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안준희 필무(筆舞) 전시_G&J갤러리
화가 안준희 필무(筆舞) 展이 인사아트센터 3층 G&J갤러리(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1-1)에서 2024년 6월 19일(수)부터 6월 24일(월)까지 전시 Opening은 6월 19일(수) pm5시에 실시한다.
안준희의 작품은 작품 앞에 선 사람을 카오스에 빠뜨린다. 선과 면의 무게 중심, 회화인지 서체인지, 자연인지 사물인지 혼란에 빠뜨린다. 부드러운 척하다가 검객처럼 날카롭고, 자유분방을 위장한 억압에 굴복해야 한다. 평온을 앞세운 온유한 노랑은 음산한 잿빛으로 변신한다. 파랑으로 출렁이고, 진홍으로 절규하다가 마침내 어두운 먹색으로 명을 다하는 색의 번뇌를 견뎌야 한다. 카오스의 극치는 화면 위의 형상들이 출구가 없어 작가의 염원인 구원을 향해 절규하는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안준희를 사랑하고 싶어진다.
안준희는 자신의 91년 3회 작품전에 붙이는 글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자신은 생명력 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세계관의 소유자요, 회화를 통해 구도의 자세를 배우려고 한다. 생이 갖는 비논리성 앞에서 자신의 내적 리얼리티를 영과 필획의 직관적 교감으로 진실하게 표현하고 싶다. 더욱 작가는 자신의 조형 의식을 소개하면서 예술이란 새로움의 구현이라는 입장보다 자기 구원과 극복의 장으로서 깨달음의 한 방식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준희는 아직 최고의 염원인 자신의 삶의 원초적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 것이다. 무능해서일까. 원초적이든 피상적이든 삶에 대한 물음은 삶의 진리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자고로 진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없었다. 니체는 말한다. 진리라는 여인은 쉽게 옷을 벗지 않는다고. 안준희의 작품이 카오스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필자의 불만은, 마치 골리앗을 상대로 팔을 걷어붙이는 다윗 같은 작가의 용기를 칭찬하는 제스쳐다. 이렇게 안준희는 젊은 날 그리고 나이 지긋한 현재까지 인생을 걸고 고뇌하는 작가다.
장석원 교수는 1984년 제2회 작품전에 ‘생의 원천적 흐름 위에 선 회화’라는 제목하에 깊은 관심을 피력한다. “나로서는 그가 자주 얘기하는 선적(禪的) 경험이라든지, 카오스에의 심취, 세련된 본능이라는 말들을 지나가는 얘기로 흘려버릴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순간순간의 필획이 주는 표현력과 뉘앙스에 전신적인 주의를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회적인 표현력과 순간성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장 교수께서는 아주 오래전에 안준희 작가의 성향을 감지한 것이다.
예술 분야 전문가들의 호평과 기대도 많았다. 시인 김하린은 우연히 접한 안준희의 화집에 사로잡혔다고 쓰고 있다. 1995년 개인전 서문 ‘안준희에게로 가는 기억’에서 안준희와 만나 나눈 얘기를 소개하고 있다. “벌교에서 살던 시절에 그림은 나에게 자기 구원의 한 방식이었어요. 그림을 통해서 구원을 느꼈지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그림마저 투쟁을 해야 하는 목표로 생각했더라면 아마 저는 내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안준희의 말인데 자신의 회화 작업과 자신의 인생을 묶어 집약한 속내였다고 본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2018년 개인전 평론에서 특별한 기대를 보인다. “이제 비로소 안준희는 詩를 동경하는 상태에 접어든 것은 아닌지? 자연의 섬세한 떨림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예술 의욕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진섭의 ‘시를 동경하는 모습’에 대한 이해에 동의 여부를 떠나, 작가 안준희가 비로소 자연의 숨결을 자신의 생명으로 호흡하고 그것을 예술로 창조하려는 태도를 치하하는 말씀인데 여기서 안준희 작가는 작게나마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 같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1995년 ‘영과 필획의 교감’이라는 평론에서 “필선을 아우르고 보듬어 주는 동시에 그 색 면을 보는 사람을 아득한 명상의 세계, 즉 무의 세계로 인도한다. 흡사 힘든 일과로 찌든 육체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아늑함과 포근함 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 비워진 자리는 ‘색 면’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화면 속의 비워진 자리는 작심하고 작업한 여백의 의미를 간과하지 말자는 주문이다. 그렇다. 화면에 마련된 여백은 무심한 잉여 공간일 수 없다.
좀 거칠지만 이런 글도 있다. “붓을 든 초창기부터 <획>에 천착하는 걸 알 수 있다. 회화 작업이 의지하는 색과 선의 구성을 짐짓 모른 척하고, 절대절명으로 생동하는 획에 집념한다. 그런데 이 획은 우주를 읽어내는 특정한 문자의 암호로 이해된다. 획의 밝음과 어둠, 또 날카로움과 둔탁함, 장·단에 따라 문자는 다양한 암호를 지시한다. 작가는 마술사처럼 획을 조율하며 우주를 해독한다. 획은 물론 자아의 음성과 심상의 궤적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와 마음의 형국을 드러내는데 미진하다지만 안준희는 획을 통로로 투명하게 자아를 분출한다. 안준희에게는 이런 내적 성찰의 운필이 성공하고 있어 부러운 일이다. (성진기, 2008년 안준희 작품전에 부치는 글 “빈 하늘에 던지는 사유”) 하늘이 빈 까닭은 작가 애초의 비상을 고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 작가는 그림에 영혼을 맡기고 사람 노릇에 몸을 받쳤다. 고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작품들은 자신의 삶과 화해를 이룬 듯하다. “무릇 작가는 보이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업을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라는 끌레의 말대로, 안준희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초월적 세계의 보이지 않는 심처(深處)를 형상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제 해방된 손목으로 분방한 붓의 춤을 따라 응하면 된다. 순수한 자아로 돌아가 미의 요정을 영접하는 춤을 추면 된다. 運筆(운필)이 아닌 筆舞(필무)에 순응할지어다.(성진기/철학박사 글중에서)
■ 안준희 화가 | An Joon Hee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 및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
개인전 | 17회 | 초대전 및 단체전 | 160회
한국사진신문
화가 안준희 필무(筆舞) 전시_G&J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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