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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믿음
240609낮 (딤전1:19-20)
<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아멘
큰 배에는 평형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균형을 잡아 주고, 파도나 바람 등으로 기울었을 때에 다시 정상적인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복원력을 위해 배 밑에 물을 채워 넣는 것을 평형수라고 합니다. 배 밑바닥을 평편하게 하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배가 속력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배를 역삼각형인 유선형으로 만들어 속력을 내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배의 안전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배 밑에 물을 채워서 무게 중심을 배 아래에 있게 하여 마치 오뚜기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배가 파도나 바람, 또는 회전을 할 때 기울었다가도 다시 정상적으로 균형을 잡게 해주어 배가 전복되거나 침몰하지 않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배에 있어서 그 배를 안전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평형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승객과 화물의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많은 평형수를 넣어야 합니다. 이처럼 평형수는 배의 안전을 담보하는 생명수입니다. 그래서 모든 배는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가 정해져 있습니다. 허용량 이상을 실으면 배의 무게중심이 위로 옮겨지게 되고, 복원력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출항하는 배에 적정량의 화물이 실렸는지를 확인하는데, 선수와 선미에 그려져 있는 [만재흘수선]이라는 눈금으로 확인합니다. 만재흘수선이 물에 잠기면 출항이 금지되고, 과적 화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주나 선장이 돈을 더 많이 벌 욕심에서 배의 무게중심과 복원력을 담보하는 평형수를 빼버리고 대신 화물을 더 많이 실어서 이 만재흘수선을 맞추게 됩니다. 화물을 많이 실으면 실을수록 선주는 돈을 벌수 있으니까 그런 편법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배가 전복당하는 사고가 발행하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한 것도 배에 적정량 넣어야 하는 평형수를 빼고 대신 그 무게만큼 화물을 더 실었다는 것입니다. 무려 허용량 987톤의 거의 네 배에 달하는 3,600톤의 화물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배가 회전하는 구간에서 배가 기울었고, 다시 배가 복원되어야 하는데... 무게중심이 위에 있다 보니 배가 전복되어 침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거짓 양심이 어린학생들과 국민들을 300명 넘게 희생시키는 비극을 맞게 한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도, 가정에도, 사회와 국가에도 반드시 평형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게중심을 잡을 수 있고, 좌우로의 흔들림에서 복원될 수 있습니다. 있어야 할 만큼의 평형수가 바닥에 있어야 거친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하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형수는 어떤 경우에도 줄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자꾸 욕심이 생깁니다. 평형수를 쏟아내면 그 만큼 탐욕을 채울 수 있고, 평형수의 무게를 줄이는 만큼 이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이고, 이것이 세월호를 침몰시켰습니다.
이렇게 한 사회를 지탱하는 평형수가 있습니다.
한 국가를 지탱하는 평형수가 있습니다.
배가 전복되지 않고 항해를 잘 할 수 있도록 평형수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한 사회와 국가에도 이런 평형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고 행해야 이 사회와 국가가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잡고 발전해 갈수 있도록 법과 도덕적 규범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잘 지킬 때, 우리 사회와 국가가 무너지지 않고, 평안하게 유지되고, 더 나은 사회와 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평형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 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이 평형수 역할을 하는 기관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라는 기관입니다.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양심은 우리 인간이 도덕적 균형을 잃을 때 작동합니다.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죄의식에 잠을 못 이룹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만들어 놓으신 <양심>이라는 기관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양심이라는 평형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 놓으신 평형수가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인생의 무게중심이 되는 평형수이며, 온갖 유혹에 흔들리는 인생을 제자리로 복원시키는 평형수입니다.
잠언4:23절을 읽겠습니다.
<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 말씀에서 말하는 마음이 바로 양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넣어 놓으신 평형수입니다.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하면 양심이 가책이 됩니다. 양심이 깨닫게 합니다.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심장을 두드려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다가도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다가도 바로 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이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주셨습니다. 이 양심을 잘 지켜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생의 평형수인 양심을 빼버리면 안 됩니다.
