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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41
#.1 씬. 강석의 사무실.(낮)
강석, 일하고 있는데, 진호, 실랑이하면서.
진호 : 안 계신다니까요. (문 벌컥 열리면서 들어오는 선태, 그런 선태의 팔을 잡으며 들어서는 진호)
강석 : (보는)
선태 : 나 누군지 모르지?
강석 : (일어서는)
선태 : (다가서며) 김선태야.
강석 : 그런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선태 : (강석의 멱살을 잡으며) 몰라서 물어, 이 새끼야.
진호 : (선태의 팔을 잡으며) 왜 이러십니까? 나가서 얘기 하시죠.
강석 : 넌 나가 있어.
진호 : 실장님?
강석 : (단호하게) 나가 있어.
진호 : (하는 수 없이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나가는)
강석 : 앉아서 얘기하죠.
선태 : (노려보는)
강석 : 아님, 그냥 주먹을 날리시던가?
선태 : (보다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네가 한 짓을 인정한다는 거냐?
강석 : (차갑게) 무작정 들이닥쳐서 멱살부터 잡는 건 행패를 부리러 왔다는 거 아닙니까?
이성적으로 얘기할 상대가 아니면, 어쩌겠습니까? 몇 대 맞고 끝내야지.
선태 : (멱살을 더욱 거칠게 잡으면서) 내가 무작정 들이닥친 것 같냐?
강석 : (멱살 잡은 선태의 두 팔을 움켜잡으면서) 그냥 앉아서 얘기 하시죠.
나도 쌈질이라면 좀 하고 산편이라서 참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선태 : (보다가 손을 놓고 의자에 앉는) 네가 한 짓이 몇 대 맞고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냐?
강석 : (앉고) 내가 한 짓이 대체 뭡니까?
선태 : (분노에 찬 표정으로 보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거 같냐?
강석 : 그러니까 뭘 알고 오셨는지 말씀을 해보시죠?
선태 : 마카오 있을 때까지만 해도, 네 놈이 뒤에서 내 노름돈을 미끼로
우리 회사 지분을 챙기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워낙 이 놈 저 놈한테 돈을 꿔댔으니까, 그게 다 한 놈 아가리로 들어가고 있을 거라곤.....
강석 : 원정 도박 경력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오신 건 아닐 텐데요?
선태 : 우리 아버지, 회사 부도나면서 화병으로 쓰러져 돌아가셨어.
강석 : .....
선태 : 도박에 미쳐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회사 부도나고 아버지 쓰러지셨다는 연락 받고도,
나 한국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어. 내가 도박 자금으로 팔아넘긴 지분이 주가 조작에 이용 됐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으니까. 꽁지 노릇하던 마르코란 놈을 족쳐서
밖에 있는 저 새끼가 관련 돼있는 거 같다는 말 듣고, 내가 덫에 걸렸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지.
그리고 돌아와서 저 새끼 뒤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됐고,
너하고 네 아버지가 대성 건설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됐지. 그러니까 모든 게 분명해지더군.
강석 : 내가 이런이런 짐작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시러 온 겁니까?
선태 : 우리 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큰 형은 교도소에 들어가고 작은 형은 해외로 도피하고,
그야말로 우리 집안 풍비박산이 났다.
강석 : .....
선태 : 멀쩡했던 한 집안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도 넌 아무런 죄의식 같은 것도 없냐?
강석 : 멀쩡했던 한 집안이라..... 사람들이 명성 몰락을 두고 뭐라고 하는 지는 못 들으셨나보군요.
명성이 하루아침에 몰락 한 건 삼형제의 공동 작품이었다고들 하는데.
선태 : (매섭게 보면)
강석 : (동요 없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주식을 차명으로 증여한 것부터가 시작이었죠, 아마.
맏형님께서는 유부남이시면서도 유명 탤런트와 연애를 하시느라 회사 경영은 신경 쓸 겨를도 없으셨고,
공금까지 횡령해서 해외에 호화 주택을 구입해서 그 탤런트한테 선물했다고 하던데.
지금 교도소에 계신 것도 그 공금 횡령 때문 아닌가요?
선태 : (벌떡 일어나며) 너 같은 새끼가 농간만 부리지 않았어도 우리 집안 이 꼴 나지 않았어.
강석 : (일어나며) 아버지 모르게 한 몫 챙기려고 주가 조작에 끼어든 것도 작은 형님이 아니신가요?
선태 : (멱살을 잡으려고 하면)
강석 : (선태의 팔을 잡고) 말했을 텐데요, 나도 쌈질은 좀 하고 산 놈이라구.
선태 : 내가 네 놈을 가만 둘 거 같냐?
강석 : 김선태씨?
선태 : .....
강석 : 당신 이러는 거,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걸 반증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명성 몰락에 관여 했다면,
날 찾아오지 않고, 검찰로 갔겠지? 안 그렇습니까?
선태 : 잘못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하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해주려고 했더니, 너 정말 안 되겠구나.
강석 : 적당한 선에서의 합의라?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내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입니까?
그런 합의가 나한테는 덫이란 걸 모를 만큼 어리석어 보이냔 말입니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그냥 돌아가시죠.
선태 : (주먹을 날리려고 하면)
강석 : (팔을 잡고) 마약에 쩔었던 몸이시니 주먹에 어디 힘이나 실리시겠습니까?
가서 몸 관리 좀 하시고 오시죠. 그래야 피할 틈도 없이 주먹을 날리실 거 아닙니까?
선태 : (부르르 떠는데)
진호, 경비1,2와 들어오는.
진호 : (경비들에게) 끌어내십쇼.
강석 : (진호에게) 너 뭐하는 짓이야?
진호 : 실장님.
강석 : 손님 가시니까 정중하게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드려라.
선태 : (기가 차서 헛웃음을 웃으며) 이강석.
강석 : .....
선태 :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강석 : .....
선태 : (나가는)
강석 : 문 닫아.
진호, 문을 닫고 나가는.
강석 : (냉정한 표정으로 창 밖으로 시선 주는)
#.2 씬. 박물관. (낮)
단아, 전시품 정리하고 있다가, 무심히 시선 주면. 서있는 강석.
단아 : 언제 왔어요?
강석 : 일중독 맞죠?
단아 : .....
강석 : (다가오며) 온지 한 10분은 된 거 같은데, 사람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는 거 보면 일중독 맞아.
단아 : 또 점심 사달라고 온 거예요?
강석 : 왜요? 귀찮습니까?
단아 : 피곤하지도 않아요? 점심때마다 왔다 갔다 하는 거?
강석 : (다가와 조심스럽게 단아를 안는)
단아 : 왜 이래요?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구?
강석 : 피곤해서 온 거예요. 일하다 피곤해서 당신 얼굴 좀 보면 나아질 거 같아서.
#.3 씬. 교정. (낮)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강석과 단아.
단아 : 회사에 힘든 일 있어요?
강석 : 그런 거 없어요.
단아 : 피곤하다면서요?
강석 : 점심때마다 온다고 구박하니까 핑계 댄 겁니다.
단아 : (곱게 흘겨보는)
강석 : 그런 눈빛 도발적이니까 삼가주십쇼. 사고 쳐줄 것도 아니면.
단아 : (웃는데)
강석 :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당신하고 나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요?
단아 : .....
강석 : 당신 그 사람 보내고 대학 다녔을 때, 같은 대학생으로 이런 교정에서 부딪혔으면.
단아 : .....
강석 : 그 사람 보내고 나서 바로라 당신 나 본 척도 안했을지 모르지만
난 분명히 당신을 알아봤을 거구, 그럼 지금처럼 귀찮게 하면서 쫓아다녔을 거구,
그럼 한 1,2년 쯤 후엔 연인이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단아 : 왜 그런 생각을 해요?
