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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Mt 14,1-12): En aquel tiempo, se enteró el tetrarca Herodes de la fama de Jesús, y dijo a sus criados: «Ese es Juan el Bautista; él ha resucitado de entre los muertos, y por eso actúan en él fuerzas milagrosas».
Es que Herodes había prendido a Juan, le había encadenado y puesto en la cárcel, por causa de Herodías, la mujer de su hermano Filipo. Porque Juan le decía: «No te es lícito tenerla». Y aunque quería matarle, temió a la gente, porque le tenían por profeta.
Mas llegado el cumpleaños de Herodes, la hija de Herodías danzó en medio de todos gustando tanto a Herodes, que éste le prometió bajo juramento darle lo que pidiese. Ella, instigada por su madre, «dame aquí, dijo, en una bandeja, la cabeza de Juan el Bautista». Entristecióse el rey, pero, a causa del juramento y de los comensales, ordenó que se le diese, y envió a decapitar a Juan en la cárcel. Su cabeza fue traída en una bandeja y entregada a la muchacha, la cual se la llevó a su madre. Llegando después sus discípulos, recogieron el cadáver y lo sepultaron; y fueron a informar a Jesús.
<세례자 요한의 죽음>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하다가
그것 때문에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14,3-12),
그 내용만 놓고 보면,
요한의 죽음을 헤로데와 헤로디아라는 개인의 죄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선포했고(마태 3,1-2),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를 특별히 더 엄하게 비판했습니다(마태 3,7).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요한의 비판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헤로데와 헤로디아만 요한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모두 요한을 미워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헤로데와 헤로디아라는 개인이 요한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이 요한을 죽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사사로운 살인죄가 아니라,
당시의 집권 세력에 의한 공적인 박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살인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헤로데가 했다는 말도(마태 14,2)
헤로데 개인의 말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불안감을 대변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였던가?
우리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것인가?" 라는 불안감.
(이것은 양심의 가책은 아니고, 미신적인 불안감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자기가 한 일이 죄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미신적인 불안감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하고 불길한 불안감입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예언자들은
요한처럼 사람들의 죄를 꾸짖다가 요한처럼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그렇게 박해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죄를 꾸짖는 예언자적 활동을 하는 이들이
미움 받고 박해를 받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회개를 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죽여서라도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이 안 들린다고 해서 자기들의 죄가 덮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데 정말로 세례자 요한은, 또 예언자들은 꼭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죄를 꾸짖는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고,
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박해받고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예언자는 원래 그렇게 박해를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사람들의 살인죄가 당연하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박해자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이 회개하라고 꾸짖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가?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했다면,
요한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영혼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죽인 일은,
요한 쪽에서 보면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난 일이 되지만,
헤로데와 헤로디아 쪽에서 보면,
그들 자신들이 자기들의 영혼을 죽인 일이 됩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멸망하는 길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요한의 죽음에 동조한 기득권층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들이 미움 받고 박해받고 살해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운명이 아닙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죽이신 것과 같고,
살인자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언자들의 죽음이 당연한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십자가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은 다 당연히 죽도록 고생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부러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다보면 힘든 길을 만날 수도 있고,
죽을 고비를 만날 수도 있고,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편한 길을 만날 때도 있고,
죽을 위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체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주님을 충실하게 따름으로써 얻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몸이 많이 고달프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이 기쁨과 행복은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성인(聖人), 때로 불꽃처럼 때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사람!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을 사시다가 이제는 빛나는 하늘의 별이 되신
성인(聖人)들 대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셨을까?
많이 연구도 하고 묵상도 해봤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또 요모조모 살펴보니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성인들은 우리 보다 좀 더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좀 덜 고리타분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삶을 좀 더 비범하게 사신 분들, 남루한 인간 조건 속에서도 품위를 지킨 사람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희와 충만의 삶을 엮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지리멸렬한 삶이 아니라
때로 불꽃처럼, 때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사람들이 바로 성인이더군요.
이것 저것 다 기웃거린 것이 아니라, 정작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오직 주님,
그분을 향한 영적 여정, 이웃을 향한 복음적이고 이타적인 삶에 깊이 헌신하고
몰입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님의 성화 여정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그분 성덕의 가장 두드러진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비안네 신부님에게 성모님은 어머니요 친구요 연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성모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성모상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품안에 작은 성모상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임종 직전 남긴 말을 통해 성모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이 목각 성모상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평생토록 밤낮없이 이 성모상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도 이 성모상이 옆에 없으면 편안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자신의 강렬한 애정과 신심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모님은 저희 첫사랑입니다. 저는 그분을 알기도 전에 벌써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은 묵주기도를 향한 그의 사랑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즉시 묵주를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르스 본당 마당을 산책하면서 더 없이 행복한 얼굴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본당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묵주기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낡은 수단 주머니 안에는 언제나 여러 개의 묵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신자들이 항상 묵주를 지니고 다니기를 원했습니다.
