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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육희망네트워크 원문보기 글쓴이: 초랭이
조저녁씨에게.
편지를 쓰면서 상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이렇게 애로를 겪은 건 첨입니다.
조의원이라고 부르자니 그래도 명색이 유권자의 일종인 내 처지가 한심스럽고.
60년생 나랑 갑장입디다.
그래도 생일은 내가 빠르니 조군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네티즌들의 애칭대로 저녁씨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은데 괜찮으신지?
60년도면 나라가 한창 어지러울 시기에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라는 표어가 곳곳에 붙어있던 시절이니 아무나 막 나오긴 했나봅니다.
게다가 우리 세대가 참 불쌍하고 딱한 게, 반공교육 적대교육의 폐혜로 인해
괴물들이 대량출하 되었다는 겁니다.
똑같은 교복에다 똑같은 신발에다 똑같은 양말에다 똑같은 모자에다 똑같은
가방에다 똑같은 머리모양에다 심지어는 집에 와서도 똑같은 체육복을 입고
살았던 세댑니다.
생각도 똑같아야 하고 내뱉는 말도 똑같아야 하고.
다르면 맞았습니다. 무조건.
머리길이가 1센티만 길어도 맞고 교복치마가 조금만 길어도 맞고 짧아도 맞고
후크를 안 채웠다고 맞고 모자를 삐딱하게 썼다고 맞고, 개 맞듯이 맞고 자란
세대라 인권에 대한 개념을 탑재할 여유도 의미도 몰랐던 참 불쌍한 세댑니다.
다른 걸 못 견디지요.
나와 다른 건 빨갱이고 불순분자인 게 아주 자연스럽던 세댑니다.
“김일성 괴뢰도당은 오늘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호시탐탐 자유 대한민국을~” 로 시작하는 쩌렁쩌렁한 대북방송으로 새벽을 시작해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하는 새마을 노래를 들으며 깡보리밥에 새우젓국 찍어서
아침밥 먹고 학교에 가면 새마을 조회에 새마을 청소에 새마을 체조에..
김일성이는 머리통보다 더 큰 혹이 모가지에 달려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거나
첩이 열 명도 넘는다는 내용에 조잡한 그림이 그려진 삐라가 등굣길 논바닥에
하얗게 깔려있고 그걸 10장 주워다 학교에 주면 연필, 스무 장은 공책, 서른 장은
스케치북을 주는데 그걸로 학용품을 해결하던 세댑니다.
학교 위에 있던 미군부대에 연탄을 날라다 주는 일이 수업보다 중요했고, 부대장이
학교에 오는 날은 ‘자유의 벗’이라는 공책 한 권씩을 나눠주는 은전을 베푸시는데
그걸 받기 위해 뭔 말인지도 모르는 쏼라 쏼라를 주리를 틀면서 들어야 했던
세댑니다.
부대장님의 연설이 끝나면 교장선생님이 미국이 얼마나 고마운 나란지 미국이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벌써 공산화되어서 여러분들은 부모님과 떨어져서 칡뿌리를
씹으며 아오지 탄광에서 석탄을 캐고 있을 거라는 공갈협박을 들으면서 소름이
돋곤 하던 세댑니다.
여자 아이들도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하고 한 번 씩 장학사나 교육감이
오는 날은 몇날 며칠을 땡볕에서 수업도 못하고 연습을 해서 사열식 분열식을
자랑스럽게 선보이고는 수도꼭지도 아닌 펌프에 수 십 명이 매달려 쇳내 나는
벌건 녹물을 들이켰던 세댑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가 시험에 나왔는데 여기서 말하는 님이 애인이라고 썼다가 ‘님=조국’ 이라는 말을 교무실에서 공책 다섯 바닥을 써야했던 세댑니다.
그 결과 조국 교수님을 뵐 때 사실은 님이란 단어가 젤 먼저 떠올랐고, 지금도
님 어쩌고 하는 단어를 들으면 조국이 젤 먼저 떠오르고, 누군가 나의 조국을
묻는다면 “님!”이라고 대답할 거 같습니다.
10월 유신이 구국을 위한 위대한 혁명이라고 귀가 닳도록 듣고 목이 닳도록 복창하면서 남자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박정희장군’ 이고 여자아이들의 희망은
‘영부인’이거나 현모양처이던 가련한 세댑니다.