강석 : 그럼 좀 더 일찍 다르게 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냥 평범한 대학생으로 나한테 마음 안주는 당신 보면서 애나 태우며 살지 않았을까.
단아 : 늦게 만난 게 안타까운 거예요?
강석 : (보고 미소 짓는)
단아 : 이렇게 생각해요. 서로 알아볼 수 있을 때 만난 거라구.
난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고. 강석씬, 전갈의 천성이 버거울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라구.
강석 : (단아의 손을 잡고)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당신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날 겁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당신을 더 빨리 찾아낼 겁니다.
단아 : .....
#.4 씬. 종가 전경.(밤)
#.5 씬. 마루.(밤)
태영, 동동 서있는.
태영 : 오늘은 안 맞았냐? 현지한테?
동동 : 아빤, 내가 매일 현지한테 맞았으면 좋겠어?
태영 : 퇴근할 때마다 불안해서 그렇다. 오늘은 또 어느 쪽 눈탱이가 밤탱이가 돼있을까?
동동 :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태영 : 뭘?
동동 : 결혼할까 말까.
태영 : 야, 더 이쁜 애가 나타날까봐 현지랑은 결혼 한다고 할 수 없다면서?
동동 : 대답 안한다고 맞을 수는 없잖아?
태영 : 야, 너 인생 왜 그렇게 비굴하게 사냐?
하는데. 말순, 장기 들어오는. 말순, 손에 붕대 감고.
말순 : (장기에게) 그냥 내려만 주고 가라니까 왜 따라 들어와?
장기 : 부상 당하셨는데, 집안까진 모셔다 드려야죠.
태영 : (말순 모습 보고, 놀라서 다가오며) 너 또 왜 이래?
장기 : 오늘도 형사과에 지원 나가셨었거든요.
태영 : 아니, 그 경찰서엔 여경이 너 하나냐?
장기 : 다들 말리는데도 나경장님이 자원을 하셨어요.
태영 : 너 정말.....
영인, 방에서 나오는.
말순 : 다녀왔습니다.
영인 : (놀라서) 다친 거야?
말순 : 아니에요. 각목에 살짝 긁힌 거예요.
영인 : 조심 좀 하지 않구서.
#.6 씬. 태영의 방.(밤)
태영 : (버럭) 뭐? 형사과?
말순 : (당황해서)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태영 : 지원 나가서도 이렇게 매일 다쳐서 들어오는데, 아예 형사과로 옮기겠다 그거냐 지금?
말순 : 나 원래 형사과 소속이었어. 난 교통계보단 형사과가 적성에 맞는다니까.
태영 : 너 형사과로 가려면 이혼하고 가.
#.7 씬. 마루.(밤)
영인, 진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듣고 있는.
동동, 뒤에 서서 듣고 있는.
말순E : 지금 이혼이라고 했어? 이혼 소리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냐?
태영E : 결혼하자마자 홀아비 되는 것보단 이혼남 되는 게 났다.
말순E : 내가 형사과로 가면 왜 홀아비가 되는데?
#.8 씬. 태영의 방.(밤)
태영, 말순 화가 나서 소리 지르고 있는.
말순 : 내 꿈이 뭔지 잘 알잖아? 난 리셀 웨폰 여주인공처럼 사는 게.....
태영 : (자르며) 그러니까 이혼 하고서 꿈 이루시라구요.
말순 : 자꾸 이혼 소리 할 거야?
태영 : 손에 붕대 감고 들어와서 형사과로 간다고 하는데, 그럼 이혼 소리 안나오게 생겼냐?
영인, 문 열고.
영인 : 할아버님이 두 사람 오라셔.
#.9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앉아있고, 그 앞에 태영, 말순 고개 숙이고 앉아있는.
만기 : 어떻게 결혼 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식구들 다 듣게 싸움을 하는 게냐?
태영 : 할아버지? 얘가요, 글쎄, 오늘도 이렇게 다쳐가지고 들어왔으면서 이젠 아예 형사과로 가겠다고.
만기 : 얘라니.
태영 : 이 사람이요.
만기 : 결정이 된 일이냐?
말순 : 아직은 아닙니다. 지원나간 게 도움이 되서
형사과장님하고 서장님이 전과를 생각해보겠다고 하셨거든요.
만기 : 그럼 아직 결정이 된 건 아니구나.
태영 : 얘가요, 할아버지.
만기 : (못마땅하게 보면)
태영 : (움찔했다가) 이 사람이요. 지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도 번쩍 번쩍 손들고 자원하고 그런 거거든요.
위험하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깡패놈들하고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이상한 체질이거든요. 이 인간이.
만기 : (보면)
태영 : (움찔하고) 이 사람이요.
만기 : 작은 애야?
말순 : 네, 할아버님.
만기 : 물론 그렇게 위험한 일도 맡는 사람이 있어야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넌 이제 예전처럼 혼자의 몸이 아니다.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몸이야.
말순 : .....
만기 : 꼭 필요해서 지원을 나가야 한다면 모를까 굳이 남편이 저렇게 걱정스러워하는데
형사과로 옮길 것까지야 없지 않겠느냐?
말순 : .....
태영 : 왜 대답 안 해?
말순 : 잘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10 씬. 마루.(밤)
태영, 말순, 만기의 방에서 나오는.
동동, 두 사람 보고 서있는.
동동 : 엄마, 아빠. 저 좀 보시죠.
#.11 씬. 태영의 방.(밤)
동동, 팔짱 끼고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말순, 태영, 뚱한 표정으로 동동을 보고 있는.
태영 : 보자면서? 왜 아무 말도 안하냐?
동동 : 엄마?
말순 : 응?
동동 : 저 엄마,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실망이에요.
말순 : 나 형사과 가는 거 포기할 거야.
동동 : 그거 말구요.
말순 : 그럼 뭐?
동동 : 제가 피자집에서 분명히 얘기 했죠. 결혼은 해도 되는데, 이혼은 절대 안 된다구.
태영 : 야, 하동동. 그건 아빠가 너무 화가 나서 욱 하는 심정으로.
동동 : 그렇다고 이혼 하자고 해?
태영 : 정말 이혼하자는 게 아니라.
동동 : 내가 얼마나 창피한 줄 알아? 엄마랑 아빠랑 큰 소리로 막 싸우고, 이혼하자고 하고.
진짜 내가 아들인 게 창피해.
태영 : 뭐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냐?
말순 : (태영 쿡 찌르며) 미안해, 동동아. 엄마랑 아빠랑 반성 할게.
동동 : 정말요?
말순 : 응.
동동 : 아빠는?
태영 : 한다, 해, 반성.
동동 : 그럼, 나 자기 전에 반성문 써 주세요.
태영 : 야, 야.
말순 : 반성문까지 꼭 써야 하니?
동동 : 저도 학교에서 잘못하면 반성문 쓰거든요, 열장씩.
태영 : 야, 열 장 씩이나 써야 하냐?
동동 : 오늘은 처음이니까 한 장씩만 써주세요. 그럼 반성문 다 쓰시면 부르세요. (나가는)
태영 : (말순 노려보며) 너 때문에.
말순 : 그러니까 이혼 소린 왜 해?
#.12 씬. 부엌.(밤)
삼월, 조만, 진아, 저녁 준비하고 있으면,
주정, 물마시면서.
주정 : (바로 퇴근해 들어오는 차림으로, 조만 보며) 떠들썩 했겠다?
조만 : 이혼 하자고 소리치고 난리 나서, 그 후배 경찰분이 저녁도 못 드시고 그냥 가셨잖아요?
주정 : 뭐야? 너 그 경찰이 그냥 간 게 서운하다는 거니?
조만 : 제가 언제요.
말순,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나오는.
삼월 : 손까지 다쳤으면서 뭐 하러 나와?
말순 : 그래도 새색신데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죠.