신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먼저 묵주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봤고
없다면 즉시 지니고 있던 묵주를 선물로 건네며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도록 인도했습니다.
여차하면 모금을 시작하고 건축이나 리모델링을 좋아하는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이
눈여겨볼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번은 아르스 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불행한 소녀들을 위한 작은 기숙사 건축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저 같았으면 얼씨구나 하고 즉시 설계사를 부른다, 시공업체를 불러 공사에 착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언제나 신중했습니다.
꼭 필요해 보이는 건축이라 할지라도 시작하기에 앞서 아주 신중한 식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식별작업이란 다름이 아닌 성모님과 함께 하는 9일기도였습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정성껏 9일기도를 바치면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성모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9일기도가 완전히 끝난 후 본당 신자들과 함께 공사를 시작할 것인가 아닌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강론은 단순하지만 성모님을 향한 그의 극진한 효심과 깊은 신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저의 진정한 사제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주셨으나 저는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십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신뢰심을 지니고 그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 다녀야 할 안전한 통로이며 지름길이시고
티 없이 깨끗하고 빠른 길이시므로,
성덕으로 빛나는 영혼들은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양승국 스테파노 SDB)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조연을 더 타박하는 교회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7
1 그 무렵에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왕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신하들에게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하고 말하였다. 3 일찌기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는데 4 그것은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5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6 그 무렵에 마침 헤로데의 생일이 돌아와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잔치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헤로데를 매우 기쁘게 해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9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소녀의 청대로 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12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마태 14,1-12)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오늘 단락은 마르코 6,14-29를 1/4 줄이고 고치고 덧붙인 것이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마르코 6,14-),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대화는(마르코 6,18-20) 마태오에서 삭제되었다. 마르코에서 헤로디아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 했고 헤로데는 그를 보호하려 했다.(마르코 6,19) 그러나 마태오에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 한다.(마태오 14,5)
요한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예수에게 알렸다는 12절 내용은 마르코복음에는 없다. 마르코에서 12제자의 파견과 귀환사이에 이 단락이 배치되어 제자들이 없던 시기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마태오에서는 예수가 고향 나자렛에서 면박당한 장면에 이어 세례자 요한 죽음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태오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더 강조되고 예수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방인을 주요 독자로 삼은 마르코복음과 유다인이 주요 독자인 마태오복음의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다르게 보도하는 복음서 사이의 차이와 그 의도를 오늘 신자들은 설교에서 잘 알아듣고 있을까.
1절에서 마태오는 헤로데를 영주라고 보도했지만 9절에서 왕이라고 부른다. 헤로데는 예수 탄생 무렵인 BCE 4년 16살에 부친을 이어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가리킨다. [B.C(Before Christi)는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시대를 보는 방식이니 삼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BCE(Before Common Era)를 쓰겠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요즘 말로 도지사인 셈이다. 그는 왕으로 불리기 좋아했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세례자 요한 이전에도 여러 예언운동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연속선상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르게 보도한다. 세례자 요한이 군중을 선동하여 정치적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헤로데는 그를 처형시켰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였다. 처형장소는 사해(死海) 근처의 마케루스 성(城)이라 한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유와 장소에 대한 보도에서 성서학자들은 복음서들보다 요세푸스를 더 신뢰하는 편이다.
당시 다른 유다교 그룹에 비해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예루살렘 성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유다교 지배층의 역할을 거부하고 종교적 평등을 주장하였다. (2) 로마에 저항하기 전에 유다인 개인의 회개에서 개혁을 시작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거점으로 하는 유다교 지배층은 로마군대와 협조하여 자기 배를 채우던 부패한 세력이었다. 그런 세력에게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은 없다며 대중적인 예언운동을 한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그러한 운동에 기꺼이 참여한 분이 바로 예수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유다사회에서 그러한 예언운동은 곧 반체제세력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세례자요한과 예수는 정치범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맞는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입문하여 요한처럼 정치범으로 처형된다. 인류 역사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 같은 운명적 파트너가 또 있을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늘 단락의 주인공처럼 주목받은 사람은 세례자 요한도 아니요 예수도 아니요 바로 헤로디아의 딸이었다. 당시 잔치에서 춤추는 역할은 본래 매매춘 여성에게 맡겨졌었다. 그러니 헤로디아의 딸을 곱게 볼 수 없었겠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그 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중세 후기부터 이름 없던 그녀에게 살로메(Salome)라는 이름이 문학과 예술에서 선사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와 그리스도교 개혁기에 순종하는 딸의 모습에서 자의식 강한 여인으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이란 단어는 사실에 맞지도 않고 이웃종교에게 무례한 단어이기도 하다. 대신 ‘그리스도교 개혁’이라고 쓰겠다) 살로메를 성숙한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에서 그 결정적인 전환점이 생겼다. 춤을 창녀의 짓으로 멸시하던 분위기가 18세기부터 정반대로 바뀌었다. 춤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은 Heinrich Heine의 ‘Atta Troll’(1841), Oscar Wild의 ‘Salome’(1893), Richard Strauss의 오페라 ‘Salome’(1905) 등이다.
