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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 겨울비가 숨죽여 내린다. 서울 간 효선이 잘 돌아오고 있는지 우산 쓰고 나가서 공중전화를 걸어보지만 두 번 다 전원이 꺼져 있단다. 나간 김에 점심으로 라면 한 그릇 시켜 먹는다. 집에 있는 것만 먹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 저녁 일곱 시, 효선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지만 감기가 잔뜩 걸린 상태다. 이럴 줄 알았다. 간호사인 주미 엄마가 연락을 받고 약과 주사를 가지고 와서는 펄펄 끓는 몸에 응급으로 처치해주고 돌아간다. (2018. 1. 16)
⎈ 어제 약 먹고 주사 맞은 게 효과가 있나보다. 효선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며칠 연습을 못했다면서 트라베르소를 불고 있다. 지저분한 꿈을 꾸다가 일어나보니 열시 반. 소리샘이 두 아들과 함께 빵을 사와서 늦은 아침을 먹는다. 조금 뒤에 구례 주차장에 갖다 놓은 차를 가지러 소리샘과 함께 구례로 간다. 피아골 입구 국수집에서 그 집의 ‘유일한 메뉴’라는 잔치국수를 먹는다. 국수집 옆에 수령 3백 년쯤 되었다는 팽나무가 푸른 이끼를 몸에 두르고 서 있다. 한참을 올려다본다. 이 나무 아래로 수없이 걸었을 조선시대 장꾼들, 육이오 때 빨치산과 국방군들, 혹은 추운 겨울의 길 잃은 나그네들이 어우러진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오늘 그게 궁금한 이 물건은 언제 어디로 사라지려나? 바람이 분다. 오는 길에 혜미원 들러 진맥하고 약을 얻어온다. 모두가 고맙다. 무조건 고맙다. (2018. 1. 17)
⎈ 잠에서 깨어났지만 몸이 일어나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꿈속에서 헤매다보니 11시를 훌쩍 넘겼다. 아침 겸 점심을 먹는데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종일 침울. (2018. 1. 18)
⎈ 오늘 리처드 로어 신부의 ‘출판되지 않은 설교노트’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 “밭에 밀과 가라지가 자란다. 우리는 추수 때까지 그것들이 함께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당신은 결코 그것들을 뽑아버릴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거기 있음을 의심하지 마라. 진정한 ‘고해성사’는 죄를 도말하거나 면해주는 성사가 아니다. 오히려 밭에 있는 망할 놈의 가라지를 ‘용서’하고 그것들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가 과연 이렇게 설교했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자기 이름의 책에 편집자가 이 글을 싣도록 허락했으니 설교한 거나 마찬가지다. 현직 신부로서 용감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왕 말을 하려면 짧더라도 모름지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괜히 기분 좋다.
배움지기들이 히말라야 차마고도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고맙다. (2018. 1. 19)
⎈ 기력이 많이 쇠한 걸 느끼겠다. 자주 자리에 눕게 된다. 그래도 좋은 글을 옮기는 작업이 몸에 생기를 준다.
나는 왜 꽃,
사람-꽃이 아닌가요?
힘 아닌 부드러움으로
나를, 내 영혼을 축복하소서.
말 대신 웃음으로
세상에 빛을 가져다주는,
난초 같은 머릿결로
사랑을, 행운을 줄 수 있는,
방들을 건너는 발걸음이
피아노 건반 위의 손가락 같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름,
너, 부드러움이여, 내 하느님 형상이여! (아브라함 헤셸)
“힘 아닌 부드러움으로… 말 대신 웃음으로… 방들을 건너는 발걸음이 피아노 건반 위의 손가락 같은…” 절창이다!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 다녀옴. 토요명상 참석. (2018. 1. 20)
⎈ 효선이 어제부터 두통을 호소. 급한 마음에 기도하면서 머리에 사혈(瀉血)을 한다. 폴 틸리히 번역. 그의 설교 ‘영원한 지금’의 마지막 구절.
―“나는 처음이자 끝이다.” 이것은 시간의 사슬에 묶여, 끝을 향해 살면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위에 설 현재가 필요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시간의 모든 형태들이 저마다 특별한 신비를 지니고, 저마다 특별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것들 모두가 우리를 궁극의 질문으로 몰아간다. 그 모든 질문에 답은 오직 하나, ‘영원이신 분,’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 있고 미래에 있을 분, 처음이자 끝이신 그분이다. 그분이 지나간 것에 대한 용서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이 장차 올 것에 대한 용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이 당신의 영원한 현존 안에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바울로의 고백은, 마침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하루를 꽉 채워 살게 되었다는, 바야흐로 순간을 사는 순간의 사람이 되었다는, 가슴 저린 고백이다. 한님,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용화사 예배. 반디, 바람빛, 보리밥, 신난다, 두더지 그리고 부산에서 온 두 식구 동참. 시행착오를 겁내지 말자, 지금 하려는 일의 결과를 계산하지 말고 과연 이 일을 내가 하고 싶은 건지, 과연 이게 하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인지, 이 일로 보람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이런 걸 보고 결정하자는 얘기. “그렇게 하면 망한다.”는 말에 걸리지 말고, 그래도 좋다고, 망할 때 망하더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이러는 사람들이 숨 쉬는 세상… (2018. 1. 21)
⎈ 나란히, 바람결, 두 사람이 새해 인사차 다녀간다. 나란히는 이번 주에 아이들과 인도여행을 떠난다고… 효선은 아침 목욕 다녀오더니 남아있던 두통이 떠났다며 명랑한 얼굴로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자기도 중앙아시아의 ‘소리’를 추적하며 실크로드를 한 번 걷고 싶다고… 하늘이 기회 주시면 다녀오시라 하니 함께 가잔다. 지금 나한테는 거기가 여기라 괜한 기운 쓰고 싶지 않다고, 웃음으로 대꾸하다. (2018. 1. 22)
⎈ 아침, 거실에서 불경(佛經)을 읽는다. 유명한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
