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綠’ 책 펴낸 국악인 박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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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音)는 틀이 없다. 틀에 갇힌 소리는 이미 죽은 것이다. 소리는 대중 속으로 울려 퍼져나갈 때 비로소 존재 가치를 지닌다. 소리에 생명 불어넣기 40년. 국악인이자 지휘자로, 작곡가로 항상 새로운 길을 걸어온 박범훈(56·중앙대 부총장). 그가 최근 소리인생 40년을 책으로 펴냈다. ‘소리 연(緣)’이란 제목이, ‘내가 만난 소리·내가 만든 소리·나를 만든 소리’란 부제가 뜻하듯 소리의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의 얘기를 담았다. 그를 만나러 간 흑석동 중앙대 캠퍼스에는 단풍이 절정을 이뤄 가을바람 속에서 합창을 하고 있었다.
“벌써 40년이 됐나.” 독백하듯 말문을 연 그는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평탄하지 않았다고 했다. 1960년대 초 그가 처음 음악의 길을 걸었을 때 그 길은 험난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음악을 한다면 천대를 받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한(恨)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한은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 에너지가 되었다. 그 자신도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뭔가가 나를 이끌었다’고 할 정도로 강했다. 그 동력은 바로 소리에 대한 애정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디서든 소리만 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소리를 찾아나섰어요. 초등학교땐 음악시간 처음 들어본 풍금소리에 반해 밤마다 교무실을 무단출입하기도 했죠.”
고향인 경기 양평의 양평중학교 밴드부 트럼펫 주자였던 그는 평생 나팔과 살기로 작정했다. 당시 미제 셀마 트럼펫 한개의 값은 무려 논 세마지기와 맞먹었다. 그는 그 비싼 트럼펫을 해가 질 때까지 불었고 심지어 잘 때도 꼭 껴안고 잤다.
-남사당패 매료 국악의 길로-
그런 그가 어느날 마을을 찾은 남사당패에 관심이 쏠렸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남운용 선생과의 만남은 또 다른 음악과 인연을 맺어주었다. 남운용 선생은 나팔을 부는 그를 보고 “그것 백날 해봤자 ‘딴따라’밖에 안되니 서울의 국악학교에 가라”고 했다.
그는 서울 남산공원에 있던 한국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박범훈은 여기서 나이어린 후배 한명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한국 사물놀이의 대표주자 김덕수다.
중앙대 예술대학 음악과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는 일본 도쿄 무사시노 음악대학으로 유학, 8년간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거치며 작곡과 이론 공부를 했다. 일본 유학은 곧 일본 음악집단 대표직을 맡고 있던 작곡가 미키 미노루와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훗날 ‘오케스트라 아시아(아시아민족악단)’의 모태가 되었다.
불교 음악과의 인연엔 도올 김용옥이 깊게 걸려 있었다.
“철학을 좋아하는 악서고회(樂書孤懷) 모임에서 자명스님에게 조용한 절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한달이 넘도록 절을 찾지 못하자 도올이 성화를 부렸지요. 중이 절 하나 찾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자명스님은 지리산 쌍계사의 말사 국사암을 소개해줬다. 쌍계사는 진감국사가 830년 중국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워와 최초로 범패를 가르친 불교음악의 본사였다. 박범훈은 당시 만난 국사암 주지스님 석상훈(釋常勳)과 20년 넘게 형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로 인해 박범훈은 달마의 소리를 만나게 된다.
그는 1960년대 우리나라 무용극의 대부로 불렸던 무용가 송범을 만나는 인연으로 국립극장 개관기념 무용극 ‘별의 전설’을 작곡하기도 했다. 연출가 손진책과의 인연으로 10년에 걸쳐 매년 한편씩 마당놀이를 작곡했다.
박범훈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의 연(緣)이라는 걸 많이 느낀다”며 “만남에 의한 인연인지, 인연에 의한 만남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인연과 만남이 나의 음악을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국악을 대중의 소리로 되살려박범훈 소리의 철학이 뭐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뭇소리’라고 했다. “제 호가 범성(凡聲)이지 않습니까. 바로 대중의 소리죠.” 대중과 함께 하는 음악. 그것이 박범훈류의 음악이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박제(剝製)된 국악을 생활 속에서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답습을 피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다보니 그가 걸어온 길은 늘 처음 걷는 길이었다.
박범훈은 국악기와 일본악기인 샤미센의 합주를 위한 곡을 만들기도 했으며, 92년 한·중수교 동아시아 민족악기를 위한 협주곡의 밤’ 행사땐 중국의 얼후와 국악기의 합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93년엔 한·중·일 3국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역사적인 아시아민족악단 창단식을 가졌다. 박범훈은 벽이 없다. 그는 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것이 박범훈 음악의 특징이다. 송창식, 김수철, 한영애 등 인기 가수들을 끌어들여 국악관현악에 접목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도올이 장문의 편지와 함께 보낸 시에 곡을 붙여 가수 송창식에게 주기도 했다.
그의 전방위적인 창작열은 무용, 관현악, 독주곡, 중주, 교성곡, 오페라, 마당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곡한 곡도 수백곡에 이른다. 최근 ‘박범훈의 음악세계’를 CD 40여장에 결집, 선을 보였다.
-장르 넘나들며 활발한 작곡활동-
창작뿐 아니라 교육행정에서도 그에게는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국악유치원’을 설립한 것을 비롯, 10여년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국악중학교를 신설했다. 국악대학과 국악교육대학원도 건국이래 처음으로 설립했다.
79년 민속악회 ‘시나위’ 설립, 87년 중앙국악관현악단 창단, 94년 한·중·일 아시아민족악단 창단, 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런 작업들을 두고 ‘우리 소리의 종자 키우기’라고 했다.
그는 교육행정이나 악단운영 모두 조화를 이루고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 하모니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역시 지휘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막식의 지휘를 맡았으며 2002년 월드컵때도 우리 음악을 세계에 알렸다. 열심히 뛴 만큼 상복도 좀 있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 석류장, 문화예술인상, 작곡상을 비롯해 KBS 국악대상, 한국무용음악 작곡상 등을 받았으니.
박범훈은 오는 11일 오후 6시 서울 센트럴시티 6층 밀레니엄홀에서 ‘소리연(緣) 40주년 기념의 밤’ 행사를 갖는다. 제자들이 마련한 무대다. 한상일 동국대 교수, 김재영 중앙대 교수, 이용탁 국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등 그의 제자들이 지휘봉을 잡는다. 또 국악인 김성녀·김영임·김덕수씨, 그리고 소리꾼 장사익씨도 무대에 오른다. 그의 무대를 축하하기 위해 중국 전통악기 얼후 연주자인 쑹페이(宋飛)도 얼후협주곡을 선보인다.
늘 새로운 길을 걸어온 그는 이 공연 이후 또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동형 인물팀장 s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