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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0월 7일 수요일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 지중해로 세력을 뻗치자,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신성 동맹)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고 여겼다. 이를 기억하고자 성 비오 5세 교황이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1960년 성 요한 23세 교황은 이날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을 만나고,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린 케파의 위선을 꾸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1,12-14)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어떤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 기도가 꽤 괜찮아 보였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흔히 바치는 기도의 내용은 어떠한가요? 대부분은 내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사 청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조금 다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주님의 기도’를 떠올려 봅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듯한 내용은 뒷부분에나 조금 나올 뿐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내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먼저 청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정말로 기도해야 하는 내용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이 땅에서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드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세상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청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당신의 기도입니다. 나의 힘이 부족하면 성체를 모시고 그 힘으로 이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기도를 묵주 기도에서도, 성무일도에서도, 미사 중에도 바칩니다. 이렇게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온전한 ‘나의 기도’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요약된 복음, 묵주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맞아, 과연 어떤 지향을 두고 묵주 기도를 바쳐야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고민해봅니다.
돌아보니 너무나 사소하고 개인적인 지향, 때로 너무 작거나 알토당토 않은 지향으로 마치 떼를 쓰고 졸라대는 지향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요즘은 더 이상 저 자신을 위한 지향을 두고 바치지는 않습니다. 돌아보니 항상 집요하게 졸라만 댔고, 미성숙한 제 지향에도 불구하고 흘러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모님께 무엇을 봉헌해드릴까 고민하며, 작은 것 하나라도 선물을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지향이 보다 거룩한 지향, 보다 성숙한 지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자렛이 마리아처럼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 뜻 안에 살기를 청하는 지향, 내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성령의 인도 아래 살겠다고 청하는 지향...
묵주 기도는 절대 수준 낮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역대 교황님들과 성인성녀들께서 지극히 사랑하셨던 기도이며,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구원사를 묵상하는 품위있고 차원 높은 기도가 확실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황님들께서 명쾌히 확증해주셨습니다.
① 묵주기도는 복음서에서 영감을 받은 묵상기도이며, 복음적 성격이 강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들과 기본 형태가 복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를 아주 간단히 ‘요약된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철저하게도 복음적인 기도입니다.
② 묵주기도는 성모송의 조화로운 연속으로 복음의 근본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③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구속사업을 이0루신 과정을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에는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님 유년기 시절의 신비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수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구원사 안의 중요한 사건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④ 묵주기도는 교회 공식 전례는 아니지만, 교회 전례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교회 전례로 이끌어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글은 소리글자이고 한문은 뜻글자입니다. 소리글자는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뜻글자는 글자 안에 의미가 담겨 있어서 글자를 바라보면서 그 뜻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은혜 은(恩)’이라는 글자를 성서적으로 풀이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은혜 은이라는 글자를 보면 ‘인(因)’ 아래에 ‘마음 심(心)’이 있습니다. 인(因) 안에는 세상을 상징하는 네모와 사람을 뜻하는 큰 대(大)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 안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돌보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은혜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은혜는 재물이 많아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만도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은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욕망’을 뜻하는 한자는 慾입니다. 밑에는 마음 심(心)이 있고 위에는 욕심 욕(欲)이 있습니다. 欲을 묵상해 보면 골짜기 곡(谷)과 부족함을 나타내는 欠이 보입니다. 깊은 골짜기는 물이 들어와도 계속 물을 받아들입니다. 채워도 또 채워야 합니다. 사람의 욕망도 그렇습니다. 재물이 있으면 조금 더 갖고 싶고, 권력을 얻으면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인정을 받으면 더 많은 칭찬을 원합니다. 마음의 골짜기를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반대입니다. 욕망이 ‘나의 뜻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라면 은혜는 ‘하느님의 뜻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은혜로운 삶을 사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해마다 잠비아로 가서 공동체가 살아갈 터전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많은 봉사자가 함께 가서 무더운 아프리카에서 땀을 흘립니다. 겉으로 보면 힘든 노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청국장을 만들어 사람들의 건강을 챙겼고, 이제는 유기농 김치를 만들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 농민회 회원들의 농사를 돕고, 유기농 농사를 통해 땅을 살리고, 김치 장인과 함께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한국의 김치를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기에 그것도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은혜롭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는 바로 이런 은혜의 삶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마리아에게도 자신의 계획과 바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아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은혜로운 삶은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도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삶, 그것이 은총의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의 욕망보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자 자신도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로운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도 같은 길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달라고 하지 않고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청합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오늘 필요한 것을 감사히 받고,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묵주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하느님의 은혜로 바꾸어 주는 기도입니다. 환희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마리아의 순명을 배우고, 빛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배우고,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부활의 희망을 바라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의 골짜기를 재물과 명예와 욕망으로 채우려 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 당신처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루카 11,2)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바라보시듯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다가오시듯
당신께 다가갑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부르시듯
당신을 부릅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품으시듯
당신을 품습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스미시듯
당신께 스밉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느끼시듯
당신을 느낍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함께하시듯
당신과 함께합니다
나 당신처럼
당신께서 하나이시듯
당신과 하나입니다
나 당신처럼
오늘의 성인
성 바코 (Bacchus)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시리아(Syria)
같은 이름 : 바꼬, 바꾸스, 바쿠스, 박코, 박쿠스
성 세르지오 (Sergius)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시리아(Syria)
같은 이름 : 세르기예프, 세르기오, 세르기우스, 세르지우스
성 세르기우스(Sergius)와 성 바쿠스(또는 바코)는 전통적으로 로마 군단의 장교들로서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유피테르(Jupiter)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이를 거절함으로써, 유프라테스 남부 시리아의 레사파(Resapha)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온다. 성 세르기우스는 분명히 그곳에 묻혔는데 후일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세르지오폴리스(Sergiopolis)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많은 성당들이 성 세르기우스나 성 바쿠스의 이름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대한 공경도 전 세계로 확대되어 보편화되었다. 사막의 유목민들은 이 두 성인을 그들의 특별한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성 바쿠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아라비수스(Arabissus)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두 성인의 유해의 일부가 현재 이탈리아 로마(Roma)의 성 세르기우스와 성 바쿠스 성당에 모셔져 있다.
성녀 유스티나 (Ju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파도바(Padova)
활동연도 : +304년?
같은 이름 : 유스띠나
이탈리아 파도바 지방에서 큰 공경을 받는 성녀 유스티나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그녀는 종종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성녀 유스티나(9월 26일)와 혼동되기도 한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녀 유스티나는 파도바에서 순교한 동정녀로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제자이자 파도바의 초대주교인 성 프로스도키무스(Prosdocimus, 11월 7일)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했던 성녀 유스티나는 집정관 막시무스(Maximus)의 명령으로 칼에 찔려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성녀 유스티나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살았던 젊은 여성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100년경에 사망한 성 프로스도키무스 주교와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영적인 유대는 가능했다고 본다. 그녀의 유해는 파도바 성벽 밖에 건립된 성녀 유스티나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왕족 출신이라는 전승으로 인해 왕관을 쓴 공주로서 표현되고 있고, 순교한 사실에 따라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거나 가슴에 칼이 꽂힌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동정녀의 상징인 하얀 유니콘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