목부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밥을 지었고 암소 젖을 짰다. 나는 마히 강변에서 가까운 이웃들과 어울려 산다. 내 집 지붕은 새지 않고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세존이 말씀하셨다, “나는 분노에서 자유롭고 고집에서 자유롭다. 나는 지금 마히 강변에 하룻밤 머무는 중이다. 내 집은 지붕이 없고 욕망의 불씨는 꺼졌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목부 다니야가 말했다, “내게는 성가시게 구는 등에가 없다. 풀이 우거진 들판에 어슬렁거리는 암소들은 비를 맞아도 끄떡없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세존이 이르셨다, “나는 뗏목 한 장 타고서 급한 물살 헤치며 건너편 언덕 니르바나에 이르렀다. 이제 뗏목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목부 다니야가 말했다, “내 아내는 고분고분 순종하고 부정(不貞)하지 않다. 오랜 세월 나와 살면서 살림을 맡아 하는데 나쁜 말은 한 마디도 내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세존이 말씀하셨다, “내 마음은 고분고분 순종하고 속세의 모든 것을 떠났다. 오랜 세월 계속된 수련으로 나쁜 생각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목부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내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산다. 내 자식들도 나 못지않게 건강하다. 그들 입에서 나쁜 말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세존이 말씀하셨다, “나는 누구의 종도 아니다. 내가 얻은 것을 가지고서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데 아무한테도 굽실거리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아,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하늘이 비를 내려도 괜찮은 건 같은데, 어째서 그런지는 하늘땅만큼 다르다. 목부 다니야에게는 있는 것들(지붕이 새지 않는 집, 젖을 내는 암소, 가까운 이웃, 고분고분 순종하는 정숙한 아내, 건강한 자녀, 직업)과 없는 것(성가시게 구는 등에)이 있지만, 세존에게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자기 말고 천상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다니야는 하늘이 비를 내려도 괜찮을 이유들이 많지만, 그래서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 어그러져도 하늘이 비를 내리면 큰일이지만, 세존은 하늘이 비를 내리면 안 될 이유가 도무지 없다. 아하! 그렇구나! 이거로구나! 문득, 어깨가 가벼워진다. …미안하지만, 붓다는, 깨어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한 사람’이다.
연원(然園) 화백 내외와 우리 내외가 박소정 선생이 대접하는 저녁을 함께 먹다가 요즘 시끄러운 가상화폐라는 게 뭐냐고 물었다. 연원이 무슨 말로 설명하는데,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떤 회사에서 가짜 화폐를 만들어 그걸 진짜 화폐로 사게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에 투자를 하는 거냐고 물으니 뭐 그 비슷한 거란다. 허, 참. 진짜를 팔아 가짜를 사다니! 왜들 그러는 거냐고 물으니 그게 다 돈 좀 쉽게 벌어보자는 것 아니겠냐고 되묻는다. 옳거니, 그렇겠다! 하지만 스승께서는 사람이 천하를 얻고 자기를 잃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하셨는데, 사람이 돈을 번답시고 자기를 망치는 줄 모르다니! 인간의 어리석음이 참으로 안쓰럽구나. 하긴 어찌 요즘의 가상화폐만 그렇겠는가? 인간의 삶 자체가 진짜를 팔아 가짜를 사는 요지경인데… 바야흐로 인류가 젊은 세대를 앞세워 물질이 어떤 건지, 그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깨달아 알아가는 과정으로 들어선 걸까? (2018. 1. 23)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서 ‘권정생문화해설사’를 양성하는데 수강생들에게 ‘권정생의 종교관’에 대하여 말해보란다. 순천―대구서부정류장―대구북부정류장―안동버스터미널―안동시내 경상북도 문화콘텐츠 진흥원(구, 안동가톨릭문화회관)까지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며 갔다. 정생이형이 살았을 때는 자주 다니던 길인데 많이 낯설다. 우리가 누구의 종교관을 안다는 게 자신한테 무슨 큰 영향을 미치겠냐고, 난 그런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평소에 관심이 없었다고, 지금도 없다고, 뭐 이런 말로 시작해서 횡설수설 떠들다보니 두 시간 가까이 흘러갔다. 으스스 춥던 몸에서 열이 난다. 잠자리가 일직면에 있는 ‘권정생 동화나라’에 마련되어 있단다.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가게 되는구나. 왜 사람들은 자기 과거든 남의 과거든 지나간 날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러느라고 정작 착실해야 할 오늘을 건성으로 보내는 걸까? 물론 과거를 기억하고 거기서 무엇을 챙기는 게 자기의 오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러는 거라면, 백번이라도 박수쳐줄 일이지만… 옛날 교실로 사용했을 널찍한 방에 홀로 누워 잠든다. 괜히 가슴이 눅눅하고 서늘하다. (2018. 1. 24)
⎈ 안동 버스터미널까지는 ‘권정생 동화나라’ 최 관장이 태워주었고 대구 가는 버스에서, 순천까지 주머니 속 남은 돈으로 갈 수 있을까? 있는 돈 모두 꺼내놓고 계산해본다. 어제처럼 버스와 택시를 타면 6백 원이 모자란다. 하지만 대구북부정류장에서 서부정류장까지 택시를 타지 않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충분하다. 옳거니, 시내버스를 타자! 봐라, 근사하다. 북부터미널에서 726번 시내버스를 타면 서부터미널로 가지 않느냐? 5분 기다려 시내버스를 탄다. 그런데 아무래도 속도가 택시보다 느리다. 서부터미널에 도착하여 매표구로 달려가니, 순천행은 오후 2시 반에 있는데 드릴까요? 한다. 지금 몇 시? 시계를 보니 11시 55분. 아주 한참 기다려야 한다.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며 매표원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순천 버스 방금 떠났어요, 한다. 시간표를 본다. 순천행 11시 50분. 아하, 5분 늦었구나. 택시를 탔으면 제 시간에 왔을까? 왔으면 뭐해? 버스 값 6백 원이 모자라는데. 어디 돌아가는 길 없을까요? 물으니 매표원이 컴퓨터를 두드려보다가 아, 삼십분만 기다리면 진주 가는 버스가 있네요, 한다. 효선에게 전화로 사정을 말하니 진주까지 오란다, 거기로 마중 나가겠다고… 진주행 버스에 오르니 절로 웃음이 난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을, 사전에 무슨 계산을 그다지도 번잡하게 했더란 말인가? 순간을 산다는 게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구나. 진주에 도착하니 효선이 소리샘과 함께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덕분에 유명한 진주냉면 한 그릇 맛보고 편안하게 귀가. 아무튼지, 대구에서 시내버스를 탄 것만큼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니, 택시를 탔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진주행 버스 값이 순천보다 적어서 진주까지는 무난히 올 수 있고 진주에서 집까지 데려갈 사람도 대기하고 있으니까. …내일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다만 내가 미리 모를 뿐. 그러니 걱정할 이유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2018. 1. 25)
⎈ 새벽에 아브라함 헤셸의 시 한 편 옮김. 거기, 이런 구절이 있다.