딤전4:2절의 말씀에 보면 <2)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미혹하는 악한 영들에 의해 양심에 불인을 맞아서 양심이 마비되어 그 기능을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기관을 주셨는데...이 기관이 작동하지 못하면, 즉 양심을 지키지 못하여 양심을 잃어버렸거나, 화인 맞아 마비되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죄악과 타락의 인생이 되고 맙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수치심도 모르고,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평형수를 쏟아 버리고, 그 무게만큼 탐욕과 이기심으로 채웁니다. 그래서 개인의 인생이 침몰하고, 가정이 침몰하고, 사회와 국가가 침몰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사자성어처럼 되어버렸죠? 무엇일까요?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제 우리 사회는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이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탐욕과 이기심을 쏟아 내고, 하나님이 주신 깨끗하고 정결한 평형수로 채워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세월호 선원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정부와 행정관청의 무능을 질타하고, 청문회도 하고, 추모도 하고. 노란 리본도 달고,,, 그런데 정작 정치권은 이런 슬픈 사건이나 역사를 당리당략에 이용만 합니다. 이 국민들은 모두 질타만하고, 욕만 하고, 한탄만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에 채워져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채우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아서 계속 비극적인 사고와 사건이나 슬픈 역사는 반복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회복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법과 규칙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과 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쏟아 내고, 그 자리에 욕심을 채우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평형수를 쏟아 내지 마십시오. 나 하나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 하나라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이라도 이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쏟아버리고 이기심과 탐욕으로 채우지 않았더라면, 이 사회가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버리지 않고 살았다면, 기독교인들이 이 어려운 시대에 얼마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며,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겠습니까?
이 시대에 기독교가 신뢰가 떨어지고,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을 누구 탓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지켜야할 양심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똑 같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쏟아 버리지 마십시오. 그 어떤 것보다 더욱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양심을 지키십시오. 돈을 지키지 말고 양심을 지키십시오. 체면을 지키지 말고 양심을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지키기 말고 양심을 지키십시오. 명예를 지키지 말고 양심을 지키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이 사신 삶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삶입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 입니다.
본문19-20절입니다.
<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평형수는 <양심>이라는 기관인데...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평형수를 더 주셨는데 그것은 <믿음>이라는 평형수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만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양심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평형수입니다. 양심에서 지키지 못한 것일지라도 <믿음>이라는 평형수는 지키게 합니다. 양심으로 지키지 못해, 범죄 하거나 탐욕과 이기심을 이기지 못했더라도 <믿음>은 이기게 합니다. 양심으로 이기지 못해 죄를 졌을 지라도 믿음은 다시 돌이키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다시 선을 행하게 합니다. 무너졌던 인생을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믿음이 파선한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입니다. 그들을 교회에서 출교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배가 파선하듯 파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파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딤후 2:17~18절을 볼까요...
<17)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훼손하고, 자신의 믿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믿음까지도 '훼방하는' 자들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출교(교회에서 내쫓음)와 같은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교회의 사역자나 지도자라고 해서, 열심 있는 성도라고 해서,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신앙의 변절자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파선한 자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믿음이 파선하면,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도 없지, 믿음도 없지...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참하게 침몰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에 큰 해악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은 스스로 부끄러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왜 파선합니까?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충만해야할 은혜가 떨어지다 보니 믿음이 파선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교회 안에 있으면 교회가 흔들거립니다. 중심을 잃고 삐거덕 거립니다. 은혜가 왜 떨어집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기도시간을 빼버립니다. 사업 때문에 주일 예배를 빼먹습니다. 나의 이기심과 세상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기도시간을 줄입니다. 예배시간을 줄입니다. 봉사시간을 줄입니다. 내 욕망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헌금을 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떨어지게 하는 요인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믿음이라는 평형수는 점점 줄어듭니다. 은혜 받고, 은혜가 충만해야 믿음의 수위가 점점 높아집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믿음의 수위도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은혜가 떨어지면 믿음이라는 평형수가 다 빠짐으로 그리스도인도 무너지고, 교회도 무너지고, 이 사회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침몰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양심이라는 평형수를 버리고 탐욕과 이기심으로 채웠기 때문이고, 성도들은 믿음생활이 세속적인 가치관과 배금주의 사상에 젖어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어 기도시간 줄이고, 예배시간 줄이고, 봉사시간 줄이고, 교회 오는 시간 줄이고,....그러다 보니 믿음이라는 평형수를 높여주는 은혜가 떨어지니 믿음이라는 평형수가 점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삶도 침몰하고, 교회도 침몰하고, 이 나라와 사회도 침몰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마지막 보루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평형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주신 양심이라는 평형수가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만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평형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무너지면 믿음이라는 평형수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와 세상을 지탱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과 믿음이라는 이 두 가지 평형수를 버리지 말고, 꼭 채우고 지킴으로
우리의 신앙도 회복되고,
교회도 회복되고,
이 사회도 회복되고,
막힌 복음의 문도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