저도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되지 않았으면 지금쯤 어버이연합이나 특수임무자동지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가스통 심부름이나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이 전교조를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을 만들어
냈겠지요.
선생이란 모름지기 널빤데기 만한 출석부랑 반들반들 길들여진 몽둥이를 옵션으로
옆구리에 딱 꿰차고 인사 안했다는 시비로 시작해서 명찰이 보이니 안보이니,
실내화가 더럽니 깨끗하니, 머리가 기니 짧으니, 빤쓰가 보이니 안보이니 찍자를
붙여서 출석부나 몽둥이로 머리통을 톡톡 치거나 옆구리를 콕콕 찌르거나 치마를 들었다 놨다 니가 어디까지 버티나 간을 보다가 아이의 눈에서 마침내 섬광같은
빛이라도 스칠라치면 그대로 귀때기를 잡고 교무실로 연행해 가서는 머리를 밀거나 치맛단을 찢거나 아이가 울어야 반드시 그 짓은 끝납니다. 하염없이 울수록 서럽게 흐느낄수록 당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게 선생인거죠. 그래야 선생인거죠. 다 박정희 같아야.
그때 당시 선생들은 다 변태 아니면 조폭들이었습니다.
솔직히 요즘 동영상 뜨는 오장풍 보면 절마 좀 억울하겠다 싶은 생각도 들어요.
지가 보고 배운 대로 한 것 뿐일텐데. 나도 이렇게 맞고 자랐는데 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네 뭐네 해서 아새끼들 간이나 키워주고 북한이 섬멸대상이 아니라 통일의 대상이니 어쩌니 하면서 빨갱이 같은 소리들이나 늘어놓고
아, 세상에 애새끼들한테 인권이 어딨습니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참말로.
그러니 애새끼들 간땡이가 부어서 공부는 안하고 촛불 들고 겨나오는 거 아닙니까. 내 말 틀렸습니까.
그 금지옥엽같은 말씀이 틀렸다고 토를 다는 전교조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렇게 안하고도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 전교조 선생들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 즉 하늘의 뜻을 안다는 말이지요.
저도 한창 때는 앞장서야 직성이 풀리고 할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해야
잠도 오고 그렇습디다만 나이 드니 매사가 조심스럽습디다.
오늘 할 일은 가급적 내일로 미루고 꼭 해야 되는 일인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말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없는지 먼저 헤아리게 되고.
나이가 든다는 게 내가 냅네 하는 잰척이나 늘어가고 쓸데없는 고집으로
주변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뭔 재미로 나이를 처먹겠습니까.
당사자는 심오함을 넘어 막대한 사명감까지 느끼면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
보기엔 견딜 수 없는 유치함이나 치졸함이 되는 일이 종종 있지요.
폭주족 아이들이 하필이면 삼일절이나 광복절 날 오토바이를 끌고 나오는 이유가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태극기까지 휘날리며.
참 대단하십디다.
인류가 십대 말년이나 늦어도 이십대 초에 다 상실한 그 유치함과 치졸함에
한 치의 손상도 없이 어찌 그리 곱게 성장하셨는지.
징역에서 만난 조폭들이 더러 그렇긴 합디다.
사시미칼이 일 센치라도 더 길든지 더 엽기적이어야 나와바리가 지켜지니까.
그 바닥에도 나름 애환이 상당합디다.
저녁씨께서 전교조에 제 발로 가셔서 돼지 배를 가르는 꼬장 퍼포먼스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세금이나 범칙금을 국회에 가서 저런 방식으로 직접 납부하면 어떨까.
저는 평생 국민만 해 본 입장에서 세금내기 더럽게 싫거든요.
강이나 파 디비고 그러니까.
국회의원 되실 때 가족들까지 위장 전입시켜서 3.9% 차이로 당선되셨습디다.
그 일로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으셨던데 그 때도 갈라보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몇 년 일찍 뜨셨을텐데.
저 사람은 저 나이 먹도록 어디다 기부를 하거나 남을 위해서 제 것을 내줘
본 적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듭디다.
지금이야 워낙 비정규직이나 불안정한 일자리가 태반이라 선생자리가 철밥통이
돼버렸습니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했습니다.