주정 : (장난스럽게) 작은 손주 며느님? 이혼 하신다면서요?
말순 : 아니에요, 할머님. 그래서 저희 저녁 먹고 반성문 써야 해요.
주정 : 반성문?
말순 : 동동이가 반성문 쓰라고 해서요.
주정 : (웃으며) 시어머님보다 더 무서운 시집살이 한다.
#.13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영자, 강석, 단아 앉아있는.
천갑 : 이젠 대답을 들을 때가 된 거 같은데.
단아 : (강석을 보고)
강석 : 아버지, 그것 때문에 이 사람 오라고 하신 거세요?
천갑 : 그럼 뭐 때문이겠냐?
강석 : 저하고 얘기 좀 더 하시자니까.
천갑 : 너하고 백날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 있어. 본인한테 바로 듣는 게 났지. 얘야?
단아 : 네.
천갑 : 네가 빨리 결정을 해줘야, 나도 일을 진행시킬 수가 있지 않겠냐?
한옥으로 이사를 하는 것도 그렇고, 종택을 사들이는 문제도 그렇고.
강석 : 아버지, 이 사람 그냥 저녁이나 먹여 보내고, 저랑 다시 얘기 좀 하세요.
단아 : 저.....
천갑 : (반색하면서) 그래? 얘기 해봐라.
단아 : 아버님께서 왜 그토록 족보를 원하시는지 이해합니다.
천갑 : 아이구. 이해하면 됐다.
영자 : 그럼 뭐 길게 얘기 할 것도 없네. 그냥 내일이라도 가져오면 되는 거지 뭐.
단아 : 아버님? 어머님?
천갑 : (보고)
영자 : (보고)
단아 : 족보란 건.....
천갑 :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게 아니란 거 다 안다. 아니까 그런 얘기면 빼고.
나 너한테 돈 주고 사겠다는 거 절대 아니다.
단아 :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에 불과합니다.
천갑 : .....
단아 : 누가 누구의 자식이었는지, 누구의 손주였는지, 그런 기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정말 그들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책입니다.
그 족보로 새로운 가문을 세우시겠다는 건, 가면을 쓰고 사시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 이 사람과 같이 두 분을 존경하고 진심을 다해 모시며 살고 싶습니다.
영자 : 얘, 얘 어른들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선생이라 그런가, 말은 참 잘한다만.....
천갑 : 가만 좀 있어봐라, 그래서?
단아 : 다른 가문의 족보로 가면을 쓰고 사는 것보단,
전 아버님 대에서부터 새로운 가문을 세우시는 게 더 보람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와 이 사람이 결혼을 하면 아이가 태어날 텐데,
그 아이를 의미도 없는 다른 가문의 족보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 자손을 위해 번듯한 가문을 세우고 싶어 하시는 뜻은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런 꿈을 가지실 수밖에 없는 아픔도 이해하지만,
그래서 제가 잠시 보관하고 있는 다른 가문의 족보를 내드리고 싶은 마음에 갈등도 했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닌 거 같습니다.
진정으로 아버님이 세우고 싶어 하시는 가문을 위한 일이 아닌 거 같아서
외람되지만 어른께 길게 말씀 올렸습니다.
천갑 : (깊은 시선으로 단아를 보는)
영자 : 너 배운 거 너무 티내는 거 아니니? 우리가 그런 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천갑 : 새로운 가문을 세운다. 새로운 가문이라.....
영자 : 그게 말만 그럴싸하지, 남들이 알아줘야 말이지. 우리끼리 새로운 가문이다 하면 뭐하냐구?
천갑 : 내 손주를 다른 가문 족보에 올리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지.
영자 : 여보.
천갑 : 얘야?
단아 : 네. 아버님.
천갑 : 족보라는 거,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거냐? 우리 아버님 대부터?
단아 : 네. 만들 수 있습니다.
천갑 : (끄덕이고) 그럼 한번 만들어보자.
강석 : 아버지, 진짜 잘 생각하셨어요.
영자 : 당신 또 쟤한테 넘어간 거야?
천갑 : 넘어가긴, 무슨 스무 고개 하냐? 옳은 말이면 들어주는 게 어른다운 거다.
강석 : 아버진, 제가 그렇게 말씀 드렸을 땐, 들은 척도 안하시더니.
천갑 : 얌마. 네가 언제 쟤처럼 말했냐? 없어 보이는 거라고 했지.
임마,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거야. 저렇게 조리있게 말을 해야지,
아버지, 없어보이세요, 그러면 내가 빈정 밖에 더 상하겠냐?
강석 : 저 사람이 말발 무지 좋거든요.
영자 : 아주 잘들 한다, 부자지간에.
천갑 : 아줌마? 저녁 준비 아직 안 됐나?
아줌마, 부엌에서 나오며.
아줌마 :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다 돼가요.
단아 : (일어서는)
천갑 : 왜?
단아 : 도와 드리려구요.
천갑 : 아냐, 아냐, 아줌마 혼자서도 잘 해.
단아 : (식당으로 움직이는)
천갑 : 그냥 있어도 되는데.
영자 : 벌써부터 며느리가 이뻐 죽겠지, 당신은.
천갑 : 왜 또 팩하니 그러냐?
#.14 씬. 강석의 집 식당.(밤)
아줌마, 단아, 상 차리고 있는.
천갑, 영자, 강석, 순진, 들어오는.
천갑 : 어디 우리 며느리감이 차려주는 밥상 좀 받아 볼까나.
아줌마 : 교수님이시라 공부만 하셨을 텐데, 언제 음식 하는 걸 이렇게 배우셨나 몰라요.
복지리 맛 좀 보세요.
천갑, 영자, 강석, 순진 앉고.
천갑 : (국 떠먹고) 어, 시원하네.
아줌마 : 사모님?
영자 : 왜?
아줌마 : 며느님 들어오시면 저 나가야 하는 건 아니죠?
영자 : 학교 나가야 하는데 얘가 어디 집안 살림할 시간이나 있겠어.
지금이야, 족보도 안 내놓겠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점수 따려고 저러는 거지.
강석 : 아니에요. 어머니. 이 사람 지금도 집안일 많이 하고 그래요.
영자 : (더 기분 나쁘고) 넌 이럴 때 좀 가만있으면 안 되니?
순진 : 오빠, 진짜 눈치 없다. 언니, 시집와서 눈치 없는 오빠 때문에 고생 좀 하시겠어요.
단아 : (강석 곱게 흘겨보면)
강석 : 밥 먹죠, 밥.
#.15 씬. 부엌.(밤)
진아, 쌀 씻고 있는. 수영, 들어오는.
수영 : 뭐해요? 혼자서?
진아 : 내일 아침 쌀 씻어놓고 들어가려구요.
수영 : 삼월 할머니랑 조만이는요?
진아 : 제가 할 수 있다고 먼저 들어가시라고 했어요.
수영 : 우리 색시만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닌가?
진아 : 저 음식 솜씨 꽝인 거 아시잖아요? 부엌에 있는 시간만 많지, 그냥 옆에서 구경하는 수준이거든요.
수영 : 나와요.
진아 : 들어가 계세요. 금방 하고 들어갈게요.
수영 : ....
진아 : 들어가시라니까요.
수영 : 싫어요, 그냥 구경하고 있을래요.
진아 : (웃으며 보는)
#.16 씬. 길.(밤)
수영, 진아손 잡고 걸어가는.
수영 : 시집 와서 매일 일만 하는 우리 색시 콧바람 좀 쐬주려구요.
진아 : (웃는)
수영 :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벌써 봄기운이 완연해요.
진아 : 네.
수영 : 아, 좋다, 색시손 잡고 밤 산책 하는 거.
진아 : 지나가는 사람들 잡고 막 자랑하고 싶은데.
수영 : (보면)
진아 : 우리 원조교제 아니에요. 우리 신랑이에요.