………
나뭇가지들은 나를 껴안고 싶다는 듯,
팔을 벋으며 속삭이고…
들판은 강물처럼 내게로 달려와 입을 맞춘다.
아, 모든 나뭇잎 위로 이슬처럼 덮이는
내 가슴의 숨결이여!
나는 다만 창공에 고요한 한 줄기 빛살―
말과 숨이 목구멍에 달라붙어 있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나는 모든 것이다.
효선이 광주 프랑스문화원을 다녀오는 동안 긴 낮잠 속으로 들어간다. 꿈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맨 아래층에 있는 내게로 2, 3, 4, 5층에 있는 물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층들이 칸칸으로 막혀 있는데도 그것들 모두 아무것도 아닌 허공인 양. …하지만 실은 그게 옳지 않은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공(空) 아닌가? 온갖 보이는 것들을 이루고 그것들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그것이 실재 아닌가?
내가 나무를 본다.
나무를 보는 나도 아니고,
내가 보는 나무도 아니고,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봄― 이것이 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는 나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너도 아니고,
둘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 이것이 너다.
오후 늦게 범강, 향아, 두더지 셋이 감기 뒤끝 안부가 궁금하다며 찾아왔다. 효선이 광주에서 오는 길로 곧장 전복-비빔밥을 만들어 저녁식사로 함께 나눈다. (2018. 1. 26)
⎈ 연주(하늘에)가 결혼하는데 주례를 부탁받아 곡성 웨딩홀 다녀옴. 젊은 부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하. 서로 마주서지 말고 나란히 서서 손을 잡으라고 말해주다. (2018. 1. 27)
⎈ 용화사 예배. 두더지, 반디, 소리샘, 목강, 신난다, 바람빛이 요한복음 17장, 예수의 마지막 기도를 읽고 소감을 나눔. 함께 말씀 읽으며 생각을 나누는 것 자체로 성스럽고 아름다운 예배였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가상화폐에 대한 반디의 설명을 듣는데, 무슨 메시지처럼, 말씀 한 마디 머리를 스친다. “드디어 마야(maya)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바야흐로, 선배들이 말하는 ‘영(靈)의 신세기’가 밝아오는 것인가?
세속과 삶은 꿈결 같은 것,
인생은 한바탕 꿈.
내가 목숨과 세속에 스스로 묶여
영원한 보물을 버렸구나.
아버지,
마야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지혜의 보석을 훔쳐갔지요.
나방은 비록 눈이 있어도,
어리석구나,
불을 보지 못하여 타죽고 만다.
눈먼 애욕에 빠져
죽음의 올가미를 잊고
황금과 여자들 뒤만 쫓아다닌다.
조심 또 조심,
멸망할 것들을 버리고 헤엄쳐 건너라. (카비르)
삼계(三界)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신기루 같다.
그것은 꿈과 같고 마야와도 같다.
그것이 그런 줄 아는 자는 그 앎으로 인하여 해방된다.
중생이 물을 생각하지만 신기루에 물은 없다.
거기 있는 것은 생각으로 쌓은 성(城)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허공에 그린 그림 같아서 알고 나면 안 것이 없다.
…거울, 물, 눈동자, 보석에 모양들이 나타나지만
그것들 안에 움켜잡을 어떤 실체도 없다. (랑카바타라 숫타)
오랜 세월 종교적 천재들 몇몇이 흘낏 보고 말해주던 ‘환(幻, maya)의 실상’이 드디어 대중 앞에 그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과연 후천개벽의 문이 열린 것인가? (2018. 1, 28)
⎈ “생명의 하느님, 우리의 날들을 축복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어서 사랑하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게 하시고, 끊임없이 자라게 하소서. 어머니-하느님, 우리를 당신께로 더 가까이 당겨주소서. 아버지-하느님, 우리가 하는 말이 당신의 영을 훼방치 못하게 하소서.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뒤섞어 하지 않게 하소서. 거룩하신 이여, 우리는 어떤 말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을 믿습니다. 다만 모든 말들이 당신에게로, 우리 가운데 있는 당신의 영에게로, 우리를 열어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당신께로 가는 우리 여정에 선물로 주신 길벗 예수, 그분을 겁내지 않게 하소서. 성 베르나르의 기도처럼, 우리 주 예수여, 당신은 우리 입에 꿀입니다. 당신은 우리 귀에 음악이요, 우리 가슴에 도약하는 기쁨입니다.” (리처드 로어)
밭은기침이 목에서 떠나지 않는다. 두더지가, 약을 드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속으로 답한다, 먹지 않겠다고, 이건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라고… (2018. 1. 29)
⎈ 왜 사람들은 다른 누구에게 ‘사과(謝過)’를 요구하는 걸까? 그런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 요즘이다. 약간 짜증이 난다. 사과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나중에 알아차리고 그 일로 피해를 입은 이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할 수만 있으면 보상하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하는 거다. 그게 이른바 사과라는 거다. 사과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다. 물론 갑이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것이 을에게 상처가 된 줄을 갑이 모를 수는 있다. 그럴 경우 을은 갑에게 당신이 이런저런 짓을 했는데 그 때문에 내가 아팠다고 지금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한다. 그래도 갑에게 사과를 요구할 건 아니다. 그건 갑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차원에서, 또는 들어주지 않으면 불이익이 클 것 같아서, 속에 없는 말을 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건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와 세상을 속이는 기만이고 종류가 다른 범죄다. 백 걸음 양보하여, 내가 당신의 사과를 받고 싶다고, 그러면 이 상처가 좀 아물 것 같다고, 이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걸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압력을 가한다는 건, 그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이라는 게 있는데, 요구할 것이 따로 있지! 아, 그리고 하나 더, 분명한 진실이 있다. 사과든 보상이든, 그런 건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것들이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18. 1. 30)
⎈ 효선은 광주 프랑스 문화관에 수업이 있어서 가고,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노리치의 줄리안, 아브라함 헤셸, 리처드 로어, 폴 틸리히 조금씩 번역. 그리고 짧은 낮잠.
