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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볼 수 있는 사람(히12:14)-2019.2.10
믿음의 결국은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주님을 봅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보고, 또 어떤 이는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봅니다. 혹자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보고, 찬양을 통해서도 주님을 봅니다. 어떤 이는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주님을 보고, 심지어 어떤 이는 꿈을 통해서도 주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알만한 것들을 계시해주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말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본다는 말이요, 주님의 임재하심을 확신한다는 말이며, 성령의 나타나심을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도 가능한 말입니다. 한마디로주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를 볼 수 있을까요? 사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고(요일4:12), 하나님을 볼 자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딤전6:16). 심지어 하나님은 모세에게 친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출33:20). 그런데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육신으로 보는 눈이 있고, 영으로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의 눈을 가진 자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보고 믿는 자입니다. 아니 믿고 보는 자입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셨습니다(요1:18).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셨습니다(골1:15).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구라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나 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또한 성령 없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성령 없이 예수님을 만나려는 의지나 노력도 역시 율법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도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 중에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요14:8).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그러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성도는 당연히 주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주를 보고 산다는 것은 내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른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주님이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믿음 말입니다. 그 주님이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일하심을 보고 사는 것이 주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니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가 주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본다는 말은 단순히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본다는 말을 눈으로 제한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무척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본다’라는 말처럼 다양하게 사용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인간은 오각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맛을 본다고 말합니다. 귀로 들어 본다고 말합니다. 손으로 만져 본다고 말합니다. 발로 차 본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본다, 누려 본다고도 말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이 주를 볼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주를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주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보는 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나 보지 못한 것들은 육신의 눈으로 당장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실상이나 증거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분명히 보여 지는 실재요,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주를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보는 통로요, 눈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주님을 봅니다. 주를 본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믿음의 눈을 열어 내안에 계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본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때 단지 환상이나 계시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까지 포함했습니다. 더욱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체의 모든 방법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 보기를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가시적인 만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전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오직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전부이신 예수를 나의 주요, 왕이며, 전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결정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주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만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전부이신 주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오,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 때 주님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일하심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주님을 보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날마다 주님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당신의 일하심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진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님을 ‘본다’라고 말할 때 무슨 기적이나 표적 같은 것을 보는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 안에서 자기가 기대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주님을 보지 못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때문에 자기 안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이나 영광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더 이상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주님이 내가 기대하는 대로 일하지 않으셨을지라도 주님이 내안에 계심을 확실히 믿노라면 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비관적인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안에서 나를 통해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며, 지금도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그분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때로 잠잠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물론 때로는 폭풍우처럼 급하고 강하게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이 친히 우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보는 것은 그분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는 것이요, 그분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함과 화평함입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를 볼 수 있는 자의 두 가지의 조건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거룩함을 좇는 자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평함을 좇는 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거룩과 화평은 쌍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지만,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는 자가 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레11:45).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반드시 거룩함을 입어야 합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사 의의 옷을 입혀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오직 예수 안에 나타내시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만 하나님의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입은 자와 교제하십니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와 교제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보혜사요, 대언자이시며,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화목제물이시오,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죄가 없고 청결하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마5:8). 물론 마음의 청결함은 내적인 생각이나 의지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거룩은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아니하는 거짓 없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마음의 청결함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맥을 같이 합니다. 거룩함과 마음의 청결함은 같은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듯이 거룩함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기를 소원하는 자는 반드시 거룩함을 좇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거룩함을 좇아가지 아니하면 주를 보지 못한다고 단정합니다. 성도는 부단히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믿음의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었기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좇아가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거룩함을 좇아가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고 더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보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최고의 모험이요, 도박일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을 한번 만남으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거룩한 행실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거룩함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내안에 계시는 주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거룩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를 보는 것은 교회의 직분이나 신앙의 연륜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 하는 자가 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아가는 자가 주를 볼 수 있음을 물론이거니와 또한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 하는 자가 주를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주를 볼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람들과 대인관계 역시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비난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믿음은 있어 보이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은 건강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냥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 좋은 믿음인 것처럼 보여 졌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이라면 결코 대인관계가 그렇게 나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거룩과 화평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자는 화평할 수밖에 없고, 화평 하는 자는 거룩한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거룩은 믿음의 영역이요, 화평은 행함의 영역이 아닐는지 모릅니다. 혹은 거룩은 믿음의 영역이요, 화평은 마음의 영역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이 두 가지가 분리될 수 없고 어떤 것만 더 중요하다고 강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믿음으로 모든 삶이 시작되고 출발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믿음이 있노라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함과 화평함을 좇으라고 강조합니다. 둘 다 우리가 주를 볼 수 있는 핵심 키워드라는 말입니다. 믿는 자가 주를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노라 해도 주를 보지 못하고 종교 생활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성경에 주어지는 몇 가지의 증거들로만 보더라도 얼마든지 식별이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도 충분히 식별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안에서 주님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 복음입니다. 만일 주를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무슨 천국 복음이겠습니까? 천국 복음은 날마다 주님을 보고 사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함을 좇는 일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좇아가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 안에 이런 믿음과 마음이 있는지를 이 시간에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면서도 화평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비난을 받고 그리스도인들이 욕을 얻어먹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믿음을 갖고 사는 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얼마나 예배를 잘 드리는지, 어떻게 봉사를 잘하는 지, 얼마나 헌신을 잘하는 지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세상은 오직 우리가 얼마나 그들과 화평 하는 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는 일이 우선이지만, 사람들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아가는 일도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평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내가 본 예수를 모든 이에게 보여주며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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