수영 : (보면서 웃는)
#.17 씬. 종가 앞.(밤)
강석, 단아 차에서 내리는.
강석 : 우리 아버지, 완전히 포섭한 거 축하합니다.
단아 : 내가 무슨 밀파 간첩이에요, 포섭하게?
강석 : 하여간 말발 하난. 나도 집에 가서 써가면서 연습해야지.
단아 : 그렇게 해선 안 돼요. 순발력을 키워야지.
강석 : (단아 얼굴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면서,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래, 졌다, 졌어.
수영E : 풍기문란으로 신고 한다. 두 사람.
강석, 단아 돌아보면. 강석, 얼른 단아 얼굴 놓고.
수영, 진아, 손잡고 걸어오는.
진아 : (수영의 손에서 손을 빼려고 하면)
수영 : (진아의 손을 더욱 꽉 잡고 걸어오는)
강석 : 어디 다녀오십니까?
수영 : 응. 우리 색시 콧바람 쐐 주려고 밤 산책 갔다 오는 길이야.
강석 : 부럽습니다.
수영 : 지금까지 데이트 하고 왔으면서 부럽긴?
강석 : 전 이 사람 놔두고 가야 하지만, 두 분은 같이 들어가시잖아요?
수영 : 그런가. 그럼 부럽기도 하겠다. 우린 들어갈 테니 풍기문란 계속 해라.
수영, 진아 웃으며 들어가는.
강석 : 풍기문란 계속 합시다.
단아 : 큰 오빠, 참 좋아 보여요.
강석 : 신혼부분데 당연하죠.
단아 : 예전엔 저러지 못하셨어요. 전에 새언니랑은 저렇게 다니는 거 본 적 없거든요.
강석 : 그러셨어요?
단아 : 네. 가요, 들어갈게요.
강석 : 어른 말 무시할 겁니까?
단아 : (보면)
강석 : 어른이 풍기문란 계속 하라고 하셨으면 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단아 : (얼른 안았다 놔주면서) 됐죠?
강석 : (버럭) 이게 풍기문란 입니까?
#.18 씬. 태영의 방.(밤)
태영, 책상 앞에 앉아 반성문 쓰고 있는.
말순, 자리끼 들고 들어오는.
말순 : 어느 부분 다정하게 밤 산책 다녀오는데, 어느 부분 반성문이나 쓰고 앉았고.
태영 : 야, 야, 빨리 써라. 동동이 자식, 또 다 안 썼냐고 들어올라?
말순 : (볼펜 들고 앉아서) 진심으로 이혼 얘기 한 거 반성합니다, 아드님. 더 이상 뭐라고 써야 하는 거야?
태영 : 그걸론 안된다잖냐? 난 그래도 세 줄 더 썼다.
말순 : (들여다보면서) 이게 뭐야? 네 엄마가 아빠의 화를 돋궈서 어쩔 수 없이 이혼얘길 해야 했지만,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다. 다 내 탓이라는 거잖아?
태영 :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말순 : 아무리 화가 난다고 이혼 애기부터 한 건 잘 한거냐?
태영 : 그러니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건들길?
말순 : 네가 이혼 얘기만 안했어도 반성문까진 안 썼을 거 아냐?
동동, 문 열고.
동동 : 또 싸우는 거예요?
태영, 말순, 얼른 표정 바꾸면서.
태영 : 아냐, 아냐, 열심히 반성문 쓰고 있는 거야.
동동 : (들어와 서면서) 내가 진짜 엄마, 아빠 때문에 마음 편히 잠도 못 잔다구요.
#.19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이불에 누우려고 하면. 동동, 반성문 들고 들어오는.
만기 : 반성문은 받아왔냐?
동동 : 네.
만기 : 동동아? 아들이 부모한테 반성문 받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동동 : 저도 이러고 싶겠어요? 할아버지?
제가 이렇게라도 안하면 우리 엄마, 아빠 대책이 없는 분들이신 걸 어쩌겠어요.
만기 : 네가 참 고생이 많다.
#.20 씬. 종가 전경.(낮)
#.21 씬. 만기의 방.(낮)
만기, 석호, 영인, 단아, 강석 앉아있는.
만기 : 혼인 날짜는 여자 쪽에서 잡는 법이니, 한 달 뒤 일요일이 어떨까 싶은데?
평촌 어른께서 두 사람 사주로 그 날이 길일이라고도 하시고.
강석 : 할아버님?
만기 : (보면)
강석 : 좀 당겨 주시면 안 될까요?
단아 : (눈치 주고)
강석 : 전 다음 주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영인 :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다음 주가 괜찮다는 건가?
강석 : 형님들 결혼하실 때처럼 저희도 간소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영인 : 그건 자네 생각이고, 자네 어머님은....
석호 : (지긋이 영인 손 누르면서)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은 자네 마음은 알겠네만
딸 시집보내는 부모 마음은 그런 게 아닐세.
강석 : 그럼, 이 주 후로 해주십쇼. 한달은 너무 깁니다.
영인 : 준비하려면 한달도 짧거든.
강석 : 할아버님?
만기 : 왜?
강석 : 내기 바둑으로 날짜를 정하시는 게 어떨까요?
영인 : 자네, 지금 그게 말이 되나? 결혼 날짜를 할아버님과 내기 바둑으로 정하겠다는 게?
만기 : 잠깐만 있어보게. 평촌 어른께 이 주 후에도 좋은 날짜가 있는지 여쭤보고.
영인 : 아버님.
강석 : (핸드폰 꺼내며) 전화 여기 있습니다.
#.22 씬. 석호의 방.(낮)
석호, 영인 들어오는.
영인 : 저 사람 장난도 아니고. 아버님까지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어.
석호 : 손주 사위가 귀여워서 저러시는 거잖아. 이실장이 내기에서 이기면 이 주 후로 하자.
영인 : 저 사람 어머니 마음에 들게 혼수 준비하려면 한달도 빠듯하단 말이야.
석호 : 서둘러 주자. 저렇게 단아 빨리 데려가고 싶어서 성환데.
영인 :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사위야.
석호 : (웃으며) 우리 딸이 너무 좋아서 저러는 거 아니냐?
#.23 씬. 만기의 방.(낮)
만기, 강석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 두고 있는.
태영, 수영, 동동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태영 : 참 보다 보다, 결혼 날짜로 내기 바둑 두는 할아버지와 손주 사위는 처음 보네.
만기 : 조용히 해라. 집중 안 된다.
강석 : 저도 꼭 이겨야 하는 승부거든요. 조용히 좀 해주십쇼, 작은 형님.
#.24 씬. 마루.(낮)
태영, 수영, 만기의 방에서 나오는.
단아, 삼월, 찻상 들고 오는.
태영 : 넌 어쩌다 저렇게 이상한 놈한테 시집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냐?
아주 눈에 핏대를 세웠다, 저 놈.
삼월 : 저 놈이 뭐야? 제부 될 사람한테.
태영 : 제부 될 놈이 워낙 이상하니까 그렇죠.
영인, 방에서 나오며.
영인 : 두 사람 밀가루 반죽 좀 해.
태영 : 네?
영인 : 점심에 칼국수 할 거거든. 힘 있는 남자들이 반죽을 해야 찰지지 않겠어.
#.25 씬. 부엌.(낮)
수영, 태영, 밀가루 반죽하고 있고,
진아, 멸치 똥 떼 내고 있고, 말순, 계란 지단 부치고 있고.
태영 : 언놈은 팔자 좋게 바둑이나 두고 있는데, 언놈은 밀가루 반죽이나 치대고 있고.
수영 : (웃으며) 너 지금 나한테 언놈이라고 한 거냐?
말순 : 어, 어. (지단이 아니라 계란 뭉치가 돼있다)
태영 : (일어나서 보며) 또냐? 어떻게 계란 지단 하나 제대로 못 부치냐?