브라보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선물한 책 ‘학생을 위한 빛’(Light for Student)을 펼치는데, 스리 오로빈도와 함께 활동한 구루 ‘어머니’(the Mother)에게 누가 묻는다. “어머니는 무슨 놀이를 하듯이 책을 아무데나 펼쳐서 거기 있는 문장을 읽으시던데 그렇게 읽어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가 답한다. “그래도 됩니다, 당신이 장난으로 그러지만 않는다면. 모든 책갈피에는 글쓴이의 에너지가 들어있어서 그것이 당신의 살아있는 에너지와 통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필요한 건 당신의 진실성입니다.” 무심코 책을 펼쳤더니 하필 이런 구절이다. 동감이다. 테이블 위에,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기운이 충전되는 책 몇 권 놓여있다. 카비르 노래, 틱낫한의 하루명상, 붓다의 가르침, 신약성경, 크리소스토무스의 짧은 강론들. 그뿐이랴? 어디든지 눈길 닿는 곳마다 펼쳐지는 그분의 복음인데… 문제는 역시 깨어있는 눈이다!
자기 딸의 친구인 여학생을 강간하고 죽여서 암매장한 남자에게 “분노를 참을 수 없다”면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단다. 어쩌면, 수많은 대중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안타깝고 아프다. 하지만, 분노라는 이름의 인간감정이 한 인간의 생사를 결정짓는 데 최후의 열쇠로 작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살벌한 현장에서는 ‘사랑’이 설 자리가 아무데도 없다. 아, 죽은 학생의 부모가 “예수의 가르침에 미쳐서”(이용도 목사처럼) 범인을 용서해달라고 법정에 호소했더라면, 혹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더라면…? 이런 상상마저도 매도당할 각오로 해야 하는 오늘은 참 슬픈 날이다. (2018. 1. 31)
⎈ 효선이 괜찮은 오디오 하나 마련하여, ‘말씀과 밥의 집’에서 공부하는 엄마와 아이들에게 건강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단다. 당장 그렇게 하라고, 뒤로 미루지 말라고, 말해준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상황을 보라. 네가 하려는 그 ‘무엇’으로 말미암아 누가 손해를 보거나 아파할 일 없고, 그것이 자연의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돈도 있다. 그러면 망설일 것 없이 하는 거다. 당장 오늘 밤 죽을 수 있는 몸으로 무엇을 이리저리 계산할 것인가?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는데 돈이 없다. 그러면 하지 않는 거다.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거다. 세상에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그런 일은 없다. 어떤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건 그 일을 내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사람 사는 게 복잡할 이유가 없다.
두더지가 집에 오면서 풍경소리 2월호를 건네준다. 최은숙의 문장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가슴을 울린다. 맞아, 글은 이렇게 쓰는 거지. 가행의 글도 고맙다. (2018. 2. 1)
⎈ 새벽 4시 반, 잠에서 깨어나 ‘카비르의 노래’를 펼쳐든다.
너는 세상을 위해서
네 신앙을 버렸다.
하지만 세상은 끝내,
너와 함께 가주지 않는다.
네 도끼로 네 발등 찍은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인다. 화려하고 휘황하게 보인다. 신앙은 내장(內臟)보다 더 깊은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얻고자 보이지 않는 것을 버린다. 결과는 자기 도끼에 찍힌 자기 발등이다. 저 어리석음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지옥? 아니다, 결국은 언제고 깨어날 눈, 그 눈만이 볼 수 있는 하늘나라다. 노리치의 줄리안이 말하는 마침내 좋아질 모든 것(all will be well)에 오늘 자기 도끼로 자기 발등 찍고 아파서 울고 있는 저 사람도 물론 포함된다. 하늘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
불광출판사 이기선 씨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택배로 부친 ‘간디 옥중서신’을 아직 받지 못했다니까 고개를 갸웃한다. 요즘 택배물량이 워낙 많아서 지체되는 건지 모르겠다. 온 김에 다른 책 하나 번역 부탁한다며, 틱낫한의 회고전(At Home in the World)을 내놓는다. 앉은 자리에서 그러자고 했다. 덕분에 며칠 행복하겠다. 고마운 일이다. (2018. 2. 2)
⎈ 잠에서 깨어나는데 어디선가 백기(白旗)가 나부낀다. 아, 맞아, 백기! 세상에 백기라는 게 있었지? 온갖 다툼과 미움과 분노를 단숨에 끝장내는! 키보다 큰 백기 휘날리며 남은 세상 살고 싶다. 사탄이라도 갈 곳 없으면 내게 오라고 했다는 아무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 알겠다. 알겠다. 깨끗한 백기. 하늘나라에 국기가 있다면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백기일 것이다. 남은 내 삶이 세상에 나부끼는 한 폭의 백기였으면!