잘 먹어야 개라도 줏어 먹을 걸 싸는데 먹는 게 오죽잖으니까.
그러니까 저녁씨도 그보다 훨씬 굵은 똥을 쌌던 교수자리 내팽개치고 글로 간 거
아닌가요.
전교조 선생들요.
그 박봉으로 굶는 아이 있으면 먹여주고 벗은 아이 있으면 입혀주고 겉도는 아이
있으면 제 집에 데려다 재우며 들어봐야 뻔한 얘기 밤새 귀 기울여 들어주며
우는 아이 붙잡고 같이 우는 사람들이예요.
그 아이들은 그게 간절해서 우는 거거든요.
누군가 지 얘길 들어줄 사람. “그래. 괜찮아” 등을 토닥여 줄 사람.
해봐야 표도 안 나고 돈이 되기는커녕 지 돈 들기 십상인 일을 표도 안내고 하는
사람들.
이번에 민주노동당에 후원금 냈다고 짤릴 위기에 놓인 선생들을 저는 차마 똑바로
못 보겠습디다.
그 사람들요.
거기만 후원한 게 아닐 거거든요.
그리고 이번에만 짤리는 게 아닐 거거든요.
짤리는 게 어떤 건지를 아는 사람들이, 뼛속까지 겪어 본 사람들이 왜 저런 짓을
또 할까.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종이 있습니다.
그걸 이해하는 사람과 죽어도 이해 못하는 사람.
나이가 오십이 됐든 칠십이 됐든 평생을 권력에 빌붙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오야붕의 명령과 의중대로만 움직여 온 사람들은 그게 죽었다 깨도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시키지도 않는 짓을 왜 할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세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을 왜 하는 걸까.
그러니 노상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떠들고 의식화 되었다고 짖어대는 거지요.
그래야 비로소 의문이 풀리거든요.
제 얘기를 하지요.
86년에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됐습니다.
노조대의원에 당선되어 대의원대회를 다녀 온 결과를 복사해서 돌린 게
해고사유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요.
어차피 할 걸 몇 달 먼저 한 게 죄였고 어차피 알 걸 남보다 먼저 안 게 죄였죠.
그때는 해고되면 10원도 돈 나올 구멍이 없던 시절입니다.
외려 그동안 적금 든 돈 깨서 유인물 만들고 퇴직금 받아서 신문 만들던 시절이니.
토큰하나가 없어서 전포동에서 영도까지 걸어 다녔고 꼭 전화를 걸 일이 생기면
동전이 남겨진 공중전화를 찾아 하염없이 걷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출근투쟁을 하러 뛰어 가던 어느 새벽엔 다리가 후들거려 남의 집에서 제사 지내고
내놓은 사자밥을 훔쳐 먹기도 했구요.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끼니땐 절대 남의 집에 안 가고
행색을 알아 본 사람들이 밥 사준대도 먹었다는 빈말을 밥 먹듯 하고 살았습니다.
가을 잠바 하나로 겨울을 견딜 때 털쉐타를 사주고 양말을 사주고 겨울 잠바를
사준 게 전교조 선생들이었습니다.
갈아 신을 신발이 없어 물이 새고 흙이 새던 신발을 벗게 된 것도 전교조 선생들이
사 준 새 신발 덕분이었습니다.
맞아서 다친 목과 허리가 아파 제대로 설 수도 없을 때 약을 지어주고 치료를 받게 해준 것도 그 분들이었습니다.
이십년이 넘는 세월을 영수증 처리도 안 되는 후원금을 다달이 보내주던 것도
전교조 선생들이었습니다.
어떤 선생은 한 달에 한번만이라도 내가 어떤 삶을 사는지 생각하려고 자동이체도
안하고 달마다 은행엘 간다 합디다.
이런 말을 하면 궁금할 거예요.
그게 어떤 마음 일까가 아니라 걸어서 짜를 방법이 뭐가 없을까.
만 51년이 넘어가는 삶을 살며 그중 해고자로 반평생이 넘는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해고자로 죽을 수는 차마 없겠기에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야 하는 출근시위를
오늘도 했습니다.