삼월, 단아 들어오는.
삼월 : 계란 지단 부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호박이나 꺼내서 씻어.
말순 : 네.
단아 : (진아 옆에 앉아 멸치 다듬는)
태영 : 너 속으로 강석이 저 놈이 이겨라 하고 빌고 있지.
단아 : 오빤.
태영 : 이 오라버닌 너 하루라도 더 데리고 있고 싶은데, 넌 아니지?
말순 : 참 못됐다. 자긴 결혼해서 마누라 데려다 놓고,
여동생은 하루라도 더 데리고 있고 싶다는 저 못된 오빠를 어째야 할까나.
태영 : 그건 그거구, 이건 이거지.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 시집보내는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하냐?
동동, 들어서고.
동동 : 진짜들 이러실 거예요? 엄마, 아빠.
태영 : 야, 입 다물자, 또 반성문 쓸라.
동동 : 야? 아빠, 반성문 두 장이야.
#.26 씬. 만기의 방.(낮)
만기, 강석 바둑 두고 있는.
강석 : 할아버님?
만기 : 왜 그러나?
강석 : (무릎 꿇는)
만기 : 바둑 두다 말고 뭐하는 건가?
강석 : 봐주십쇼. 이럼 또 무승부 됩니다. 제발 오늘은 좀 져주세요, 할아버님.
만기 :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거 아니겠나?
강석 : (만기 팔 잡으면서) 한 달은 정말 너무 깁니다, 할아버님. 손주 사위 좀 살려주십쇼.
#.27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영자, 천갑, 순진, 앉아있고, 혜주 서있는.
천갑 : 데려와 보라니까.
혜주 : 정말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아버지.
천갑 : 컴퓨터에 그 놈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다면서, 그럼 그게 연애하는 게 아니고 뭐냐?
혜주 : 그건 그냥.....
순진 :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사이면서 너 빼지마 얘.
혜주 : 정말 아니라니까. 다녀올게요. (인사하고 나가는)
영자 : 일요일에도 만나러 가면서 아니라는 거 봐. 순진아?
순진 : 네?
영자 : 네가 뒤 좀 밟아봐.
#.28 씬. 부엌.(낮)
수영, 태영, 방망이로 반죽 밀고 있고, 단아, 옆에서 칼로 썰고 있고, 삼월, 지단 썰고 있고,
진아, 호박 채 썰고 있고, 말순, 끓고 있는 큰 냄비 앞에서 국물 맛보고 있는.
주정, 차 마시고 서서.
주정 : 조만이 얜 어디 간 거야?
삼월 : 봄 옷 한 벌 사러 간다고 나갔어.
주정 : 웬일이래? 걔가 옷을 다 사러 가고. 돈 아까워서 절대 지 돈으론 옷 안 사 입는 애가.
말순 : 앗 뜨거.
태영 : 뎄냐?
말순 :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아냐.
태영 : 진짜 물가에 내놓은 애도 너 같진 않을 거다.
삼월 : 또 또 반성문 한 장 더 쓰고 싶어?
태영 : 당신 같진 않으실 겁니다.
진아 : 앗. (칼로 손 베고)
수영 :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벴어요?
진아 : 아니에요, 살짝.....
수영 : (피가 약간 베어나는 진아손 잡고 어쩔 줄 모르는) 피나잖아요. 들어가요. 약 바르고 밴드 붙이게.
진아 : 괜찮아요. 꾹 누르고 있으면 돼요.
수영 : (진아 끌고) 들어가요.
진아 : 괜찮은데.
수영, 진아 데리고 들어가는.
주정 : (신기한 듯 보면서) 수영이 쟤 얼굴 하얘진 거 봤냐? 응급실 가자고 안하는 게 다행이다.
강석, 들어서는.
강석 : 저 이겼습니다. 하단아씨? 우리 이 주 뒤에 결혼합니다.
단아 : (부끄럽고)
태영 : 아주, 신났다, 신났어.
주정 : 축하해, 손주 사위.
강석 : 고맙습니다, 고모할머님.
태영 : 야, 너도 이젠 이 집 식구니까 이리 와서 이것 밀어라.
강석 : 네?
태영 : 뭐하냐? 반죽 좀 밀라는데.
강석 : 네? 네. 근데 저 그런 거 해본 적 없는데요.
태영 : 누군 태어날 때부터 밀가루 반죽 밀줄 아냐? 빨리 와.
삼월 : 아이고, 그만 둬.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 부엌일을 왜 시키려고 그래?
태영 : 너 작은 형님 말 씹냐?
강석 :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태영 앞에 앉는)
단아 : 손도 안 씻고 앉으면 어떡해요? 이리 와서 손이나 씻고 앉아요.
강석 : (개수대 앞으로 가는)
주정 : 처갓집이 무섭긴 무섭네. 하라는 대로 하는 거 보면.
#.29 씬. 식당.(낮)
장기, 조만, 식사하고 있는. 서로 수줍어하면서.
장기 : 레스토랑 같은데 가서 드셔도 되는데.
조만 : 돈 아깝게 뭐 하러 비싼 거 먹어요. 비싼 거 먹으나, 싼 거 먹으나 나오는 건 똑같은데.
장기 : 아, 네, 참 소탈하신 성격이신가 봐요. (김치찌개 먹다가) 아, 이거 왜 이렇게 짜. 짜죠?
조만 : (멍하니 보는)
장기 : 짜지 않으세요?
조만 : (입을 틀어막으며 흑 하고 울면서 뛰쳐나가는)
장기 : (놀라서 보는)
#.30 씬. 공원.(낮)
조만, 울고 앉아있는. 그 옆에 앉아 눈물이 글썽해 있는 장기.
장기 : 아니, 어쩌다 미각을. 사람이 먹는 맛에 사는 건데.
조만 : 그게 제 운명의 비극이에요. 아니, 또 있어요.
장기 : 또 뭐가?
조만 : 제가 살림 귀신이 붙은 인간이거든요.
장기 : 귀, 귀신이요?
조만 : 근데, 제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릇 깨는 건 기본이고, 바느질을 했다하면 손 꿰매는 게 일이구. (흑하고 얼굴 가리고 우는)
장기 : 아, 진짜 많이 비극적이시다. 그런데 제가 원래부터, 영화를 봐도 슬픈 영화를 더 좋아하고,
드라마를 봐도, 왈가닥 여주인공보단 비련의 여주인공한테 끌리는 편이거든요.
조만 : (보는)
장기 : 조만씨 처음 탁 봤을 때부터, 저한테 그런 느낌이 있더라구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31 씬. 커피숍.(낮)
혜주, 현규 서빙하고 있으면,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순진.
#.32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천갑, 영자, 순진 얘기하고 있는.
영자 : 뭐? 우리 혜주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순진 : 그 남자애랑 붙어있고 싶어서 하는 거겠죠 뭐.
영자 : 그럼 뭐야? 가난한 집 아들인가. 지가 벌어서 공부해야 하는.
천갑 :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잘 됐어. 데릴사위 들이기 딱 맞춤이다.
영자 : 여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며느리는 없는 집안에서 들이고, 딸은 있는 집안으로 보내라는 말도 있는데.
천갑 : 우리가 데리고 살면 되는데 좀 없으면 어떠냐? 애만 번듯하고 똑똑하면 돼.
순진 : 똑똑한 건 모르겠구요, 번듯한 건 진짜 죽여줘요. 혜주 애인만 아니면 딱 내 스타일인데.
#.33 씬. 커피숍.(낮)
현규, 혜주 테이블 닦고 있는.
현규 : 좀 앉아서 쉬어요,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는데.
혜주 : 발표 언제 나요?
현규 : (보면)
혜주 : .....
현규 : 나 대학원 시험이요?
혜주 : 네.
현규 : 다음주에.