“…위험한 일을 무릅쓰고 했다가 실패한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 위험한 일을 하지 않고 그래서 실패하지 않은 자는 자신의 인생에 실패한 것이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다. 스스로 용서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폴 틸리히) 그랬지, 스승의 가르침대로 산답시고 했다가 세상에서 왕창 망한 놈 되기를 소원한 아무가 거기 어디 있었지. (2018. 2. 3)
⎈ 용화사 예배. 두더지, 신난다, 효선 그리고 바람빛. 오늘은 식구가 단출하다. 그래도 은혜는 풍성하고 따뜻하다. 함께 오랜만의 자장면으로 저녁식사. (2018. 2. 4)
⎈ 새벽, 자명종이 울린다. 효선이 새벽기도를 가나보다. 소위 말하는 ‘깡통 보수주의 신앙’으로 돌아가고 싶단다. 생전에는 뵙지 못했어도 꿈속에서 여러 번 만난 어머님처럼 되고 싶단다. 그러라고, 어머니가 학교엔 다니지 못하셨지만 하늘의 지혜로 사신 분이라고, 한평생 오직 예수의 약혼녀로서 정절을 지키신 분이라고, 진정한 보수주의는 래디컬 자유주의라고, 당대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건 참 보수가 아니라고,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하늘에서 어머니가 팔 걷고 나서신 모양이다. 때가 된 모양이다. 감사!
숲에서, 별에서, 침묵을 배워라.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면.
너, 아우성치는 수수께끼야!
너에게 아무런 답도 없다는 거냐?
숨 막히게 딸꾹질하는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흐느끼는 파도들아.
아, 뭐? 뭐? 뭐라고?
내 아이들아,
하느님 아이들아.
항상 자라면서 아무데도 가지 않는,
휴일도 죽음도 모르는,
저 바다의 일생을 누가 알랴?
논쟁과 분쟁의 땀으로 얼룩진 파도들,
무거운 두려움의 큰 바다에
한 거인이 뒤척인다.
한 쌍의 물거품을
해변으로 옮겨갈 길을 찾느라,
큰 파도가 영웅처럼 덮치며 싸우고 있다.
떨어지는 물방울마다 소리를 내며
마지막 한 조각 연민(憐憫)을 깨운다.
너의 그 아우성으로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울부짖는다,
“무엇을 위해서 내가 영웅처럼 덮쳐야 하는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목마름,
누구의 목마름을 내 이 물로 축여줄 것인가?”
해들은 노래하고,
별들은 빛을 뿌리고,
그리고 파도는 마냥 운다.
“말해다오, 대관절 내가 누구인가?”
저 모든 세상을 위한,
저 모든 세월을 위한,
슬픔과 눈물 아니면 네가 무엇이겠느냐?
하늘이 스치듯 헤엄치며 속삭인다,
“통곡해라, 너와 나를 위하여 울부짖어라!”
문득, 들리는 소리가 선명해진다.
나는 눈물로 나를 씻어 성결케 하고,
그리고 너를 축복한다,
“파도야 잠잠해라,
바다야, 들어라!
한 인간이 너에게 말한다.”
나는 안다, 광대무변 한 마디 말 속에서,
애쓰고 헐떡이는 파도들을
착실하게 기다려주는, 저 항구를.
나 이제 비밀을, 하느님을, 드러내리라.
아브라함 헤셸이 스물여섯에 발표한 ‘바다’ 전문. 파도치는 해변에서 인간의 슬프고 아픈 역사와 그를 기다리는 항구 같은 하느님을 아울러 바라보는 젊은 시인의 눈! (2018. 2. 5)
⎈ 아침 먹는데 효선 입을 통해 한 마디 주신다. “기도에 응답은 따로 없다. 기도가 응답이다.” 그렇다, 사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그것이 사람의 전부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가? 내 입으로 기도하지 않겠다. 내 존재가, 내 삶이 곧 한님 향한 기도이기를…
두더지가 전직 순천 시장이었다는 아무 씨 동반해서 왔다. 새로운 길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달라지면 같은 길이 새로운 길이라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으면 아무리 새로운 직장에서 다른 종류의 일을 해도 그 사람 여전히 낡은 길을 가는 거라고, 뭐 이런 얘기가 그냥 입에서 나왔다. 보리밥이 왔다가 함께 저녁 먹고 돌아간다. (2018. 2. 6)
⎈ 틱낫한의 ‘그때 그랬지’를 번역한다. 본인의 지난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거기에 자신이 평생 가르치고 실천해온 내용을 담았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갓 불문(佛門)에 들어서는 젊은 제자에게 늙은 스승이 자신의 낡은 가사(袈裟)를 물려주려고 바느질하는 정경이 눈물겹다.
