 사회주의자들이 개입돼 있다며 해녀항쟁을 계기로 당시 제주지역 항일운동 주도세력 검거에 집중했다. 제주 출신들이 많이 살던 일본 오사카에서도 해녀항쟁을 지원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려던 김인태 등 48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김 지사는 “선생님들이 수용된 옆방에서 나오는 신음소리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그분들이 고문당하고 방에 들어오면, 경찰이 눕지도 못하도록 가슴을 줄에 묶어 나무기둥에 매달아 놓았다”고 회고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항쟁 3년 뒤 <조선일보>(1935년 8월6일치) 기고문에서 “도로를 차단해 최후까지 항쟁한 사건”이라며 “여성들이 정의를 위하고, 자기네 이권을 위하여 싸운 기억은 아직도 없다. 철완 같은 두팔로 그들은 바다와 싸워 자기네 생명선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명일의 대성을 위하여 정의를 지킴에는 목숨도 헤아리지 않는다”고 찬탄했다. “일을 당할 때는 일치단결하는 단결성이 있다.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사리지 않고 시(是)와 비(非)에 대한 관념이 굳세고, 이에 대하여 한번 ‘시’라고 인정하면 대거 매진하는 의협심이 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제주해녀항쟁은 일제와 그 대리인이었던 조합의 횡포에 저항했던 생존권 수호투쟁이자 일제 수탈정책에 저항했던 항일운동이었다. 그 배경에는 해녀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은 청년운동가들의 활동이 있었고, 이들은 해녀항쟁을 항일투쟁으로 끌어올렸다. 김 지사는 “부모보다 선생님들과 더 친했다. 선생님들이 우리가 배워야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위를 벌일 때도 협의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