혜주 : 네. (돌아서는)
현규 : 나도 붙었으면 좋겠어요.
혜주 : .....
현규 : 떨어지면 군대나 가자 그랬는데. 아니 솔직히 군대라도 갔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거기가 나 군대 가는 거 너무 겁내하니까 우선은 붙었으면 좋겠다 그래지네요.
혜주 : ......(돌아서는) 내 욕심이었던 거 같아요.
현규 : .....
혜주 : 욕심 같은 거 갖지 말자,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었나 봐요.
어쩌면, 그쪽 군대 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그럼 마음 정리하기 훨씬 쉬울 테니까.
현규 : 여기서 할래요. 그쪽 친구 해주면서. 아, 그러려면 시험에 붙어야 하는데, 걱정 되네.
#.34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천갑, 영자, 강석 앉아있는.
영자 : 이 주 뒤? 무슨 결혼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겠다는 거야?
강석 : 한 달 뒤로 하자시는 거 제가 사정해서 겨우 이 주 뒤로 잡은 거예요.
천갑 : 그래, 그래, 이왕 하는 거 빨리 해치워버리자.
그래야, 저 놈 매일 하교수 집에 가서 붙어사는 거 안볼 거 아니냐? 여보, 좋게 생각하자, 좋게.
영자 : 당신까지 구렁이 담 넘어 가듯 그러지 마. 하객 천명 넘는 장소 잡는 것도 얼마나 알아봐야 하는데.
강석 : 천 명이요?
영자 : 그것도 우리 쪽 하객만이야. 하교수네가 얼마나 부를지 아직 모르는 거구.
강석 : 어머니, 무슨 하객을 천 명씩이나 부르겠다고 그러세요?
천갑 : 야, 그건 아니지. 내 인맥이 보통 인맥이냐?
하객 그 정도는 불러야 이천갑 아들 장가보내는구나, 제대로 소문 날 거 아니냐?
강석 : 하교수 오빠분들 결혼 하시는 거 보셨잖아요? 소란스러운 거 싫어하는 집안이에요.
영자 : 쟤, 쟤 말하는 거 봐. 그 오빠들은 재혼이잖아? 작은 오빠는 애까지 딸린 이혼남이구.
그러니까 조용히 해치웠지만, 넌 우리 집안에서 첫 결혼이야.
강석 : 저, 그런 떠들썩한 결혼식 싫어요.
영자 : 결혼식에 대해선 너 왈가왈부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강석 : 제 결혼식인데 어떻게 제가 아무 말도 안 해요?
식구들끼리 조용히 하는 걸로 하게 해주세요, 어머니.
영자 : 너? 솔직히 말해.
강석 : (보면)
영자 : 너도 좀 캥기는 거지? 넌 초혼이지만, 하교수는 재혼이라,
사람들 많이 부르는 게 부담스러운 거잖아?
강석 : 그런 거 아니에요.
영자 : 그런 거 아니면 가만있어. 근데 너....와이셔츠 앞에 뭐가 묻은 거니?
강석 : 네? (와이셔츠 내려다보면)
영자 : 허연 거 그게 뭐야?
강석 : 아, 밀가루 반죽 밀다가 묻었나보네요.
천갑 : 뭘 밀어?
강석 : 점심에 칼국수 하는데, 형님들이 밀가루 반죽 미시길래 도와 드렸거든요.
영자 : (입 벌어지고,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참 여러 가지 하고 다닌다, 너.
강석 : 해보니까 재밌던데요 뭐.
천갑 : 야, 야, 네 엄마 더 열 받게 하지 말고, 그만 올라가라.
강석 : 네. (일어서며) 어머니, 정말 저 결혼식 떠들썩하게 하는 거 싫어요.
천갑 : 올라가라.
#.35 씬. 천갑의 방.(낮)
천갑, 영자 들어오는.
천갑 : 고스톱 칠까? 내가 잃어줄게.
영자 : 내가 지금 고스톱 칠 기분이야? 아니, 아무리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고 하지만, 부엌일까지 하고 다녀. 다니길.
천갑 : 여보?
영자 : 왜?
천갑 : 천 명은 좀 과한 거 아닐까?
영자 : 당신 또 왜 이래?
천갑 : 저 자식, 골질하면 어떡하냐? 시끄러운 거 싫다고 하교수 데리고 가서
둘이서 결혼식 해치우고 오면 그게 더 골 때리는 거 아니냐?
영자 :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강석이 쟤가 그러고 싶어도
하교수가 우리 눈치 보여서 그렇게는 못할 테니까.
#.36 씬. 단아의 방.(낮)
단아, 영인 앉아있는.
단아 : 죄송해요, 어머니. 직업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을 써야 할 데가 있어 써버리는 바람에 결혼 자금으로 내놓을 게 없어서.
영인 : 참, 별 소릴 다 하네.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오빠들이 너 결혼 자금으로 쓰라고 많이들 내놨어.
단아 : (보는)
영인 : 네가 내놔도 우리 안받았을 거야.
우린 그냥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거든.
단아 : .....
#.37 씬. 수영의 방.(낮)
수영, 진아, 태영, 말순, 단아 앉아있는.
단아 : 고마워요.
태영 : 자식아, 고맙긴 뭐가 고마워, 당연한 걸 가지고.
말순 : (태영 쿡 찌르며) 얹혀간 주제에 너무 큰 소리 치는 거 아니야?
태영 : (말순 입 막으면서) 당신은 뭘 얹혀갔다고 이러나?
수영 : 단아야?
단아 : 네.
수영 : 오빤, 그 친구가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차가운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왜 네가 그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는지 알아지는 거 같다.
그리고, 이 사람하고 나 결혼하는데, 네 영향이 컸다.
단아 : .....
수영 : 너 용기 내는 거 보면서 오빠도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하게 됐고,
어린 이 사람한테 청혼 할 수 있었다. 그거 고맙게 생각한다.
태영 : 강석이 그 자식, 좀 놀면서 산 건 분명한 거 같지만,
이 작은 오빠가 단단히 못을 박아뒀으니까 다신 룸싸롱 같은 데 가지 않을 거다.
말순 : 진짜 수준 차이 확실하게 난다.
태영 : 무슨 수준 차이?
#.38 씬. 태영의 방.(낮)
태영, 말순 들어오는.
말순 : 아주버님처럼 좀 품위 있고 근사하게 못하냐?
아주버님 말씀 들으면서 코끝이 찡해 있는데 거기서 룸싸롱 얘기로 맛을 보내냐?
태영 :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넌.
말순 : 아니, 어떻게 10분 차이 쌍둥이라면서 달라도 이렇게까지 다를 수가 있냐?
혹시 출생의 비밀 같은 거 있는 거 아니냐?
태영 : 너....너까지. 내가 평생 형 반만큼 하란 말 때문에 상처받고 산 놈이라고 얘기 했을 텐데.
말순 : 그러니까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어도 본전은 할 텐데 왜 떠벌려서 수준 차이를 내냐구?
태영 : 그래, 난 덜 떨어졌다, 덜 떨어져서 입만 벌렸다하면 수준 차이를 낸다.
말순 : 조용히 못해. 또 동동이한테 혼나고 싶어?
태영 : (엎드리면서) 그래, 결혼을 한들 뭐하겠냐?
마누라는 수준차이 난다고 업신여기지, 아들놈은 맨날 반성문이나 써내라고 하지.
(발버둥치면서) 나같이 불쌍한 인생도 없을 거다.
말순 : (태영 엉덩이 때리면서) 조용히 울어, 조용히. (하는데, 핸드폰 울리는) 어, 엄마? 어, 어.
(말하면서 태영을 바라보는) 그랬어? 알았어. 응. 응.
제부더러 이번엔 정말 정신 차리고 잘 해야 한다고 해. 끊을게. (전화 끊고) 여보?