“…스승께서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셨다. 그러고는 옷을 입어보라고 하셨다. 내 몸에 조금 컸지만, 눈물이 나올 만큼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날 더없이 성스러운 사랑, 부드럽고 넉넉한 순수 사랑을 받았고 그것은, 계속된 수년간의 수련생활을 통하여, 내 속에 큰 뜻을 품고 기르게 해주었다. 스승이 나에게 옷을 건네주셨다. 나는 그것이 부드럽고 신중한 사랑으로 나에게 주시는 큰 격려인 줄 알면서 옷을 넘겨받았다. 그때 들려주신 음성은 내가 그동안 들어본 것들 중에 가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얘야, 내일 너 입으라고 내가 이 옷을 손봤다.’ 그렇게 간단했다.…”
한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누구였더라? 영어 잘하고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있을 때 형이라 부르면서 그 밑에서 일을 돕기도 했는데, 한양대학 교목이었는데, 아, 이름이 생각 안 난다. 그리고 또 그 형님. 다정하고 기도도 잘 하고 키는 작지만 마음이 넓었는데, 당신 승용차로 우리 아버지 유골을 충주에서 서울까지 옮겨다주었는데, 그 형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들이 나에게서 사라져간다. 물론 아직 남아있는 이름들도 있다. 완택, 영숙, 대선, 미선, 종주, 은숙, 호일, 정곤… 기억나는 이름들을 불러본다. 이들마저도 어느 날 나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작고 큰 이야기만 남겨두고 사라져간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 헛말이다. 이름보다 이야기다. 역사라는 게 그게 뭉쳐진 하나의 이야기 아닌가? (2018. 2. 7)
⎈ 아침에 옮긴 헤셸의 시 한 구절. “모두가 범죄자다. 아니면 누구도 아니다!” 이토록 찬란한 통찰이 스물여섯 젊은 몸을 꿰뚫었다니! 역시, 인간 실존은 나이가 얼마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온갖 고(苦)가 ‘나’라는 물건이 ‘너’라는 물건에 맞서 따로 있다는 어미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그 말이 과연 참말이다. 언제였던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한문으로 쓰면서 무식한 아무개가 끝 글자를 ‘存’이라고 썼을 때 그것을 보신 무위당 선생, 아무런 말씀 없이 ‘尊’으로 고쳐주셨지. 그렇다, ‘사람’이란 존재하는 어떤 물건이 아니다. 어디에나 있으면서 아무데도 없어 붓다처럼 거룩한 지존(至尊)이다.
이제 무엇이든 머릿속에 저장하기를 포기해야겠다. 며칠 전 이령이가 제 친구들과 무슨 잡지를 만든다면서 ‘할아버지 글’을 받아 실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글을 쓰기는커녕 글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독촉을 받고서 곧 써주겠다고 해놓고는 그걸 또 잊었다. 방금 효선이 전화 받았다면서 글 썼느냐고 묻는데 기가 막힌다. 삼십분만 기다리라 해놓고 급히 몇 자 적는다.
이령아,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그만 깜박했다.
급히 몇 자 적어 보낸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길을 가야 해.
하나는 혼자 가는 길, 다른 하나는 함께 가는 길.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길을 따로 가는 게 아니고 동시에 가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어떤 이는 “홀로 더불어 간다.”고 말하더라.
혼자 가면서 함께 가는 거야.
너희는 순례여행을 많이 해봐서 그게 어떤 건지 좀 알 거다.
그렇게 혼자 가면서 함께 가는 비결이 뭘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구나.
“거리를 잘 조절해라.”
나와 친구 사이,
나와 직장 사이,
나와 세상 사이,
그 사이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돼.
그걸 공자님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고 하셨지.
그런데 그 거리 조절은 누가 해야 할까?
그건 네가 해야 해.
상대방에게 가까이 오라 떨어져라 하지 말고 네가 그렇게 하는 거야.
잘 생각해보렴.
너희들 가는 길에 건강하고 행복한 꽃들이 만개하기를 바란다.
포항에서 보배가 과메기를 보내왔다. 배움지기들 초대하여 과메기 잔치를 벌인다. 예똘과 류하가 우연히 동참한다. 유쾌한 감동의 자리. 모두가 고맙다. (2018. 2. 8)
⎈ 새벽꿈에 주승동 목사가 저쪽에서 혼자 걸어오는데, 누가 그를 가리키며 속삭인다. 저 친구, 이번에 아주 기특한 일을 했어요. 십년 동안 착실히 모은 돈 1억을 가난한 시골교회에 주었답니다. 내 입에서 말이 나온다. 하늘이 도우셨군. 천만다행일세. 그가 묻는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튼 간에 십년 동안 돈을 쌓아두었다는 얘기 아닌가? 들어온 것이 무엇이든 그때그때 나가지 않고 쌓여있는 그게 바로 생명한테는 재앙이거든. 안 그런가? 하늘이 그 친구를 도우셨어. 그걸 치우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벌거숭이 알몸으로 돌아가신 예수 앞에서 그 민망함이 어떻겠는가? 내 입이 하는 말에 스스로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과테말라에서도 다른 제3세계에서 겪은 일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당신이 마을에 들어가면 얼마 안 되어 돼지 멱따는 소리나 닭이 푸드득거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당신을 위해서 그것들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들이 마지막 남은 돼지나 닭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토록 그들은 가난하다.
축적(蓄積)은 당신을 일종의 내핍정신(scarcity mentality)으로 얽어맨다. 하지만 가진 게 거의 없는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 기꺼이 남아있는 것을 내어줄 수 있다. 쌓아두고 보관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이 아니다. 그들은 말한다, ‘이게 마지막 돼집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마을에 오셨으니 잔치를 해야지요.’ 그래서 그들은 돼지를 잡고 당신은 그들이 고기를 손질하는 동안 집 안에서 기다려야 한다.
잔치가 벌어지고 마을사람들과 배불리 먹었는데 아직 남은 고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들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한테는 냉장고가 있다. 남은 고기를 잘 보관하는 것은 당연한 미덕이다. 음식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계명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있다.… (냉장고가 없는) 과테말라에서는 남은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즉시 나눠야 한다. 서로 친척관계인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음식을 나르는 것은 매일 겪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온 마을이 한 집안처럼 서로 의지하여 살아간다. 이곳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내 것’인 집안에 쌓아두고 또 쌓아둔다. 그것들을 모든 ‘당신’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내핍과 개인의 책임에 바탕을 둔 우리의 경제정책은 인간을 더욱 더 소외되고 고립된 경쟁자로 몰아간다. 반대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놀랍도록 풍요로운 정책이 있다. 누구나 집단에 의지하여 살 수 있어서, 내일을 위해 쌓아두려는 유혹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편견으로 보면 무책임한 삶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들이야말로 신앙과 공동체와 하느님 나라에 우리보다 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로어, Letting Go: A Spirituality of Subtraction)
열시쯤 민해, 용우, 진택, 숙자가 와서 ‘기도’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나누고 함께 아침 겸 점심식사. 저녁에는 사랑어린학교 학부모 교육에서 한 마디 해달란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묻지 않으면 답하지 말라는 선생의 말씀을 앞세워놓고서 1시간 넘도록 무슨 말이 참 많았다. 고단하다. (2018. 2. 9)
⎈ 아브라함 헤셸의 시(詩) 한 편이 가슴을 울린다. 제목은 ‘용서’
물로 몸을 씻을 때 진저리치며 생각합니다.
