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루카 11,28참조)
봄으로 접어드는 3월의 첫 토요일을 맞이하여 성모신심 미사를 봉헌합니다. 동시에 오늘은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3.1 운동을 기념하는 106번째 3.1절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오늘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이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마치 그들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듯한 말씀을 건네는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인간적 도리를 어긴 불효자식이며 동시에 십계명 중의 4번째 계명을 어긴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불효자이자 죄인이 되어버리는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사실 누구보다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이 어머니가 분명 그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가 들어도 모질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길 그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느님 안에서의 참 가족의 의미를 모든 이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육적으로 맺어진 혈연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영적 의미로서의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일깨워주고자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가족은 분명 이 힘들고 외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든든한 울타리이자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와 범주가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다보면 어느 순간 가족은 새로운 곳으로 향해 가는 데에 있어 걸림돌이 되고 큰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할 많은 것들, 가족이기에 감당해야 할 많은 것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선 혈연으로서의 가족의 범주를 넘어선 하나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이러한 면에서 오늘 독서의 사무엘 상권의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등극한 후, 자신은 화려한 궁정에서 그 누구보다 호화롭게 사는 반면, 자신을 왕으로 선택하고 뽑아주신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계약의 궤가 초라한 천막 안에 모셔진 것을 두고 주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장면을 전합니다. 그런 다윗을 두고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1사무 7,5.8-9)
하느님의 이 말씀은 다윗이 놓치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곧, 다윗은 아무 것도 아닌 양치기 목자에 불과했던 자신이 이스라엘 모든 민족을 통치하는 임금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뛰어남과 훌륭함이 전혀 아닌 오직 전적인 하느님의 선택과 그분의 은총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잊고 있었다는 것. 자신이 임금이 되어 화려한 궁전에서 누구보다 호화롭게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신 하느님의 전적인 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감히 하느님이 머무를 성전마저도 자신이 짓겠다는 오만의 절정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다윗의 모습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눈과 마음이 멀어버려 하느님을 잊게 되는 결정적 우를 범하는 인물의 전형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과 연관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또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가족, 그리고 가족의 품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과 평화로움은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가능성을 잊게 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일 될 수 있다는 것. 그럴 때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 현재의 편안함 속에 안주하고 머물려고만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내 삶 안에서 실행함으로서 하느님의 형제 누이 어머니로서 하느님과의 영적인 가족이 되어 하느님의 베푸는 넘치는 사랑을 온전히 얻어 누리십시오. 그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 은총을 통해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삶, 기쁨과 희망의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그리하여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루카 11,28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