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 이언 매큐언 / 민은영 / 한겨레출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또는 생명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는 같은 이야기일까?
삶, 그 너머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생명/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것 또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결정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하는가, 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자기의 생명을 던지는 경우가 인간의 삶에 많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이다. 그 신념이 나를 향할 수도 있고 타인을 향할 수도 있다. 그 신념이 종교적일 때도, 인류애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다음 세계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현재의 삶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 신념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할 때도 있고 타인이나 주변의 압력일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내려진 결정을 어떤 경우 받아들여야 하거나, 또는 받아들일 수 없는가?
사회의 합의(법)에 따르면 18세 이상을 성인이라고 하고, 성인은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말한다. 소년이 18세가 되려면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결정은 법정이 내린다. 그렇게 소설은 조건을 줄여 나간다.
소년은 (주변의 압력에 의해) 수혈을 거부한다. 보호자도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 이유는 종교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은 몸이 더럽혀지는 것을 피하는 것이고 내세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 종교단체의 신념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판사는 소년의 생명과 복지가 중요하다는 결정을 한다.
소년은 병상에서 일어난다.
순교자로서 종교단체에서 우러러보이는 존재가 될 수 있었고, 부모의 자랑이 되었을 기회를 앗아간 판사는 소년에게 어떤 존재로 각인되었을까?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부모를 소년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판사는 소년이 속한 사회와 관계없는 사람이다. 소년은 자기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꺼내버린 판사에게 나도 당신의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행동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지만, 판사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소년은 두 세계에 속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어쩌면 소년은 판사를, 신을 대신할 역할로 보지는 않았을까. 듣지 않는 신, 관계를 거부하는 신에게서 소년은 떠난다.
다시 병마가 소년에게 찾아온다. 소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소년은 자기가 원래 속했던 문화의 가르침을 택한다.
갈등은 언제나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 그 세계가 거시적으로 종교나 인류애일 수도 있고, 짜장면이나 짬뽕이냐가 될 수도 있다. 종교와 인류애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짬짜면과 볶음밥의 갈등일 수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건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 주어진 정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정보들이 나의 결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은 극히 부분적이다.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삶은 보호자의 관리하에 있으며 그사이에 주어지는 정보들에 의하여 한 개인의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 거기서 나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각 시대는 어떤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해악은 인내심을 갖고 감수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정말 고통이 되고 지옥이 되는 것은 다만 두 시대, 두 문화와 종교가 서로 중첩되는 때입니다.
읽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34쪽에 나온 말이다.
소년은 두 문화 사이에 존재했다. 판사는 아이에게 이쪽의 법을 적용했다. 저쪽에 있어야만 하는 소년은 저쪽에서 어떻게 보였고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교회법과 세상 법을 단 한 번에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진대, 소설의 갈등은 여기서 출발하고 극대화되지만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갈등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소년의 선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종교를 포함하는 더 큰 집합일 수도 있지만 종교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종교라는 틀의 부분 집합일 수밖에 없다. 세상은 종교를 포함한, 수많은 문화를 포함하고 있으나, 종교는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다른 개념이기에 사과와 오렌지처럼 서로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 둘을 함께 다룬다면 끝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소설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해결 방법은 없다.
종교가 인정되지 않거나 신정국가이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독재국가이면서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할까? 한 세계에 살면서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종교가 인정되지 않지만 종교를 가질 수 있고, 신정 국가이지만 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독재국가에서 살지만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전체의 일부이지만 전체가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칠드런 액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성인이다. 결정은 내 뜻대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