“이것은 수백만 노동자들의 땀이다.”
밤거리 여인들은 우리 아버지 의붓딸들,
그리고 끔찍한 범인들은
어쩌면 우리 집에서 이사 간 사람들.
살해당한 이들을 떠올리면,
살생을 내가 부추겼다는 생각이 들지요.
아마도 우리 마을 천더기들을
욕보인 건 나일 거예요.
내 안의 무엇이 고백합니다,
“당신의 그 고통, 천번 만번 내 탓이오.”
당신 문간에,
당신 감옥에,
당신 병원에,
용서를 빌며 이 머리 던지고 싶습니다.
언제부턴가, 이른바 세상의 흉측한 범죄자들이나 파렴치한들을 옹호까지는 아니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 모습이 그들한테서 얼비쳐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 세상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용서할 사람은 없다. 용서를 빌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데…
토요명상. 학부모, 배움지기들과 함께 하게 돼서 도서관이 그들먹하다. 광주, 전주의 길벗들도 동참. 늘 하던 얘기를 되풀이하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2018. 2. 10)
⎈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렸는데 축하하러 왔다는 미국 부통령, 뉴스를 보니 꼭 무슨 싸움닭 같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는 뭐가 그리 무서운 건가? 뭐가 그토록 겁나서 달밤에 고독한 늑대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가? 내 눈에는 거대한 두려움의 빙산 위에 얹힌 나라 같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총질을 할 정도로 아무나 총을 지닐 수 있고, 그래야 안심이 된다는 나라. 세계에서 입국 수속이 가장 까다롭다는 나라. 그곳이 데이비드 소로우, 토머스 머튼, 도로시 데이, 마틴 루터 킹 같은, 영혼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이들의 고장인데… 아하, 그래서 그런 건가?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건가?
오늘 옮긴 리처드 로어 신부의 글에도, 미국은 이런 나라다.
―중앙아메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명력이 넘친다. 신앙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거기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아무래도 여기 있어야겠다고 말하면, 그들의 대답은 예외 없이 이렇다. “아니에요, 신부님. 미국으로 돌아가세요. 정작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곳은 아메리카랍니다. 신부님이 중앙아메리카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요(웃음). 성직자는 많지 않아도 사실 우리가 더 잘 살고 있거든요. 신부님은 돌아가서 미국에 복음을 전하셔야 합니다.” (R. Rohr, Radical Grace)
용화사 예배에서 두더지 하는 말이, 이러다가 학교 망하는 거 아닌가? 뜬금없는 생각이 드는데 크게 불안하지는 않더란다. …이러다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이러다가’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망했어도 뭘 어떻게 하다가 망했는지, 흥했어도 뭘 어떻게 해서 흥했는지, 그게 진짜 문제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건 언제고 망하게 마련인즉, 이러다가 내일 망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오늘 가는 길을 계속 가라는 한님의 격려 같다고, 김교신 선생 예를 들면서, 이런 말을 진솔히 주고받는데 갑자기 효선이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참는다. 까닭을 물으니 한참 만에 겨우 하는 말, “뽑기 하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단다. 좌중이 웃음바다로 출렁인다. 이 무슨? 따라서 웃는데, 심각한 순간마다 통쾌한 너털웃음으로 판을 뒤집는 달라이 라마가 생각난다. 하하하, 그거 참 근사하다. 한님 뜻을 묻는 방편의 하나로 제비뽑기를 하는 건데, 그러다가 학교가 망한다? 아, 한님! (2018. 2. 11)
⎈ 눈이 제법 내린다. 순천에서 함박눈 보기는 두 번 겨울에 처음인 것 같다. 옆집 할머니가 퇴원했는데 집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며, 고깃국에 밥을 장만한다. 다행이다.
효선이 미루와 함께 여수엘 다녀오겠다며 차를 끌고 나간 지 한참 되었다. 밤 아홉시가 넘었는데도 오지 않는다. 전에 차를 운전하며 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기에 조바심이 나고 궁금해서 전화를 걸어보려다가 그만두고 기다리는데 열시 넘어 열한시가 되어간다. 안 되겠다 싶어 옷을 차려입고 나서려는 순간 문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린다. 반가운 마음에 웃음이 났지만 동시에 화가 솟구친다. 한 시간쯤 전에 도착했는데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이야기하느라 늦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 화가 난다. 궁금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집에 있는 줄 알면 주차장에서 몇 걸음이 집인데 집에 와서 이야기해도 되지 않는가?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목소리가 커진다.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뭐지? 누가 내 속에서 팡―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내버려두면 진짜 폭소가 터질 것 같다. 꾹 눌러 참는다. 여기서 웃음을 터뜨리면 화를 계속 낼 수 없잖은가? 이 대목에서는 화를 좀 더 내야 한다. 효선이 뭐라고 말하는데 화가 나서 말을 들어줄 수 없으니 나중에 하라고, 십분 뒤에 하라고, 그러자 알았다며 자리를 비켜준다. 십분 쯤 뒤, 배가 고프다고, 흰떡을 구워 기름소금에 찍어먹겠다고 하니, 신바람 나게 부엌으로 간다. (2018. 2. 12)
⎈ 오전 내내 아브라함 헤셸의 시 한 편에 매달린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누구와도, 어떤 이유로도,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싸움의 현장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내 중년의 약속이, 비록 충실히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스스로 대견하고 스승께 고맙고, 그래서다.
오, 만군의 주님, 승리나 영웅주의로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소서.
망신당한 내가 약자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그렇다면 나를 부끄럽게 하소서.
내 영혼이 고집스레 끓어오릅니다.
