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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狎鷗亭) 荒榛蔓草蔽高丘(황진만초폐고구)-거친 숲에 엉킨 풀이 높은 언덕 뒤덮어 緬想當時辦勝遊(면상당시판승유)-아득히 당시를 생각하니 명승지임을 알겠다. 人事百年能幾許(인사백년능기허)-인간의 한 백년 그 얼마나 되는가 滿江煙景入搔頭(만강연경입소두)-강에 가득한 안개 풍경, 번잡한 머리에 든다. 기대승(奇大升)
한명회(韓明澮) 셋째 딸 장순왕후 공릉(恭陵)
먼저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 인물을 소개한다.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淸州), 호(號)는 압구정(狎鷗亭)이다. 그의 조부(祖父) 한상질(韓尙質)은 이성계를 도운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한상질(韓尙質)은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돌아왔다.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는 60세 이상의 국가원로인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都堂)에 모여 국호를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한명회는 젊어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하자 나이 40세가 다되어 조상의 공로(功勞-蔭補)로 종9품의 말단직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과 만나게 된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조선전기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의 계획자로서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한명회는 4번의 공신(功臣)에 책록되었고, 우의정을 비롯해 영의정까지 당대 최고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두 딸을 왕후로 드리어 세조와는 사돈 간이면서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장인이었으니, 그 위세는 충분히 짐작된다.
한명회는 잉태된 지 7달 만에 태어난 칠삭둥(七朔)이로, 어려서는 사지가 완전치 못했는데, 차츰 장성하면서 체구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커지고, 또 지모가 남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12살의 단종(端宗)은 문종(文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은 약해진 왕권을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비밀리에 거사를 모의하였다. 수양대군은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몰래 모았는데, 이때 한명회가 친구인 권람을 통하여 수양대군에게 접근한다.
수양대군은 여러 모로 한명회를 시험하고는 한명회를 가리켜 “그대야말로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로다!”라고 후대하였다 한다. 장자방이란 중국 한나라 때의 유방(劉邦)을 도운 책사(策士) 장량(張良)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양대군의 모든 계책은 한명회로부터 나왔다.
한명회는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명회와 관련된 이야기로 이른바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그가 개성의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관원들이 만월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친목계를 조직하여 우정을 돈독히 하자고 결정되었다.
이때 한명회도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그 자리에서 멸시와 비웃음을 받고 끼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에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시켜 출세를 하자, 당시 계원들이 비로소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세속에서 세력을 끼고 남을 멸시하는 자를 사람들이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 지목하였다고 한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고 했던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네 인간사의 얄팍함을 야유하는 것 같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한명회는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철저히 제압하였다. 한명회는 끝없는 권력의 감시로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찾아내어 제거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명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사육신 사건 처리 뒤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冊錄)되었고, 이어 1468년(예종 1년)에 발생한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처리 뒤에는 익대공신(翊戴功臣)에, 그리고 성종(成宗) 즉위 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는 등 불과 20여 년도 안 되는 기간에 4번의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것도 모두 1등공신의 최고 지위였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한명회의 생애(生涯)가 반드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이시애가 반역을 모의하면서 신숙주와 한명회 등과 글로써 통했다는 자백이 나와 이시애와 연루설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한명회는 삭탈관직 되었다가 다시 정계에 복귀된다.
지금 압구정동(狎鷗亭洞)의 동(洞)이름은 한명회의 호(號)이다. 한명회는 관직을 떠난 후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고자 지은 정자가 압구정(狎鷗亭)이다.
그러나 노후를 한가하게 보내겠다고 지은 압구정(狎鷗亭)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의 화려했던 정치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줄은 상상 할 수 없었고 본인도 몰랐다.
한명회 소유의 정자였던 압구정(狎鷗亭)이라는 명칭은 한명회가 중국 문장가(文章家) 예겸(倪謙)이란 사람에게 부탁해서 받은 것이었다. 한명회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예겸(倪謙)과 교류하며 시(詩)로서 서로 응대하던 차에 한명회가 예겸에게 정자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예겸은 압구정(狎鷗亭)라고 이름 지었다. 압구정(狎鷗亭) 건물이 완성되는 날 성종(成宗)은 이를 축하하여 압구정 시(詩)를 직접 지어 내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철거되었다.
성종(成宗)때 한명회(韓明澮)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문신(文臣) 최경지(崔敬止)는 압구정(狎鷗亭)과 한명회(韓明澮)를 비교하여 아래와 같은 시를 썼다 三接慇懃寵握優(삼접은근총악우)-세 번이나 은총을 흠씬 입으면서 有亭無計得來遊(유정무계득래유)-정자는 있어도 가서 놀 계획 없구나. 胸中政使機心靜(흉중정사기심정)-흉중에 욕심을 진정 가라앉힌다면 宦海前頭可狎鷗(환해전두가압구)-벼슬살이 바다에서도 갈매기와 친하련만. 최경지(崔敬止)
압구정(狎鷗亭)은 워낙 풍광이 아름다운 터라 그 소식이 중국까지 알려졌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거치는 관광코스가 되었다.
1481년(성종 12년) 이때도 역시 중국 사신이 와서 압구정을 관람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는 좁다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방문을 거절하였으나, 계속되는 사신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방문을 허가하였다.
문제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한명회가 자신의 정자가 좁아서 중국 사신이 방문하여도 잔치를 열수 없다는 구실로, 국왕이 사용하는 차일(遮日)을 청하였던 것이다. 차일(遮日)은 햇볕을 가리기 위(爲)하여 치는 포장(布帳)을 말한다.
