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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새로 읽기 13
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신 보 성
장엄정토분은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가르친 법문이다.
정엄장토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불 처소에 있을 때 법에 대해 얻은 것이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처소에 계실 때, 법에 대해 얻은 것이 실제로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전생을 기록한 책에 본생담(本生譚)이란 것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은 전생에 선혜동자로 있으면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여러 선지식을 찾아 다닌다.
여기에 등장하는 연등부처님 역시 부처님이 전생에 스승으로 받들어 모신
부처님이다.
이때, 부처님은 연등부처님에게 꽃을 공양하고 연등부처님이 길을 걸어가실 때
길이 빗물에 젖어 있으면 옷을 벗어 땅에 깔아 스승의 발이 젖지 않게 하시고
때로는 머리를 풀어 땅바닥 깔아드리기도 했다.
연등부처님은 전생부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전생부처님에게 장차 부처가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라는
수기를 주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위 글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 있을 때
법에 대해 얻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수보리는 여래께서 연등불 처소에 계실 때 법에 대해 실제로는 얻은 것이 없다고 대답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법이다라고 하는 고정된 무엇이 있어서
이런 것을 스승으로부터 얻거나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이다 진리다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스승이나 경전의 가르침이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깨달음 그 자체를
손에 쥐어 줄 수는 없다.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소를 물가로 몰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 물은 소가 스스로 마셔야 한다.
그래서 불교의 선종에서는 경전의 문자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깨달음을
중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강조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존자와의 사이에 말 한마디 없이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하고 받은 삼처전심의 일화도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사상의 표현으로 보아야한다.
삼천전심(三處傳心)이란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擧염花)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 쌍림열반 곽시쌍부 (雙林涅槃槨示雙趺)를 말한다.
영산회상 거염화는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자 가섭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고,
다자탑전분반좌는 가섭이 법회에 늦게 참석하여 앉을 자리가 없자 부처님이 그가 앉은 자리의 반을 내어 주어 가섭을 앉게 했다는 것이며,
쌍림열반 곽시쌍부는 부처님 장례식 때 가섭이 안 보이니
부처님은 그의 두 발을 관 밖으로 내 보였다는 일화이다.
가섭은 부처님 돌아가신 후 선종의 제1대 조(祖)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 주신 스승이라 할지라도
존경하고 보은해야할 대상인 것이지 의지의 대상은 될 수가 없다.
깨달음은 스승에게 의지하여 증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전생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해도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진리다하는
그 무엇을 얻거나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스스로 깨닫고 보니 반야바라밀의 세계는 본래 청정하더라는 것이다.
장엄정토분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한다고 함은 곧 장엄 아닌 것을
말씀하심이며 그 표현이 장엄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위대한 보살들은 당연히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마땅히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며, 마땅히
소리 향기 맛 감촉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요약해서 말한다면, 마땅히 집착함이 없이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부처님이 생각할 때
공덕을 지어서 불토를 장엄한다면 그것도 상을 취한 것이 아닌가?
하고 수보리가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보살이 부처님 나라를 장엄하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이때 수보리는 부처님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아니라고 대답한다.
장엄한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나라(불국토)의 장엄에는 세간불토장엄 신불토장엄 심불토장엄의
세 가지가 있다.
세간불토장엄(世間佛土莊嚴)이라함은 절이나 탑을 짓고 보시 공양을 하며
사경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눈에 보이는 세간의 불토를 꾸미는 것을 말한다.
신불토장엄(身佛土莊嚴)이라함은 우리의 몸이 불국토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심으로 이타행을 하면 우리의 몸 전체가 부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심불토장엄(心佛土莊嚴)이라함은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국토가 청정해진다(心淸淨 國土淸淨).
어리석은 중생들은 제상이 비상임을 알지 못하고 상 하나 하나에 탐하고 화내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제상이 비상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면 탐진애증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제상이 비상임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탐진애증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선정이다.
그래서, 불교수행을 지혜와 선정을 아울러 닦는 것이라 하여 정혜쌍수(定惠雙修)라고 한다.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결국 심불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불국토가 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보살들은 청정한 마을을 일으켜야 한다.
색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를 요약해서 말하면 마음에 머무름이 없이 청정한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를 한문 원본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글귀는 유명하다.
중국 선종의 6대 조사인 혜능스님은 원래가 무식한 나뭇꾼이었다.
출가하기 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시장에 가서 어느 집에 나무를 한 짐 져다 주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그 집 앞에서 경을 읽고 있었다. 금강경이었다.
젊은 혜능은 스님의 경 읽는 소리에 매료되었다. 그 중 한 구절에
홀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젊은 혜능이 깨달음을 얻은 글귀가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었다.
이후, 혜능은 홀어머니에 대한 노후대책을 강구해 놓은 다음에
홍인의 문하로 출가하여 마침내 중국 선종의 6대조사가 된다.
장엄불토분은 또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수보리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과 같다면,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이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큰 몸이라고 하신 것은 곧
큰 몸 아닌 것을 말씀함이오며, 그 표현이 큰 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생각할 때 수보리가 또 부처님의 32상 80종호라는 신체적 특징을 보고
이러한 대인상과 원만구족상이 전생 공덕의 보답이 아니겠느냐? 라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신체적 특징이 공덕의 보답이라면 그것도 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냐?하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하고 수보리에게 물은 것이다.
수미산은 큰 산을 말하는데 수미산왕이라 했으니
세계에서 가장 큰 산을 지칭한 것이다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수보리는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매우 크다고 대답하면서도 그것이 큰 이유는 큼 몸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금강경에는 이런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금강경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한문 원본은 불설비신(佛說非身) 시명대신(是名大身)으로 되어있다.
직역하면, 부처님 말씀은 큰 몸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이 큰 몸이라는 것인데, 이를 의역하면,
수미산이 그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겠는가?
산이 아무리 높아도 산은 높다는 생각이 없고, 바다가 아무리 깊어도 바다는 그 스스로를 깊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듯 부처님은 그 스스로의 32대인상이나 80종호의 원만구족상을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스스로의 신체에 관심이 없으시다. 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부처님 스스로가 32상 80종호를 얻었다는 생각이 없는데,
그게 어찌 취해서 얻은 것이냐? 하고 수보리의 의심을 풀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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