예, 모든 것에 내 영혼이 끓어오릅니다.
단, 전쟁에는 아닙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마당에 서서,
당신께 구걸합니다.
이 몸에 패배를 안겨주소서!
내 가슴은 승리의 쾌감보다
패배와 상실의 아픔을 더 잘 견뎌냅니다.
모욕당한 정의를 구하고 지켜내는 자로서,
승리감을 느끼는 그것이 잘못임을 깨치게 하소서.
내 행실이 사람들 가슴에 심어준 기쁨으로
새겨진 트로피를 자랑스레 지니고 다니게 하소서.
오, 만군의 주님, 승리나 영웅주의로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소서.
망신당한 내가 약자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그렇다면 나를 부끄럽게 하소서. (헤셸, ‘모든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 전문)
오늘은 이런 날인가? 오후에 옮긴 틱낫한의 지난 시절 얘기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1946년, 나는 중앙 베트남 후에의 투 히에우 절 사미승이었다. 당시 후에 시는 프랑스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하루는 프랑스 병사 둘이 절에 왔다. 하나는 문밖에 세워둔 지프에 앉아있고 다른 하나가 총을 들고 들어와서 쌀을 있는 대로 모두 내어놓으라고 우리를 윽박질렀다. 절간에 남아있는 건 쌀 한 자루가 전부였는데 그걸 가져가겠다는 거였다. 그 병사는 아직 스무 살이 안 돼보였고, 마르고 창백한 모습이 말라리아를 앓고 있는 듯했다. 말라리아는 나도 앓아본 병이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쌀자루를 져다가 지프에 옮겨 실어야 했다. 거리가 꽤 멀었고, 무거운 쌀자루에 눌려 비틀거리자니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그들이 절간에 남아있는 쌀을 몽땅 가져가면 우리 식구들은 먹을 것이 없게 된다. 절로 돌아오면서 나는 울었다. 나중에 나는 스님들 가운데 한 분이 큰 쌀독 하나를 마당 구석에 몰래 묻어두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언젠가 그 프랑스 병사에 대하여 명상을 하게 되었다. 부모와 형제자매와 친구들을 떠나 멀고 먼 베트남까지 와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십대 소년이 거기 있었다. 그 소년이 안 죽고 살아서 부모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을까? 가끔 그게 궁금했다. 그가 생존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은 수년 동안 지속되었고, 디엔 비엔 푸 전투에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를 깊이 들여다보며, 베트남 사람들만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고 프랑스 병사들도 똑같은 희생자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그 프랑스 병사에게 분노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향한 자비심이 솟아났고, 오로지 그가 잘 되기만을 바랐다.
나는 그 프랑스 병사의 이름을 몰랐고 그도 내 이름을 몰랐다. 그날 우리가 만났을 때는 서로 적이었다. 그는 절에 와서 먹을 것 때문에 나를 죽일 수 있었고, 나는 자신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본디 적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었다. 다른 환경에서 만났더라면 가까운 친구로 될 수도 있고 서로 그리워하는 형제간일 수도 있었다. 우리를 갈라놓고 우리 사이에 폭력을 끌어들인 건 전쟁이었다.
이것이 전쟁이다. 이것이 우리를 적으로 만든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겁에 질려 서로 죽인다. 전쟁은 수많은 고통을 가져다준다. 아이들은 고아가 되고 도시와 마을은 폐허로 된다. 난리 통에서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이 희생자다. 그 엄청난 파괴와 고통을 배경으로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경험한 나는, 또 다시 일어날 모든 전쟁을 미연에 막겠다는 간절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나라들이 더 이상 젊은이들을, 비록 평화의 이름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전쟁터에 파병하지 않는 것이 내 기도다. ‘정의로운 노예제도’ ‘정의로운 미움’ 또는 ‘정의로운 인종차별’ 같은 개념들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평화를 위한 전쟁 또는 ‘정의로운 전쟁’이란 말도 받아들일 수 없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내 친구들과 나는 우리가 중립인 것을, 우리에게는 아군도 적군도 없다는 것을, 북도 남도,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베트남인도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천명하였다.
그래서 당시 미국과 베트남으로부터 함께 의심받아야 했던 붓다의 제자 틱낫한, 요즘 많이 쇠약해졌다는 소문이다. 나이가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괜찮다. (2018. 2. 13)
⎈ 두더지 소개로 현역 정치인을 만나 함께 점심. 이번 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려다가, 두더지처럼, 제비뽑기로 하늘의 뜻을 여쭈었고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단다. 잘 했다고, 이 나라 정치판에 매사를 기도로 결정하면서 하늘과 함께 판단하는 간디 같은 모세 같은 그런 인물 하나 출현할 때가 되었다고… 오늘의 대화에서 새 힘을 얻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자주 만나잔다.
사랑어린학교 ‘애프터 스콜레’ 졸업생 셋(이령, 은서, 어진)이 마감잔치를 한다. 저희끼리 만들었다는 소책자 ‘한 박자 쉬어가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귀엽고 아담하다. 내용도 대강 훑어보니 대견스럽다. 노란 손수건 한 장으로 아이들과 엄마 아빠들이 돌아가며 눈물을 훔친다. 흐뭇한 광경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밝은 세계가 확연히 느껴진다. (2018. 2. 14)
⎈ 내일 설날. 괴산 아민이네 가기로 약속이 되어 해산물을 좀 사겠다며 여수 가는 길에 동행한다. 차에서 효선이 말한다. 무슨 일을 선한 의도로 시작했는데 일이 예상한 대로 되지 않거나 상대가 뜻밖의 반응을 보이더라도 할 수만 있으면 처음-마음 그대로 일을 계속하겠다고. 대꾸한다, 그러라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중앙교회 홍 목사가 “맛있는 사과”라면서 한 상자 들고 왔다. 해외여행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사과는 한국 사과가 으뜸이더라 하니 웃으며 정말 그렇단다. 고맙다. (2018.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