자본으로부터 때로는 노조로부터 건네지던 돈의 유혹을 거부하면서도 지난한
해고자의 삶을 버티게 했던 건 전교조 선생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존감을 가르쳐 준 참 스승들.
저를 버티게 했던 그들이 어렵습니다.
이제 제가 그들을 지켜야 할 차례입니다.
뭘로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많은 시간 고민했습니다.
작년 11월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위원회로부터 두 번의 징역살이와
26년 전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결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긴 해고생활과 징역살이에 대한 위로금으로 43,135,000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이 통장에 찍힌 걸 확인하던 날 울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눈물이 흐릅디다.
상한 음식도 못 버리고 궁상을 떨고 밀폐된 공간을 못 견디는,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 시간들.
그 돈에는 서면 국밥 골목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국밥 가마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스물여섯 해고노동자의 굶주림이 서려 있습니다. 지금도 안개 낀 날은 무럭무럭
김이 솟아오르던 그 가마솥이 어김없이 생각나요.
동래시장 슈퍼에서 통조림하나를 훔치다 들켜서 시장바닥에서 이빨이 흔들리도록 맞고 수안파출소에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던 치욕스런 허기가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그렇게 절박할 수가 없습디다. 스물여섯 나이에.
개가 먹는 걸 보면서도 침이 흐르던 내 청춘.
그 돈에는 대공분실에 끌려가 군복을 갈아입고 그 군복에 살껍질이 들러붙도록
맞았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민주노조 그게 뭐라고 그걸 세우다가 한 사람, 그렇게 세워낸 걸 지켜내다 두 사람,
십년지기 이십년지기 세 사람을 땅에 묻어야 했던 피눈물 나는 세월들이 있습니다.
그 돈에는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이유로 24시간 수갑을 찬 채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사형수와 같은 담요를 덮고 살았던 징역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걸 풀어주라고 싸우다가 징벌방에 갇혀 양손 양발이 뒤로 묶인 채 죽을 핥으며
입은 채로 싸야 했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징벌방에서 풀려났는데도 묶여있던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아 수갑 채워진 사형수가 온몸 구석구석을 닦아줄 때, 그는 내 몸을 닦고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 날마다 면회를 온 것도 전교조 선생들이었고, 먹고 어떻게든 버티라고 빵이며
우유를 노다지 사 넣어주던 것도 전교조 선생들이었고 편지며 엽서들을 뻔질나게
보내주던 것도 전교조 선생들이었습니다.
결초라도 해서 보은을 해야 하건만, 그럴만한 조건도 됐는데 솔직히 머리카락 자를라니
내 짚신부터 삼아 집디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녁씨의 꼬장 퍼포먼스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으니.
난 저녁씨만큼은 쾌척 못해요. 그것도 월수를 찍지도 못해요.
이 돈 들고 저는 해직의 위협에 맞서 천막농성장에서 밤을 새우는 선생님들을
아주 죄스런 마음으로 뵈러 갈 겁니다.
이거 하나만 알아두시구려.
전교조는 당신이 그렇게 오바질 하면서 능멸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라는 거.
정치인에겐 어떻게든 떠서 이름을 알리는 게 생존의 문제라는 건 압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하도 절박하여 하루 40여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그들을
구원할 정책으로 이름을 알렸다면 난세의 영웅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생존 자체가 고통인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법안으로
지명도를 알렸다면 얼마나 큰 박수를 받았겠습니까.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불자가 되거나 백수가 되는 청년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의젓한 인생선배로서 올바른 의정활동을 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안상수를 조전혁이 덮고 조전혁을 강용석이 덮는 빼어난 청출어람의 집권당을
눈만 뜨면 듣고 봐야 하는 국민노릇이 이렇게 쪽팔리진 않을 겁니다.
저녁씨가 택한 방법이 옳은 방법이었는지는 이후에 판가름 나겠지요.
가스통 할배들은 어쨌든 늙고 촛불아이들은 자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다음 콘서트엔 강용석 동지를 게스트로 모시는 거에 강추!
대박 날겁니다.
아까부터 눈앞에서 알짱거리던 모기 한 마리를 손바닥으로 탁 쳐서 잡았는데
이놈은 누구의 고혈을 빨았는지 피가 팍 터지네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
무더위에 건승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