태영 : (보는) 왜 그러냐? 근지럽게.
말순 : (태영 일으켜 앉히는)
태영 : 왜 그래?
말순 : 리조트에 우리 제부 취직시켜 줬다면서?
태영 : 어, 그거, 마침 자리가 하나 벼서.
말순 : (끌어안으며)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여보야.
태영 : 야, 야, 근지럽게 이러지 마라.
말순 : 아, 내 이쁜 신랑 하태영. 아주버님하고 수준차이 좀 나면 어떠냐? 이렇게 착하고 이쁜데.
태영 : (확 밀어내며) 수준차이 소리 좀 그만 못하냐?
#.39 씬. 백화점.(낮)
단아, 영인 그릇을 보고 있는.
가전제품 매장, 단아, 영인 돌아보고 있는.
#.40 씬. 커피숍.(낮)
단아, 영인 차를 마시고 있는.
단아 : 너무 과한 거 같아요, 어머니.
영인 : 더해주고 싶은데 참는 거야.
단아 : 그래도.....
영인 : 아버지하고 내 마음도 그렇고 오빠들 마음도 있으니까 해주는 대로 가져가.
단아 : 새언니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구요.
영인 : 그런 거 이해 못할 사람들 아니야, 새언니들.
단아 : 고단하셔서 어떡해요? 몸도 무거워지실 땐데.
영인 : 아직은 그럴 때 아닌가봐. 배만 살짝 나오려고 하지 입덧도 가라앉아서 고단 한 거 모르겠어.
그치만 말 나온 김에 펑퍼짐한 옷 몇 벌 사가지고 가야겠다.
나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일리스튼데 살짝 짜증나려고 하는 거 있지.
당분간 임산부 옷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단아 : 어머닌, 맵시가 좋으셔서 임산부 옷 입으셔도 보기 좋을 거예요.
영인 : (웃으면서) 그건 그래.
#.41 씬. 석호의 사무실.(낮)
석호, 일하고 있으면, 영인 들어오는.
석호 : 쇼핑은 다 했어?
영인 : 대충은. 친척들한테 보낼 예단은 단아 모르게 준비하려구.
석호 : 그래, 잘했어. 그 자식 그거 알면 마음만 무거울 거야.
영인 : (배 만지면서) 이 녀석은 딸이었으면 좋겠어.
석호 : 왜?
영인 : 단아 시집보내면서 그 시어머니한테 쌓인 거 많은데 원한 풀어야지.
석호 : (웃으며) 어떻게 원한을 풀려구?
영인 : 딸만 주시면 황송합니다, 하는 집안으로 시집보낼 거야. 정말 몸만 보낼 거라구.
석호 : 행여나 그렇게 되겠다.
영인 : 두구 봐. 그래서 이름도 지어놨어.
석호 : 뭐로?
영인 : 단단이.
석호 : (웃는)
#.42 씬. 커피숍.(낮)
혜주, 현규 마주 서있는.
현규 : 합격 했다구요. 나 머리는 진짜 좋은가 봐요. 그렇게 공부 안하고 땡땡이 쳤는데, 턱 붙는 거 봐요.
혜주 : (눈물 글썽해서 보는)
현규 : 혹시 나 붙으라고 물 떠 넣고 장독대에서 빌고 그런 거 아니에요?
혜주 : (미소 짓는)
현규 : 이따가 저녁에 내가 한턱 쏠게요. 합격 기념으로.
혜주 : 아니요, 내가 쏠 거예요. 친구분들도 오라고 해요.
하는데, 영자, 순진 들어오는.
현규 : (돌아서며) 어서 오세요.
혜주 : (놀라고) 엄마?
영자 : (현규를 위 아래로 훑는)
혜주 : 어, 어떻게?
영자 : 나 혜주 엄마예요.
현규 : (인사하는) 정현규입니다.
영자 : 혜주한테 한번 집에 데려오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들어서 내가 이렇게 왔어요.
혜주 아버지가 한번 가서 어떤 사람인지 좀 보고 오라고 성화도 하시고.
현규 :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표정으로 혜주를 보는)
혜주 : 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영자를 끌고 나가려고 하면)
영자 : 얘가 왜 이래? 말 좀 하고.
혜주 : 엄마, 제발요, 제발..... (억지로 영자를 끌고 나가는)
순진 : 너 너무 빼는 거 아니니?
혜주 : (순진도 끌고 나가는)
#.43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천갑, 영자, 순진 앉아있는.
영자, 물 벌컥 벌컥 마시면서.
영자 : 아무 사이도 아니래.
순진 : 진짜 이상한 애예요, 혜주 걔,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애 사진을 왜 컴퓨터에다 도배를 해 놓냐구요.
영자 : 남자애가 멍한 얼굴 하는 거 보니까 아무 사이 아닌 건 맞는 거 같애.
천갑 : 난 또, 연애라도 하나보다 해서 대견하게 생각했구만.
순진 : 아.
천갑, 영자, 순진을 보는.
순진 : 짝사랑이다, 그거예요, 이모부, 이모. 혜주 혼자 짝사랑하는 거라구요.
#.44 씬. 커피숍.(낮)
현규, 손님에게 서빙하고 있으면. 친구들 들어오는.
성민 : 발표 났나? 친구?
현규 : 났다.
강하 : 군대 가는 건가? 친구?
현규 : 내가 니들처럼 여름 학기에 졸업하는 머리신가. 붙으셨네, 이 몸은, 가뿐히.
성민 : 근데, 혜주 걘 왜 울상을 하고 저 밖에 앉아있냐? 난 너 떨어져서 그러나보다 했는데.
현규 : .....
#.45 씬. 상가 내.(낮)
혜주, 고개 푹 숙이고 앉아있는, 옆에 다가와 서는 현규.
현규 : 왜 이러고 있어요?
혜주 : (고개 드는)
현규 : ....
혜주 : 창피해서요.
현규 : 그 사촌 언니 재밌는 분 같아요. 말 이상하게 전해서 어머니까지 찾아오신 거 같던데.
혜주 :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현규 : (보면)
혜주 : 내가 컴퓨터에 그쪽 사진 많이 올려놨거든요.
사촌 언니가 그거 보고, 사귀는 사람 있는 거 같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려서.
현규 : 내....사진, 컴퓨터에 많이 올려놨어요?
혜주 : ......
현규 : 언제 찍었는데?
혜주 : 나, 스토커 같죠?
현규 : (보다가 웃으며) 신고 안할 테니까 이따가 합격 축하턱 거하게 쏴요.
혜주 : (미소 짓고 보는) 네.
#.46 씬. 강석의 사무실.(낮)
강석, 일하고 있으면, 진호 들어오는.
진호 : 김선태 전홥니다.
강석 : ....
진호 : 자리에 안 계시다고 했는데도 계속 전화를 합니다.
강석 : 몇 번이야?
진호 : 2번입니다.
강석 : (전화 받는) 이강석입니다. (듣고) 다시 만날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나가죠. (수화기 내려놓는)
진호 : 만나시려구요?
강석 : 나가봐라.
진호 : 만나시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강석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가봐.
#.47 씬. 룸싸롱.(밤)
선태, 술을 마시고 있는. 들어오는 강석.
강석 : (앉는)
선태 : 그래, 네 말대로 나 마약에 쩔어서 주먹질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다.
강석 : .....
선태 : 도박에 미쳐서 아버지 회사 말아먹고, 결국엔 화병으로 돌아가시게까지 만든 인간이지.
강석 : .....
선태 : 인생에 희망이라는 게 전혀 없는 인간이다.
어쩌면 네가 아니었어도 결국에 이렇게 밖에 될 수 없었을지 몰라.
그렇지만 이렇게 바닥으로 까진 안 떨어졌을 거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 나이에 이렇게 시궁창에 처박히진 않았을 거야.