성(性)과 욕망이 성서에서 억압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설교에서 그 주제는 무시되고 억압되고 잘못 설명된 역사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교, 특히 성서학자들은 왜 성서본문과 관계없는 해설이 그리스도교에 유행하였는지 그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지 알아내고 반성해야 한다. 잘못된 성서해설은 신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자체를 망가뜨리고 불의한 체제와 권력자에게 협조하게 만든다. 세상의 독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서 구절인 로마서 13,1을 잘못 해설하여 불의한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옛날에만 있던 사례가 아니다.
아담과 이브,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딸, 빌라도와 유다 지배층- 성서에서 범행의 주연과 조연을 맡은 대표적인 두 유형이다. 아담, 헤로데, 빌라도는 최종 판단과 실행을 맡은 주범이었다. 이브, 헤로디아의 딸, 유다 지배층은 그저 조연을 맡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연 인물보다 조연배우에게 더 책임을 묻고 비난해 왔다. 왜들 그리 분별력이 모자랄까.
세례자 요한이 처형되고, 예수도 처형되고, 예수 제자들도 같은 길을 걷는다(마태오 5,12; 19,17-, 34-). 그런데 그런 죽음은 먼 옛날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쉽다. 순교자들을 존경하지만 순교자가 되기는 싫기도 하겠다. 사교모임 다니듯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신분세탁을 노리며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순교라는 단어가 과연 제대로 들릴까. 로마군대와 유다교 지배층이 같은 편이듯, 불의한 권력과 부패한 종교 지배층은 같은 편이다. 국민들의 의로운 분노를 무마시키고 신자들의 품위상승이라는 허위의식을 선물하는 그리스도교는 이런 점에서 ‘인민의 아편’ 노릇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다. 그런 그리스도교가 없었다면 불의한 권력은 그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죽음을 보면서 그리스도교는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김근수 (요셉)
«Se enteró el tetrarca Herodes de la fama de Jesús»
Rev. D. Joan Pere PULIDO i Gutiérrez Secretario del obispo de Sant Feliu
(Sant Feliu de Llobregat, España)
Hoy, la liturgia nos invita a contemplar una injusticia: la muerte de Juan Bautista; y, a la vez, descubrir en la Palabra de Dios la necesidad de un testimonio claro y concreto de nuestra fe para llenar de esperanza el mundo.
Os invito a centrar nuestra reflexión en el personaje del tetrarca Herodes. Realmente, para nosotros, es un contratestigo pero nos ayudará a destacar algunos aspectos importantes para nuestro testimonio de fe en medio del mundo. «Se enteró el tetrarca Herodes de la fama de Jesús» (Mt 14,1). Esta afirmación remarca una actitud aparentemente correcta, pero poco sincera. Es la realidad que hoy podemos encontrar en muchas personas y, quizás también en nosotros. Mucha gente ha oído hablar de Jesús, pero, ¿quién es Él realmente?, ¿qué implicación personal nos une a Él?
En primer lugar, es necesario dar una respuesta correcta; la del tetrarca Herodes no pasa de ser una vaga información: «Ese es Juan el Bautista; él ha resucitado de entre los muertos» (Mt 14,2). De cierto que echamos en falta la afirmación de Pedro ante la pregunta de Jesús: «Y vosotros, ¿quién decís que soy yo? Simón Pedro le respondió: ‘Tú eres el Mesías, el Hijo del Dios vivo’» (Mt 16,15-16). Y esta afirmación no deja lugar para el miedo o la indiferencia, sino que abre la puerta a un testimonio fundamentado en el Evangelio de la esperanza. Así lo definía San Juan Pablo II en su Exhortación apostólica La Iglesia en Europa: «Con toda la Iglesia, invito a mis hermanos y hermanas en la fe a abrirse constante y confiadamente a Cristo y a dejarse renovar por Él, anunciando con el vigor de la paz y el amor a todas las personas de buena voluntad que, quién encuentra al Señor conoce la Verdad, descubre la Vida y reconoce el Camino que conduce a ella».
Que, hoy sábado, la Virgen María, la Madre de la esperanza, nos ayude a descubrir realmente a Jesús y a dar un buen testimonio de Él a nuestros herman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