한명회가 성종(成宗)임금께 청하기를 “신의 정자는 본래 좁아 지금 더운 계절이라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궁궐 관서에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하였다. 아마 한명회가 임금이 사용하는 차일(遮日)을 압구정에 설치하여 권력을 과시할 생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준비한단 말인가 압구정이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제천정(濟川亭)이란 지금의 용산구 한남동 557 일대로서 제천정길이 있는 곳이다. 제천정(濟川亭)은 조선시대 왕실(王室) 소유의 정자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자이다.
청일전쟁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에게 불하하였는데, 뒤에 정자가 없어지고 지금은 “서울명소고적”라는 표지석만 있다.
그러나 한명회는 성종(成宗)의 말을 듣지 않고 임금의 차일(遮日)을 계속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다시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치르도록 하고 이를 불허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성종의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가 아파서 제천정(濟川亭) 잔치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압구정 잔치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단히 진노한 성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우리나라 제천정(濟川亭)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喜雨亭)은 세종(世宗)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거동하였다가 마침 신령스러운 비를 만났으므로 정자이름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새로 세운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하였다.
그리고 압구정을 헐어 없애는데 그치지 않고 승지(承旨)나 대간(大諫)의 비난이 한명회에게로 쏟아졌다. 이때마다 성종은 한명회의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 반대파의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성종도 한명회의 국문(鞠問)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벼슬을 떠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생각으로 지은 압구정은 그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생육신(生六臣)의 대표적인 인물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생전에 특히 생육신을 탄압한 한명회(韓明澮)를 싫어했다는데 어느 날 압구정(狎鷗亭) 기둥에 걸려 있던 한명회가 지은 주련(柱聯)을 읽고 시(詩) 내용을 고쳐 버렸다고 한다. 아래와 같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젊어서는 나라를 돕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늙어서는 강호에서 편히 쉬네. 라는 한명회의 시를
김시습은 “부(扶)”자를 “망(亡)”으로, “와(臥)”를 “오(汚)”고쳐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젊어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로 고쳤다고 한다. 여기서 강호(江湖)란 자연(自然)과 넓은 세상(世上)을 뜻한다.
그 후 압구정은 여러 손을 거쳐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1861∼1939) 소유가 되었는데 박영효가 갑신정변(1884)의 주모자로 역적이 되자 몰수되어 압구정은 파괴되고 터만 남는다.
지금 압구정동에는 “압구정 표지석”만 남아 있고 아파트가 재개건축 때 정자도 복원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우리역사의 기록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주역인 한명회를 역신(逆臣)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시켜 왔다.
그러나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요순시대”의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은 꿈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는 비정하고 살벌한 것이다.
이런 죽음이 항상 동반되는 정치 현실에서 한명회는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4대를 35년 거치면서 정치인으로서 용이주도하게 당시로서는 장수인 72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세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선왕조의 정치개혁과 국방강화, 과전법(科田法) 개혁과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면서 국력을 강화시키는 중심에 서 있었다.
필자는 한명회를 거론할 때는 항상 유교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조광조(趙光祖)와 비교를 한다. 아무리 위대해도 일찍 죽으면 소용이 없다. 조광조는 뜻은 좋았지만 “무모”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조광조에 비하면 한명회는 현실정치를 직시한 “뱀처럼 지혜로운” 정치가다.
필자는 한명회를 볼 때에 항상 박정희 정권 때의 김종필을 생각한다. 김종필은 지혜로운 정치인이다. 박정희의 “뜨거운 화로”옆에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이 유지되었다고 본다.
역시 정치를 잘했던 못했던 간에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 노태우등은 끝까지 정치현실에서 천수를 다하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에 스스로 국민과 자신의 삶을 포기한 노무현은 “무책임”하고 허약한 대통령으로 후대 역사에 재조명될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도 한명회처럼 지혜롭고 현실을 직시하고 “쇠가죽”같이 끈덕지게 질긴 집념의 대통령이 이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남북이 분단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환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이고 청춘콘스트 같은 달콤한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된다. 얼음같이 차가운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명회에게는 딸이 넷 있었는데, 맏딸은 세종(世宗)의 부마(駙馬)인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이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며느리였다.
필자가 생각컨대 신숙주가 사육신에서 변절을 한 것은 사돈인 한명회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 딸은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의 첫 번째 왕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다. 넷째 딸은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다.
오늘 답사한 한명회의 셋째 딸 장순왕후(章順王后) 공릉(恭陵)이다. 공릉(恭陵)은 조선 제8대 임금 예종(睿宗1450~1469 재위1년)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영의정이자 상당부원군인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16세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장순왕후는 돌아가신 후 장순빈(章順嬪)으로 불렸으며, 1462년 2월 파주에 모셔졌다.
장순왕후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왕후의 능이 아닌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다. 따라서 공릉은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과 무인석이 생략되어 간소하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봉분과 석물은 조선 초기 형태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1472년(성종3년)에 세자빈에서 왕후로 추존되었으며, 이후 무덤의 이름도 왕후 격으로 높여 공릉(恭陵)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릉의 비각 안에 있는 표석(表石)은 공혜왕후(恭惠王后) 순릉(順陵)의 표석과 함께 1817년(순조17년)에 세운 것이다.(문화재청 자료 참고)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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