그래서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다.
강석 : .....
선태 : 나머지 인생 라스베가스에 가서 게임이나 하면서 보내고 싶다. 30억만 만들어주라.
강석 : (차갑게 미소 짓는)
선태 : 그럼 네가 나한테 한 모든 짓거리 깨끗하게 잊어줄 테니까.
강석 : 말이 안 된다는 거 모르십니까?
선태 : 네가 시궁창에 처박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애원한다고 생각해주라.
너한테 그 정도 돈 껌값이나 다름없을 텐데.
강석 : 비싼 껌을 씹으며 사신 모양이군요. 난 댁한테 그만한 돈을 적선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신 이런 일로 보자고 하지 마십쇼. (일어서는)
선태 : (일어서서 강석의 팔을 잡으며, 애원하는 표정으로) 사정하는 거다.
강석 : 제가 그런 게 통할 놈으로 보이십니까?
선태 : 내가 아무것도 없이 너한테 돈을 달라고 하는 걸로 보이냐?
강석 : ......
선태 : 시궁창에 처박혀 있지만, 그래도 한때는 명성 아들로 행세하고 산 놈이야.
한국에 와서 널 찾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지냈을 거 같냐?
강석 : .....
선태 : 왜 검찰에 안 갔냐구? 검찰에 가봐야 나한테 돌아올 게 없거든.
너 감방에 넣어봐야, 나한텐 실속이 없거든.
강석 : .....
선태 : 주가 조작, 외환 관리법 위반. 검찰에서 구미가 당겨할 증거들 수집하느라 애 좀 먹었지.
강석 :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그럼 가지고 가시죠, 검찰에.
선태 : 협상하자, 우리.
강석 : 협상이라는 건 말이죠. 서로 맞바꿀 게 있을 때 가능한 겁니다.
난 댁하고 맞바꾸고 싶은 게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 술값 정도 계산해드리는 게 전부일 거 같군요.
그럼, 하루 속히 시궁창에서 빠져나오시길 빕니다.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선태 : (술병을 던지는. 벽에 부딪혀 깨지는 술병) 두고 보자, 이강석, 나 이대로 혼자 죽진 않아.
강석 : (나가는)
선태 : (분노에 찬 눈빛으로)
#.48 씬. 강석의 방.(밤)
천갑, 의자에 앉아있는, 강석, 들어오는.
천갑 : (일어나는) 진호 전화 받았다. 명성 셋째 아들 만났다구.
강석 : 네.
천갑 : 왜 그런 놈을 혼자 만나러 다녀?
강석 : 폐인이 된 인간이에요.
천갑 : 만나서 뭐라디?
강석 : 30억을 달라고 하더군요.
천갑 : (기가 막히고) 미친 놈.
강석 : 그냥 발악을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천갑 : 네 뒷조사를 하고 다녔다던데?
강석 : 허술하게 일처리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천갑 : 강석아?
강석 : 네.
천갑 : 30억은 좀 과하고, 계속 귀찮게 굴면 골치 아플 테니, 몇 푼 쥐어주고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
강석 : 그런 인간들 잘 아시잖아요? 한번 먹이를 던져주면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뭔가 약점이 있어서 먹이를 던져줬다는 걸로 생각하니까요. 죽을 때까지 귀찮게 굴 거예요.
천갑 : 네가 계속 시달릴까봐 그러지 난.
강석 : 상대 안 해주면 제 풀에 나가떨어질 거예요.
#.49 씬. 마루.(밤)
삼월, 조만, 진아, 말순, 이불, 베개, 바느질하고 있는.
삼월은 저고리 꿰매고 있는. 영인은 그냥 앉아있고.
주정, 들어오는.
삼월 : 늦었네.
주정 : 지방에 취재 갔다 오는 길이야. 우리 단아 진짜 시집가긴 가나보네.
새색시들이 시집오자마자 시누이 시집보내느라 고생들 많아. 근데 조카댁은 구경만 하는 거예요?
영인 : 전 임산부라 허리 굽혀서 바느질하면 현기증이 나거든요.
주정 : 바느질 전혀 못하는 건 아니구요?
영인 : (웃으며) 며느리들 앞에서 위신 좀 세워주세요, 고모님.
단아, 방에서 나오는.
삼월 : 왜 또 나와? 신부는 자기 혼수 바느질 하는 거 아니라니까.
단아 : 미안해서요. 옆에서 바늘귀라도 뀔게요.
수영, 태영, 다과상 들고 부엌에서 나오는.
수영 : 자, 야식들 드시면서 하세요.
말순 : 그렇지 않아도 출출했는데. (하면서 일어서 다과상 앞으로 가려는데,
치마와 이불을 함께 꿰매서 이불이 딸려오는)
태영 : 참, 재주도 용하다. 어떻게 자기 치마하고 이불을 같이 꿰매냐?
주정 : 단아야? 네 방에서 휴대폰 울리는 거 같다. 참 징글징글하게도 찾는다, 네 신랑감.
#.50 씬. 단아의 방.(밤)
단아, 들어와서 핸드폰 받는. 밖에선 식구들 웃음소리 들리고.
단아 : 네.
강석E : 뭐해요?
단아 : 저 혼수 바느질들 하시는데 심부름 하려고 나가있었어요.
강석E : 우리 덮을 이불 그런 거요?
단아 : 네.
강석E : 진짜 우리가 결혼을 하긴 하나보네.
#.51 씬. 강석의 방.(밤)
강석 : (핸드폰) 하단아씨?
단아E : 네.
강석 : 고맙습니다. 나 같은 놈하고 결혼하겠다고 결심해줘서.
세상 사람들에게 원한 많이 사고 산 나 같은 놈하고 결혼한다고 해줘서.
단아E : 왜 그런 말을 해요?
강석 : 고마워서요. 약속 할게요. 당신을 닮아가야 하니까,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52 씬. 웨딩드레스 샾 (낮)
커튼이 열리고 단아, 웨딩드레스 입고 서있는.
강석, 바라보는. 예복 차림으로.
단아 : (수줍게 미소 짓는)
강석 :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53 씬. 번화가 (밤)
강석, 단아 손 잡고 걸어오는.
강석 : 딱 세 밤 남았다. 공식적으로 사고 쳐도 되는 날이.
단아 : (흘겨보면서) 결혼식 날을 사고 쳐도 되는 날이라고 하는 건 너무 삭막한 거 아니에요?
강석 : 서른 넘어 결혼하면서, 아무 사고 없이 결혼하는 게 더 삭막한 거 아닙니까?
단아 : 밝힘증 환자 같거든요?
강석 : 그렇게 만든 게 누군데. (단아 어깨 잡아서 벤치에 앉히며) 기다려요. 커피 빼올 테니까.
단아 : 안 마셔도 돼요.
강석 : 기다려, 갈게, 그거 좋아하잖아요?
단아 : (미소 짓고)
강석 : (자판기가 있는 건너편 길로 건너가는)
단아 : (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강석 : (자판기에서 커피 뽑으면서 문자 누르는)
단아 : (핸드폰 보면)
- 기다리시오. 사고 못치고 장가가는 놈의 원한이 어떤 건지 첫날밤에 보여주겠소.
단아 : (고개 들고 컵 두 개를 들고 웃으며 길을 건너고 있는 강석을 곱게 흘겨보는)
강석 : (장난스럽게 웃으며 길을 건너는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에 눈이 부시고.
사람들 놀라서 돌아보고)
단아 : (굳어져서 일어나는)
강석이 들고 있던 컵 두 개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강석, 길 위로 쓰러지는.
강석의 시선, 슬로우로 놀라 뛰어오는 단아의 모습이 보이고.
강석, 천천히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하는 시선으로 달려오는 단아의 모습이. 그 위로.
강석 : (마음의 소리) 저.....여자.....울게 하면.....안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