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함남 사람이다.의병장으로서 강원도 및 함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에 민족의 무력이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투쟁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일제에 항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을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켜 갔다.이같은 시기에 김택룡은 의진을 조직하여 함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1909년 9월부터 10일까지 전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의병운동이 쇠퇴하여 감에도 불구하고 함남과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유격작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국권회복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가 그는 1910년 7월 11일 수십 명의 부하 의병들을 이끌고 강원도 금성(金城)군 북면 하당현(下堂峴)에 머물고 있던 중, 다른 의진과의 알력으로 이들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54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272·273면 |